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42화 (42/55)

제3장

엘프의 멸망

그들은 엄청나게 긴 손톱을 무기로 사용했다.

붉은빛으로 번들거리는 그들의 손톱이 꽤나 길었기에 자칫 검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손톱은 어지간한 명검보다 강했다.

중원에선 적수가 없다는 팔왕의 검과 도, 그리고 창과 부딪혔음에도 멀쩡했다. 육신을 잘라내면 금방 되살아나 붙었다.

싸움은 당연히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난감하군. 이대로 시간을 끌면 우리만 손해다.’

혁련천후는 난감해했다. 그들의 공격은 상당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겐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질 않으니 그게 문제였다.

이대로 싸운다면 결국 지쳐서 쓰러지는 쪽은 자신들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온 에이미 공주와 마계를 다녀온 혁련소에게 막연하게 방법을 기대했지만 그들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젠장! 돌아버리겠군!”

성질이 급한 왕전과 북궁천소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죽어도 수십 번은 더 죽었을 그들이 여전히 주변을 맴돌며 자신들에게 사악한 기운을 뿌려대고 있었으니…….

“잠시 물러나라!”

혁련천후의 명령에 모두는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상대도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들도 어쩌면 혁련천후와 같은 심정일 수도 있었다. 싸움은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없는 묘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흑야가 검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이런 황당한 싸움은 처음이군.”

상대적으로 내공이 약한 진천과 사공진무는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진천이 혀를 내둘렀다.

“환술이 먹히질 않는 놈들입니다.”

“제가 진으로 한번 가둬볼까요?”

사공진무가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말했다.

딱히 방법이 없으니 그거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혁련천후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든 사공진무가 무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조윤과 담대소천이 그의 좌우를 호위했다.

“제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빠져 다리가 다 후들거립니다.”

사공진무는 정말 지쳐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자 적들이 다시 달려들 기세를 보였다. 사공진무가 씩 웃으며 소리쳤다.

“징그러운 자식들! 제발 갇혀라!”

사공진무의 손에 쥐어진 나뭇가지들이 둥실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사방으로 흩어지며 떨어져 내렸다.

파파팍!

천금만쇄진.

반경 오 장 이내의 모든 것들을 가두어버린다는 진법이 펼쳐졌다. 공격용이 아니라 부상을 당했거나 추격을 당할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진법이 그것이다. 성공하면 진 안의 사람을 외부에선 누구도 볼 수 없게 된다.

나뭇가지가 방위를 점하며 바닥에 꽂히자 놀랍게도 적들이 사라졌다.

“어! 사라졌네?”

“뭐야? 성공한 거야?”

모두가 놀란 소리를 냈다.

당사자인 사공진무가 가장 크게 놀랐다.

“어라! 이게 뭐야? 정말 갇힌 거야?”

진법을 처음 경험하는 에이미 공주와 데얀, 그리고 크로우기사단의 단원들은 눈을 부릅뜨고서 입을 벌렸다.

“하하하!”

혁련소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모두가 그를 돌아봤다. 혁련소가 사공진무에게 엄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숙부! 최곱니다! 암흑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젠장! 진즉에 할 것이지. 망할 놈!”

“그러게.”

정말 황당한 결과였다.

혹시나 해서 펼친 것이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혁련천후가 사공진무에게 물었다.

“효력이 얼마간 지속되는 것이지?”

“누가 나무를 뽑지만 않으면 평생 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말에 일제히 탄성이 쏟아졌다. 데얀과 기사들이 지른 소리였다. 혁련천후가 이번엔 진천을 돌아봤다.

“환술로 저 나무들을 암벽처럼 만들 수 있겠지?”

“하하! 그거야 식은 죽 먹깁니다.”

진천이 손을 탁탁 털며 나섰다. 사공진무와 손바닥을 마주친 그가 환술을 펼치려 두 팔을 들었다. 그러나 모두는 머리를 긁적거리는 사공진무에게 뜨거운 눈길을 주느라 진천이 펼친 환술을 보지 못했다.

갇힌 자들의 소멸은 가인과 카츄의 몫이 되었다. 혁련천후는 그들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때, 그들의 손으로 직접 죽이라고 명했다.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은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실전이라고 은근히 기대를 하고 왔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나마 소득이라면 사공진무의 놀라운 능력을 눈으로 목격한 것이 전부였다.

지난날 사공진무와 대격전을 벌였던 데얀은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사공진무를 흘긋거리기 바빴다. 평생을 좁은 공간에서 지내면 어떨까를 생각한 데얀은 치를 떨며 사공진무에게서 은근슬쩍 떨어졌다.

죽은 자들을 모아 한곳에 묻어준 일행은 생존한 엘프들을 데리고 홀베른으로 떠났다.

* * *

요란 제국의 황궁.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고루거각들은 언제나 화려함을 뽐내며 서 있다. 대륙 최강의 국력을 보유한 것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도시 전체를 철벽처럼 두른 성곽은 그 어느 국가의 성보다 높고 견고했다.

창검을 든 병사들의 눈매는 사나운 표범을 연상시켰고 그들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얼굴엔 믿음이 가득했다. 대륙은 케이론에 패배한 요란을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이곳의 백성들은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황제를 믿기 때문이었다.

전쟁광이라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황제, 막스를 요란의 백성들은 무척 신임하고 따랐다. 언젠가 혁련천후도 의아하게 여겼던 그 부분이 어쩌면 요란이 강대국으로 올라선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 부분이 요란과 케이론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각설하고…….

성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드높은 첨탑에 황제 막스가 누군가와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놀랍게도 황제가 앉아야 할 상석엔 로브를 걸친 인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엘프의 돌을 가지러 간 아이들이 늦는구나…….”

“혹시 무슨 일이라도…….”

“그건 아니다. 엘프들이 비록 강하다곤 하지만 그 아이들을 감당할 만큼은 아니지. 혹, 변수가 있다고 해도 그 아이들과 나는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가 아니더냐. 소멸을 당할 만큼의 위기가 닥쳤다면 내게 전해졌겠지.”

“엘프들의 저항이 조금 심하다고 여기십시오. 곧 돌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것만 손에 넣으면 남은 것은 아이아스의 심장뿐, 곧 불사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막스 황제가 허리를 숙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님께 아이아스의 심장을 바치겠나이다.”

스승이라면 이자가 바로 켈베로스란 말인가? 그는 분명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 모습을 드러냈지 않은가? 그렇다면 테세우드 공작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막스 황제의 공경을 받는 그는 로브를 깊숙하게 눌러쓴 탓에 용모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간간이 번뜩이는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 혼이 얼어버릴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그 눈빛이 막스를 향해 고정되었다.

“레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함께 온 자들과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곧 돌아온다고 했으니 염려 마십시오.”

“놀라운 일이군. 레인이 두려워하는 자가 이 세상에 있었다니…….”

막스 황제가 다시 허리를 굽히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레인은 분명 그자에 대하여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 스승님께서 직접 하문하시지요.”

“어쩌면 그자들도 레인과 같은 곳에서 온 자들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곳은 강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으니까…….”

“스승님이 아니면 누구도 문을 열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자들이 스스로 이곳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스승, 켈베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기억을 되짚었다. 핏빛 호수에서 그곳을 지키던 가문의 혈족을 데리고 넘어올 때를 떠올렸다.

‘문제는 없었다. 다만 쫓아오던 그 흑발사내가 걸리긴 하지만… 혹시, 그자가 연못으로 뛰어들면서 차원의 문이 뒤틀린 것이란 말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간발의 차이로 흑발사내의 공격을 피해 이곳으로 넘어왔던 자신이 아닌가? 달려오던 기세를 생각하면 곧장 연못으로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섬뜩한 놈이었어. 물론 지금은 오크만도 못한 놈이겠지만…….’

스스스…….

주변에 섬뜩한 기운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스승님!”

“……!”

켈베로스는 상념을 떨쳤다. 그러자 주변을 요동치던 섬뜩한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막스.”

“예, 스승님!”

“엘프의 돌을 가져오면 홀베른을 도발할 것이다. 아이아스의 심장을 지키는 놈들을 밖으로 끌어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미리 준비를 해놓아야 할 것이야.”

“케이론은……?”

막스 황제가 의구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그들은 절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테세우드, 놈이 사라지면 케이론은 당장의 정치적인 혼란을 수습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최소한의 방어병력만을 남겨두고 홀베른에 집중할 것이다.”

막스 황제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놈들이 홀베른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양면에서 적을 맞는 형국이 되지 않습니까?”

“후후! 당연히 돕겠지. 하지만 테세우드를 따르던 기사들은 분명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반으로 쪼개진 케이론은 홀베른만 못 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막스 황제가 뒷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가 물러가자 켈베로스는 자신의 품 안에서 커다란 구슬을 꺼냈다. 그가 간단한 주문을 외우자 영상이 나타났다.

“도대체 한곳에 모여 뭣들 하고 있는 거지?”

구슬 안에는 엘프의 마을로 갔던 자들이 서성거리는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모두가 한곳에 모여 뭔가에 대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였다.

눈빛만 드러나 있어서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뭔가 허둥대는 것도 같았다. 섬뜩한 켈베로스의 눈동자가 슬쩍 가늘어졌다.

“어리석은 놈들! 또 엘프의 정기를 취하려고 늦는 모양이군.”

켈베로스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며 구슬을 다시 품속에 갈무리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첨탑의 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게 나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제, 아이아스의 심장만 얻는다면 나는 최초로 모든 차원을 지배하는 위대한 관조자가 될 것이다. 후후후!”

그는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50미르 거리에 또 다른 첨탑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위용을 과시하며 우뚝 솟아 있었다. 켈베로스의 눈동자에 탐욕이 어린다. 그곳에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고룡, 트로이안의 심장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나의 분신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 이계의 힘을 가지고 말이야. 후후후…….”

묘한 말이 흘러나왔다.

분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 * *

홀베른의 밤은 아름답고 고요했다.

모두가 홀베른의 평화를 축복하고 감사히 여기며 꿈속으로 빠져들 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리엘은 두 눈은 여전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홀베른으로 돌아온 그녀는 며칠 동안 혁련천후가 특별히 마련해 준 거처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마을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가인을 처음 만났을 때, 돌아갔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란 자책이 그녀를 괴롭혔다.

‘미안해요. 할아버지…….’

죽은 족장은 그녀의 할아버지였다.

어려서 마계와의 전쟁이 일어나 부모님을 모두 여읜 그녀는 줄곧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왔다. 그녀에겐 부모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세상을 구경하고 오겠다면 몰래 떠난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나 때문이야. 엘프의 영광을 책임져야 할 내가 모든 걸 망쳐버렸어.’

그녀는 자꾸만 스스로를 자책했다.

엘프들은 원래 늙지 않는 종족이다. 그러나 수백 년 전 마계와의 전쟁 이후, 인간세상으로 터전을 옮기면서부터 그들은 인간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종족으로 변했다. 다시 자신들의 공간으로 돌아가려면 엘프의 돌이 전능의 힘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날이 불과 십 년이 채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돌 때문에 참극이 빚어졌다. 카츄와 가인의 말로는 그들이 엘프의 돌을 원했다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이 혁련천후 등과 제때 도착했기에 그것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함께할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용서하지 못해!”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원독에 찬 눈동자는 여전히 투명한 액체를 흘려냈지만 하얀 이가 파고든 입술은 선연하게 진한 핏물을 흘려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창 밖에 솟아 있는 나무, 그곳에 혁련천후가 나뭇가지를 밟고 서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나왔다가 불이 켜진 아리엘의 거처에서 지독한 한기가 느끼고는 나무로 올라선 그였다.

아리엘의 뺨을 가득 적신 눈물을 보고는 슬쩍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때, 아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창을 가운데 두고서 마주쳤다.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중심을 잃은 혁련천후의 육신이 밑으로 쑥 떨어졌다. 몸을 회전하며 바닥으로 내려선 혁련천후는 스스로를 욕했다.

‘내가 미쳤군.’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아리엘의 거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렸다. 아리엘은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한동안 서서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질끈 깨물어졌다.

‘당신께 도움을 청하겠어요. 원한다면 내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도움을 청하겠어요. 내 종족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휘이잉!

전혀 불지 않던 바람이 창을 두른 커튼을 쓸고 지나갔다. 커튼이 사라지는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가렸다.

손을 뻗어 커튼을 치워냈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 * *

연소민과 에이미 공주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엘프의 아이들을 돌보라는 특명을 혁련천후에게서 받았다. 슬픔과 충격으로 활력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좀처럼 먹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아리엘이 함께해 주면 그때 조금 먹고 말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아이들과 오래 있지 못했다.

수련.

그랬다. 그녀는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충분히 강하다. 자신이 지닌 힘에다 마법까지 펼친다면 팔왕 중에서 진천과 사공진무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강해지기를 원했다. 마을을 참혹하게 파괴시킨 자들의 주인인 켈베로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자 결심했던 까닭이다.

스승은 혁련천후였다.

그는 담대소천에게 맡기고자 했지만 그녀 스스로가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우겼던 결과였다. 스승과 제자의 분위기는 꽤나 어색했다.

그러나 대련에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졌다. 한을 품은 아리엘의 열정이 지독했기 때문이다.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는 여전히 담대소천 등의 집중조련을 받았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최종 목적은 어쩌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만큼은 평화롭고 즐겁기까지 했다.

한편 케이론 제국은 건국 이래 가장 큰 사건이 터졌다. 승승장구하던 테세우드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케이론 제국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자신의 거처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된 그의 시신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시켰고 둘로 나뉘었던 기존의 세력들은 전보다 더한 갈등으로 치달았다.

승전의 분위기를 타고 요란의 본토를 치려던 모든 계획이 전면 백지화되었고 테세우드 공작과 황제를 추종하는 주변 공국들과 위성국가들은 각각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면화하며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제국 간의 전쟁이 내전으로 치닫자 황제와 레이나 공주는 그것을 막고자 혼신의 힘을 쏟아붓고 있었는데…….

케이론의 소식은 홀베른에도 들어갔다.

혁련천후는 수뇌부들을 모아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며 그 부분에 대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들끼리 할 때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홀베른 국왕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어차피 요란과 한 번은 부딪혀야 한다고 보면 케이론의 분열은 우리에게 큰 손실입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가 그렇게 죽을 줄이야…….”

“사인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남아 있는 피는 한 방울도 없었고 피부와 장기는 햇빛에 말린 생선 같았다고 합니다. 그런 식의 죽음은 저희들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지라…….”

듣고 있던 담대소천이 말했다.

“채음술을 익힌 자들에 의해 죽은 시신과 비슷하군요. 아마 이곳에도 상대의 모든 기운을 흡수하는 수법을 익힌 자가 있나 봅니다.”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채음술이 극에 이르면 피해자는 피부와 뼈, 장기만을 남기고 모든 힘과 수분을 빼앗기게 된다. 테세우드 공작의 시신과 같은 형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혁련천후는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요란으로 향할 날이 머지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터져버린 테세우드의 죽음이 그는 난감하기만 했다.

요란 제국이 케이론 제국의 군사적인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울 때, 자신들은 소수정예로 요란의 황궁을 들이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는 바람에 요란 제국은 케이론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분산되어야 할 그들의 전력이 고스란히 보전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필이면 이때 뒈질 게 뭐람.”

북궁천소가 불퉁거렸다.

“요란 제국과의 전투에서 그자의 능력은 소문 이상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강자가 강제로 모든 힘을 빼앗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라면…….”

조윤의 말에 혁련천후가 담담한 투로 말했다.

“초인이라는 자들보다 더 강력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겠지. 중원도 그렇다만 어느 세상이든 드러나지 않은 자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초인이란 그저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가 가야 하는 요란에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놓겠지. 특히 그 켈베로스라는 놈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말을 끝낸 혁련천후가 과일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카루가를 응시했다.

“어쩌면 저 아이가 놈을 잡는 열쇠를 쥐고 있을 수도 있겠지.”

모두가 카루가에게 시선을 모았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카루가가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만이 느껴지는 그를 본 모두는 혁련천후의 말을 의아해했다.

“놈은 마계의 황족이라고 들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저 아이와 이어질 거란 생각이 드는군. 물론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일 수도 있고…….”

아리송한 말에 모두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당최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은 왕전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술만 마셨다. 북궁천소도 마찬가지였다.

“수련의 정도는……?”

“느는 속도가 상당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습니다.”

“데얀은?”

“갑주를 입으면 거의 저희들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놀라운 말이 담대소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들과 비슷하다면 초인보다 강하다는 소리다. 물론 모두가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갑주 덕분이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혁련천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홀베른 국왕에게로 향해졌다.

“장인에게 부탁해 놓은 것이 있다. 내일, 그것을 궁으로 가져오도록 해.”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 말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물질이라고 들었다. 꽤 도움이 되겠지. 그걸 한 자루씩 나누도록 해.”

그 말에 담대소천과 조윤만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검이 주병이 아니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희들은 무기에 구애받지 않을 수준이 아닌가?”

“좋은 무기는 무사들의 꿈이지 않습니까?”

“너희들 것도 만들었으니 인상들 펴!”

“정말입니까? 하하! 고맙습니다. 주공!”

지금껏 말없이 과일만 깎던 연소민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의 눈에는 맨주먹으로도 세상을 뒤집고 남을 존재들이 무기를 받는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어색할 뿐이었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케이론의 분열은 당분간 잊는다! 우린 우리가 할 준비만 철저히 하도록 해.”

“주무시겠습니까?”

“적당히 마셔.”

혁련소는 문득 아버지의 뒷모습이 쓸쓸하다고 느꼈다. 연소민이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탁자 밑으로 몰래 손을 잡아주었다. 아리엘도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반짝 눈을 빛냈다. 사람들을 한번 돌아본 그녀는 가볍게 한숨지으며 살짝 들었던 엉덩이를 도로 앉혔다.

“주모님들께 가시는 모양이다.”

“요즘은 수련 시간을 빼놓고는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내시던 모양인데…….”

진천과 사공진무가 수군거리는 말들은 모조리 아리엘의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그녀도 아직 몰랐다.

* * *

케이론의 황궁은 칼 날 같은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정적 간의 깊은 골이 테세우드 공작의 죽음으로 더욱 깊어진 탓에 서로는 노골적으로 상대를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는데 아침마다 황제가 치르는 조례도 거르는 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때문에 황제의 호위병들은 내란 때나 있을 법한 수준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레이나 공주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헤론 후작이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적국과의 전쟁 때보다 더한 경호망이 펼쳐진 것이다.

헤론 후작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레이나 공주의 거처는 새벽으로 넘어가는 깊은 시각임에도 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탁!

찻잔을 내려놓는 레이나 공주의 하얀 얼굴이 제법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휴…….”

이윽고 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황권과 황실을 위협했던 테세우드 공작이 사라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 밖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구심점을 잃어버리면 흩어질 줄 알았던 정적들이 오히려 더욱 강하게 세를 집결시키고는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테세우드 공작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한 위기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도대체 뭐가 문젤까? 그가 죽어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속내는 또 무엇일까?”

그녀는 테세우드를 맹신했던 정적들을 떠올리자 가슴이 돌로 눌러놓은 듯 답답해졌다. 문득 자신은 평생을 이렇게 살 팔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루라도 근심이 없는 날이 지금껏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에 미치자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미치겠어. 정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황궁 밖으로 보이는 수도의 고요한 모습에 그녀는 잠시 모든 생각을 접고 멍하니 서 있었다.

철그럭! 철그럭!

심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로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창검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자신과 황제의 근위병들이었다. 그녀는 잠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루 삼교대로 이어지던 경계순찰은 테세우드 공작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매시간 10분 간격으로 황궁 전체를 돌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황권이 약한 탓에 기사들만 고생한다고 여겼다.

“잠 안 자고 뭐 해?”

“어멋!”

누군가가 느닷없이 허공에 둥실 뜬 채 창문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레이나 공주는 루안임을 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후! 얼굴이 엉망이군. 그 작자가 죽었으면 환하게 웃어야 정상이 아닌가?”

“언제 돌아왔어요?”

“조금 전에…….”

“들어오세요.”

루안은 창문을 통해 서슴없이 실내로 들어갔다. 레이나 공주는 밖을 살펴보고는 창문을 닫았다.

“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군.”

“한 잔 드려요?”

“아니, 그냥 술 있으면 한 잔 줘. 독하면 더 좋고.”

“잠시만 기다려요. 내려가서 가져올게요.”

“몇 병 가지고 와.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서 꽤 들어갈 것 같으니까…….”

루안을 가볍게 홀린 레이나 공주는 일층 주방으로 내려가 술과 간단한 요리를 들고 올라왔다. 그녀가 잔을 두 개를 가져온 것을 본 루안이 슬쩍 웃었다.

“요즘 자주 술을 마시는군. 그러다 술꾼 되는 것 아냐?”

“술꾼이 되면 복잡한 거 신경 안 써서 좋겠죠. 어떨 땐, 술에 취해서 정신을 놓은 사람들이 부럽기도 해요. 무척…….”

루안의 눈동자가 살짝 빛을 발했다.

“세상 다 살은 사람처럼 말하는군. 테세우드를 따르던 그 작자들 때문인가?”

“창검을 안 들었을 뿐, 반란이나 다름없어요.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서 생활하던 묘한 자들도 신경 쓰이고 말이죠. 느낌이 좋지 않은 자들이에요.”

“본 적이 있나?”

“전에 힐끗… 아무튼 뭔가 사악한 느낌을 주는 자들이었어요. 당장, 반기를 든 수많은 귀족들과 군부의 장수들보다 그들이 더 꺼림칙한 건 왜일까요?”

거푸 석 잔을 마신 루안은 레이나 공주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무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술값으로 놈들은 내가 맡지.”

“위험해요. 혼자선…….”

“후후! 나를 못 믿나?”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루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가 않았던 초인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요란의 케이시 공작이 실각하고 테세우드 공작은 목숨을 잃었어요. 더구나 범인은 그 윤곽조차 모르는 상태이니… 다만, 홀베른의 룻거 후작만이 아직 전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는 있지만, 기존의 모든 힘의 서열이 몽땅 무너졌단 느낌이에요.”

“그게 내가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으로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어디서 또 어떤 강자들이 새롭게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에요. 특히 테세우드 공작은 죽기 직전, 요란과의 전투에서 놀랄 만한 신위를 보였다고 하더군요.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말이죠. 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요. 그의 권역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 그들이 그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불안해요.”

루안이 피식 웃었다.

“말을 듣고 나니 더 가야겠는걸? 그런 위험한 놈들은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게 레이나에게 좋은 일 아닌가?”

“루안, 당신이 강하다는 거 알아요. 초인들보다 더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초인들 정도는 우습게 여기는 존재들이 출현한 세상이에요. 당장, 아르소에서 함께했던 숙부들만 해도 루안보다 약하지 않아요. 특히 그들이 주공이라 부르던 그 사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혁련천후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이 덜컥 솟아났던 까닭이다. 그 모습에 루안이 묘한 빛으로 물었다.

“어떤 놈인데 그러는 거야?”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니 못 했어요. 마치 비어버린 공간처럼…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를 이길 존재는 없다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들어요.”

레이나 공주는 술로 목을 축였다. 루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 레이나 공주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드러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심어줄 자가 있었다니, 그는 그게 의문임과 동시에 묘한 질투심마저 생겨났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루안은 요리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음에 보게 되면 내게 알려줘.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그냥 얼굴이나 보러 온 거야. 또 가봐야지.”

레이나 공주가 굳은 표정으로 루안을 응시했다. 눈빛에 담긴 뜻을 간파한 루안이 씩 웃어주며 말했다.

“위험하면 알아서 도망칠 테니 염려 놓으라고.”

레이나 공주는 그가 어디로 갈 건지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이다. 그는 항상 이랬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했지만 모든 걸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했다.

“조심해요.”

“나중에 보자고! 공주! 하하하!”

루안은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레이나 공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루안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 대한 말을 털어놓으면 그가 그곳으로 향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말하지 않았던가.

“미안해요, 루안…….”

* * *

루안은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을 이미 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좌표를 알고 있었다.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이동한 그는 어둠 속에서 커다란 산처럼 웅크린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을 바라보았다.

“흠! 뭔가 요상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죽어서까지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인간이었어.”

그는 언제나 자신이 넘쳤다. 그리고 밝았으며 때로는 거칠기도 했다.

지금도 단신으로 호랑이굴로 들어섰으면서도 조금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평원으로 떨어진 그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후후! 결계가 더 강화됐군.”

권역의 사방을 두른 결계도 그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질 않았다. 그에겐 강력한 힘만큼이나 특수한 능력이 있다.

인간이 두른 결계로는 그를 잡아내기란 모래사장에서 색이 다른 모래 한 알을 집어내는 것과 같았다. 어둠이 옅어지며 서서히 거대한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동이 틀 시각임에도 곳곳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창검을 들고 오가는 기사들의 모습이 루안의 눈에 비쳤다.

“그런다고 죽은 놈이 살아서 돌아오나? 바보들…….”

구조물이라곤 작은 수풀이 전부인 평원은 경계병들에게 그대로 노출되기 십상이건만 루안은 그저 여유롭게 걸었다.

그때, 걸어가는 루안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키도 몸집도 지금보다 훨씬 장대하게 변해갔다.

“맥마흔! 놈들은 너의 죽음을 모르겠지? 워낙 치열했던 전투였으니까. 미안해. 잠시 너로 살아볼까 한다. 네가 테세우드와는 꽤 잘 지냈으니까, 이해하라고.”

언젠가 황궁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맥마흔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루안은 일부로 경계병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멈춰라!”

경계병들이 창과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놀랍게도 뒤쪽에 마법사로 보이는 자도 있었다. 마법사처럼 귀한 존재를 경계 병력에 투입하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심 씁쓸하게 웃은 루안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제1군단 경기병대 소속의 맥마흔 자작이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러 왔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보여라!”

“이런, 이 부대마크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젠장! 세상에 널린 게 가짜 부대마크다! 당장 당신이 맥마흔 자작인지 아닌지를 증명하지 못하면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루안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매가 매섭게 돌아갔다.

“이 새끼들이 감히 기사 주제에 자작에게 이따위 말버릇을 보여? 전쟁터에서 개고생을 하고 왔더니 별 거지 같은 새끼들이 다 열 받게 하고 지랄이야! 이봐! 너희들, 부대 소속의 귀족을 모독하면 그 벌이 뭔지 모르나?”

루안은 강하게 나갔다. 그러자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다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거의 통과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각하의 예하부대에 계셨습니까?”

“이봐! 넌, 지금 경기병대를 모욕하고 있음을 알라고. 알았어?”

“아, 아닙니다! 워낙 철저한 경계를 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던 터라, 용서하십시오!”

철커덕!

강철로 만들어진 철문이 열렸다.

사나운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본 루안은 안으로 걸으려다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법사에게 말했다.

“자네가 안내 좀 해야겠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

자작이라도 마법사에게 함부로 말을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고작 경계초소에 투입된 마법사라면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루안은 거침없이 마법사를 대했다.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마법사가 느릿느릿 그에게로 다가왔다.

“동작 하고는… 어서 안내해라!”

“따라오시죠.”

“경계들 똑바로 서라.”

“예! 자작님!”

* * *

대마법사 쉐인은 자신의 거처에서 보고를 받았다.

“맥마흔 자작이라고?”

“그렇습니다. 제1군단 경기병대 소속이라고 했습니다. 책임자를 만나 뵙고 싶다고…….”

“경기병대의 기사들만 2만이 넘어간다. 신분은 확인했느냐?”

“부대마크가 새겨진 갑주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쉐인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바쁘니까 그냥 방을 하나 내어주고 기다리라고 전하여라!”

“알겠습니다!”

기사가 돌아가자 쉐인은 다시 굵고 두꺼운 책을 넘겼다.

그는 지금 테세우드 공작의 사인에 대한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죽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고서적들을 몽땅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바닥에 나뒹구는 책만도 10권은 넘어갔다.

탁!

한참을 찾았으나 비슷한 경우조차 보이지 않자 쉐인은 책을 덮고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요즘 들어 그는 꽤 수척해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그는 테세우드의 가장 오랜 측근이자 스승과도 같았던 인물이다.

당연히 황제와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는데, 정작 쉐인 자신은 그런 것이 싫었다.

자신은 초월자라 불리는 대마법사다.

결코 추악한 정치판엔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테세우드와의 개인적 인연 때문에 그와 함께했었지만 그가 죽은 지금은 그저 마법사로서 살아가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다만 그 죽음이 워낙 기묘했기에 사인만큼은 밝혀내고자 했다.

‘휴… 이렇게 갈 거면 왜 그렇게 살았는가. 부질없는 야망 때문에 죽은 이후에도 편할 날이 없지 않은가?’

문득 죽은 테세우드 공작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추모를 받으며 안락한 곳으로 가야 하건만 시신조차 묻히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시신은 권역의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되어 있다.

물론 쉐인의 명령으로 내려진 조치였고 이유는 사인을 밝혀내기 위함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쉐인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막 책장을 넘기려던 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어쩌면 그곳에 답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왜 진즉에 그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쉐인은 재빨리 웃옷을 걸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결계가 이중 삼중으로 쳐진 출입구를 열고 쉐인은 안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기묘한 물건들이 배치된 이곳은 평소 테세우드 공작이 수련을 하거나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종종 찾았던 곳이다.

이곳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와 쉐인뿐이었다. 쉐인은 망설임 없이 벽면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벽이 뒤로 밀려나며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뚜벅! 뚜벅!

밀폐된 공간이라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울렸다. 통로를 통해 깊숙이 들어간 쉐인은 다시 결계를 해제하고 한 실내로 들어섰다.

우우웅…….

그가 들어서자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쉐인은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벽면에서 막 튀어나오려던 날카로운 화살들이 벽 속으로 사라졌다.

우측 벽면에 책을 꽂아두는 곳이 있었는데, 쉐인은 모든 책을 끄집어내 책상 위에 올렸다.

“이계의 강자들…….”

책 표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쉐인은 상당한 속도로 책갈피를 넘기기 시작했다. 책은 자신도 처음 보는 것이다. 책을 넘기는 쉐인의 얼굴이 때때로 놀람과 탄성으로 물들었다.

처음 듣고 보는 기묘한 내용들이 책안엔 가득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쉐인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이건……!”

[그곳엔 강자들이 넘쳤다. 초인에 버금가는 자들이 수두룩했고 초인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두려운 자들도 열을 넘어갔다. 나는 이곳이야말로 신들의 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용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누구지? 누가 이것을 썼단 말인가?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계란 어디란 말인가?”

내용은 점점 황당하기까지 했다.

대마법사인 쉐인의 상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 전부였다. 쉐인은 자신도 모르게 책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강호라 불렀고 강호를 지배하는 그를 신처럼 받들었다. 팔왕이라 불리는 무서운 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는 섬서라는 곳에 거대한 성을 세우고 그곳에 은거했다. 강호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곳을 신전처럼 여기고 숭배했다. 어느 날, 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읽어가던 쉐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섬서? 익숙한 지명인데…….”

그랬다.

어디선가 들어본 지명이었다. 그는 재빨리 기억을 살폈다. 그러나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호흡을 고른 쉐인은 다시 책갈피를 넘기기 시작했다.

내용은 신화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몇 장을 남기지 않고 그림이 그려진 갈피가 나타났다. 모두가 사람들의 초상화였는데 누가 그렸는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새겨놓은 것 같았다.

“허억!”

쿵!

초상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쉐인이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탐스러운 수염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 이럴 수가…….”

믿을 수 없었다.

초상화의 인물들은 그도 본 적이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흑발에 흑안을 지니고 철검 한 자루로 자신을 곤경에 빠트렸던 사람들…….

쉐인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육신은 오한이 든 듯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렸고 머리는 새하얀 백지상태로 변해갔다.

“그래, 셤서! 그들이 왔다는 셤서가…….”

이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날, 테세우드 공작이 자신의 사람들로 만들겠다며 찾아 나섰던 자들, 그때 레이놀드 백작이 말했었다. 그들이 온 곳이 셤서라는 곳이라고…….

“공작도 이 책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그랬다.

그가 이 책을 봤다면 그들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케논 산맥에서 레이나 공주와 함께 있었던 그들을 보고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놀람을 이어가고 있을 때, 루안은 기사가 안내한 방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시종이 갖다놓은 간단한 요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창을 통해 권역의 곳곳을 살폈다. 해가 떠오르자 수많은 기사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이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이 입는 것과 다른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건가?”

수가 상당했다.

드넓은 평원으로 이동하는 기사들의 수는 어림잡아 3만은 넘어 보였다.

평원에 다다른 기사들이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곧장 훈련에 돌입하는 광경에 루안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꽤나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후후! 억울해서 눈도 못 감겠어. 테세우드! 살아 있었을 때 저들을 이용했더라면 원하던 것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루안은 차가운 눈으로 기사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지자 루안은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첩자는 밤에만 움직이는 건 아니지. 후후!”

스슥!

루안의 육신이 방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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