제7장
킹 데스나이트로 변신한 카르스
크로우기사단의 단장, 레인은 불신으로 역력한 눈빛으로 카르스를 응시했다. 연이은 격돌로 그는 카르스가 결코 자신보다 아래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놈은 카르스가 아니다. 저 진득한 마기는 결코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것, 그렇다면……!’
레인은 다시 검을 들었다.
“카르스! 너의 아버지가 저곳에 있다.”
“아버지? 그런 건 너희 같은 미개한 족속들에게나 있는 것, 어둠의 왕인 내게 아버지란 없다!”
레인은 내심 놀랐다.
‘킹 데스나이트! 그랬군. 놈은 죽은 몸이었어. 어쩐지 강하다 했더니, 마계의 졸자가 되었구나. 불쌍한 놈! 제국의 황태자에서 이젠 그저 마계의 마졸일 뿐이구나.’
조금은 마음에 걸렸던 황태자 카르스에 대한 감정은 사라졌다.
그가 진정 죽은 기사들의 왕이라면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다. 마계의 족속들은 인간과는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 그것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미련 없이 너를 죽여주마. 카르스!”
“후후! 그럴 실력이 될까? 지금까지 네놈의 기운을 살피려고 슬슬 싸웠다만 이제부턴 다를 거다. 모든 걸 파악했거든…….”
“죽은 놈이 생각에다 만용까지 부리는군.”
“이제 그만 네놈은 죽어줘야겠어. 저곳에 인간들의 왕이 있으니 네놈, 다음은 그자가 될 것이다. 후후후!”
“불쌍한 놈! 그는 네놈이 인간이었을 적에 네놈의 아버지다. 물론 그에게 다가갈 기회조차 넌, 얻지 못할 것이야.”
참혹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도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카르스 때문에 몬스터들이 접근을 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레인은 슬쩍 전장을 살폈다.
여전히 치열했지만 조금씩 몬스터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블랙 오우거와 블러드 와이번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몬스터는 정규훈련을 받은 기마병단의 상대가 되질 못한다.
레인의 입가에 섬뜩함이 걸렸다.
“이젠 끝을 보자꾸나.”
그때였다.
레인의 좌측에서 섬뜩한 기운이 몰아쳤다.
“으악!”
레인의 고개가 황급히 좌측으로 돌아갔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크로우기사 단원이 그의 눈에 잡혔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허억! 저, 저…….”
지척에 카르스가 검을 겨누고 있었음에도 레인은 지금까지의 냉철함을 잃어버리고 혼비배산, 말까지 더듬었다. 그의 두 눈에 불신의 빛이 번져갔다.
“나를 알고 있었던 놈이군.”
흑발을 휘날리며 선 사내, 레인은 눈을 깜빡여가며 그를 다시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분명 그였다.
결코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사내, 자신이 살아왔던 고향에서 무적의 존재로 군림했던 그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신, 신마성주……!”
자신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역시, 나를 알고 있었어. 누구지? 신교에서 온 놈인가?”
혁련천후는 레인과 카르스의 중간지점으로 걸었다. 귀신을 본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레인과는 달리 카르스는 입맛을 다시며 탐욕스러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앞의 레인과는 비교불가의 엄청난 힘이 혁련천후에게서 느껴졌다.
‘오호! 이거 굉장한 인간이 나타났군.’
그에겐 혁련천후도 자신에게 힘을 보태줄 한낱 미끼로 보일 뿐이었다. 혁련천후는 카르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레인을 차갑게 응시했다.
그 와중에도 크로우기사단은 누군가에 의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엉겁결에 그곳을 돌아본 레인은 다시 경기를 일으켰다.
“오, 오왕……!”
혁련천후를 안다면 당연히 그들도 안다.
무적의 수신호위 팔왕, 그중에서도 죽음과 가장 친숙하다는 살왕과 창왕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있었다.
“당신들이 왜, 이곳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 * *
쩌저정!
마법병단 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양 제국의 마법병단의 마법공격이 허공에서 정통으로 부딪히자 공간이 균열을 일으키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왔다.
“으아아…….”
근접거리에 있던 기사들이 가루로 흩날려 사라졌다. 피아를 구분 못 한 파생된 기운들은 반경 30미르 안에 있던 모든 생명체를 거두어 가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참혹한 광경은 기마병단 간의 격돌로 벌어지고 있었다. 케이론 제국의 기마병단의 가운데를 돌파해 들어갔던 요란 제국의 기병들은 그야말로 파괴자, 그 자체였다.
수적으로 곱절 이상이었던 케이론 제국의 기마병단은 벌써 반 수 가까이 줄어 있었다. 그에 반해 요란 제국의 5만 기병은 수천에 불과한 사상자를 내고서 전장을 광포하게 휘젓고 다녔다. 마법사들도 그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아군과 섞여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로 인해 전황은 요란 제국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기병으로 대표되던 케이론 제국이 기병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병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의 외곽은 양 제국의 정예들이 격돌을 벌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곳에서의 승부가 전투의 결과로 이어질 만큼 주요 인물들이 몰려 있었는데 초인이라 불리던 테세우드 공작이 단연 발군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그의 검에 의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기사들이 쓰러져갔다.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은 모든 기사들의 꿈이다. 당연히 적의 수장인 테세우드 공작에게 대부분이 몰려들었던 까닭에 그가 선 주변은 죽은 자들의 육신으로 넘쳐났다.
서걱!
또 하나의 목숨이 피를 뿌리려 쓰러졌다.
테세우드 공작은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하고서 다시 검을 휘두른다. 그는 오직 막스 황제만을 노리고 돌진했다.
그러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베어도베어도 그들은 목숨을 던져가며 테세우드 공작의 진로를 막아섰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테세우드 공작은 순간 시야가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전신을 시커먼 천으로 두른 자들이 기병을 손에 들고서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들이 지금까지의 기사들과는 다름을 깨달은 테세우드 공작은 주변을 살폈다. 순간, 그는 아차 했다.
‘너무 떨어졌다.’
그랬다.
자신 홀로 너무 먼 곳으로 와 있었다. 자신을 호위하던 기사들과 자신과의 거리는 대략 20미르, 평소라면 한걸음에 이동할 거리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과 아군으로 뒤섞인 전장이 아닌가?
“비열한 놈! 그러고도 네놈이 제국의 황제라 할 수 있느냐?”
그제야 그는 막스 황제가 자꾸만 뒤로 물러났던 이유를 깨달았다.
“네놈의 방식을 배웠을 뿐이다. 테세우드!”
“닥쳐라!”
“후후! 비열함이란 너와 어울리는 단어지. 주인을 문 사나운 사냥개의 말로가 어떤지 보고 싶구나. 테세우드!”
“이놈! 막스!”
테세우드 공작이 검이 불을 뿜었다. 초인의 분노가 담긴 검은 무한한 오러를 발출하며 주변을 광포하게 몰아쳤다. 그러나 앞을 막아섰던 자들이 그의 전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꽈앙!
허공에서 불꽃이 몰아쳤다.
막아섰던 자의 육신이 휘청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반면, 테세우드 공작은 잠깐 멈칫 했을 뿐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고작 한 놈이 나를 막아내다니…….’
자신은 제국에 셋뿐인 초인이다.
그런 자신의 분노가 담긴 맹공을 고작 한 명이 막아낸 것이다. 더욱이 죽지 않는 멀쩡한 모습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질 않은가?
그런 자가 스물이나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분노는 이내 긴장감으로 변해가며 질끈 입술을 깨물게 만들었다.
‘위험하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구나.’
우우웅!
테세우드 공작의 육신이 기묘한 소리를 울리며 뿌연 연기 같은 것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막아섰던 자들이 흠칫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막스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다가 점점 그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지금 놈을 치시오! 어서!”
* * *
쾅! 쾅!
시뻘건 불꽃이 사방으로 뻗치며 주변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날아갔다. 기사들은 그저 멍하니 혁련소와 칸빌의 가공할 결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이 격돌하면 파생된 기운이 50미르까지 뻗쳤다. 이미 반경 50미르 안쪽은 조그마한 바위조차 없었다.
오직 그들이 밟고 선 대지와 둘의 육신만이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혁련소는 칸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강해졌군. 칸빌.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빌어먹을 애송이놈! 네놈이야말로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설마 마왕의 암흑마기라도 물려받은 것은 아니겠지?”
“미친놈! 그 양반이 미쳤냐? 그걸 내게 주게? 난, 원래부터 강했던 몸이야. 재수 없게 마법사 놈들에게 당했을 뿐이라고!”
둘 사이의 공간에 다시 마나의 요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벌써 몇 번에 걸쳐 둘은 이런 식으로 싸워오고 있었다.
“후후! 애송이! 다시 싸워볼까?”
“좋지! 대신 이번엔 네놈을 깨끗하게 소멸시켜 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애송이!”
“간다! 나쁜 놈아!”
둘의 육신이 다시 허공에서 격돌했다.
쾅! 쾅! 쾅!
굉음과 번쩍이는 빛으로 인해 기사들은 더욱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들은 요란 제국과의 전쟁에 투입될 전력들이다.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결투 때문에 아예 정신을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연소민이 둘의 지척에 내려섰다.
그녀는 은발을 휘날리는 혁련소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내려선 위치가 그의 뒤쪽에다가 둘이 워낙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니라 누구라도 용모를 분간하기란 불가능했다.
‘얘가 어딜 갔지?’
그녀는 카루가가 보이지 않자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카루가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증오에 찬 소리를 지르고 이곳으로 몸을 날린 그가 보이지 않자 연소민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쩌정!
둘의 결투는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격돌하면 거대한 불꽃이 연방 사방으로 퍼져나갔는데 혁련소가 파란색, 칸빌은 붉은색으로 나뉘어 먼 곳에서 보면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격돌에서 파생된 기운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더욱 강력해진 둘의 기운은 점점 반경을 넓혀갔다. 50미르 밖에 섰던 기사들의 갑주가 뜨겁게 달구어질 정도가 되자 정신 줄을 놓고 구경하던 기사들은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상부에 서둘러 보고하라! 초인들이 나타났다고 말이다!”
“자작님! 전투가 개시되었다고 합니다! 서둘러 평원으로 오라는 전갈입니다!”
“뭣이! 벌써 붙었단 말이냐?”
“아군이 밀린다고 합니다! 속히 전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젠장, 이런 멋진 결투를 두고 떠나야 하다니… 모두 전장으로 간다! 서둘러라!”
기사들이 분주하게 전마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빠르게 북쪽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떠나자 혁련소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쾅!
칸빌의 공격을 맞받아친 그는 뒤쪽으로 훌쩍 몸을 날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엄청나게 강해졌구나. 칸빌! 정말 대단해!”
“감탄만 하고 있을 작정이냐? 애송이!”
“아니,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힘을 개방할 생각이야. 조심해야 될 거야, 칸빌!”
“…뭐?”
칸빌이 흠칫했다.
본격적으로 힘을 개방한다니, 그럼 지금까지 전력으로 싸운 게 아니란 말인가? 칸빌은 가소롭다는 듯 입가가 올라갔다.
‘저놈 표정이 이상하잖아?’
한껏 여유가 묻어나는 혁련소의 미소를 본 칸빌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다른 자의 기운을 흡수하는 게 한계가 없는 거냐?”
“무슨 헛소리냐?”
“그러니까, 무한대로 다른 자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냐고 묻잖아.”
“후후! 당연하지. 네놈의 힘도 곧 나의 일부로 흡수될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엔 마계로 돌아가 네놈을 도와준 놈들을 깡그리 소멸시켜 버릴 작정이다.”
칸빌의 눈동자가 시뻘건 광망으로 번뜩였다.
“그게 가능하다고 여기는 모양이군. 바보 같은 놈……!”
“후후! 어디 감추어놓은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볼까?”
칸빌이 먼저 움직였다.
혁련소도 움직였다. 확실히 그는 기사들이 사라진 지금, 조금 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유는 오직 그만이 알뿐이었다.
화아악!
칸빌의 주변 공간이 뜨거운 화염으로 이글거렸다. 격돌 이후, 처음으로 화염계열의 마공이 발현되고 있었다. 사실 칸빌은 여유를 보이곤 있었지만 혁련소가 느닷없이 다른 분위기를 발산하자 자신도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빌이 막 몸을 날리려고 할 때였다. 칸빌의 뒤쪽에서 빛이 일렁거리는 것을 본 혁련소의 표정이 변했다.
그를 무섭게 노려보던 칸빌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감히! 어떤 놈이!”
칸빌의 육신이 엄청난 속도로 뒤를 향해 돌아가며 화염을 뿜었다. 그와 동시에 혁련소가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콰지지직!
“멈춰!”
“아악!”
공간이 화염으로 휩싸이며 그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칸빌의 입에서도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혁련소에게 어깨를 강타당한 칸빌은 상당한 거리까지 날아가서 겨우 내려섰다.
털썩!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서 왜소한 인영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혁련소가 재빨리 인영에게로 달려갔다.
“카루가!”
카루가였다.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린 카루가가 미약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혁련소가 재빨리 카루가를 품안에 안았다.
“카루가! 이봐! 카루가!”
“혀, 형…….”
“그래, 나야! 카루가! 정신 차려!”
“헤헤… 성공할 수 있었는데, 형 때문에 실패했잖아. 저 나쁜 놈을 죽일 수 있었는데…….”
카루가의 호흡소리가 급격하게 미세하게 변해가자 혁련소의 얼굴에 다급함이 번져갔다. 그런 그들을 칸빌은 그저 노려보고만 있었다.
‘한 팔을 움직일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저 애송이놈이 갑자기 이렇게 강해지다니…….’
이유는 그것이었다.
뒤쪽에서 자신을 노리는 기운을 느끼고 공격함과 동시에 자신의 어깨에 떨어진 혁련소의 공격으로 인해 칸빌은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오른쪽 어깨를 내주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당장에 달려들었을 것이다.
칸빌은 재빨리 몸 상태를 살폈다.
‘이대론 놈을 이길 수 없다!’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다. 그렇다면 무조건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혁련소를 죽일 듯 노려보던 칸빌의 눈동자가 이채로 물들었다.
‘…응!’
좌측 숲에서 뛰어나오는 연소민이 보였다. 순간, 그의 눈이 사악한 빛으로 번쩍였다.
‘쓸 만한 계집이군. 멍청한 신이 내게 기회를 주는군. 후후후!’
콰앙!
칸빌의 육신이 섬전처럼 혁련소의 머리 위를 넘어가 연소민에게로 날아갔다. 칸빌이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한 혁련소는 카루가를 안고 우측으로 멀찌감치 몸을 피했다. 그러나 칸빌이 곧장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자 순간적으로 의구심인 든 혁련소의 시선이 칸빌을 쫓았다.
“아리안!”
그도 아리안을 보았다.
지금 연소민은 아리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혁련소는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연소민임을 몰라봤다.
“위험하다…….”
칸빌이 그녀를 노림을 깨달은 혁련소는 카루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섬전처럼 칸빌의 뒤를 쫓았다.
* * *
카루가를 찾지 못하고 숲에서 나온 연소민은 무지막지한 기운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고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신이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충만한 존재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엄청나…….”
그녀는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20미르 밖을 돌진해 들어오는 존재에게서 발출된 무한한 압력이 전신을 조여들고 있었다. 피하려고 몸을 띄우는 순간 그대로 죽을 것만 같다는 공포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는 검에 자신의 모든 힘을 실었다.
우웅…….
그녀의 검이 강렬한 오러로 둘러졌다.
그녀는 칸빌의 뒤를 쫓아오는 혁련소를 보지 못했다. 앞선 칸빌에 가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당장의 위기감 때문에 시야가 좁아진 탓도 있었다.
화아악!
엄청난 열기가 그녀를 압박해 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격 사정권 안으로 칸빌이 들어섰다.
“어둠의 여왕으로 만들어주마. 그 힘을 내게 넘겨라!”
“합!”
연소민의 전력을 담은 검이 칸빌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적으로 늘어난 그녀의 힘을 간파한 칸빌은 순간 흠칫했다. 그러나 피하기란 이미 늦었다.
“감히!”
칸빌의 거대한 화염의 검이 연소민의 가녀린 육신을 향해 떨어졌다.
“부딪히면 안 돼!”
혁련소의 고함은 곧 강력한 굉음에 묻혀버렸다.
꽝!
번쩍!
“아…….”
굉음과 빛의 폭발, 그리고 가녀린 연소민의 신음이 혁련소의 눈과 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드드드…….
지진이 온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암흑마기를 끌어올려 시야를 되찾은 혁련소의 눈에 가랑잎처럼 날아가는 연소민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쫓는 칸빌도 보였다.
그때 혁련소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소민, 아니 그에겐 여전히 아리안으로 각인된 그녀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상당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건만 혁련소에겐 잠시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아무런 소리도, 심지어 그녀를 향해 쫓아드는 칸빌조차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보일 뿐이었다. 입술이 떨리며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소민!”
그랬다.
연소민이었다.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그녀가 분명했다.
순백색으로 변했던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칸빌의 오른손이 그녀의 가녀린 육신을 낚아채는 것을 본 혁련소의 입에서 처절한 부르짖음이 토해졌다.
“으아아아!”
* * *
“크윽!”
칸빌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연소민을 안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혁련소가 쫓아오고 있었다.
“젠장! 순간적으로 뿜어낸 힘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그가 지나가는 공간에 시커먼 액체가 뿌려졌다. 놀랍게도 그의 왼팔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어깨어름에서 시커먼 액체가 끊임없이 허공으로 뿌려졌는데, 인간으로 치면 핏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금 전, 격돌 직전에 연소민의 힘이 느닷없이 커진 까닭이었다.
위험을 눈치 챘으나 워낙 창졸지간에 당한 거라 피할 시간조차 없었다. 때문에 팔 하나를 잃어버린 칸빌은 생사가 걸린 도주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 뒤를 쫓아오는 혁련소에게 잡힌다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이 지독한 살기는 뭐야?’
그랬다.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의 지독한 살기를 혁련소가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왜 이런 살기를 자신에게 발산하는지를…….
비록 치열한 결투를 벌였지만 조금 전까지 이런 살기 따윈 전혀 없었다.
‘이 계집과 관련이 있었던 모양이군. 빌어먹을!’
쾅!
땅바닥을 차고 오른 칸빌은 북쪽으로 달렸다. 살려면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 자신의 수족들이 모여 있다. 죽은 기사들의 왕, 카르스와 십만이 넘어가는 몬스터 대군에게로 가야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이다.
* * *
콰과과광…….
연속적으로 울린 굉음은 전장에 모든 이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혁련천후도 무심결에 굉음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요란 제국의 황제가 진을 치고 있던 능선에서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렬한 빛으로 둘러싸인 누군가가 거침없이 요란 제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는데 걸려드는 모든 자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놀라운 능력을 지녔군. 이 세상에 저런 존재가 있었나?’
엄청난 광경에 혁련천후도 가볍게 놀랐다.
그때를 이용해 레인이 몸을 날렸다. 결코 녹록치 않은 레인이기에 혁련천후는 그가 사정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런……!’
방심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막아서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카르스였다.
혁련천후는 그제야 카르스를 자세히 살폈다.
“묘한 놈이군. 호흡이 느껴지지 않다니, 네놈이 저들을 이끌고 온 그놈인가?”
그는 전장의 몬스터들을 가리키며 차갑게 물었다.
“후후! 대단한 인간이군. 이 세상에 어째서 너희 같은 놈들이 이토록 많이 설치는 거지?”
혁련천후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시커먼 그림자가 카르스를 덮쳤다.
흑야였다.
쾅! 쾅! 쾅!
흑야의 검과 카르스의 검이 불꽃을 만들어내며 치열하게 얽혔다. 느닷없는 흑야의 공격에 카르스는 순식간에 수세에 놓였다.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던 레인과는 또 다른 강력함이 흑야에게서 느껴지자 카르스는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주둥이 때문에 죽는 것이라 여겨라!”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놀라운 놈들뿐이군.”
카르스는 진정으로 놀랐다.
오히려 레인보다 강력한 기운이 난도질 할 듯 몰아치자 지금까지의 여유로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저쪽은 내가 맡겠다. 너희들은 저놈들을 처치하고 에이미에게 가 있도록 해.”
혁련천후는 조윤에게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빛이 난무하는 능선으로 걸었다. 그를 호위하려던 조윤은 어쩔 수 없이 흑야와 카르스를 향해 다가오는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에게로 걸음을 놓았다.
“너희들은 내가 상대해주마.”
조윤의 창이 강기를 품었다.
* * *
테세우드 공작의 가문은 오래전부터 대륙에 소문난 검술의 명가이자 마스터의 산실로 유명했다. 한 세대에 반드시 마스터 하나는 배출해 온 테세우드 가문은 그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언제부턴가 케이론 제국을 장막 뒤에서 조종하기 시작했는데 당대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황권을 노리기에 이르렀다.
당대 가문의 수장인 테세우드 공작은 원대한 야망만큼이나 강력한 무력을 지닌 초인이며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케이론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그는 세상이 모르는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무공에 있었다. 목숨이 위기에 놓인 상황이 아니면 절대 사용하지 않는 그것은 그의 선조가 우연하게 인연을 맺은 이계에서 온 인물에게서 얻은 것이었는데, 그 무공이 지금 테세우드 공작에 의해 발현되고 있었다.
콰지직!
테세우드 공작의 검은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베어 넘겼다. 마스터에 준하는 강자들의 검도, 최상위 마법방어막을 두른 갑주도 소용없었다.
오로지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두른 자들만이 그의 검을 막아낼 뿐이었다. 전체적인 전황은 요란 제국이 유리했지만 가장 중요한 수뇌부 간의 전투는 테세우드 공작으로 인해 케이론 제국이 압도해 나가고 있었다.
막스 황제는 돌연한 상황에 처음으로 불안감을 드러냈다.
“도대체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레인! 레인을 불러오너라!”
그는 주변을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때 레인이 그의 곁으로 내려섰다. 막스 황제는 곧장 전장을 휘젓고 있는 테세우드 공작을 가리키며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을 막아라! 레인!”
그러나 레인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폐하! 후퇴하셔야 합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 후퇴라니!”
“자세한 것은 본영에서 말씀드리겠으니 서둘러 퇴각명령을……!”
말을 하던 레인이 흠칫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의 시선을 따라 막스 황제도 시선을 돌렸다. 흑발을 늘어뜨린 혁련천후가 느릿하게 걸어오는 것을 본 막스 황제는 이맛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적인가? 저잔 도대체 누구지? 이런 전장에서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혁련천후는 도저히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참혹한 주변경관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두려움에 떠는 레인의 모습에 막스 황제는 위급한 상황도 잊고서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근위병들이 혁련천후의 앞을 막아섰다.
검은 천을 두른 자들은 테세우드 공작을 막느라 이곳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절망감을 드러내는 레인에게 차가운 미소를 보여준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매서운 빛을 발했다.
“그대가 요란 제국의 황제인가 보군?”
‘피해야 한다!’
막스 황제는 순간적으로 그를 상대해선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적이다! 막아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근위병들이 달려들었다.
막스 황제는 때를 이용해 레인과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전장에 뿔 나팔소리가 울렸다.
퇴각을 알리는 소리였다.
혁련천후는 달려드는 근위병들을 무시하고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막스 황제를 쫓았다. 사방에서 허공에 뜬 그를 향해 강전이 날아들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검은 옷의 마법사들 몇이 강력한 마법공격을 퍼부었다.
따다다당!
날아든 강전들은 모조리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자욱하게 피어나는 피 안개…….
근위병들이 아닌 마법사들이 뿌린 피였다. 언제나 마법사에겐 용서를 모르는 혁련천후였다. 공격을 퍼부었던 자들의 육신이 두 조각으로 썰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운이 없게도 죽은 자들의 육신이 테세우드 공작이 뿌려대는 기운에 휩쓸려 산산조각으로 찢어졌다.
그야말로 처참한 죽음이었다.
순간, 혁련천후와 테세우드 공작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러나 이내 혁련천후는 막스 황제가 도주한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으아…….”
“추격하라! 적의 황제가 저곳으로 갔다. 황제의 목을 베어라!”
전장은 더욱 참혹하게 변해갔다. 끝까지 죽이려는 자와 도주하려는 자 간의 피 튀기는 전투는 전장을 한 폭의 지옥도로 변모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