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수련
혁련천후는 왕궁의 첨탑에 올라 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요즘 그의 얼굴은 전보다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아들과의 해후는 설치던 잠까지 숙면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록 아내들의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데얀과 아이들이 무척 좋아합니다.”
홀베른 국왕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게 더 수월해져.”
“저하까지 합세하셨으니 저희들이 없었더라도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 일곱 분들은 너무 강합니다.”
홀베른 국왕은 팔왕의 일곱을 거론했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다른 질문을 했다.
“초인들과 싸워본 적이 있나?”
“이곳에서만 있었던지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대와 룻거는 초인들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너무 크게 보셨습니다.”
“아니, 그 정도론 부족하지. 적어도 산악의 후예라면 저들만큼은 강해져야 산악의 자존심이 선다. 놈은 누구보다 힘을 숭상했으니까…….”
홀베른 국왕은 혁련천후가 보지 않음에도 경건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루라도 잊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생명이 다해 사라지는 그날까지 가슴에 새겨놓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찬바람이 불어와 둘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꽃송이처럼 날리던 눈발은 어느새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졌다. 잠시 말없이 먼 곳을 응시하던 혁련천후의 시야에 누군가가 비쳤다.
“헤헤! 여기서 뭐 해?”
카루가였다.
허공에 둥둥 뜬 카루가는 혁련천후가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자 재빨리 그의 어깨로 올라가 앉았다.
“몸은 괜찮으냐?”
“아직 아픈데, 누나가 며칠만 지나면 괜찮다고 그랬어.”
“그래… 내려갈까?”
“술을 준비할까요?”
“좋지. 소민과 에이미도 부르도록 하지. 칼슨이라는 그 친구도 함께…….”
칼슨은 검술대회에 참가했던 금발청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홀베른 국왕이 일부러 신분을 위장하여 참가시킨 인물로서 룻거 후작의 아들이었다. 물론 그도 금발에 벽안으로 변신을 한 관산악의 후예였다.
“어! 다 내려온다!”
카루가가 산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홀베른 국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그게 보이느냐?”
“헤헤! 사나운 데얀이 얼굴에 멍든 것까지 보이는데?”
“허어……!”
홀베른 국왕은 카루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아직 그는 카루가의 진정한 모습을 모른다. 그냥 듣기에 화가 나면 전혀 다른 존재로 변신해 무시 못 할 힘을 보인다고만 알고 있었다.
“술상을 더 봐야겠어…….”
“하하! 술은 넘치도록 있습니다. 내려가시지요. 전하!”
잠시 후, 모두는 거나한 술자리를 가졌다.
데얀을 비롯한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의 모든 이들은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을 달고 있었다. 특히 데얀은 누구보다 큰 것을 달았는데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물든 모습은 마치 점박이 개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무척 밝았다.
카루가가 놀리며 웃어도 데얀은 껄껄 웃으며 받아넘겼다.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은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술자리가 이어지는 내내 모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 * *
케논 산맥에서의 양 제국 간의 전투는 결국 요란 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요란 제국이 테세우드 공작이 이끄는 케이론 제국에게 황제가 줄행랑을 치는 수모까지 당하면서 대참패를 당했다고 전해지자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경악했다.
그것은 요란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며 근간을 이어오던 왕국과 공국들의 배신을 불러왔고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승전국인 케이론의 왕궁은 예상과는 달리 조용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기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 레이나 공주의 거처에는 헤론 후작과 루안이 레이나 공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각하게 굳어져 있는 헤론 후작과는 달리 루안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간혹 레이나 공주를 훔쳐보며 눈빛을 반짝일 뿐이었다.
“그들이 틀림없어요.”
“그들이 강한 건 알았습니다만, 그 정도일 줄은…….”
“안타까워요. 정말 안타까워요. 그들을 내 사람으로 진즉에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녀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루안이 끼어들었다.
“그 친구들이 그렇다고 테세우드, 그 늙은이의 편에 선 것은 아니잖아.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고.”
이들은 지금 대륙에 번져가는 흑안의 마검사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문에 그들은 요란 제국의 비밀전력인 크로우기사 단원들을 죽였다고 했다. 블랙 오우거도 죽일 만큼 강력한 크로우기사 단원들이 흑안의 마검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은 통신석을 타고 이미 전 대륙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그들이 혁련천후 일행들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어느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흑발을 바람에 날리며 능선을 오르던 그를 보며 전율에 몸을 떨었습니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적도, 아군도 그저 그가 두려워 물러날 뿐이었습니다. 요란의 황제가 그의 검을 피해 도주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서도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적의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친구도 아니었으니까요. 그가 만약 우리와 적으로 돌아선다면…….]
다른 기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검을 든 자와 창을 든 자, 그들은 몬스터 대군의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걸려드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버리는 파괴와 죽음의 춤을… 놀란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발밑에 요란의 대마법사 율튼이 죽어 있었습니다. 죽이는 광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전 순간, 확신했습니다. 그들, 흑안의 마검사들이 대마법사를 죽였다고 말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자신이 직접 들은 기사들의 증언을 떠올리며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장 테세우드 공작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황권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그들에 대한 아쉬움은 밤잠을 설칠 만큼 컸다.
“테세우드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루안이 레이나 공주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연히 병력을 추슬러서 요란 제국의 본토로 향하겠죠. 다만 그 시가가 다소 늦어지는 점이 의아할 뿐이에요. 돌아오기가 무섭게 곧장 갈 줄 알았는데…….”
“혹시 부상이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날, 그를 봤어요. 외관상으론 멀쩡하더군요.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후후! 뭔가 없다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자가 아니지. 기사들의 말로는 전장에서 예전의 그보다는 훨씬 강력함을 뽐냈다고 하더군. 그게 이상하지 않나? 초인이라 불리는 수준에 오른 자들은 더 이상의 발전은 매우 힘든 법이거든. 특히 단시일엔 거의 불가능하고 말이야. 분명 뭔가를 사용했을 거야.”
루안의 말에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알아보지. 놈의 지나친 발전은 결국 내게도 좋은 건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걱정 마. 누가 나를 어찌할 수 있겠어? 후후! 그건 그렇고 다음 출전 땐, 레이나도 참전할 생각이야?”
“그래야겠죠.”
“후후! 그럼 그땐 나도 불러줘. 호위기사로 전쟁에 한 번쯤은 참전해 보는 것도 재밌을 거야.”
레이나 공주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린 루안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 헤론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약, 요란의 본토로 출전하게 된다면 이번엔 우리도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테세우드 공작에게 지금보다 더 확고한 기반을 주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 점을 미리 그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테세우드 공작의 기반, 이전에 제국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니까요.”
“진정, 마마께서도 참전할 생각이십니까?”
“앉아서 기다리는 건 질색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루안이 같이 가준다고 했으니까 안전할 거예요.”
“적들의 집중포화를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레이나 공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적들도 이젠 제가 그다지 영양가가 높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어쩌면 그게 저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주겠죠. 피곤하군요. 그만 자야겠어요.”
“편히 주무십시오.”
헤론 후작이 나가자 레이나 공주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곧장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이내 잠에 빠졌다.
* * *
대승리를 거둔 테세우드 공작은 자신의 권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세를 몰아 요란 제국의 본토를 노리자는 주변의 강력한 권고를 그는 모두 물리쳤다. 모두가 그의 그러한 점을 이상하게 여기고 수군거렸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황궁이 무색하리만치 거대하고 화려한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은 나날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주변 공국의 왕들도 황궁을 찾지 않고 이곳을 찾았다. 어떤 왕들은 공물을 아예 이곳으로 바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테세우드 공작은 케이론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드높은 위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 어떤 왕들도 테세우드 공작을 만나볼 수는 없었다. 전투 이후, 그가 자신의 비밀스러운 거처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던 까닭이다.
뿌연 수증기가 사방을 가득 채운 비밀스러운 공간에 테세우드 공작이 누워 있었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제단처럼 생긴 곳에 등을 대고 누운 그의 육신은 미동조차 없었다. 얼굴 주변은 무수히 많은 빛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빛 덩어리들이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빛은 점점 밝아졌다. 내부의 독소들이 모조리 빛 덩어리들에 의해 흡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분쯤 흘렀을까?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이며 형형한 안광이 뿜어졌다.
“후욱!”
상체를 일으키자 단단한 근육질이 그대로 드러났다. 크게 호흡을 한 테세우드 공작은 제단에서 내려섰다.
“후후후! 확실히 더 강해졌군.”
치르륵!
움켜쥔 주먹이 묘한 빛으로 둘러졌다. 만면에 흡족함을 드러낸 그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대마법사 쉐인과 부상에서 완치된 레이놀드 백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별일 없었습니까? 공!”
쉐인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허허! 각국의 왕들이 각하를 뵙고자 지금껏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둘러 그들부터 만나보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 저녁에 모두 만나볼까요?”
“황실에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만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서두르시지요.”
테세우드 공작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젠 그 작자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조만간 요란의 북부지역을 손에 넣으면 그땐, 공식적으로 케이론의 황위에 오를 것이오!”
“당연히 그러셔야 합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각하!”
레이놀드 백작이 가슴을 쑥 내밀려 소리쳤다. 그의 어깨를 툭 쳐준 테세우드 공작은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놓았다.
그의 걸음걸이를 본 쉐인의 눈에 놀람의 기운이 나타났다.
‘전보다 더 강해지셨구나. 초인의 영역을 넘으셨단 말인가…….’
그는 테세우드 공작이 머물렀던 제단을 흘긋 돌아봤다. 그곳엔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몸을 씻고 복장을 갈아입은 테세우드 공작이 각국의 왕들과 만찬을 가지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시각은 새벽녘이 되었을 때였다.
옷을 벗고 침상에 몸을 누이려던 테세우드 공작이 흠칫하며 재빨리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누구냐!”
그의 오른손에 빛으로 형성된 검이 나타나 있었다.
“후후후!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군. 마나로 이루어진 검이라…….”
실내의 어딘가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테세우드 공작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숨어들었단 말이냐! 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까?”
“초인이 호들갑은… 후후후!”
스슥!
놀랍게도 테세우드 공작의 전면에 전신을 검은색 천으로 두른 인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른 천으로 인해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만을 볼 수 있었다. 실내는 이내 칙칙한 마기가 자욱하게 번져갔다.
“요란에서 온 놈이더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감히 나를 암습하려고 들다니, 어리석은 놈이로다!”
“후후! 전보다 강해졌다고 우쭐대는 꼬락서니하고는…….”
흑포인의 눈동자는 지옥의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테세우드 공작은 그 눈빛 속으로 자꾸만 자신이 빨려들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전신에 힘이 제대로 모여들지도 않았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마나로 이루어진 검의 형태가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불과 조금 전까지 강해졌다고 좋아했던 자신이 아닌가? 그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까지 충만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태어나서 가장 큰 위험에 처했다. 본능은 눈앞의 존재가 자신을 죽일 거라 경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공격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그러더군. 네가 이상한 힘을 지녔다고 말이지. 그 힘이 어디서, 어떻게 얻어진 것인지 내게 말해야 할 것이다. 테세우드.”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후후! 켈베로스, 내 이름이다.”
테세우드 공작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그럼, 다, 당신이…….”
“그렇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 어둠의 신이 나 켈베로스다. 후후후!”
* * *
아리엘은 왕궁으로 들어서다가 연무장에서 수련 중인 케이언 크로우기사단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혁련천후 때문이다.
“수련 중인가요?”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혁련천후가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그녀는 손까지 흔들며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폭발적인 아름다움에 데얀을 비롯한 기사들의 눈동자가 뜨겁게 요동쳤다.
그것을 본 혁련천후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저기 연무장의 끝에 세워진 기둥이 보이냐?”
그의 뜬금없는 말에 모두는 고개를 돌려 기둥을 응시했다.
“한쪽 다리로 저곳을 돌아오도록! 선착순 2명만 뽑겠다. 나머진 오늘 저녁을 굶어야 할 것이다.”
그저 예쁜 여자한테 눈길 한 번 준 것이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모두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가급적이면 이곳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왜요?”
“방해가 되잖아!”
“흠…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세상에 나보다 더 예쁜 여자가 없으란 법도 없고, 만약 적들 중에 그런 여자가 있다면 사전에 단련을 시켜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혁련천후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훗! 그냥 여기서 구경만 할게요. 대신 수련 중에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제가 고쳐주죠. 그거면 됐죠?”
“……!”
“화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쥐어준 아리엘은 천연덕스럽게 연무장의 우측에 솟아 있는 나무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화이팅!”
그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연무장을 돌아오는 기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혁련천후는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더 빨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보며 생긋거리는 아리엘에게 말했다.
“도우려면 제대로 돕던가.”
스슥!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리엘은 그의 코앞에 나타났다. 놀라운 이동력이다.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에 혁련천후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물러났다.
“어떻게 도울까요?”
떨어진 만큼 아리엘이 다가오며 눈을 반짝거렸다. 슬쩍 인상이 구겨진 혁련천후는 데얀을 불렀다. 일등으로 도착한 데얀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대련이다!”
“예? 누구하고…….”
“이 아가씨가 너를 상대할 것이다.”
아리엘의 고운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제야 혁련천후의 속내를 깨달은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데얀을 노려봤다.
“얼른 붙어요! 흥!”
* * *
아리엘이 데얀과 대련을 시작할 즈음, 연무장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담대소천 등과 혁련소와 연소민, 에이미 공주는 가장 구경하기 좋은 곳에 이미 자리 잡고 앉아 있었고 뒤늦게 온 홀베른 국왕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시하자 아리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쳇! 지면 개 창핀데?”
그녀는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짧은 단검처럼 보였는데 오색찬란한 보석이 검신의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데얀이 들고 있는 검에 비하면 3분지 1 정도의 길이였다.
“그냥 싸워요?”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서 있던 혁련천후에게 쏘아붙이 듯 물었다.
“돕는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흥! 미쳤어요? 아무런 보상도 없이 땀을 흘리게?”
“뭘 원하지?”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들어줘요. 물론 제가 지면 없던 일로 하죠.”
“좋다. 그렇게 하지.”
“진짜죠? 아싸!”
그가 허락하자 아리엘의 얼굴이 대번에 환하게 밝아진다. 변화무쌍한 그녀의 성격에 혁련천후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 * *
“하하! 작은어머니와 무척 닮았지 않습니까?”
“끙!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혁련소는 아리엘을 보며 크게 웃었다.
왕전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소의 말대로 아리엘은 자신들의 두 번째 주모인 영호수란과 무척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왕전과 북궁천소의 얼굴이 슬쩍 굳어지는 것을 본 혁련소가 조금은 미안한 듯 말했다.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크흠! 아니다! 조만간 깨어나서 우리를 괴롭힐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다! 크허허! 그렇지 않냐? 무식한 자식아!”
“맞다! 벌써부터 걱정이다.”
“어머! 시작했어요.”
연소민의 말에 모두는 연무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갑주를 차려입은 데얀과 아리엘의 대련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놈이 갑주까지 걸쳤다면 저 아이가 당해낼 수 있을까?”
“싸우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저 아인 뭔가 신비한 구석이 있어. 주공께서도 그걸 아시고 대련시키지 않았을까? 승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담대소천이 정색을 하고서 대답했다.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는 누구보다 눈을 반짝이며 아리엘을 응시했다. 같은 여자로서 아리엘은 너무 아름다웠다.
여인 특유의 질투심이라도 발동한 걸까? 둘은 한마디 말조차 없이 아리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데얀의 선공으로 대련이 시작되었다.
깡!
데얀의 묵직한 검과 아리엘의 단검이 부딪히며 불똥을 튕겼다. 갑주를 걸친 데얀의 파괴적인 공세에도 아리엘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임은 아리엘이 더욱 빨랐다.
“으합!”
“느려요!”
스슥!
데얀의 공격은 좀처럼 아리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수련을 받기 이전의 데얀은 갑주를 걸치면 초인을 능가하는 무력을 지녔었다. 그런 데얀이 혹독한 수련을 거쳤으니 그 정도가 어떨지는 보지 않아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데얀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이 가장 크게 놀라고 있었다. 사실 데얀을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그녀가 강한지를 모르고 있었다.
“아둔한 놈! 여전히 힘을 중시하는 버릇을 못 고쳤군.”
“버릇이 쉽게 고쳐지나. 기다려봐. 조금씩 그걸 느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차라리 갑주를 벗어버리고 싸우는 게 낫겠어. 저 속도론 평생을 싸워도 저 아이를 당하지 못한다.”
흑야는 데얀의 싸움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쾌를 중시하는 그는 파괴력은 넘치지만 속도가 느린 데얀이 미련스럽기까지 했다. 사공진무가 끼어들었다.
“놈이 더 약해진 것 같습니다! 저와 싸울 땐 저 정돈 아니었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더 약해지다니?”
“느낌이 그렇단 말입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공진무는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제대로 데얀을 겪었던 그가 아닌가?
그때 담대소천이 중얼거렸다.
“재밌어지겠군.”
“저 자식, 성질이 제대로 뻗쳤는데?”
“갑주를 벗으면 무력이 뚝 떨어지는 놈이 왜 벗지?”
“전반적인 파괴력은 떨어져도 수련을 통해 화산의 정수를 제대로 배우고 있었으니 대련에선 더 나을 수도 있다. 일단, 속도부터 빨라지겠지.”
데얀이 갑주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제대로 열이 뻗친 것처럼 보였다. 아리엘이 심판을 보고 있는 혁련천후에게 따졌다.
“시합 중에 갑주를 벗다니요? 반칙!”
“반칙? 그런 거 없다.”
“쳇! 적 앞에서 이랬다면 벌써 목이 날아가도 수십 번은 더 날아갔겠다.”
갑주를 몽땅 벗어버린 데얀이 손에 침을 뱉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울퉁불퉁한 근육질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아리엘이 핀잔을 주었다.
“흥! 숙녀 앞에서 그게 무슨 짓?”
“젠장! 대련에 숙녀는 개뿔! 다시 시작합시다!”
“배고프니 얼른 끝내죠? 우리 지금부턴 전력을 다해서 싸워요.”
“그거 좋지!”
둘은 다시 대결로 돌입했다.
* * *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의 모두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둘의 격돌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은 데얀이 밀리고 있다는 것에 무척 놀라는 눈치였으나 점점 몰입하면서부터 둘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했다.
그때, 그들의 귓속을 파고드는 전음이 있었다.
[아리엘의 공수전환을 눈여겨 봐두도록 해!]
혁련천후였다. 전음은 이어졌다.
[속도는 곧 승패와 직결된다. 상대보다 빠른 속도로 더 강한 힘을 싣는다면 그게 바로 강한 것이다!]
모두는 시선은 둘에게 고정시킨 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대결은 무척 치열했다. 갑주를 벗어던진 데얀이 훨씬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으로 조금 비슷해진다 싶더니 이내 밀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파워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만!”
혁련천후가 둘의 대련을 중단시켰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데얀이 더 싸울 수 있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약속, 잊지 마요?”
“……!”
대답을 못 한 혁련천후에게 눈을 찡긋거린 그녀는 데얀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당신, 무척 강해요. 인정하죠.”
그리고는 몸을 돌려 궁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엘이 사라지자 데얀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방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표정은 의외로 어둡지 않았다.
“뭔가를 깨달은 눈치군?”
“헉! 헉!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약점을… 헉! 헉!”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패배하고도 그것을 인정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번의 대련은 성과가 컸다고 볼 수 있었다. 더욱이 가장 성격이 급하고 거친 데얀이 그런 반응을 보였다.
‘좋은 경험이 되었겠군. 하지만…….’
걸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자신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던 아리엘을 떠올렸다. 대번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 해달라고 할지…….’
* * *
자신의 거처로 들어선 아리엘은 어깨를 움켜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식한 인간! 힘만 세 가지고는…….”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도 꽤나 힘든 승부였다.
어깨에 부상까지 입었다. 자신의 종족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선 적수가 없는 강자가 아니었던가.
“더럽게 아프잖아! 씨…….”
아무래도 뼈가 잘못된 듯싶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어깨에 살포시 얹었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기운이 손바닥에서 흘러나와 어깨를 둘렀다.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렸던 그녀의 얼굴이 차츰 밝아졌다.
“훗! 그래도 꽤 성과가 있었어. 뭘 해달라고 할까?”
그녀는 얼음덩어리처럼 생긴 혁련천후를 떠올리자 슬쩍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스스로 돌아서기엔 너무 깊게 빠져버린 자신을 발견하고도 그녀는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벗어버린 그녀는 욕실로 들어섰다.
육감적인 몸매가 걸을 때마다 환상적으로 출렁거렸다.
나무를 이어 만든 욕조에 물을 받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으로 뜨겁게 물을 데우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졸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스르르 감기려고 할 즈음, 그녀의 귓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응?’
아리엘은 눈을 떴다.
목소리의 임자는 카츄였다. 단 한마디만을 들었을 뿐인데 아리엘은 가슴을 차고 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카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츄! 지금 어디야? 그리고 목소린 왜 그래?]
[마을로 돌아가야 해! 마을에, 마을에…….]
카츄는 울고 있었다.
[아리엘! 마을이 공격을 당했어! 어서 마을로 돌아가야 해! 서둘러!]
[가인, 그게 무슨 소리야? 공격을 당했다니, 누가 마을을 공격했단 말이야?]
[그건 나도 몰라! 아무튼 빨리 마을로 돌아가! 나와 카츄가 먼저 간다!]
그것으로 가인의 목소리는 끊겼다.
촤아악!
아리엘은 황급히 육조에서 나왔다. 지금 가인이 자신에게 전한 마법은 위급할 때만 사용하는 자신들 종족의 신비스러운 술법이다. 한 번 사용하면 수개월은 지나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마나의 소모가 발생하는 것이 그것인데…….
그녀는 황급히 갑주를 찾아 걸쳤다.
그리고 갑주 안에 감추어 놓았던 구슬을 꺼내어 주문을 외웠다. 구슬에 빛이 감돌며 영상이 나타났다.
아리엘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불바다가 된 마을의 참혹한 전경,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생명처럼 아끼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이, 이럴 수가…….”
죽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질린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울부짖는 그들의 비명이 아리엘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주르륵!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한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괴상한 생명체가 비쳤다.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두르고 손엔 시뻘건 혈광을 두른 검으로 종족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존재들, 아리엘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켈베로스의 가디안!’
그랬다.
자신들과는 천적인 존재들이 구슬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 * *
“도와줘요!”
혁련천후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리엘을 의혹에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고 들어갔던 그녀가 눈물범벅으로 돌아와 느닷없이 도와달란다. 그는 미처 대답을 못했다.
“약속했잖아요.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이런……!’
“제 고향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들을 구해주세요.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넌, 충분히 강하지 않은가?”
“저 혼자로는 힘든 놈들이 왔어요. 그러니 어서…….”
아리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죽어가든 종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터질 것만 같았다.
혁련천후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수련을 중단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전이다!”
그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혁련천후는 아리엘에게 물었다.
“네 고향이 어디지?”
“멀지만 텔레포트로 가면 돼요.”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천후는 조금은 놀란 눈으로 아리엘을 쳐다봤다. 그녀가 범상치 않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해서 데얀과 대련까지 시켰지 않은가.
하지만 텔레포트가 가능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었다.
“꽤 강적이 나타난 모양이군…….”
데얀을 꺾을 정도의 고수에다 텔레포트를 시전할 수 있을 정도의 아리엘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할 정도면 보나마나 강적이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그는 담대소천을 응시했다.
“서둘러야겠다.”
* * *
그림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숲은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아리엘의 텔레포트로 케논 산맥의 끝부분으로 이동한 모두는 주변을 살폈다. 아리엘은 가장 먼저 화염으로 휩싸인 작은 마을로 뛰어갔다.
“상당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담대소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들 중, 마기와는 가장 상극의 무공을 익힌 그는 대번에 숲 전체를 두르고 있는 음습함을 간파했다.
“이건, 마계의 황족들만이 지닌다는 암흑마기가 분명합니다! 놀랍군요. 인간이 사는 세상에 어찌 암흑마가가… 혹시?”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느냐?”
“켈베로스! 어쩌면 놈일 수도 있습니다.”
혁련천후가 눈매를 가늘게 하고서 다시 물었다.
“요란 제국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그놈을 말하는 것이냐?”
에이미 공주를 통해 켈베로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그는 의혹이 일어났다. 혁련소가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마계에서 강제로 쫓겨난 황족이 그놈입니다! 아직 마계의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 저곳을 두른 마기가 암흑마기가 틀림없다면 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혁련천후의 눈매가 매서운 기운으로 채워졌다.
“잘됐군.”
어차피 한번은 부딪혀야 할 대상이 켈베로스다.
혁련소가 돌아온 지금, 그에게 남은 과제는 단 하나, 고룡 트로이안의 심장을 얻어 아내들을 깨우는 것뿐이다. 그런 다음 중원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돌아가는 방법은 켈베로스, 그에게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이계에서 수많은 존재들을 끌어온 게 그였으니 당연히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허공을 가르며 마을로 진입했다.
* * *
처참했다.
곳곳이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질펀했다. 죽은 자들의 얼굴이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안타까움을 나타내던 에이미 공주가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엘프!”
전설의 종족이라는 엘프가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들이 엘프란 말이냐?”
“틀림없어요. 아!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은 숲을 수호하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드워프와 더불어 고대에 사라졌다는 신비의 종족인 그들이 처참한 주검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에 모두는 놀라워했다.
“아리엘을 찾아라!”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아리엘이 나타났다. 그녀의 품엔 그녀와 무척 닮은 사람이 안겨 있었다. 바로 가인에게 아리엘을 찾아오라고 시켰던 족장이었다.
아리엘은 슬픔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족장의 시신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잠시 모두는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뾰족한 귀가 그녀가 엘프임을 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혁련천후가 낮은 목소리고 말했다.
“아직 놈들이 이곳에 있다. 일어나라!”
아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조차 못했다.
“정신 차려라! 놈들이 떠나지 않았다면 네 동족들이 살아 있음이 아니겠느냐? 그들을 죽게 내버려둘 셈인가?”
혁련천후의 나지막한 호통에 그제야 아리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소민이 다가가 그녀를 가볍게 앉아주었다.
“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해요. 아리엘 님!”
그때였다.
혁련소가 울창한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입니다! 방금 암흑마기가 흔들렸습니다. 생존자들이 저쪽으로 간 듯합니다!”
“데얀과 너희들은 가급적 전면에 나서지 말도록!”
주의를 준 혁련천후가 먼저 몸을 날리자 모두는 그의 뒤를 쫓았다.
* * *
“죽어버려!”
가인은 혼신을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새파란 빛줄기가 한곳으로 쏘아졌다. 빛줄기가 향하는 곳에 검은 천으로 전신을 두른 존재들이 서 있었다.
콰앙!
강력한 폭발은 주변 나무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며 회오리를 일으켰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소용돌이의 현장에 남은 것은 초토화된 수풀의 흔적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은 가인의 공격권을 벗어나 있었다.
가인은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족장도, 촌장도 모두 눈앞의 존재들에 의해 영원히 환생할 수 없는 소멸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모두 죽일 거야! 이 나쁜 놈들아!”
붉어진 가인의 얼굴은 핏줄이 돋아났다.
가인의 옆에는 카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끈 쥔 주먹을 바르르 떨고 있었는데 얼굴은 말라붙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후후후! 대답하면 저들은 살려주겠다.”
유달리 붉은 눈동자를 지닌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엔 20명가량의 어린 아이들이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가인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진다.
“어차피 네놈들에겐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다. 온전히 내주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꼬마야.”
“닥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가 손을 슬쩍 움직이자 아이 하나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악! 가인! 살려줘!”
아이는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가인의 눈동자에 핏물이 고였다. 남은 아이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모습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악! 가인!”
떠오른 아이의 주변 공간이 사납게 움직였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아이는 한 줌 핏물로 화해버릴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 아일 내려줘!”
“후후!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것이냐?”
“정말이다! 그건 족장의 딸이 지니는 것, 정말 내겐 없어!”
“그 계집은 지금 어디 있지?”
“홀베른! 홀베른에 있다! 원한다면 내가 그녀에게 데려다주겠다. 그러니 아이를 그만 살려주란 말이다!”
가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가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아리엘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해! 아리엘……!’
“누나!”
갑자기 카츄가 소리쳤다. 가인이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리엘이 숲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아리엘……!”
아이들의 목숨을 협박하던 자들은 장내로 들어서는 혁련천후 등을 보면서 시뻘건 안광을 번뜩거렸다.
“크어어!”
뒤쪽에서 괴상한 비명이 터졌다. 아이들을 주변에 서 있던 자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광경이 모두의 눈에 비쳤다. 그곳에 흑야가 나타나 있었다.
퍽!
목이 잘린 자의 육신이 시뻘건 연기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에이미의 마법으로 아이들은 아리엘의 옆으로 옮겨졌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이쪽으로 와! 가인! 카츄!”
가인과 카츄가 재빨리 아리엘의 옆으로 이동했다. 가인은 반가우면서도 아리엘을 쳐다보지 못했다.
“괜찮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미안해…….”
가인은 기어코 눈물을 보였다.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준 아리엘은 시선을 전방으로 던졌다.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다.
주변이 울렁거리며 난폭한 기운이 요동을 쳤다.
“용서 못 해…….”
“위험한 놈들이다. 넌, 아이들을 지켜라. 놈들은 우리가 상대하지.”
혁련천후가 아리엘의 어깨를 짚었다. 흑야에 의해 목이 잘렸던 자의 육신이 어느 사이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윤과 흑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카르스와 폭스 후작 등과의 싸움에서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본 그들이었다.
“골치 아픈 새끼들이군.”
우드득!
북궁천소가 어깨에서 대도를 잡아 내리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왕전은 이미 대도를 틀어쥐고 당장에 달려들 기세였다.
“너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 그리고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이 재빨리 아이들을 안전한 거리 밖으로 옮겼다. 함께 싸우겠다는 가인과 카츄는 진천이 혈도를 짚어 주었다.
아리엘은 여전히 그들의 옆에 섰다. 그녀의 눈빛을 본 혁련천후는 더 만류하지 못했다. 혁련천후는 시뻘건 혈광이 이글거리는 눈을 번뜩이며 자신들을 바라보는 자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켈베로스의 종자들이군?”
흠칫!
확연히 흠칫거리는 게 보였다. 혁련천후의 눈에 섬광이 돌았다. 넘겨짚어 물어본 것인데 상대의 반응을 보니 분명했다.
치르륵!
그의 검이 천살강기를 품었다.
“후후!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두려운가?”
“누군가? 그대는…….”
“너희 같은 악마의 종자들을 잡아먹는 사람!”
“인간 주제에 암흑마기를 지녔다니, 마계에서 온 존재인가?”
가장 큰 덩치를 지닌 자가 허공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혁련천후가 아닌 혁련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혁련소가 앞으로 나섰다.
“흐음! 아버지를 무시했으니 곱게 죽진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