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43화 (43/55)

제4장

테세우드 권역의 비밀

홀베른이 갑자기 바빠졌다.

아르소와 다크의 영지민들이 텔레포트를 통해 이주를 해온 까닭이다. 대부분이 소중한 물건만 챙겨온 까닭에 거주할 집에서부터 생활용품까지 모든 것을 마련해야 했다.

기사들이 웃통을 드러내놓은 채 집을 짓는 광경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귀족이 대부분인 기사들이 하위층을 위해 노동을 하는 광경은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게다가 지금 홀베른의 기사들은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님을 뜻했다.

“이봐! 꼬마! 네 방은 얼마 만하게 만들어줄까?”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구경하던 다크 영지의 루크는 기사가 자신에게 묻자 엄마를 쳐다봤다. 루크의 엄마는 여전히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홀베른의 기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줄 테니 말해 보아라. 꼬마야.”

“이만하게 만들어 주세요.”

루크가 양손을 동그랗게 휘저으며 말했다. 기사가 껄껄 웃는다.

“좋았어! 이만하게 만들어주지.”

기사는 루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공사장으로 돌아갔다. 그런 광경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무척 긴장했던 사람들은 점차 기사들의 호의로 인해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 모든 기사들이 동작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대면서 고개를 숙였다. 공사장의 입구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인데, 혁련천후와 홀베른 국왕 등이 그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상왕께서 오셨습니다! 모두들 예를 갖추십시오!”

누군가가 이주민들에게 나지막이 소리쳤다.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엎드려 절했다. 루크가 엄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앗! 다크 영주님이다! 엄마! 저기 봐!”

“오! 그렇구나. 그런데 머리색이…….”

“우리 영주님이시다.”

“아니야. 머리가 다르잖아. 그런데 얼굴은 똑같네?”

다크 영지민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혁련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들이 알고 있던 다크 영주였는데 머리색이 흑발이 아닌 은발로 바뀐 탓에 확신이 들지 않은 모양이다. 혁련소가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다크, 맞습니다! 하하하!”

“오! 정말이셨구나. 영주님!”

“영주님! 다크 영주님!”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를 반겼다. 마치 타향에서 가족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모두의 얼굴에서 묻어났다. 다크 영지의 사람들이 혁련소에게로 몰려들었다.

만류하려던 기사들은 혁련천후가 눈빛으로 제지했다.

“하하! 루크! 꽤 씩씩하게 컸구나!”

“영주님!”

혁련소는 루크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올렸다. 반면 아르소의 영지민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주인 아리안을 기다렸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자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그 모습에 연소민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내가 지금 이 모습을 하고 있었네?’

그랬다.

아리안이 아닌 연소민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못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재빨리 한적한 곳으로 뛰어가 아리안의 모습으로 변신한 후, 돌아왔다. 그러자 아르소의 사람들도 얼굴에 웃음이 돌았다.

“오느라 고생들 많았어요.”

연소민이 환한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로 몰려들었다. 지금까지 아르소의 내정을 도왔던 써튼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수고 많으셨죠?”

“아닙니다! 하하!”

머리를 긁적이는 써튼에게 반가운 인물이 다가갔다. 우드였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특히 이런 광경에 익숙하지 못했던 써튼과 우드, 그리고 마법사 요란은 저절로 마음이 따스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보기 좋군요.”

“케이론에선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지. 이런 걸 보면 홀베른이 왜 제국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강국인지 알겠군.”

요란과 우드는 말을 나누다말고 서로를 돌아봤다.

“아예, 우리도 이곳에서 정착을 해버릴까?”

“그럴까요?”

“좋아! 그러자고.”

둘의 사이로 써튼이 얼굴을 쓱 내밀었다.

“저도 끼워주셔야죠.”

* * *

[카루가!]

잠결에 들려온 목소리에 카루가는 몸을 뒤척였다.

[카루가!]

다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카루가는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꿈을 꾼 것이라 여긴 카루가는 다시 천을 머리까지 덮어쓰고는 침상에 누웠다. 그때 주변이 울렁거리며 검정색 연기가 뭉글거리며 생겨났다.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가던 연기는 이내 붉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변했다.

[일어나라! 카루가!]

“아씨! 누구야?”

카루가가 짜증을 내며 벌떡 일어났다.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크게 놀랐다.

“아버지?”

[그래. 나다. 카루가.]

카루가가 폴짝 뛰어올라 시커먼 연기를 안으려고 했으나 손에 잡히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영혼소환을 했구나… 쳇! 괜히 좋아했네.”

[카루가,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나자 카루가의 얼굴은 이내 걱정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카루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애틋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켈베로스가 어둠의 힘을 깨우려 하고 있다. 엘프의 돌과 아이아스의 심장을 가져가기 위해 놈은 곧, 자신의 수족들을 모조리 이끌고 이곳, 홀베른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너와 함께하는 인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지켜야 한다. 놈이 어둠의 힘을 얻으면 모든 차원은 멸망하고 말 것이란 것도 알려야 한다.]

카루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게 정말이야? 난, 칸빌만 걱정하고 있었는데…….”

[팔을 잃어버린 칸빌은 대신할 육신을 찾느라 당분간 인간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당장은 켈베로스, 놈을 막아야 한다. 소환력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잘 들어라, 카루가! 너만이 켈베로스를 막아낼 수 있다. 그것 때문에 너를 일부러 마계에서 추방시킨 것이다. 너는 너도 모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켈베로스는 궁극의 힘으로 들어서기 이전에 자신의 본모습으로 변신할 것이다. 그때, 그 힘으로 켈베로스를 소멸시켜야 한다.]

“나도 모르는 힘이 내게 있다고? 그게 뭐야?”

[그건 때가 되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카루가! 두려워하면 절대 안 된다. 놈을 소멸시켜야만 마계도 옛날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모든 건, 오직 네게 달려 있다. 카루가…….]

목소리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뜻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무서워. 하지만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정말 강한 사람들이야. 그들이 켈베로스를 처치할 거야. 그리고 여차하면 아버지를 부를게.”

[난, 인간세상으로 강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그리고 인간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켈베로스에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만 믿어라. 오직 너만이 켈베로스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카루가.]

스스스…….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루가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버지…….”

[사랑한다, 나의 아들아…….]

붉은 눈동자가 사라졌다. 연기도 목소리도 사라졌다.

털썩!

카루가는 힘없이 침상에 앉았다. 창을 보니 희미하게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카루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쳇! 난, 한 번 소멸되면 더 이상 환생이 불가능해. 내가 놈에게 당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걸 알면서 왜 내게 그걸 시키는 거야.”

해가 뜨고 아침이 시작될 때까지 카루가는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연무장은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이 내지르는 기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데얀은 홀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특별수련 중이었는데 갑주를 벗은 상태로 담대소천과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도무지 상대가 되질 않았지만 데얀은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이미 상체 곳곳에 시퍼런 멍이 수도 없이 생겨나 있었지만 데얀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수련을 하고 있는 연무장의 우측 강변엔 새로운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선 울창한 숲에 상당수 사람들이 뭔가를 만들며 부지런을 떨고 있었는데 아리엘과 함께 홀베른으로 들어선 엘프의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거목 위에다 집을 짓기 바빴다.

엘프들만의 기술로 전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공간에 예쁘장한 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때론 나무와 나무 사이에도 조그마한 주거공간을 연결했고 모든 집은 풀을 엮어 만든 다리와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로 왕래할 수 있었다.

아리엘이 모든 것을 지시했다.

슬픔을 이겨낸 그녀는 예전의 활력엔 못 미치지만 그래도 꽤 밝아져 있었다.

카츄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가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뭔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흐르는 강물에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기다란 의자가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간혹 아리엘을 쳐다보며 씩 웃음을 던지는 그에게서 슬픔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대부분이 아이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엘도 그런 이유로 빨리 슬픔을 털어내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비켜!”

허공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첨벙!

“으앗!”

강물이 폭포수처럼 솟아오르며 가인을 덮쳤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가인의 전신은 흠뻑 젖어버렸다.

“흐흐! 동작하고는…….”

북궁천소였다.

가인은 놀란 눈으로 강을 쳐다봤다.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게 강물에 우뚝 박혀 있었다. 낚시를 할 장소로 이용될 그것을 북궁천소가 그냥 힘으로 우겨 박은 것이다.

“홍수가 나도 끄떡없을 거다.”

북궁천소는 자신이 박아놓은 걸 발로 툭툭 건들며 히죽 웃었다. 가인은 한숨을 쉬며 그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너무 높잖아요.”

“높아? 알았다.”

북궁천소의 육신이 그대로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곧장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인이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콱!

제법 기다란 구조물이 그냥 쑥 내려갔다.

“이제 됐냐?”

가장 무식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으로 너무나도 간단히 해결되자 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리엘이 다가왔다.

“역시 최고예요!”

“흐흐!”

그녀가 엄지를 치켜세우자 북궁천소는 겸연쩍게 웃었다. 아리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북궁천소를 아주 가까이서 쳐다봤다.

“기왕이면 저것도 좀 옮겨주세요.”

그녀는 산더미처럼 쌓인 돌들을 가리켰다.

강변에 널려 있던 돌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엘프들이 산책할 길에다 놓을 용도로 쓰일 돌들이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는데 북궁천소는 주저 없이 씩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대신 엘프들만이 마시는 명주로 하죠. 됐죠?”

“흐흐흐…….”

술이라면 껌뻑하는 북궁천소다.

아마 산 전체를 옮기라고 해도 그럴 위인이다. 술이라면 왕전도 결코 못지않았다. 유령처럼 그들의 옆에 왕전이 나타났다.

“술을 준다고? 엘프들이 마시는 명주를 말이지?”

그 많던 돌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깨끗하게 옮겨졌다.

* * *

거대한 독수리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홀베른 왕궁의 상공을 수시로 날아다녔다.

첨탑에서 홀베른 국왕이 독수리들을 일일이 살피고 날려 보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법 굳은 얼굴을 한 그는 마지막 독수리를 날려 보내고는 첨탑을 내려갔다.

그는 곧장 혁련천후가 머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놈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홀베른 국왕의 말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병력은?”

“선발이 20만이고 뒤이어 15만 정도가 따라붙을 것이라 알려왔습니다. 역시 막스, 놈이 직접 이끈다고 합니다.”

“켈베로스, 놈은 고룡의 심장을 지키고 있겠군?”

홀베른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서 활동하는 아이들의 보고에 의하면 고룡의 심장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켈베로스, 놈이 심장을 지닌 채, 이곳으로 오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주력부대와 함께 이동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요란으로의 난입은 불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모든 것이 가려지게 되었으니 선전포고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선전포고를 할 놈들이 아니다. 우리 역시 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선공으로 기를 죽여 놓는 것이 유리하다.”

“선공이라시면…….”

“놈들의 이동 동선에 놓인 평원지역을 미리 살펴놓도록.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밀고 들어오는 놈들은 똑같이 수로 쓸어버리는 것이 좋다!”

홀베른 국왕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요란은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여전히 50만에 이른다고 들었습니다. 저흰 15만의 정규군이 전붑니다. 수로 상대하시겠다는 건 좀…….”

“50만이든 100만이든 한꺼번에 전장에 투입하지는 못한다. 단, 전쟁이 길어지면 수적인 우세를 보이는 쪽이 유리한 건 맞지만 단기전, 특히 기습전에서는 기동력이 우선이다. 우린 최소한의 병력으로 놈들의 선봉부대를 최단시간에 괴멸시킬 것이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기라도 하듯, 혁련천후에게선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저들이 없는 확실한 장점이 있다.”

홀베른 국왕은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혁련천후가 창 쪽으로 걸어가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소천은 중원에선 역사에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오만으로 북원의 기병 15만을 괴멸시킨 적도 있었지. 난, 요란의 선봉이라는 기마병단이 북원의 기병보다 강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병만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던 자들이었으니까…….”

홀베른 국왕은 북원을 모른다. 다만 혁련천후의 말을 들어보니 엄청난 강병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담대소천에 대한 그의 신뢰가 무한함 역시 느꼈다.

“이번 전쟁의 시작은 소천이 한다. 적의 선봉을 무너뜨리면 그다음에 내가 나서겠다. 물론 그대와 룻거의 능력도 기대하겠다.”

홀베른 국왕을 바라보는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신뢰라는 빛이 담겼다. 아직 세상에 진면목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은 이 세상에서 초인이라 부르는 자들보다 월등하게 강하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저도 제 이름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관옥명, 그게 그의 이름이다. 언제고 하고 싶었던 말이다. 홀베른 국왕은 열망이 어린 시선으로 혁련천후를 올려다보았다.

혁련천후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산악은 우리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저희들도 함께 가겠습니다.”

“홀베른은 어찌할 테냐? 이곳의 백성들은? 그들은 왕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지 않느냐?”

“……!”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홀베른 국왕은 어깨에 따뜻한 감촉을 느꼈다.

“그 문제는 차후 다시 논의토록 하지. 우선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너와 나의 지상과제다.”

“반드시 적을 몰아내고 트로이안의 심장을 바치겠습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뜨거운 기운이 주변을 몰아쳤다. 모든 것이 걸린 전쟁이 곧 시작된다. 반드시 이겨야만 아내들을 살려내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두 눈이 섬광을 발했다.

“아내들을 살리고 중원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악마가 될 것이다. 막아서는 놈들이 50만이 아니라 100만이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모두 베어버릴 것이다.”

* * *

케이론 제국의 황궁이 심야에도 불구하고 드나드는 사람들로 무척 소란스러웠다.

거의 대부분의 행정을 주관했던 테세우드 공작파의 인물들이 태업에 들어간 지금, 레이나 공주가 거의 모든 황실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녀의 거처에는 상당수의 인물들이 뭔가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다소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 무거운 어조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이 홀베른으로 가려면 본 제국의 북부지역을 관통해야만 가능합니다. 그 시간이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서둘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늦으면 그들을 막아낼 시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들과 맞선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오. 지금도 테세우드를 따르던 지휘관들은 여전히 황실에 고개를 꼿꼿이 쳐든 상태가 아닙니까? 그 전력이 무려 제국의 60%에 해당합니다. 그들이 명령에 불응한다는 건 불을 보듯 훤한 것, 고작 40%의 전력으로 요란과 맞설 수는 없습니다!”

장대한 체구를 지닌 인물이 분명하게 반대를 표하고 나서자 헤론 후작이 끼어들었다.

“홀베른이 비록 독립된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본, 제국의 위성국가가 아닙니까? 그들이 요란의 말발굽에 무참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니요. 그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어차피 요란은 홀베른을 무너뜨리면 다음은 반드시 우리를 노리고 들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도 지원 병력을 홀베른과의 접점지역으로 급파해야 합니다!”

“헤론! 그럼 수도의 방위는 어떡할 셈인가? 우리가 주력군을 내보낸 사이, 테세우드를 따르던 자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그건 어떻게 막아낼 셈인가?”

“맞소! 그자들이 그런 호기를 놓칠 리 없소! 지원 병력의 급파는 불가하오!”

헤론의 의견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헤론 후작도 레이나 공주도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당장은 요란보다 테세우드를 따랐던 자들이 더 위험한 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지금도 공공연히 반란에 대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마마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누군가가 레이나 공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나 공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며 소란을 가라앉혔다. 실내는 이내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잠시, 모든 이들을 둘러본 레이나 공주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케이론의 소중한 분들이기 이전에 제국을 지켜야 할 귀족이자 국민입니다. 케이론의 모든 국민들은 명예서약이란 것을 합니다. 신께 맹세하고 스스로에 각인을 찍는 서약식에서 우리는 말합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그녀는 말끝을 흐리고는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 그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홀베른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케이론의 위성국가이기 이전에 우방국입니다. 친구의 위기를 외면하고서 어떻게 명예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들은 전쟁의 참화에 짓밟힐 위기에 처했던 아르소와 다크의 영지민들의 이주를 받아들여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대국으로서의 그 명예가 홀베른보다 못 하다면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고 손가락질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녀는 황제와도 같은 위엄을 떨쳐내고 있었다.

단호한 의지가 담긴 눈동자와 지그시 깨문 입술은 그녀의 의지를 대변했고 좁고 가녀리지만 결코 굽혀지지 않은 어깨는 그녀가 거론한 명예의 무게가 산처럼 크고 중한 것임을 모두에게 알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준동을 대비할 방법은 세워놓아야지 않겠습니까?”

가장 강력하게 출전을 반대했던 인물이 다소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호흡을 고른 레이나 공주가 본연의 말투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책임지고 해보겠어요. 그동안 여기 계신 분들께는 요란의 이동 동선과 전반적인 전력에 대한 분석을 부탁드리겠어요. 내일 아침, 제국에 공식적으로 홀베른을 돕겠다고 공표하겠어요. 그래야 요란도 섣불리 전 병력을 투입하지는 못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까짓것 언젠가 붙어야 할 놈들이라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붙는 것도 좋겠지요. 크흠!”

“옳거니! 그래야 한 놈이라도 더 벨 수 있지 않겠나? 하하하!”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황실의 충신들, 그들이 자신의 말에 따라 승산 없는 전쟁에 기꺼이 목숨을 걸겠다고 나선다. 헤론 후작이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위로했다.

“마마! 저는 홀베른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탁드려요. 후작님!”

“통신석을 가지고 가니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헤론 후작은 곧장 포탈로 이동했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이나 공주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또 보길 기대할게요. 숙부들…….”

* * *

수천에 이르던 아르소와 다크의 영지민들은 완공된 집으로 모두 이주를 마쳤다.

모두는 훨씬 넓고 깨끗한 집을 얻은 것에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대부분이 간단한 귀중품과 옷가지만을 챙겼던 탓에 거의 모든 생활도구는 나라에서 무상으로 지원했다. 여인들은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생활자재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사내들은 아내들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만으로도 미소 지었다.

또한 그들이 거주하는 강 건너편엔 전설의 종족, 엘프들의 부락이 이미 완성되어 입주를 마친 상태였는데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주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곳곳에 구수한 냄새가 퍼졌다.

이주 이후에 첫 식사를 짓는 여인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이봐요! 여기 이것 좀 가져가서 드세요!”

여인들이 강 건너편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들의 손에는 갓 구운 빵과 과일즙을 짜서 만든 음료가 들려 있었다. 건너편에서 뛰어놀던 엘프족의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카츄! 우리 보고 저거 먹으라는데?”

아이들은 카츄를 보며 침을 삼켰다. 카츄는 가인을 돌아봤으나 가인은 아리엘을 쳐다봤다.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츄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스슥!

“어머나!”

카츄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자 여인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죄송해요. 아직 다리나 배가 없어서…….”

“아하! 괜찮아. 방금 구운 거니까 식기 전에 나눠먹어. 모자라면 말하고.”

빵과 음료를 잔뜩 받은 카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다시 강 건너편으로 돌아갔다. 빵을 본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자 여인들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리엘은 빵을 하나씩 쥔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누난 안 먹어?”

“누난 나중에 궁으로 들어가면 술 마셔야 해.”

가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술도 마셔?”

“배웠어. 괜찮던데?”

“쯧쯧! 세상 구경하고 오겠다더니 안 좋은 건 다 배웠군.”

“너도 배워봐. 기분이 꽤 좋아지는 게 마실 만해.”

“됐거든!”

가인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맛있게 빵을 먹던 카츄가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청난 마나가 움직여.”

아리엘과 가인이 정색을 하고서 기운을 집중했다. 과연 상당한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새삼 카츄의 능력에 놀란 아리엘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안정된 움직임이라면 포털을 통해 누군가가 왔다는 것이야. 난, 궁전으로 가볼게. 나중에 봐!”

스슥!

아리엘이 사라지자 가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로 벌렁 누웠다.

“난 잘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깨워.”

* * *

모처럼 궁전으로 들어가는 아리엘은 주변을 흘긋거리며 표정을 밝게 했다. 슬픔은 이미 가슴에 새겨 놓은 지 오래다. 살아남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강인해져야겠다는 결심을 매일 밤 해오고 있었다.

그녀는 궁전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떠오르는 얼굴 때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차갑게 굳은 얼굴이 한번쯤은 자신을 위해 웃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가볍게 했다.

“흠… 전쟁 때문에 정신들이 없네.”

곳곳이 분주했다.

상당수의 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전차를 옮기기에 여념이 없었고 전령으로 오가는 독수리들이 분주하게 첨탑으로 날아들었다.

“연무장에 있나 보네.”

눈에 익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연무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무장이 가까워지자 조금씩 기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마법으로 이동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홀베른 왕궁은 마나를 통제하는 곳이다.

자칫 마나의 배열이 뒤틀어지기라도 한다면 꽤나 고생을 해야만 한다. 모두가 강력한 마나통제용 결계가 쳐진 까닭인데 그만큼 홀베른은 강력한 마법사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다만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연무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담대소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북궁천소와 왕전 등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가 웃통을 벗은 채,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그곳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생겨나자 스스로 머쓱한 표정을 지은 아리엘은 연무장의 중앙에 자리한 연단으로 올라가 그 위에 앉았다. 그녀를 발견한 데얀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하다가 왕전의 주먹에 저만치로 날아갔다.

“자식이 대련 중에 한눈을 팔다니… 죽고 싶냐?”

“으… 그게, 저기 아리엘이…….”

“아리엘? 어디? 오호! 정말이네?”

왕전이 아리엘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왔냐?”

퍽!

왕전의 복부에 데얀의 주먹이 작렬했다.

“한눈을 파시다니요? 흐흐!”

“이런, 개… 오냐! 오늘 넌 뒈졌어!”

둘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아리엘의 입가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들의 옆에는 역시 웃통을 벗은 담대소천이 10명에 달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울퉁불퉁한 근육을 뽐내며 맨손으로 검을 든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섬뜩한 날카로움이 주변을 난무했지만 담대소천의 육신은 이곳저곳에 번뜩이며 한 방에 한 명씩을 날려 보냈다.

“놀라워. 순수한 체력만으로 저토록 강력함을 발휘하다니…….”

그랬다.

지금 담대소천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 반해 기사들에게선 일정량의 마나가 느껴졌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유한 케니언 크로우기사들을 주먹으로, 그것도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서 밀어붙인다는 것은 체술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강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저들이 숭배하는 그는 어떨까?”

문득 혁련천후는 얼마나 강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정한 위력은 아직까지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함께 넘어온 존재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진정한 위력을 모르는 상태다.

데얀을 주먹으로 제압할 때도 모든 힘을 다하지 않은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리엘은 무심결에 주변을 살폈다. 혁련천후를 찾기 위함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생각만 해도 보고 싶어지고 가슴이 떨렸다.

심호흡을 한 그녀는 살짝 붉어진 뺨을 손으로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뒤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진 모양이군.”

아리엘의 몸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놀란 얼굴은 돌아가는 순간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셨어요?”

혁련천후였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좋아해요. 무척… 모두가 감사히 여기고 있어요.”

“그래… 들어가지.”

“술 마시나요?”

아리엘은 혁련천후의 곁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가슴이 닿은 팔에서 물렁대는 느낌이 느껴지자 혁련천후는 슬쩍 몸을 뺐다. 그때, 뒤쪽에서 말이 들려왔다.

“어! 너무 가까운데…….”

아리엘은 그제야 뒤를 따라오는 혁련소의 존재를 눈치 챘다. 깜짝 놀라서 돌아본 그녀가 다시 놀랐다. 그와 혁련천후가 판에 박은 듯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애인 생기셨습니까? 하하!”

“쓸데없는 소리!”

‘아! 저 사람이 잃어버렸다는 그 아들이었구나.’

그제야 아리엘은 혁련소가 누군지 알았다. 혁련소와 아리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혁련소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들이 깨어나시면 조심하세요. 엄청 무서운 분이 계시거든요. 하하! 저 먼저 가겠습니다!”

손까지 흔들며 사라지는 혁련소를 혁련천후는 슬쩍 인상을 찌푸린 채 바라보았다. 여전히 팔을 통해 뭉클한 느낌이 전해져오자 다시 몸을 뺐지만 아리엘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입을 놀렸다.

“흠! 아들까지 있는 유부남한테 저처럼 예쁜 여잔 너무 과한 상대가 아닌가요?”

“과하니까 좀 떨어지시지.”

“훗! 요즘 제가 슬프잖아요. 그러니 좀 참으세요.”

“전혀……!”

그러는 와중에 둘은 정문을 넘어서 혁련천후가 머무는 중앙 건물로 들어섰다. 그때 건물 위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휘이익!

“그림 좋습니다!”

혁련소였다. 옆엔 우드와 요란, 그리고 써튼 등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가 크게 놀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혁련천후와 여자라는 그림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림 좋다는데요?”

“강제로 떨어뜨릴까?”

“흠! 알았어요.”

아리엘이 그제야 살짝 떨어졌다. 휘파람을 불어대던 혁련소는 혁련천후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고서야 멈추었다. 에이미 공주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나왔다.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전신에서 구수한 요리냄새가 진동했다.

아리엘이 반색을 하며 입술을 놀린다.

“어머! 맛있는 거 하나 봐요?”

“어서 오세요. 아리엘. 전하! 식사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에이미 공주의 안내를 받으며 걷던 혁련천후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내려다보자 아리엘은 피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마주 보았다. 그녀의 도발적인 반응에 에이미 공주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했다.

아리엘의 도발적인 모습에 실소를 흘린 혁련천후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을 불러오지. 가인과 카츄라고 했던가?”

“그들은 왜요?”

“둘의 능력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죠.”

아리엘은 대답을 해놓고도 그냥 에이미 공주가 가리킨 식당 쪽으로 걸음을 놓았다. 혁련천후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슬쩍 깊어졌다. 에이미 공주가 아리엘의 팔을 잡으며 눈빛으로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어딜 가냐고 물었다.

아리엘이 양손을 으쓱해 보이며 에이미 공주를 마주 보았다. 혁련천후의 눈치를 슬쩍 살핀 에이미 공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을 불러오라고 하셨잖아요.”

“불렀어요.”

“예?”

무슨 소리냐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는 에이미 공주, 그녀에게 눈웃음을 지어준 아리엘이 혁련천후를 돌아보며 꽤나 요염하게 웃었다.

“우리만의 통신수단이 있거든요. 불렀으니까 그만 인상 펴시고 들어가시죠.”

* * *

식당으로 들어서던 혁련천후는 우측 담장 너머에서 요란한 기합소리가 들려오자 방향을 바꾸어 그곳으로 걸었다.

쿵! 쿵!

담장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연이어 전해졌다. 뒤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합!”

“캐스팅이 너무 늦어!”

혁련천후는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담장 앞에 이른 그의 육신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담장을 넘어선 혁련천후의 눈에 요란과 우드가 비쳤다. 그리고 그들의 한참 뒤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 중인 써튼도 보였다.

“헉! 헉! 죽겠습니다. 쉬었다 하죠.”

우드는 이미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는데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서 연방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앞에선 요란은 허리에 손을 얹고는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의지로 어떻게 강해질 거야. 마법사는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노력과 의지가 더 중요한 법인데…….”

“헉! 헉! 먹은 게 모조리 올라올 것만 같습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쉬었다가 하시죠.”

우드는 결국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란이 어이없다는 투로 그를 다그쳤다.

“쯧쯧! 그래가지고 원수는 고사하고 너도 죽을 거다. 완전 저질 체력을 지녔잖아. 이거!”

“헉! 헉! 헉!”

우드는 아예 뒤로 벌렁 누우며 요란의 도발을 무시했다.

“아예 눈을 감고 자라, 자! 이런…….”

“고맙습니다. 좀 자고 일어나겠습니다!”

“뭐라고?”

요란은 어이가 없다는 빛으로 우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품속에서 물병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물을 마시던 요란이 물병을 입에 문 채로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혁련천후가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튕기듯 일어난 그는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그러면서 발로 우드의 옆구리를 툭툭 걷어찼다. 그러나 우드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것으로 알고는 눈조차 뜨지 않았다.

“수련 중인가?”

“그렇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요란은 뻗어버린 우드를 가리키며 헛웃음을 지었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늘어졌던 우드가 빛의 속도로 일어섰다.

“오, 오셨습니까?”

“힘든 모양이군.”

“아닙니다! 견딜 만합니다!”

언제 지쳤냐는 듯, 씩씩하게 대답하는 우드의 어깨를 툭 두드려준 혁련천후는 요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란도 수련을 받아야 하지 않나?”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6서클에 근접하는 자신을 지도해 줄 사람이 어디 흔한가. 대마법사 정도라면 모를까. 요란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함을 놓치지 않은 혁련천후는 가볍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들이 있다. 너희들이 구분 짓는 서클이라는 것에서 어느 정돈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대마법사에 준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건 확실하지.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아봐.”

요란의 안색이 급변했다. 두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부릅떠졌다.

“꽤 어린 친구들을 스승으로 모시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그,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드도 덩달아 좋아한다. 그때 써튼이 뛰어와 넙죽 허리를 숙였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전신을 땀으로 목욕을 한 그는 표정만큼은 무척 밝았다.

“실력이 제법 늘었다고 들리더군.”

“아직 멀었습니다!”

부동자세로 대답하는 써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 혁련천후는 셋을 느릿하게 쓸어보며 말했다.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너희들이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다. 의지만 있다면 길은 열려 있으니 모든 건 너희들에게 달렸음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셋의 대답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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