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45화 (45/55)

제6장

감도는 전쟁의 기운

모두가 술을 마시며 밤을 보낼 즈음 혁련천후는 홀로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었다. 아내들이 잠을 자고 있는 곳은 사공진무가 펼쳐놓은 죽음의 절진이 철통처럼 두르고 있었지만 그는 익숙하게 진 안으로 들어갔다.

이중 삼중으로 펼쳐진 죽음의 방어막을 지나 수정관이 있는 마지막 방에 이르러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벽면의 수정관 속에는 700년 동안을 잠을 자며 자신을 기다려온 관산악이 있었다.

누구보다 전투적인 성향을 보였던 그와의 추억이 떠오르자 혁련천후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관산악을 바라보았다.

“성질이 급한 네가 너무 오랫동안 참았구나. 산악…….”

관산악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어서 꺼내주시기나 하시죠.” 라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오른손에 굳게 쥐어진 대도의 끝부분에 선연한 핏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700년을 지나면서도 선혈은 방금 막 흘러내린 것처럼 생생한 색깔 그대로를 지니고 있었다.

“훗날, 주인께서 이곳을 찾으신다면 이 산악의 피로 예를 대신하겠노라고 전하라.”

관산악은 기나긴 잠 속으로 빠지기 직전에 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대도의 끝부분을 적신 선혈은 바로 그가 흘린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애틋한 눈으로 관산악의 곳곳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감과 거의 동시에 혁련소와 연소민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산악 숙부! 언제 봐도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후후!”

“조금만 참으시면 저희들이 깨워드리겠어요. 제가 신교의 딸이라고 혼내시면 안 된답니다.”

“산악 숙부는 나를 무척 좋아하셨으니 대번에 용서하실걸?”

“훗!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혁련소는 혁련천후가 들어간 문을 돌아보며 가볍게 한숨지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저곳에서 보냈다. 물론 자신도 수시로 드나들며 잠자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곤 했다. 부모들의 사랑이야기는 전 중원의 모든 선남선녀들이 꿈꾸는 그런 사랑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성년이 될 때까지도 그 사랑은 오히려 깊어지기만 했다는 것을 혁련소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소민이 혁련소의 어깨에 기대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도 저분들처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겠죠?”

“그건, 글쎄…….”

혁련소의 아리송한 대답에 연소민이 고개를 들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혁련소가 묘하게 웃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최소 둘은 되어야… 윽!”

옆구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피어나자 혁련소는 더 이상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짐짓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엄살을 부리던 혁련소가 정색을 하고서 연소민의 팔을 끌었다.

“그냥 나가지. 여긴 아버지만의 공간이니까, 우린 방해만 될 뿐이야.”

여전히 삐친 듯 보이는 연소민의 입술에 기습 입맞춤을 한 혁련소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 * *

두두두두두…….

20만에 이르는 대병력의 이동으로 하늘은 온통 먼지로 덮어졌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출진행렬의 선두에는 거대한 마차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마법사들의 철통같은 근접호위와 아군조차도 접근을 불허하는 크로우기사 단원들로 인해 마차 주변은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다.

케논 산맥에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크로우기사 단장 레인의 모습도 보였고, 제7강습여단장인 루턴 후작도 전방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뽐내고 있었다.

레인의 안광이 전에 비해 한층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간혹 마차 쪽을 흘긋거렸다. 아군조차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엄청난 존재가 그 안에 타고 있다. 마차를 경호하는 음침한 기운의 마법사들은 레인의 시선이 마차를 향할 때마다 섬뜩한 기운을 뿌려댔다.

“시선을 거두어라!”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일 듯 그들은 잔혹한 살기마저 드러냈다. 시선을 돌리는 레인의 눈동자가 일순 섬광으로 빛났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전이 벌어지면 네놈들 먼저 죽여주마. 재수 없는 유령새끼들…….’

아군이되 적보다 못한 사이가 그들이었다.

마법사들은 오직 켈베로스만을 추종한다.

하지만 레인은 막스 황제와 꽤나 친밀한 관계다. 그것에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진 상태였다.

전날, 케논 산맥의 평원에서 벌어졌던 케이론과의 전투에서 마법사들은 켈베로스가 내린 명령만을 수행했다. 레인과 막스 황제가 혁련천후의 추격을 피하며 도주할 때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그들은 아군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힘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게 켈베로스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전투의 결과는 요란 제국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마법사들은 켈베로스에게 크나큰 포상을 받았다. 이유는 테세우드 공작의 힘을 끌어내고 그것을 켈베로스에게 전송했기 때문이다. 전송을 받은 켈베로스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을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으로 보내어 그를 암살하고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얻어진 힘을 믿고서 궁극의 적, 홀베른으로 출전하는 것이다.

레인은 마법사들을 쓸어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죽어버린 껍데기 주제에 인간을 무시하다니…….’

그랬다.

마법사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강력한 힘이 봉인된 어둠의 로브를 걸친 그들은 켈베로스와 소멸을 같이한다. 그가 죽으면 비로소 마법사들도 죽는 것이다. 그전엔 세상의 그 어떤 물질이나 기운으로도 그들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뿌우우우…….

나팔소리가 울렸다.

선두에서 척후를 겸해 이동하던 기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돌아오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잡혔다. 레인이 손을 들자 마차가 이동을 멈추었다. 동시에 크로우기사 단원 하나가 달려오는 척후병들에게로 마주 달려갔다.

곧 기사가 돌아와 레인에게 알렸다.

“10만 정도로 보이는 케이론의 기마병들이 국경지대 근처를 타고 동북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케이론의 기병이 나타났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레인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테세우드 공작의 죽음으로 내란 직전까지 몰린 그들이 설마 군사를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는 말 머리를 돌려 마차로 다가갔다.

막스 황제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케이론이 군사를 움직였다는 척후병들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기병 10만이 동북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놈들이 기병을 움직였단 말이냐? 케이론이?”

“그렇습니다. 폐하!”

“미친놈들이 아니냐?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면 테세우드파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거늘…….”

막스 황제는 뜻밖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홀베른을 치는 과정에서 케이론은 완벽하게 배제하고 있었던 터라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기병뿐이라고 하더냐?”

“아직은 기병의 움직임만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일단 진군하시면서 차후 상황에 따라 작전을 변경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레인! 마법사 몇을 척후로 보내어 자세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레인이 돌아가자 마법병단 쪽에서 둘이 바람처럼 전방으로 사라졌다.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린 막스 황제의 귓속으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케이론이 군사를 움직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스승님!]

[그곳에도 인물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저 반란이 두려워 웅크리고 있을 것으로 여겼거늘… 홀베른의 움직임에 관한 새로운 보고는 없었느냐?]

[여전히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심어놓은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제법 강해 보이는 자들이 자주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수가 열을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니 심려 놓으셔도 될 듯합니다.]

[제법 강해 보이는 자들이… 특별한 징후 같은 것을 보이지는 않았다더냐?]

[그냥 마스터보다 조금 강해 보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걱정할 건 없겠군. 이번 전쟁으로 너를 시험할 것이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막스!]

[믿어 주십시오. 스승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켈베로스는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막스 황제는 시녀가 건넨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껄껄 웃었다.

“모든 세상이 곧 우리의 것이 되겠군. 기쁘지 않느냐? 엘리샤!”

그는 시녀의 풍만한 가슴에 손을 집어넣으며 연방 흡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케이론 제국과의 전투에서 10만이 넘어가는 병사들을 잃어버린 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현명하고 바르기만 했던 요란의 백성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극도의 이질감마저 느끼게 하는 태도였다.

* * *

레이나 공주는 다시 케이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홀베른의 강성함에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소문 이상으로 그들은 강력했다. 게다가 혁련천후 등이 합세한 탓에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요란이 패할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 모든 것을 잊고 잠을 청했다. 연이은 술자리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금방 잠이 들었다.

탁!

누군가 창을 두들기는 소리에 그녀는 막 끊기던 의식이 돌아왔다.

“어머!”

창을 쳐다본 그녀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창 밖에 루안이 있었는데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그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자 잠옷 바람 그대로 창문을 열었다.

“루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크크! 제대로 한 방 먹었어. 늙은 마법사놈한테 말이야.”

“어서, 어서 치료부터 해야 해요!”

그녀는 루안을 잡아끌어 자신의 침상에 눕혔다. 웃음기 머금은 표정과는 달리 그는 꽤 중상을 입고 있었다.

호흡이 상당히 거칠었는데 입가엔 선혈이 끊이지 않고 흘렀다.

“도대체! 도대체 왜 루안이…….”

“호들갑 떨지 말라고. 누가 보면 죽는 줄 알겠네. 으윽!”

“움직이지 말고 그냥 누워 있어요. 마법사를 불러 올게요.”

“마법사는 무슨… 그냥 잠 한잠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쿨럭!”

시커멓게 죽은피가 쏟아지자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포션으로 일단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마법사들이 머무는 건물로 몸을 날렸다.

“크크! 정말 골로 갈 뻔했어. 으윽! 전신의 뼈마디가 다 부러진 것 같군. 젠장!”

어지간한 강자라도 몇 번은 죽었을 중상임에도 루안은 여유로웠다.

“크크! 그래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어. 테세우드, 놈은 죽은 게 아니었어. 빌어먹을 놈! 나만큼이나 목숨이 질긴 놈이야. 쿨럭!”

테세우드 공작이 죽지 않았다니?

루안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흉갑 안으로 손을 밀어 넣더니 작은 알약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을 먹기 위함인 듯 루안은 입을 벌렸다. 벌려진 입안은 선혈이 엉켜 붙어 엉망이었다.

“이건 레이나를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살아야 그녀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우드득!

루안은 그대로 알약을 씹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지금 루안이 하는 것은 분명 중원의 고수들이 하는 운기조식이었다. 그가 어떻게 운기조식을 안단 말인가?

이 세상의 강자라는 자들은 운기조식이 뭔지도 모른다.

“후우욱!”

거친 숨결이 입을 통해 들락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루안의 상세가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흐르던 피가 멈추고 창백했던 안색은 대번에 핏기가 돌았다.

그러기를 얼마가 지났을까, 마법사를 데려오겠다며 나선 레이나 공주가 돌아오기도 전에 루안은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휴우! 이제야 좀 살맛이 나는군.”

으드득!

팔을 돌리자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때, 레이나 공주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뒤에는 황실기사단에 소속된 마법사 둘이 보였다.

“후후! 필요 없다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놀라긴, 나 루안은 원래 이런 사람이잖아. 멀쩡하니까 그냥 돌아들 가셔.”

마법사들은 두 눈을 멀뚱거리며 레이나 공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마법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루안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요? 당신은 분명 죽기 직전의 상태였어요.”

“별다른 건 없어. 그냥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을 사용했을 뿐이야.”

“말해 줘요! 당신의 가문이 어떤 곳인지를, 지금까지는 묻지 않았지만 이젠 정말 알고 싶어요.”

루안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은 아니야. 옷이나 한 벌 갖다 줘. 이런 꼴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레이나 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안은 한번 안 된다고 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안 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루안은 새로운 갑주를 걸치고 시녀들이 가져온 술과 음식을 들었다.

“쉐인이 그렇게 강했던가요? 당신이 그 지경을 당할 만큼…….”

대화 도중 레이나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늙은이가 강한 것이 아니고 그 건물이 지랄 같았지. 긴박한 순간에 마나가 제대로 운용되지 않더군. 덕분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지.”

“뭔가 다른 것을 알아낸 건 없나요?”

“별로… 다만 그곳에 상당한 놈들이 몰려 있더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 이상이었어.”

루안은 음식은 조금만 먹고 술을 많이 마셨다.

레이나 공주는 술잔이 비는 족족 잔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루안에게 무척 미안했다. 자신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려는 루안의 마음을 자신이 이용한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오늘은 그가 달라는 대로 술을 내었다.

“홀베른을 도와야지?”

“그것 때문에 그곳엘 다녀왔었어요. 돕는 거야 당연히 돕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부러워서 그래요. 홀베른이…….”

“부러워?”

루안이 묘한 눈빛을 보였다.

레이나 공주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 잔 털어 넣었다.

“그곳에 상왕이라는 분이 계시더군요. 놀랍게도 그분은 제가 알고 있던 분이셨어요. 물론 그땐 평범한 변방영지의 기사 정도라만 여겼었지만…….”

“전 왕이 살아 있단 말인가? 지금의 국왕이 왕위에 오른 지가 30년이 지난 것으로 아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요. 다만 그분에 대한 왕실의 충성이 정말 부러울 정도더군요. 게다가 루안과 싸웠던 그분들, 제가 숙부라고 부르던 그분들이 상왕 전하의 충실한 동료이자 기사들이더군요.”

루안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그자들이 전부 그곳에 있었단 말이야?”

“그래요. 아리안도, 다크 영지의 영주도 모두 그곳에 있더군요. 영지민들까지…….”

레이나 공주는 말하면서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한때는 케이론의 백성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마치 자신이 잘 못해서 타국으로 망명을 간 것처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었다. 그때의 기분이 다시 되살아나자 그녀는 자꾸만 술잔에 손이 갔다.

“수십 배나 큰 영토를 자랑하는 대제국과의 전쟁이 임박했음에도 홀베른의 백성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더군요. 왜 그럴까요? 우리 케이론의 백성들은 고작 변방인 케논 산맥에서의 전쟁만으로도 불안에 떨며 동요를 일으키는 데, 그들은 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요?”

레이나 공주의 목청이 조금씩 격앙되었다.

루안은 그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건 바로 왕실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있다는 걸 뜻하는 거죠. 우리 케이론이 가지지 못한 걸 그들은 가지고 있어요. 물론 황실이 무능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점은 인정하지만, 황실의 일족으로서 그 부분에 대한 잘못은 통감하지만… 그래도 우리 백성들에 대한 섭섭함을 지울 수가 없어요.”

“자책하지 마.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되는 거지.”

루안은 그녀의 빈잔을 채워주며 위로했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흘긋거렸다. 만약 테세우드가 죽지 않은 것을 안다면 얼마나 큰 실망을 할까.

레이나 공주가 루안을 지그시 바라보며 불렀다.

“루안…….”

“그 눈빛은 또 뭐야? 부담스럽게…….”

덥썩!

갑자기 레이나 공주가 그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루안이 손을 빼려 했으나 레이나 공주는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는 말했다.

“다시는 다치지 마요. 나를 위해서, 아니 케이론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당신을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을 거예요.”

“후후! 내가 간 거지. 레이나가 가래서 간 건 아니잖아?”

와락!

레이나 공주의 가녀린 육신이 루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와장창!

쨍그랑!

술병과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다시는 내 곁에서 떠나지 마세요.”

* * *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의 강력함은 모두의 상상을 초월했다.

흑야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광경에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지금 평원에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는 30미르에 이르는 좁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방금 스스로 검을 휘둘러서 나타난 결과물이었다.

“기절초풍을 하겠군.”

그는 손에 쥐어진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조윤 역시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에 어안이 벙벙한 듯 보였다. 검이 아닌 창이었기에 구덩이의 길이는 흑야보다 길었다.

“이 정도 위력이면 호신강기도 그냥 잘라낼 것 같은데?”

“호신강기도 그렇다만 이 세상의 기사들이 입는 마법갑주도 대번에 썰어내겠어. 좋기는 하다만 섬뜩하기도 하군.”

“강호에 한 자루만 풀어놓으면 난리가 나겠군. 이건 명검의 개념을 넘어선 거니까.”

“그렇겠지.”

둘은 한동안 감탄을 하고는 등을 돌렸다.

평원은 여전히 전술훈련에 한창인 기사들로 가득했다. 전차가 울리는 굉음은 한참을 떨어진 그들이 선 곳까지 은은하게 울렸다.

“엄청난 살육전이 되겠지?”

“그래, 이런 종류의 싸움은 처음인데…….”

“후후! 어쩌면 저승에서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많은 생명을 거두게 될 거다.”

“난, 놈이 솔직히 궁금하다. 켈베로스라는 그놈 말이야. 상당히 강하겠지?”

“그렇겠지. 설마 주공께서 밀리기야 하겠냐? 괜한 걱정은 집어치우고 우리부대는 훈련이 끝났으니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

둘은 평원의 끝부분에 보이는 왕궁으로 걸음을 놓았다.

둘이 조금을 걸었을 때였다. 하늘에서 뭔가 번쩍하더니 누군가가 둘의 앞에 나타났다.

“헤헤! 여기 있었구나.”

카루가였다.

“너도 수련 중이냐?”

“응! 힘들어 죽겠어. 술 마시러 가는 거지?”

“왜? 너도 마시고 싶냐?”

“줘도 안 먹어. 그런 건…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조윤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부탁? 그게 뭔데?”

카루가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변신을 한, 나와 한번만 싸워줘.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라니까 저쪽으로 가서 하면 되겠다.”

조윤과 흑야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흑야가 다시 카루가에게 물었다.

“새로운 힘이라도 얻은 거냐? 갑자기 대련은 왜?”

“사실, 지금까지의 나는 완벽한 힘이 아니었어. 제약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제약이 어제 풀렸어. 그래서 시험해 보고 싶어. 얼마나 강한지 말이야. 해줄 수 있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다쳐도 난 모른다.”

“헤헤! 난, 다치면 저절로 회복되는 몸이잖아. 고마워. 헤헤!”

카루가는 머리를 긁적이며 해맑게 웃었다.

셋은 방향을 바꿔 조금 더 한적한 곳으로 걸었다.

숲이 살짝 우거진 곳에 이르러 조윤이 창을 비껴들며 웃었다.

“내가 상대해 주마. 꼬맹이.”

“헤헤! 조심해. 나도 내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모른단 말이야.”

“후후! 제발 강했으면 좋겠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잠시 후, 카루가가 섬뜩한 모습으로 변했다.

화염을 두른 육신은 전에 비해 그다지 커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강력함은 장난이 아니었다.

흑야가 가볍게 놀랐다.

“확실히 강해졌군. 그런데 정신은 멀쩡한 거냐?”

“응! 정신은 말짱해. 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훨씬 기분도 상쾌하고 그래.”

섬뜩한 모습에서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다소 이상했다.

흑야가 조금 뒤쪽으로 물러섰다.

조윤이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재촉했다.

“어서 덤벼봐. 꼬맹이!”

“알았어! 간다!”

화르륵!

카루가의 채찍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시뻘건 화염이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쳤는데 주변 나무들에 불꽃이 붙을 정도로 극양의 기운을 자랑했다.

우우웅!

조윤도 감히 가볍게 보지 못하고 창에 강기를 둘렀다. 선공은 카루가가 했다. 허공에 뜬 상태임에도 카루가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쾅! 쾅!

창과 채찍이 격돌하며 요란스러운 굉음과 불꽃을 폭발시키자 어둠이 막 내리던 평원이 뇌전이 치는 것처럼 번쩍거렸다.

흑야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몰래 하기는 글렀군.’

이 정도라면 왕궁에서도 보일 정도다. 조만간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들 것이 뻔했다. 흑야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선두엔 역시 왕전 등이 있었다.

* * *

근처에 내려선 왕전 등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저게 카루가 맞느냐?”

“더 강해졌다고 대련을 해달라고 하더군.”

북궁천소가 둘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중원의 어지간한 고수들은 쉽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겠어. 놀라운걸? 짧은 시간에 저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니…….”

“발전한 게 아니다. 제약이 있었는데 그게 풀어진 모양이야. 그래서 봉인되었던 힘이 드러나는 거겠지.”

쾅!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며 사방으로 화염과 강기가 튕겨나갔다.

뒤늦게 현장으로 들어선 케니언 크로우기사들이 황급히 사방으로 비상하며 파생된 기운들을 피했다.

따다다다당!

흑야 등은 호신강기로 화염을 막아냈다. 순간 공간이 일렁거리며 그들의 신형이 조금 일그러지는 광경이 나타났다. 파생된 기운만으로 엄청난 고수들이 펼친 호신강기를 자극한 것이다.

“괴물탄생이군.”

흑야가 중얼거리자 모두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휙!

바람이 불며 아리엘이 내려섰다. 가인과 카츄도 그녀의 옆에 함께하고 있었다.

“대련이네?”

“가까이 가지 마라. 다친다.”

왕전이 가인과 카츄에게 뒤로 물러날 것을 말하자 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그 정도쯤이야.’ 라는 표정이다.

조윤의 창은 무지막지한 힘을 뿜어댔다. 카루가의 채찍도 결코 그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카루가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찍이 뿜어대는 위력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흑야의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저놈도 꽤 강해졌군. 몰래 수련이라도 한 건가?”

그의 시선은 조윤을 향해 있었다. 왕전과 북궁천소가 씩 웃었다.

“흐흐! 뭘 저 정도를 가지고…….”

흑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너희들도 수련을 했냐?”

“당연하지. 솔직히 드래곤인가 뭔가가 있으면 한판 붙어보려고 했는데, 쩝! 아쉽지만 나중에 켈베로스, 놈한테 한 번 써먹어볼 생각이다. 그런데 넌 수련을 안 한 모양이지?”

왕전의 말에 흑야는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웃었다.

“나도 했다.”

“아닌 것 같은데?”

“당장 붙어볼까?”

“아니다. 됐다.”

* * *

혁련천후는 양 볼이 시퍼렇게 멍든 카루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에게 맞은 건가?”

“응! 저기 저…….”

카루가는 손으로 다른 탁자에서 식사 중인 조윤을 가리켰다. 혁련천후의 눈길이 매섭게 조윤을 향했다.

“조윤!”

“예! 주공!”

“왜 이랬지?”

혁련천후가 카루가의 볼을 가리키며 매섭게 물어오자 조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루가는 일부러 조윤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저… 대련을 하자고 해서…….”

“네가 카루가와 대련을 했단 말이냐?”

“지가 더 강해졌다고 하면서 한판 싸워 달라고 했습니다.”

혁련천후의 눈매가 꽤나 매서워 보이자 조윤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왕전 등에게 도와달라고 눈빛을 보냈으나 모두가 슬쩍 외면하자 조윤은 속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쳤다.

“쯧쯧! 팔왕이 언제부터 어린아이와 대련을 했지?”

“주공, 그게 아니고요…….”

조윤은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그때 카루가가 몰래 혓바닥을 쏙 내밀어 보이자 조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야! 꼬맹이! 너 죽고 싶냐?”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이 쏟아졌다.

아차 했지만 말을 주워 담을 재주가 조윤에겐 없었다.

“저것 봐. 죽인다잖아.”

카루가의 치명타가 작렬했다.

“야! 니들 정말 이럴 거야?”

조윤이 왕전 등을 노려보며 황당하다는 몸짓을 했지만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모두는 조윤을 외면했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윤에게 말했다.

“수련상대가 없었는데 네가 해줘야겠다.”

쨍그랑!

조윤이 잡았던 젓가락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날 밤, 조윤을 제외한 모두가 은밀한 장소에서 카루가를 만났다.

“약속을 지켰으니 너도 약속을 지켜야지.”

왕전이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카루가를 쳐다봤다. 다른 이들도 같은 표정이다. 볼을 만지작거리던 카루가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듣던 모두의 표정이 점점 놀람으로 변하더니 희열의 빛마저 보인다.

카루가의 말이 모두 끝나자 왕전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이제 조윤, 놈의 조문을 잡았구나! 앞으로 까불면 죽었어. 이 자식!”

카루가에게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한 번 싸운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카루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카루가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낮게 속삭였다.

“절대비밀이야. 말하면 정말 나를 죽일지도 몰라.”

음모(?)의 끝은 어둠 속에서 이루어졌다.

* * *

요란 제국의 대군은 거침없이 홀베른으로 질주를 거듭했다.

케이론 제국의 국경을 꽤나 가깝게 이동했던 탓에 간간이 케이론 제국의 지역 수비군이 그들과 부딪히긴 했지만 전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정도의 규모였다.

제국을 떠난 지 27일 되던 날, 홀베른과의 접점지역에 그들은 본진을 차렸다. 자신감에 넘쳤던 막스 황제는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는 일차적으로 홀베른을 흔들 심산으로 산발적인 공격명령을 몇몇 부대에 내렸다.

두두두…….

최전방의 정찰을 겸한 5,000기의 기마병들이 본진을 빠져나와 홀베른으로 질주했다. 마법사들도 상당수 포함된 그들은 하루를 더 달려서 홀베른의 최전선에 이르렀다.

드윈 자작은 최전선을 늘어진 숲을 바라보며 매서운 눈빛을 발했다.

“제대로 된 경계 병력조차 없다니, 뭘 하자는 거지?”

최전선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경계병들이 없었다. 초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부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숲 뒤쪽에 매복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를 먼저 보내어 정찰을 해보심이 좋겠습니다.”

“좋다! 서둘러라!”

부관이 돌아가자 곧 마법사 둘이 빠르게 전방에 펼쳐진 숲으로 날아갔다.

“정찰과 혼란을 조성할 목적으로 왔다만 놈들의 병력이 있다면 쓸어버리고 갈 것이다. 초전에 기를 확실히 죽여 놓는 게 좋겠지.”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공에 목을 맨다.

지금 드윈 자작처럼 말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 * *

“놈들이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기사 한 명이 데얀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들이다. 정찰을 하려는 모양인데, 모두 몸을 숨기고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데얀의 명령에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이 일제히 기를 감추고 은밀하게 숨었다. 정찰을 목적으로 최전선을 나왔다가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몸을 은신한 그들이다. 데얀의 눈매가 사납게 빛을 발했다.

“오면 모조리 죽여주지.”

“우리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스스로를 믿어라. 우린 지난날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저깟 기병 5,000기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스스슥!

수풀들이 가볍게 움직이며 마법사들이 숲 안으로 들어섰다.

찌르르…….

사위가 조용했다.

들리는 건 오직 풀벌레 소리뿐이다. 마법사들은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는 곧장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서 뭐라고 말을 하자 5,000기의 기마병단이 질풍처럼 숲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데얀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수련의 성과를 시험해 본다. 전원 전투준비!”

스르릉…….

곳곳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총인원 21명 대 5,000기의 기마병단이 격돌을 목전에 둔 평원은 말발굽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섬뜩한 적막감으로 넘쳤다.

두두두두…….

요란의 기마병단이 숲을 들어서 곧장 직선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병력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검조차 뽑지 않은 상태였다.

“쳐라!”

데얀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몸을 솟구쳐 기마병단을 덮쳤다.

“적이다!”

“매복이다! 적의 매복이다!”

콰지지직!

“으아악!”

오러가 난무하며 핏물이 솟구쳤다.

모두가 하나같이 대량살상을 목적으로 한 공격을 펼쳤다. 짧은 시간에 상당한 수의 기마병들이 피를 뿌리며 떨어졌다. 기마병단의 허리쯤에서 시작된 혼란은 진열을 대번에 무너뜨렸다.

“적은 소수에 불과하다! 당황하지 말고 놈들을 에워싸라!”

선두에서 질주하던 드윈 자작이 말 머리를 돌려 혼란이 일어난 지점으로 돌아오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명령이 오히려 화를 불러왔다.

“좋은 명령이다! 하하!”

밀집대형으로 모여들자 데얀과 기사들이 동시에 공격을 펼쳤다.

상상불허의 무지막지한 오러가 그들의 주변을 요동치며 강력한 회전을 시작했다. 기마병들의 검과 창날까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참혹한 죽음이 이어졌다.

“크아아!”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탓에 가까이 근접한 자들이 오히려 끌려들어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콰지직!

“으악!”

“물러나라! 접근하면 죽는다! 뒤로 물러나라!”

기마병들은 말 머리를 돌리기에 급급했다. 오직 오러만이 보일뿐 공격을 펼치는 적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말이 되는 건가?”

드윈 자작은 너무 놀란 탓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때, 바깥쪽으로 이동하던 기마병들이 몰려들었다. 드윈 자작의 얼굴이 그들을 보자 퍼졌다.

“놈들에게 화살을 퍼부어라!”

1,000여 기에 달하는 기마병들은 요란 특유의 이동식 활을 보유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화살을 조준했다.

근처에 있던 아군이 자리를 피할 때까지 기다렸던 그들은 동시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어지간한 하급갑주는 그대로 관통한다는 강철화살 1,000여 발이 새카맣게 날아갔다.

“호신강기!”

데얀의 날카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의 전신이 희뿌연 방어막으로 둘러졌다. 혁련천후가 특별히 그들에게 전수한 신마성의 호신강기였다.

따다다다다당!

경쾌한 금속성이 울리며 불꽃이 튀었다.

드윈 자작을 비롯한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방어막에 튕겨 날아온 화살들이 오히려 아군을 덮치자 그들은 질색을 하고는 사방팔방으로 몸을 피했다.

“으아악!”

히이잉!

구슬픈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감히 홀베른을 넘보다니, 그 대가가 어떠한지 미리 보여주겠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쓸어버려라!”

데얀의 사자후가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적의 호신강기를 두른 21명의 기사들은 핏빛 전장을 지배하는 전사로 돌변했다. 그들은 갈팡질팡하는 기마병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숲을 벗어난다! 평원으로 후퇴하라!”

드윈 자작은 이제야 제대로 된 명령을 내렸다.

숲에서는 전마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행동반경이 좁고 느리니 공격도, 수비도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기마병들은 재빨리 평원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워낙 다수가 얽혀 있었던 탓에 그것도 원활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자들이 점점 늘었다.

“단장님! 놈들이 평원으로 빠져나갑니다!”

“후후! 그곳이라고 안전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추격해!”

쾅!

데얀의 육신에서 화염이 터졌다.

“이런 빌어먹을 마법사새끼가!”

데얀의 고개가 부러질듯 세차게 돌아갔다.

그곳에 마법사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방비상태에서 파이어 볼을 격중당하고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데얀이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마법사는 자신의 눈앞에 하얀 불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신의 품속으로 날아갔다.

“마법사를 찾아서 우선 격살시켜라!”

“이미 모조리 죽였습니다!”

“하하! 좋아! 자! 넓은 곳에서 제대로 된 사냥을 해보자꾸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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