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제1장
해후
에이미 공주의 마법은 기존의 마법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녀는 홀베른 왕국이 수백 년을 공들여 만들어온 신비한 마법의 정수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그 위력은 대륙의 대마법사들에 버금가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 에이미 공주가 자신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혁련소의 육신을 제어해 나갔다. 평원을 대낮처럼 밝힌 강렬한 빛은 그녀가 시전한 마법의 부산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만으로도 요란 제국의 기사들과 몬스터 간의 전투가 중단되었다. 일시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력을 앗아간 까닭이다.
‘너무 강해! 이 사람…….’
에이미 공주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혁련소는 그녀 이상으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펼친 마법장이 혁련소의 주변 공간의 중력을 수배로 증가시켰음에도 그를 제어할 순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가녀린 육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역할을 다했다. 혁련천후가 따라잡을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혁련천후는 혁련소의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충만했던 혁련소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는 그대로 검을 뻗었다.
“정신 차려라! 소!”
퍽!
혁련천후의 주먹이 더 빨랐다.
혁련소의 육신이 허공에서 휘청거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때리는 순간 천살강기로 혁련소의 내부를 보호한 혁련천후는 의식을 잃은 아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여기 있었느냐?’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점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드디어 아들을 찾은 것이다.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와 단 하루라도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눈을 뜨고 살아가는 시간은 오직 아들에 대한 생각만으로 지새웠던 세월이었다. 그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지금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 * *
조윤의 창이 칸빌의 다리를 꿰뚫었다.
“크으……!”
칸빌의 육신이 크게 휘청거렸다.
연소민에 의해 팔 하나를 잃어버린 탓에 방어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칸빌은 너무나도 쉽게 연소민을 품에서 놓아버렸다. 추락하는 연소민을 흑야가 안아 들었다.
“조심해라!”
조윤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흑야는 허공을 차고 혁련천후가 있는 곳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그가 떠 있던 공간에 카르스의 검이 떨어졌다.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조금만 늦었다면 꽤나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조윤이 창을 던져 흑야를 추격하려던 카르스를 노렸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굉음처럼 울렸다. 카르스는 추격을 포기하고 몸을 틀어 창을 피해야만 했다.
“크아아…….”
칸빌이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에 찬 절규를 터트렸다.
놀랍게도 그는 인간처럼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조윤과 같은 고수들의 내공은 특별한 기운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를 파고들면 혈액을 응고시키는 것이 그것인데, 칸빌도 비록 검은색이지만 피가 흐르는 생명체였기에 내부가 얼어가는 극한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칸빌이 약했더라면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느낄 틈도 없이 죽었을 테니까…….
“크으……! 돌아와라!”
조윤을 향해 돌진하려던 카르스와 둘을 칸빌이 불렀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셋은 돌진을 포기하고 칸빌의 옆에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계약한 칸빌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칸빌을 카르스는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결코 상위 존재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나를 마계로 인도해라! 카르스!”
“저놈들을 내버려두고 말입니까?”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 돌아오면 그때 모조리 소멸시켜도 늦지 않다. 서둘러라! 카르스!”
칸빌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멸을 면하기 위해 다급해진 그는 카르스가 자신의 명령에 이의를 표했음을 느끼지 못했다.
카르스는 절대 칸빌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계약자다. 다만 그가 칸빌보다 강하다면 계약을 무시하고 힘으로 종속관계를 바꿀 수는 있다. 그들에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 칸빌에겐 그런 것을 느끼거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카르스는 옆을 흘긋 돌아봤다.
그곳에 자신과 싸우던 인간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가장 강인한 느낌을 주었던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마침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놈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카르스는 혁련천후를 보며 그렇게 판단했다.
판단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칸빌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동시에 강력한 기운이 자신들에게로 몰아쳐 들어옴을 느꼈다.
카르스는 그게 누구의 기운인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마계로 모시겠습니다!”
스스슥!
콰아앙!
그들이 섰던 곳에 혁련천후의 천살강기가 떨어졌다. 주변이 초토화로 변하며 솟아오른 자욱한 먼지구름이 하늘의 달을 가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주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혁련천후는 이미 등을 돌리고 아들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렸던 자들이 사라졌음을 이미 깨달은 것이다.
“크아아…….”
“끄어어어!”
몬스터들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전히 평원을 가득 메운 몬스터들은 갑자기 뒤쪽 숲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요란 제국의 제7강습여단은 잠시 당황한 태도를 보였다.
“추격하지 마라!”
루턴 후작은 몬스터들을 포기했다.
하룻밤을 이어진 전투로 인해 그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 지경이라면 다른 기사들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드디어 참혹한 피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평원 위에는 죽은 자들의 주검과 살아남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 그리고 혁련천후 일행뿐이었다.
“각하! 저들을 만나보시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루턴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들 덕분에 몬스터가 물러갔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데스 나이트가 그들 때문에 도주했다고 그는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망설이게 만든 이유였다.
“어? 그냥 갑니다! 각하! 명령을 내려주시면 데려오겠습니다!”
루턴 후작이 부관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부 다 죽일 일이 있느냐? 본토로 돌아간다!”
* * *
아리엘은 홀베른의 왕궁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위치한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렸다.
“흠! 역시 사람이 많은 곳은 시끄러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본다.
손에 먹음직한 과일을 든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심의 한복판을 씩씩하게 걸었다.
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전 대륙이 초긴장 상태로 빠져들었지만 홀베른은 평상시의 번잡함,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곳곳에 케이론 제국과 요란 제국이 케논 산맥에서 드디어 격돌했다는 전단이 수도 없이 붙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식당이나 술집의 개업전단지쯤으로 여길 뿐이었다.
“훗! 확실히 웃기는 곳이야, 이곳은…….”
아리엘은 그런 홀베른의 국민들을 흥미롭게 여겼다.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걷던 그녀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교차로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와!”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 한 말일까? 대답도, 나타나지도 않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가인! 네가 온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얼른 나와!”
스슥!
“쩝! 역시 네 눈은 속일 수가 없군.”
그녀의 뒤쪽에 가인과 카츄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리엘이 몸을 돌려 둘을 바라보았다.
“날 데려가려고 온 거야?”
“알면서 왜 물어?”
“당연히 족장님이 시키셨겠지?”
“당근이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가인과는 달리 카츄는 아리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런 카츄를 아리엘은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호호! 카츄! 누나가 보고 싶어서 온 거지? 이리와!”
카츄가 기다렸다는 듯 폴짝 뛰어서 그녀의 품으로 안겼다. 카츄를 번쩍 안아 든 아리엘이 가인을 슬쩍 노려보았다.
“일단은 카츄, 밥부터 먹이고 얘기해. 따라와!”
“킁!”
셋은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아리엘은 작지만 무척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로 가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 * *
“오호! 이곳에 이런 곳도 있었네?”
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대륙에서 생산되는 모든 술을 판매하는 술집이었다. 바깥에서와는 달리 내부는 무척 넓고 화려했다.
대낮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카츄가 코를 막으며 인상을 썼다.
“술 냄새…….”
“애한테 참 좋은 교육을 시킨다.”
가인이 비꼬듯 말하자 아리엘은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툭 쏘아댔다.
“모르면 잠자코 계셔!”
“모르긴 개뿔! 여긴 술집이잖아. 많고 많은 식당을 제쳐두고 하필이면 이런 곳이냐?”
“기다려봐. 멋진 음식이 나올 거니까. 그런데 우리 카츄는 키가 좀 컸니?”
“응! 한 뼘이나 컸는걸.”
“어이구, 그랬어요.”
아리엘은 카츄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카츄도 그녀의 곁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 모습에 질투가 났는지 가인은 영 표정이 그랬다.
심드렁한 가인을 잠시 바라본 아리엘이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난 돌아가지 않아, 가인.”
“족장님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그건 아니지.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 있을 거야. 아니 무조건 이곳에 있어야 해!”
“쳇! 백마를 탄 왕자님이라도 발견한 거냐?”
가인의 심드렁한 반응에 아리엘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나중에 돌아가서 말해 줄게. 그러니까 식사하고 마을로 돌아가. 곧 있으면 이곳도 전쟁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싫다! 난, 족장님께 약속했어. 반드시 널 찾아서 데려갈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혼자선 절대 못 간다!”
카츄가 끼어든다.
“나도 싫어. 아리엘이랑 같이 있을래.”
아리엘이 고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잠시 말없이 가인을 응시하더니 다시 말했다.
“너, 내 고집 알잖아. 그러니까 포기해.”
가인이 고개를 쑥 내밀며 물었다.
“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지 이유를 말해 봐. 들어보고 결정하지. 얼른 말해 봐.”
“그건 나중에 말한다니까!”
“그럼 나도 이곳에 남겠다. 너도 내 고집 알지? 그러니까 딴말 마라.”
가인이 팔짱을 하고서 고개를 돌려버리자 아리엘은 숨을 내쉬며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때 점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
점원은 아리엘의 미모를 흘긋거리다가 가인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갔다. 점원의 뒤통수를 째려보던 가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 혹시 남자라고 생긴 거 아니야?”
“글쎄……!”
“글쎄? 오호! 정말인 모양이네? 너, 족장님이 아시면 얼음 굴에서 최소 10년이야!”
아리엘이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며 가인을 노려봤다.
“됐으니까, 밥이나 드셔! 카츄! 많이 먹어!”
“엘프의 돌을 지켜야 할 네가 이렇게 돌아다니니까 족장님을 비롯한 어른들께서 하루를 편하게 주무시질 못하잖아. 그건 알기는 하냐?”
“너도 충분히 강하니까 네가 잘 지켜.”
“말을 말자. 에구 밥이나 먹자. 카츄! 많이 먹어라.”
결국 가인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셋은 잠시 대화를 끊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런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조명이 어두운 구석진 곳, 그곳에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간간이 아리엘을 향하곤 했다.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가락에 녹색 구슬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반지는 시시각각 다른 색, 다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홀베른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색 벽돌을 쌓은 벽에 붉은색이 칠해진 원형의 지붕을 덮은 건물은 요정이 사는 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좌우를 곱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좁게 난 길 위를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휴…….”
연방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는 바로 카루가였다.
머리에 흰 천을 감은 카루가는 어른처럼 뒷짐을 하고서 자꾸만 건물을 흘긋거렸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 볼록 튀어나온 볼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듯했다.
“쳇! 그 안에서 영영 살 거야?”
누구에게 하는 소릴까?
대상은 아마도 벽돌집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카루가의 뒤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목소리를 들은 카루가의 고개가 자라처럼 쏙 들어갔다. 왕전이었다.
“오셨어요……?”
“여기서 뭐 하냐니까?”
“그냥, 심심해서…….”
“심심해? 이 콩알만 한 놈아! 누군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개고생인데, 심심해? 이게 머리를 다치더니 완전 맛이 갔네? 너, 그것도 엄살이지?”
카루가가 질색을 하며 대답했다.
“정말 아파요.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데…….”
“피는 개뿔, 먹물이지. 헛소리 말고 얼른 따라와!”
왕전은 카루가의 목덜미를 잡고는 성큼 걸음을 놓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카루가는 끌려가면서도 벽돌집을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벽돌집의 이층 창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사람의 머리가 쑥 튀어나왔다.
“갔어요?”
“응! 잡혀갔어. 개처럼…….”
“어휴! 말 하고는…….”
“흠! 공기 한번 죽인다!”
눈부신 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가자 관옥 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혁련소였다. 그리고 그 옆에 연소민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행복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둘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너무 좋아요.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게 다 나 때문이지.”
“그래요. 맞아요. 이게 다 잘난 그대 덕분이에요.”
“하하! 그럼, 당연하지!”
연소민이 혁련소를 가볍게 노려봤다.
“그거 알아요?”
“뭘……?”
“무척 뻔뻔하고 능글맞아졌다는 거요.”
“쩝! 그런가?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고…….”
화사한 햇빛이 둘을 따사롭게 비추었다. 산들바람이 불어 가볍게 흔들린 나무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랫소리를 울려댔다.
둘에게 세상은 분홍빛, 그 자체였다. 턱을 괴고 먼 곳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연소민의 눈동자가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어멋!”
화들짝 놀란 그녀가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혁련소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볼 때, 일층 길 위에 누군가가 스윽 나타났다.
“좋냐?”
“어! 전왕 숙부!”
“좋으냐고?”
왕전이었다. 그가 왜 또 왔을까? 혁련소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싫겠습니까?”
“부르신다.”
“누가요? 아버지가요?”
“빨리 오라신다.”
“왜요?”
“나도 몰라. 난 분명히 전했다? 그럼 간다!”
스슥!
왕전이 또 사라졌다. 혁련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왕전이 사라져간 방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뒤에서 연소민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빨리 가보세요. 부르신다잖아요.”
“왜 부르시지? 아직 부상 중인데…….”
“풋! 부상은 무슨… 일러바치기 전에 얼른 가봐요. 어서요.”
* * *
새롭게 만들어진 연무장엔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이 기합성을 지르며 비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담대소천이 허리에 손을 얹고는 호랑이 같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 땅에 머리를 박고 엉덩이에 손을 올린 데얀이 보였다.
“찌를 때 허리를 이용해야지!”
“으합!”
담대소천의 말 한마디에 기합성은 두 배로 커졌다. 연무장 옆에 세워진 큼지막한 나무 아래에서 북궁천소와 흑야가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손엔 술병을 한 손엔 큼지막한 닭다리를 든 북궁천소는 연방 혀를 내둘렀다.
“애들 잡네. 애들 잡아. 저놈 저거, 이제 보니 완전 악질교관이었잖아?”
“화산 애들은 저거보다 몇 배는 더 지독한 수련을 거쳤다. 저 정돈 약과지.”
“그놈들하고 저놈들하고 같으냐? 자질 자체가 다르잖아. 인마!”
“최소한 비슷해지려면 저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봤자 발끝에나 따라갈까 걱정이지만…….”
북궁천소의 말처럼 담대소천은 혹독한 수련을 시키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오르던 산을 요즘은 아침, 점심, 저녁을 나누어 세 번을 오르게 하는 것도 모자라 해가 떨어질 때까지 연무장에서 그림자도 사라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데얀은 식사를 하고 조금 늦게 집합했다는 이유만으로 벌써 두 시간째,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으니 그들의 수련 정도가 얼마나 혹독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훤했다.
“헉! 헉!”
“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기사단원들은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었다.
그들은 애원이 담긴 눈으로 담대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완고한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너희들의 선조는 이것보다 수배는 더 지독한 수련을 거쳤다. 고작 이 정도에 지칠 거라면 너흰 강해질 자격이 없다!”
담대소천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데얀! 일어서라!”
데얀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부동자세를 취했다. 군기가 제대로 든 그의 모습에 북궁천소와 흑야가 실소를 머금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다! 야간수련은 상왕 전하께서 직접 주관하실 것이다! 식사들 하고 오후 7시까지 이곳에 다시 집합한다! 해산!”
오후 수련이 끝났다.
모두가 연병장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지독한 수련 탓에 일어나서 식당으로 뛰어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적당히 좀 해라. 고수가 되기 전에 수련 받다가 죽겠네.”
북궁천소가 다가오는 담대소천에게 술병을 건네며 히죽 웃었다. 흑야가 자리에 앉는 담대소천을 보며 툭 내뱉듯 물었다.
“어지간하면 대련으로 들어가지?”
“아직 멀었다. 엉뚱한 마나의 운용법으로 인해 화산의 날카로움이 완전히 사라졌어. 저 데얀이라는 놈은 화산의 검법이 아니라 하북 팽가의 도법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니…….”
“그러니까 대련을 통해 수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기를 강화하는 훈련만으로 놈들의 잃어버린 날카로움이 돌아오겠냔 말이다.”
“그건 네놈들이 도와줘야지.”
흑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우리가 왜?”
“주공께서 그러라고 하셨다. 불만 있으면 주공께 따져! 가자! 배고프다!”
* * *
“후! 죽을 맛이군.”
데얀은 맨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머리에 잔뜩 묻은 흙조차 털어내지 않은 그는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양팔을 쭉 늘리고는 금쪽같은 휴식시간을 즐겼다.
“단장님! 식사하셔야죠!”
“입맛도 없다.”
“하하! 그래도 좀 드셔야죠. 야간수련 땐 밥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날 죽여라.”
“하하하!”
기사들이 모두 웃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은 의외로 눈빛만큼은 활력에 넘쳤다. 혹독한 수련으로 인해 불만을 지녔을 거란 보통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었다. 데얀이 고개만 옆을 돌려 말했다.
“늦으면 밥도 없어! 얼른 식사들 하고 와라!”
“단장님은 안 가십니까?”
“입맛이 없다니까. 그냥 너희들끼리 먹고 와.”
“에이! 그럼 저희들도 굶을랍니다. 잠이나 자죠.”
데얀이 벌떡 일어섰다.
“미친놈들! 알았다! 알았으니까 얼른 일어나!”
기사들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몰골들이 가관이었다. 땀으로 범벅이던 몸을 곧장 맨땅에 눕혔으니 전신이 흙으로 엉망이었다. 그래가지곤 식당 안으로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다.
“좀 씻고 가야겠습니다. 이래가지곤 쫓겨나기 십상이겠는걸요.”
“흠! 그럴까? 좋지! 모처럼 냉수목욕을 해보도록 하지!”
데얀이 느닷없이 연무장의 우측을 흐르는 좁은 강으로 몸을 날리자 기사들도 모조리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풍덩!
“으아! 차갑다!”
“으흐흐…….”
한겨울의 강물은 뼈조차 얼릴 듯, 무척 차가웠다.
그러나 수련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육신을 식혀주기엔 더없이 좋았다.
“역시 냉수목욕이 최곱니다!”
“으… 좋긴 좋다만 그곳이 번데기가 되겠는걸.”
“원래 번데기가 아니었습니까?”
“뭐야?”
데얀은 스스럼없이 기사들과 어울렸다.
지나치게 꼬였던 지난날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밤이었으면 홀라당 옷을 벗었겠지만 보는 눈들 때문에 옷을 입은 그대로 모두는 어린아이처럼 잠시 물장구를 치며 법석을 떨었다.
“어? 단장님! 저기 누가 옵니다.”
“오! 상왕 전하와 무지 닮았는데요?”
그들이 물놀이를 하는 건너편에 은발을 늘어뜨린 청년이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바로 혁련소였다.
비록 은발이었지만 얼굴은 혁련천후와 무척 닮아 있음을 깨달은 기사들은 재빨리 행동을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며칠 전, 상왕이 잃어버렸던 아들을 되찾아 돌아왔다는 소린 이미 궁 안에 파다하게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누구보다 그 소문을 빨리 들었던 그들은 혁련소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데얀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혁련소도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련은 할 만합니까?”
혁련소가 밝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이미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의 모든 것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담대소천에게 지옥의 수련을 받고 있는 것까지도 말이다. 데얀을 비롯한 기사들이 즉답을 못 했다.
가까이서 보니 혁련천후와 정말 흡사하게 닮았던 까닭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험! 나날이 발전하는 게 무척 좋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데얀이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아카데미 수련생이나 할 법한 대답을 데얀이 하자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얀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혁련소가 분명 혁련천후와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고 한 대답은 자신이 생각해 봐도 좀 아니었다.
“하하! 데얀 단장이군요. 나중에 대련이나 한 번 뜨시죠?”
“대련요? 어어, 그게…….”
확실히 데얀은 조금은 얼어 있었다. 모두가 혁련천후 때문이다. 그의 아들이면 자신들에겐 하늘이다. 괜히 잘못 보였다간 초상을 치를 수도 있다.
“왕자님이십니까?”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큰소리로 물었다.
“왕자?”
“며칠 전에 상왕 전하와 함께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십니까?”
“아하! 그건 맞지만 왕자는 아닌데요?”
순간, 데얀의 눈초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아니야? 왕자가 아니라고? 그게 정말이냐?”
데얀의 분위기가 돌변하자 혁련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뛰쳐나가려던 데얀을 기사들이 양쪽에서 잡아 말렸다.
“왕자가 아니라면서 내가 존댓말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니, 너 이리 와! 자식아!”
“단장님! 참으십시오!”
혁련소는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데얀과 기사들을 느릿하게 쓸어보았다. 시뻘게진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데얀이 꽤나 우습게 비쳤는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나중에 대련으로 만납시다! 그럼!”
“이봐! 흰머리! 거기 안 서!”
혁련소가 손까지 흔들고 지나가자 데얀은 먹이를 빼앗긴 곰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말렸던 까닭에 혁련소는 무사히(?) 식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뜨거운 김이 넓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식당의 한쪽 구석엔 숙수들이 엄청난 양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우드와 요란이 그들을 돕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에이미 공주도 머리에 천을 두르고는 식탁에 음식을 놓느라 꽤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왕전과 진천, 사공진무가 들어섰다. 그리고 먼지를 홀딱 뒤집어쓴 카루가도 뒤를 따랐다.
“에이미! 밥 다됐냐?”
“조금만 기다리세요. 거의 다됐어요.”
“술부터 좀 가져와! 목이 말라 돌아가시겠다!”
왕전이 들어서자 숙수들이 표정부터가 달라졌다. 여유롭던 동작들은 이내 군인을 연상시키는 절도 있는 동작들로 대번에 바뀌었다.
왕전과 북궁천소는 어느 세상, 어느 곳을 가더라도 제대로 먹히는 인상들이다. 하물며 평범한 숙수들의 눈에는 마계의 발록처럼 여겨졌다.
에이미 공주가 술과 간단한 요리를 먼저 내어왔다.
“드시고 계시면 곧 식사를 올릴게요. 진천 님도 많이 드세요!”
“예, 아! 그래…….”
진천의 허둥대는 반응에 사공진무는 심드렁한 얼굴로 술병을 낚아챘다. 에이미 공주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진무 님도 많이 드세요.”
“많이 주고 그런 소릴 하던가… 벌컥! 벌컥!”
에이미 공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주방으로 돌아가자 왕전이 음흉한 표정으로 사공진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으흐흐! 이 자식! 질투하는구나. 그렇지?”
“됐거든요. 전 저렇게 생긴 여잔 별롭니다!”
“헤헤! 저 누나를 좋아하는구나?”
딱!
“콩알만 한 놈이 뭘 안다고!”
괜히 끼어든 카루가의 머리에 불꽃이 튀었다.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울상이 된 카루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
“형!”
막 식당으로 혁련소가 들어서고 있었다.
“하하! 카루가! 표정이 왜 그러냐?”
“헤헤! 그냥 한 대 맞았어. 누나는?”
“조금 있다가 올 거다. 안녕하십니까? 숙부님들!”
“너,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다?”
“하하! 빠지긴요. 그대론데…….”
머쓱해하는 혁련소를 셋은 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때, 뒤쪽 문을 통해 데얀을 비롯한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이 우르르 들어섰다. 마침 혁련소와 눈이 정통으로 부딪혔다. 대번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데얀을 혁련소는 웃음으로 대했다.
“저게 미쳤나? 곰 새끼처럼 으르렁대기는…….”
사공진무가 데얀의 반응을 보고 불퉁거렸다. 그는 여전히 에이미 공주 건으로 심드렁한 상태였다.
“저보고 왕자라고 묻기에 아니라고 했더니 저러네요?”
“내가 손 좀 봐주랴?”
“아닙니다. 활력이 넘치고 보기 좋은데요. 중원에 계셨을 때의 숙부님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들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눌 때 데얀은 혁련소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저분들과 저렇게 허물없이 지낸다면 왕자가 아니라도 보통 인물은 아닐 텐데…….’
그랬다.
왕전 등과 어울리는 모습이 꽤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데얀은 슬쩍 불안감이 생겨났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기사의 옆구리를 찔렀다.
“상왕 전하께서 아드님 말고 다른 사람도 데리고 오셨냐?”
“한 분만 함께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단장님께서도 모두 아는 분이지 않습니까?”
“……!”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크흠! 아니다. 밥이나 먹자!”
“아직 밥이 안 나왔는데요?”
“쿨럭!”
* * *
다소 소란스럽던 식당이 혁련천후가 들어서자 쥐죽은 듯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이 뒤를 따랐고, 그 뒤에 멋들어지게 금발을 늘어뜨린 청년이 함께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된 탁자에 혁련천후가 앉자 모두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홀베른 국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전하겠습니다.”
혁련천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홀베른 국왕은 모두를 따뜻한 눈으로 한차례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상왕께서 내리신 하교를 전하겠소.”
한차례 호흡을 가진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본, 홀베른의 염원이 무엇인지 모두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700년 동안 이어져온 선조들의 유지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소.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자 숙명이었소.”
꼴깍!
누군가의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홀베른 국왕의 얼굴이 경건하게 굳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데얀과 기사들의 얼굴엔 뜨거운 열망이 어렸다.
“그 숙명을 벗고자 하오!”
“요란으로 갑니까?”
데얀의 격앙된 목소리가 식당 전체를 울렸다. 무례한 태도였으나 누구 하나 그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홀베른 국왕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마저 걸렸다.
“그렇다. 데얀! 요란으로 갈 것이다.”
“우아!”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 전체가 환호를 질렀다. 혁련천후와 홀베른 국왕이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침없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지켜보던 에이미 공주의 뺨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천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다독거리려고 하다가 사공진무의 매서운(?) 눈길을 받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
혁련천후의 한마디가 다시 정적으로 몰아갔다.
모두가 열망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혁련천후는 술잔을 살짝 기울이고는 데얀과 기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지금, 너희들의 수준으론 어림없다.”
“……!”
“강해져라!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져야 요란으로 갈 것이다. 알겠나?”
데얀과 기사들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언제 지금보다 두 배까지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열망은 암울로 바뀌어갔다. 그 괄괄한 성격의 데얀이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소천!”
“예! 주공!”
“지금 저 아이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지?”
“전에 비하면 거의 두 배에 육박합니다.”
담대소천의 그와 같은 말에 데얀과 기사들의 고개가 부러질 듯, 그를 향해 돌아갔다. 두 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라니? 지금까지 받은 훈련은 고작 체력훈련이 전부였는데…….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들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담대소천의 대답은 이어졌다.
“초식을 운용하는 방법만 남았으니 7일 정도면 가능하리라 봅니다.”
“좋다! 내일부터는 내가 직접 저들을 수련시키겠다. 너희들은 그동안 소의 수련을 도와라!”
“예! 주공!”
“오늘은 특별히 술과 음식을 허락하겠다. 많이 마시고 즐기도록…….”
혁련천후와 홀베른 국왕, 그리고 룻거 후작이 자리를 떴다. 식당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얀과 기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그들에게 왕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식들, 표정하고는… 정 못 믿겠다면 나가서 한판 떠볼까?”
“정말입니까? 저희들이 강해졌다는 것이…….”
“저게, 말을 불알 구멍으로 처 듣나?”
왕전의 거친 말에 에이미 공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담대소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술로 밤을 지새워보지. 내일 해가 뜨면 수련의 성과가 어느 정돈지 알게 해주겠다.”
술판은 다음 날 새벽, 동이 틀 무렵까지 이어졌다.
* * *
새우잠을 잔 모두는 이른 시각에 연병장으로 집합했다.
테얀과 기사들은 미리 나와 있는 담대소천과 왕전 등의 옆에 혁련소가 함께 서 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얀은 혁련소가 자신을 보며 웃음을 보내자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그가 왕자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혁련소에게 욕을 해댔던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쩝! 죽이기야 하겠어?’
데얀은 슬쩍 혁련소를 쳐다봤다. 껄껄 웃는 왕전과 북궁천소가 눈을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대번에 생각이 바뀐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둘의 험악함에 데얀은 다시 근심에 휩싸였다.
“지난 밤, 내가 했던 말을 지금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걸 증명해 주고자 한다!”
담대소천의 말에 모두는 다시 열망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강해졌다는 담대소천의 말을 떠올리자 숙취로 인해 흐렸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함과 동시에 궁금증도 생겨났다.
‘어떤 방식으로 증명하겠다는 걸까?’
모두의 공통된 궁금증이었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담대소천이 손으로 왕궁의 뒤쪽을 두르고 늘어선 산을 가리켰다.
‘설마……?’
데얀을 비롯한 모두는 불안감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담대소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왕전 등을 돌아보며 눈빛을 보냈다.
“시작하지.”
“흐흐! 좋다! 모두들 산의 정상에서 만난다! 가장 늦게 오르는 놈은 내가 직접 대련을 해주겠다!”
우려는 현실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근사하게 대련 같은 것을 통해 할 거라고 모두는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린 것은 데얀이었다.
* * *
데얀은 가장 먼저 산의 정상에 다다랐다.
그러나 자신이 출발할 때 웃음을 주고받았던 담대소천 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흐흐! 성질머리만 더러운 줄 알았는데, 제법이군.”
“마법으로 순간이동을 하신 건…….”
“뭐야?”
“아닙니다.”
즉시 꼬리를 내린 데얀은 그대로 눈밭에 누웠다. 뒤이어 다른 기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담대소천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데얀!”
“예! 장군님!”
모두는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중원에서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라고 혁련천후가 지시했던 까닭이었다.
“뭔가 느낀 것이 없느냐?”
“……!”
데얀은 영문을 몰라 대답을 못했다. 담대소천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모두가 그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보였다.
“산을 오르는 시간이 두 배가 빨라졌다.”
“그렇습니까?”
그랬다.
그들은 미처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시키면 죽자고 올랐을 뿐, 별다른 의미는 두지 않았던 그들이다. 그때 데얀이 물었다.
“그것으로 저희들이 강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소!”
“예! 숙부님!”
“네가 저들을 상대해줘야겠다. 방식은 네 마음대로 해라.”
“하하! 좋죠.”
혁련소가 앞으로 나섰다.
“시작할까요?”
데얀이 다시 물었다.
“이자, 아니 이분과 싸우는 것으로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대답은 흑야가 대신했다.
“대륙에 가장 강한 자들이 누구냐?”
“그야 초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소문에 흑안의 마검사들이 초인들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저 소문이라…….”
그때 다른 기사가 소리쳤다.
“다크 블러드가 초인들보다 강하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흑야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다크 블러드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론 다크 나이츠로 불리기도 한다. 모두가 이 세상에 넘어와 벌였던 자신의 행각을 두고 붙여진 별명들이다.
“그 아이가 다크 블러드다!”
“예엣!”
모두가 크게 놀랐다. 어지간한 데얀도 눈을 부릅뜰 정도로 흑야의 말은 엄청난 것이었다. 다크 블러드는 죄를 지은 자들에겐 죽음의 집행자로 불리는 신비의 인물이다. 마스터들도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었는데, 눈앞의 젊은 혁련소가 바로 그 다크 블러드란다.
물론 거짓말이다.
혁련소도 뜬금없는 흑야의 말에 내심 어이가 없었다.
[숙부!]
[넌 가만히 있어.]
“저, 정말입니까?”
데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담대소천이 다시 나섰다.
“지금, 너희들은 마스터 사냥꾼이라는 다크 블러드와 대련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갑주를 벗은 맨몸으로 하게 될 것이다.”
“맨몸으로 말입니까?”
“그동안 너희들은 갑주를 믿고 지나치게 파괴적인 공격수법만 익혀왔다. 때문에 너희들은 복잡한 수 싸움을 즐기는 강자들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주공과의 대련을 생각하면 감이 올 것이다. 그분의 오른 주먹 하나에 너희들 전체가 패배하지 않았느냐? 해서 오늘부터는 너희들에게 싸움의 묘리를 깨우치게 해줄 것이다. 물론 그전에 너희들이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 확인시켜주겠지만…….”
잠시 말을 흐린 담대소천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갑주를 벗은 상태에서 너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
모두는 대답을 못했다.
그런 건 지금껏 생각조차 안 했던 것이다. 갑주를 입지 않고 싸움을 하는 자신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갑주 자체가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갑주가 없는 너희들은 마스터들의 사냥감 정도에 불과하다.”
“그 정돈 아닙니다!”
데얀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직접 느껴볼 테냐?”
“아, 아닙니다!”
담대소천이 데얀을 슬쩍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맨몸으로 이 아이와 대결을 펼쳐 10분을 버텨낸다면 갑주를 입었을 때, 둘이 초인 하나를 당해낼 수 있음을 장담하지! 물론 남은 기간의 수련 정도에 따라서는 더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데얀, 너는 혼자서 맨몸으로 초인을 이겨낼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정말입니까?”
“정말이다!”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담대소천의 말이었지만 데얀과 기사들의 얼굴엔 또다시 열망이 번져갔다. 칼을 들고 살아가는 검사들에겐 강해진다는 것, 그것이 삶의 최종목표다. 하물며 가문의 숙명 때문에 세상에 웅지조차 드러내지 못했던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은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이분은 초인과 비교하면 어느 정돕니까?”
데얀이 가장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대답은 혁련소가 했다.
“맨손으론 비슷하죠. 하지만 내가 검을 들고 싸운다면… 10분 정도? 하하!”
“눈 온다! 시작해라!”
왕전의 고함을 신호로 혁련소와 그들의 대련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