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통곡의 철벽, 케니언 크로우
드윈 자작은 재빨리 평원으로 빠져나와 전열을 재정비했다.
돌아보니 500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그만큼이 죽어버린 것이다.
“이런 악마 같은 놈들!”
그는 검에 오러를 품고서 숲을 빠져나오는 데얀과 기사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뒤늦게 숲을 빠져나오던 기사들이 속절없이 그들의 손에 의해 죽어나가는 광경에 드윈 자작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일자 대형으로!”
두두두두!
기마병들이 일제히 횡으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대로 돌진해서 육탄으로 깔아뭉갤 심산이었다.
“저 악마 같은 놈들을 핏물로 만들어주자! 돌진!”
살아남은 기마병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을 시작했다. 지축이 흔들리고 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데얀의 입가가 말려서 올라갔다.
“좋아! 원했던 대로 움직여주는군. 모두 좌우로 흩어진다!”
팟!
그들이 좌우로 번개같이 움직이며 흩어졌다. 동시에 그들이 사라진 자리의 허공에 하얀빛의 덩어리가 둥실 떠올랐다.
“카츄! 저놈들은 우리의 원수다! 절대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응! 알았어!”
가인과 카츄였다.
빛에 둘러싸인 둘의 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의 손이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모조리, 모조리 죽여줄 거야! 원수 놈들! 타앗!”
가인과 가츄가 손을 앞으로 후려쳤다.
쒸리리링!
묘한 소리가 울리며 빛이 쏘아져갔다. 놀랍게도 빛은 날아가면서 얇은 원형으로 변해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예리함이 느껴졌다.
퍼퍼퍼퍼퍽!
첫 줄에서 질주해 들어오던 기마병들이 전마와 함께 통째로 썰어지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차마 눈뜨고는 도저히 보기 힘든 참상이 펼쳐졌다.
선두에서 용맹을 부리던 드윈 자작도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자작께서 전사하셨다! 후퇴하라!”
“본진으로 돌아간다!”
누군가가 절규했다.
곳곳에서 울부짖는 자들도 생겨났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 도살에 불과했다. 그것을 요란의 기마병들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싸울 의지를 상실한 요란의 기마병들은 오직 살기 위해 평원의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이 없게 좌우로 달려 나간 자들은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가인과 카츄의 공격이 더욱 그들에겐 공포였다.
“또, 또 온다!”
“으악!”
검을 휘둘러 막으면 검을 자르고 들어와 육신을 베었다. 마스터 급이라면 방어가 가능한 정도였지만 일개 기병단에 마스터 급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들을 살릴 것은 오직 전마의 속도뿐이었다.
죽을힘을 다해 말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거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앞을 달려가는 기마병들은 비로소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하며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죽음의 손길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헉! 적인가? 아니면 아군인가?”
그들이 질주하는 평원의 능선에 일단의 기마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요란 제국의 기사들에겐 적일 수밖에 없었다.
수가 수백에 불과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자들에겐 천만대군 만큼이나 두렵게 다가왔다.
“도주는 불가하다! 전마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들은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선택은 단 한 번뿐임을 명심하라!”
룻거 후작이었다.
핏빛 갑주를 걸친 그의 어깨에는 한쪽엔 검이, 다른 한쪽엔 거대한 활이 메어져 있었고 전마의 옆구리엔 역시 거대한 화살이 잔뜩 걸려 있었다.
확성마법을 통해 요란 제국의 기사들에게 똑똑히 전달된 그의 투항권고에 곳곳에서 항복을 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상당수는 여전히 머뭇거렸고, 그중엔 싸우자고 소리치는 자도 있었다.
룻거 후작이 활을 끌어 화살을 메겼다.
팡!
공간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가장 끝부분에서 싸우자고 소리치던 자의 육신을 꿰뚫었다. 그 정도는 어지간한 궁술의 고수는 다 할 줄 아는 정도다.
하지만 룻거 후작의 화살을 달랐다.
“으아악!”
화살에 명중당한 기사의 육신이 한참을 날아가 떨어졌다. 그 가공할 광경에 머뭇거렸던 자들이 떨어지듯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룻거 후작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전원 투항했습니다!”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룻거 후작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50미르 간격으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인물들, 바로 홀베른이 자랑하는 최강의 마법병단이 그들이었다.
신비에 가려진 그들의 전력 때문에 그 어떤 나라도 요란을 침범하는 것을 망설였다. 총인원 50명 중에서 고작 다섯만이 왔을 뿐인데도 그 넓은 평원을 전부 감당한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 * *
“모두 3,500명이 항복해 왔습니다.”
혁련천후는 룻거 후작의 보고를 받았다.
그는 첨탑에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왕궁의 반대편 평원에 포로로 잡힌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결계가 그들을 가두어 놓고 있었는데 경계병은 아무도 없었다.
살짝 닿기만 해도 그대로 녹아드는 초강력 결계가 처져 있던 까닭이다.
“빠져나간 자들은 없느냐?”
“없습니다.”
“좋아. 이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전투부대를 보내거나 아니면 전 병력이 곧장 이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 정보에 만전을 기하도록!”
“예! 전하!”
“그리고 마법병단에게 적의 척후병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사전에 차단하라고 전해. 인원이 부족하면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을 전원 데려가도 좋다!”
룻거 후작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마법병단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흠……!”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렸다. 룻거 후작이 재빨리 따라붙으며 물었다.
“진무 공께서 설치 중인 진법이 내일 중이면 완성될 것 같습니다. 하오면 선공을 강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다. 당분간 놈들의 선봉부대만 요격하는 쪽으로 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한꺼번에 모조리 몰려오겠지. 그때, 전차부대를 투입할 것이다.”
룻거 후작은 혁련천후를 존경에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에게선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어지간한 사람은 만용으로 느껴질 법도 하건만 그는 확신이라는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만큼 룻거 후작이 혁련천후를 믿는 것이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지만…….
혁련천후가 물었다.
“임시 거주지역은 어떻게 되었나?”
“10만 명을 수용할 만한 규모로 완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이틀 후쯤이면 최전선의 영지민들을 대피시킬 계획입니다.”
“하루 앞당기도록 해. 벌써 어제의 전투가 소문이 돌았다면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을 것이다. 밤을 새워서라도 내일까지 완공을 하라고 지시해!”
“예! 전하!”
둘은 왕궁의 정원에 이르러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공진무와 진천이 막 왕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혁련천후를 발견한 둘이 환하게 웃으며 뛰어왔다.
“작업은 마쳤느냐?”
“하하! 완벽하게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는 새 한 마리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게끔 해놓았으니 술 좀 주십시오!”
혁련천후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모처럼 함께 마셔볼까?”
“야후! 좋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좀 씻고 오겠습니다! 땀을 엄청 흘려놔서…….”
둘이 바람처럼 거처로 날아가자 룻거 후작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 봐도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나뭇가지 몇 개로 사람을 가두고 수백 개로 수천 병력을 가둘 마술을 부리시다니…….”
혁련천후도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거처로 가려던 발길을 식당으로 돌렸다.
“제가 주방장에게 음식을 준비하라 시키겠습니다.”
룻거 후작이 먼저 식당으로 몸을 날렸다.
혁련천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내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함께 돌아가느냐, 아니면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차원을 떠도느냐의 결판 시점이 코앞에 닥쳤다.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무조건 그녀들을 깨워서 중원으로 돌아간다.’
* * *
요란 제국의 제7강습여단장인 루턴 후작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서 상황실을 서성거렸다.
정찰 겸, 적의 최전선에 혼란을 조성할 목적으로 출전한 선봉부대가 돌아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앉은 레인 역시 무거운 기색이다.
“설마 놈들에게 기습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레인의 물음에 루턴 후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비록 최정예는 아니라지만 상당한 전투경험을 지닌 베테랑들입니다. 기습 따위에 당할 리 없습니다. 설사 기습을 당해서 피해를 입었다고 쳐도 최소한의 병력은 벌써 돌아왔어야 정상인…….”
“이동식 통신구를 지닌 통신병이 함께 출전하지 않은 것인가?”
“홀베른은 워낙 마법병단이 강력한 곳이라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그물처럼 쳐 놓은 마나 때문에 오히려 적에게 역정보를 흘려줄 가능성이 높아 아예 통신병들은 전투부대에서 뺐습니다.”
언제나 섬뜩한 표정만을 지었던 레인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가 조금은 이상했다.
5,000명의 기사들을 걱정해서 얼굴을 굳힐 레인은 결코 아니다. 케논 산맥에서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잃고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은 왜 고작 5,000명에 이토록 심각하게 굳어지는 것일까. 이유는 바로 켈베로스를 장막처럼 감싸고 호위하는 가디안, 어둠의 마법사들 때문이다.
그들은 제국의 실력자인 케이시 공작도 실각시킨 자들이다. 모두는 케이시 공작이 황태자 카르스에 밀렸다고 하지만 레인은 그들이 막후에서 황태자 카르스를 이용해 만들어낸 것임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케이시 공작이 실각한 다음 목표는 바로 자신이었다.
‘놈들이 수작을 부릴 구실을 조금이라도 주어선 곤란하다. 내가 실각하면 놈들은 무조건 황제를 처치하고 자신들이 제국을 통치하려 들 것이다.’
레인이 생각하는 그들의 최종 목적은 바로 그것이었다.
영혼이 봉인된 존재들이 통치하는 제국은 더 이상 산 자들의 세상이 아니다. 레인이 비록 사악하고 악독한 존재라지만 그도 엄연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던 터였다.
“단장님! 단장님!”
“…응?”
루턴 후작이 연거푸 부르고서야 레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안되겠습니다. 마법사들을 몇 보내어 상황을 파악해 봐야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그렇게 하게!”
루턴 후작이 상황실을 빠져나가려는 때였다. 시커먼 로브를 걸친 자가 소리 없이 그들의 가운데에 나타났다. 레인이 가장 싫어하는 존재, 바로 어둠의 마법사였다.
레인의 눈동자에 일순 섬광이 돈다. 자신도 모르게 검집에 손을 가져갈 정도로 그는 지독히도 그들을 증오했다.
둘을 죽어버린 눈동자로 쓸어본 어둠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켈베로스 님께서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를 하라고 하셨다. 루턴!”
묵직하면서도 ‘웅웅’ 울리는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섬뜩했지만 레인에겐 화를 돋우는 것에 불과했다.
“작전이 조금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거짓은 너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 루턴…….”
레인과 루턴 후작의 미간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둘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눈동자가 새파란 광망을 뿜었다.
“후후후! 감히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이다니, 영혼을 봉인당하고 데스 나이트가 되고 싶은 모양이군. 레인!”
“그전에 네놈이 영원한 소멸을 당할 수도 있지. 껍데기!”
“너의 그 태도, 기억해 두겠다. 레인…….”
어둠의 마법사가 연기처럼 사라지자 루턴 후작이 분통을 터트린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저 재수 없는 작자들과 함께해야 하는 건지. 폐하께서도 왜 저런 자들을 끌어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게. 홀베른과의 전쟁만 무사히 끝나면 무슨 수를 내겠네.”
“차라리 아이아스의 심장을 얻기 전에 수를 내는 것이 좋겠단 생각도 듭니다. 말이야 제국과 모두를 위해 심장이 필요하다지만 솔직히 전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이아스의 심장은 켈베로스, 그분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속단하지 말게. 일단은 아이아스의 심장을 얻는 것이 급선무네. 켈베로스, 그분은 둘째치고 폐하께서도 그것을 무척 원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니 당장은 홀베른을 쓸어버리는 것에만 집중을 하세나. 어차피, 그곳은 아이아스의 심장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붙어보고 싶었던 곳이야. 무인으로서 홀베른이 얼마나 강한 자들이 있는지 궁금했거든…….”
레인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목청까지 낮게 깔았다.
그에게도 무인의 본질이라는 게 있었을까? 섬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투기라는 게 아른거렸다.
“일단은 마법사들을 최전선으로 보내고 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마스터, 한 명을 붙여서 보내도록 하게. 놈들도 정찰을 차단할 목적으로 곳곳에 저격수들을 배치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루턴 후작이 빠르게 상황실을 벗어나자 레인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루턴 후작의 기운이 완전히 감각에서 사라지자 레인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빛났다.
“아이아스의 심장과 홀베른 따윈 필요 없다. 그자! 그자의 존재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가 진정 중원에서 넘어온 신마, 그자가 맞으면 이번 전쟁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아니 이곳에서 이루려던 본교의 염원이 막힐 수도 있게 된다. 모든 힘을 기울여서라도 그자만큼은 이번 기회에 죽여야 한다. 반드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가 혁련천후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거론한 본교는 또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으드득!
갑자기 레인이 이를 갈았다.
“신마, 혁련천후! 이곳은 중원이 아니다! 신마성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본교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부딪히기 이전에 넌 켈베로스, 그 괴물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겠지.”
우르릉…….
후두두둑!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점검 거세져가던 빗소리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돌멩이가 떨어지는 듯 심하게 울리자 레인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눈 속에는 큼지막한 우박이 섞여 있었다.
“이건……!”
레인의 눈동자에 의혹이 어린다.
“그때와 비슷한 기후다. 설마 그것들이 또……?”
무엇을 염려하는 걸까?
레인은 한동안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졌던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죽은 자들의 육신과 그들이 흘렸던 핏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그곳엔 어둠 속에서 간혹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요란 제국의 첩보, 정찰활동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숨어 있는 저격수들이었는데, 그중엔 스스로 자원한 혁련소와 연소민도 함께하고 있었다.
둘은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같은 장소에서 작전이 아닌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이젠 이곳의 밤하늘도 무척 정이 들었어요.”
연소민은 혁련소의 품에 몸을 묻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별이 사라지는 걸 보니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건가?”
“눈이 내리면 좋을 텐데…….”
연소민은 더욱 깊숙하게 안기며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혁련소의 팔을 가슴에 안았다. 혁련소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단둘이서만 살고 싶을 만큼…….”
“전쟁이 끝나고 중원으로 돌아가면 둘이 따로 나가서 살까?”
“싫어요.”
혁련소가 눈을 동그랗게 했다.
“둘이서 살고 싶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분들과 떨어져서 산다는 게 지금은 솔직히 상상이 안 가요. 그리고…….”
“그리고 뭐?”
“어머님들하고도 함께 살고 싶어요. 제 소원이 그거였잖아요.”
순간, 혁련소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의었다.
“성이 넓으니까, 부모님이랑 숙부들과 함께 살면서 은밀한 곳에 우리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하면 되겠네.”
“만약 중원으로 돌아가서 아버님이랑 오빠를 찾으면…….”
그녀가 갑자기 말을 흐렸다. 그녀를 안은 혁련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 마. 아버지는 분명 교주님과 무진을 받아주실 거야. 원래 그런 쪽에선 화끈하시거든.”
“정말 그래주실까요?”
“당연하지.”
우르릉…….
후드득!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천둥소리가 울리자 혁련소와 연소민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투두두둑!
“우박까지! 골고루 하는군. 이렇게 되면 적의 정찰병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난, 저곳으로 가야 할까 봐요. 조심해요!”
“소민도 조심해.”
연소민은 빠르게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혁련소는 하얗게 변해가는 평원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마침 바람까지 불어대자 시야는 훨씬 흐려졌다.
“분명 다른 놈들을 보낼 텐데…….”
연소민이 간 곳을 슬쩍 쳐다본 혁련소는 다른 곳을 살폈다.
숲의 총 너비는 500미르에 달한다. 좌우측 가장 끝부분엔 마법사 요란과 우드가 은신하고 있다. 그리고 20미르 간격으로 기존, 홀베른의 마법사들과 에이미 공주 등이 철통같은 경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천이 이곳저곳을 오가며 모든 상황을 살피는 중이다.
숲 말고는 홀베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하늘을 날아가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곳 숲은 양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점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요란 측이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휘이잉!
후두두둑!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는 기척을 감지하는 걸 방해했다. 덕분에 시력에 의존해야만 하는 모두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서 요란의 병력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누군가 혁련소의 어깨를 툭 쳤다.
“어째 떨어졌냐?”
진천이었다.
“공무 중 아닙니까.”
“공무? 공무를 아는 놈이 지금껏 착 달라붙어 있었냐?”
“부럽습니까?”
“쩝! 그래. 부럽다.”
둘의 농담은 잠시 후 중단되었다. 진천이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쩍 빛을 발했다.
“후후! 역시 이번엔 정찰 병력만 왔군.”
“어딥니까?”
혁련소의 눈에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진천이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혁련소는 눈에 내공을 끌어올려 진천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발과 어우러져 뭔가 희끗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달랑 다섯뿐이군요.”
“기마병단의 소식이 궁금했겠지. 이거, 의외로 막스라는 놈이 차분한 모양이군. 곧장 대군을 몰아쳐서 올 줄 알았는데.”
“잡아야죠.”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한 놈이라도 놓치면 낭패니까.”
진천의 눈동자에 살짝 금광이 어렸다.
환술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을 펼치면 평소의 수배에 달하는 시력과 맞먹는 시야를 얻는다. 진천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마스터 급 기사 한 놈에 마법사가 넷이군. 소! 네가 저 마스터를 맡아라. 마법사는 나와 에이미, 소민이 맡겠다.”
“사로잡을까요?”
“가능하다면……!”
둘은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은밀한 방법으로 모두에게 소식을 전해놓은 상태였다.
요란의 마법사들은 상당한 속도로 숲을 향해 질주해 오고 있었다. 내리는 눈 때문에 경계망이 흐려졌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숲 가까이 다가왔을 때, 진천과 혁련소가 벼락같이 그들을 덮쳤다.
“환영한다! 하하하!”
파츠츠츠!
진천의 양손이 괴상한 기류를 뿜어냈다.
마치 얼음이 얇게 펼쳐진 모습과도 같은 그것은 상당한 속도로 마법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마법사들의 뒤쪽으로 상당수의 인물들이 퇴로를 차단하며 떨어져 내렸다.
깡!
혁련소와 기사의 검이 허공에서 정통으로 부딪혔다. 묵직한 신음성과 함께 기사의 육신이 주르륵 뒤쪽으로 밀려났다.
“대항하면 죽는다!”
혁련소는 차갑게 일갈하고는 다시 기사를 덮쳤다. 그는 일부러 기사가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공격했다. 검과 검끼리 부딪혀 내상만을 입힌 다음에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반면에 마법사들은 생각보다 강한 자들이 온 것 같았다.
주변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지며 마법공격이 난무했다.
“후퇴하라!”
“누구 마음대로!”
펑! 펑!
“어딜 가느냐!”
에이미 공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리며 마법사들의 퇴로 방향에 그녀가 나타났다. 이미 전신을 빛으로 두른 그녀는 양손에 유선형 빛 덩어리를 쥐고는 당장에라도 발출할 자세를 취했다.
그녀를 본 마법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마법사는 마법사를 알아본다. 눈으로 보이는 마나의 움직임만으로도 서로의 우열을 감지할 수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에이미 공주의 강력함은 대마법사에 못지않을 정도였다. 엄청난 거리까지 뻗친 마나의 반사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소중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에이미 공주의 서릿발처럼 매서운 호통에 요란의 마법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요란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들을 마나로 묶었다.
진천이 히죽 웃는다.
“이것들이 나보다 쟤를 더 무서워하네? 어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줘?”
“호호! 설마요.”
깡! 깡! 깡!
혁련소를 맞은 기사는 여전히 대항했다.
주변이 모두 적이었지만 기사는 용맹했다. 그게 기사와 마법사들의 차이점이었다. 마법사들은 개인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을 하더라도 죽지 않고 오히려 중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워낙 마법사를 귀하게 여기는 대륙의 풍토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세에 몰리면 항복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사들은 다르다. 특히 마스터 급에 이른 강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그들은 항복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라고 여긴다.
그것은 차원을 떠나 모든 무인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힘들면 그냥 죽여!”
진천이 소리쳤다.
“하하! 꽤 질긴 친굽니다!”
혁련소는 여유가 넘쳤다. 여전히 그는 적당한 속도와 힘을 실어 기사를 몰아쳤다. 아니었다면 벌써 싸늘하게 식었을 기사다.
아무리 여유가 넘쳐도 지켜보는 연소민은 불안했다. 그녀는 혹시나 사랑하는 사람이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이 불안했다.
혁련소의 낭랑한 목청이 주변을 울렸다.
“미련하게 목숨을 버릴 테냐? 홀베른은 요란과 다르다! 케이론과도 다르다! 항복하는 것이 명예를 더럽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검을 버려라!”
“닥쳐라!”
기사는 여전했다.
검을 두른 오러가 더욱 사납게 요동쳤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마법사들이여!”
기사는 무릎을 꿇은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시선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기사의 눈이 사납게 흔들렸다.
대항하지 않고 항복을 해버린 그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그러나 평정심을 잃은 대가는 가혹했다. 혁련천후의 검 끝이 기사의 어깨 밑을 때리고 지나갔다. 그곳은 오른쪽 육신을 마비시키는 혈도가 있는 곳이다.
“욱!”
털썩!
갑작스럽게 육신의 반쪽이 마비되자 기사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오호! 근성 하나는 알아줄 만했어.”
혁련소는 검을 거두며 낭랑하게 말했다.
이번에 우드가 재빨리 뛰어와 기사의 육신을 마나로 묶었다. 검을 쥔 오른쪽이 마비된 기사는 재빨리 왼손으로 검을 옮겨 잡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만 진천이 발로 검을 걷어차 버렸다.
“야수 같은 놈이군.”
“죽여라! 이놈들!”
“싫다! 이놈아!”
장난스럽게 대답한 진천이 모두에게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이 쓰레기 같은 마법사 놈들!”
기사는 마법사들을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나마 성한 왼발로 마법사들을 걷어차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는 혁련소는 반대편 혈도마저 짚었다.
“하하! 꽤 마음에 드는 친구야!”
* * *
사로잡힌 마법사들과 기사는 기마병들과는 다른 곳에 격리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대접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장소만 다를 뿐, 처우는 기마병들과 동등했다. 기사는 기사대로, 마법사들은 마법사대로 각각의 방에 감금시킨 진천은 묘한 눈으로 기사의 방을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후후! 성격을 보니 저놈이 어쩌면 큰일을 해주겠군.’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혁련천후의 거처로 걸음을 놓았다.
혁련천후는 자신의 거처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고심에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천이 들어왔음에도 그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진천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아서는 자신도 지도를 살폈다.
홀베른 주변의 모든 지형이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는 곳곳에 붉거나 푸른색의 점들이 찍혀져 있었다.
가볍게 숨을 고른 혁련천후가 그제야 진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법사들을 잡았다고?”
“그렇습니다. 사나운 기사도 한 놈 잡았습니다.”
“기사?”
“마법사들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나선 놈인 것 같습니다. 꽤 사나우면서도 충성심이 대단한 놈이더군요. 그래서 놈을 좀 이용해 볼까 합니다.”
혁련천후가 눈빛을 발하며 진천을 응시했다.
눈동자는 그게 무슨 뜻이냐를 묻고 있었다.
“요란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볼까 합니다.”
“포로로 잡힌 기사를 이용해서 말이냐?”
“그렇습니다. 다만 탈출을 아주 멋지게 시켜야만 할 텐데… 그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곧 방법이 찾아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혁련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커다란 술통을 들고는 그것을 술잔에 채워 진천에게 건넸다.
“이번에 온 놈들마저 돌아가지 않는다면 놈들은 본진을 버리고 모조리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이 분명하다. 하여 내일 아침쯤, 최소한의 병력을 왕궁에 남겨두고 놈들을 요격하러 떠날 생각이다.”
“놈들이 뭉쳐서 온다면 요격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흩어 놓아야지.”
진천이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놈들이 당장은 25만이나 차후 상당한 병력이 더 오질 않겠습니까? 그러면 꽤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만…….”
혁련천후는 진천과는 달리 자신감을 비쳤다.
“우리에겐 케이론이 있다. 테세우드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제국이다. 그들이 있는 한, 요란도 함부로 본토에서 병력을 빼지는 못할 것이다. 여차하면 그들보고 요란의 본토를 노리라고 하면 그뿐이다.”
“레이나 공주가 과연 그 큰일들을 해낼 능력이 되겠습니까?”
혁련천후는 술로 입술을 적시고는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 당장은 내일 출진에 집중해. 그리고 우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귀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수가 수십만이 넘어갈 수도 있겠지. 모두들 악마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중원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그 점은 이미 모두가 각오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아닌 국가 간의 전쟁이니 어쩔 수 없지요. 뭐, 수십만이 죽더라고 이후에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준다고 여기니까 별로 두렵지도 않습니다. 하하!”
진천이 해맑게 웃었다.
혁련천후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기 위한 억지웃음이었다. 혁련천후도 진천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푹 자둬. 어쩌면 내일부터는 핏물 속에서 살게 될 테니까…….”
* * *
맥퀸 후작은 마스터에 소문난 다혈질이다.
마법사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홀베른의 최전선으로 들어섰다가 포로가 된 맥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설쳤다.
“괘씸한 놈들!”
그는 자신을 잡은 은발청년보다 너무나 손쉽게 포기해 버린 자국의 마법사들이 더욱 괘씸했다. 싸우다 죽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 여기는 그에게 마법사들의 그와 같은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봐! 씩씩거리지 말고 잠이나 자란 말이야.”
튼튼한 철창 밖에서 경계를 서는 기사가 짜증을 부렸다.
맥퀸의 눈동자가 불을 뿜었다.
“며칠 후면 네놈들은 모조리 핏물에 코를 박고 죽을 것이다!”
“코를 박고 죽든, 자빠져서 죽든 그냥 잠이나 자란 말이야. 이 돼지 같은 자식아!”
기사는 당장에 검을 뽑아 죽일 듯 눈을 부라렸다.
맥퀸은 그에게 침을 뱉고는 돌로 만들어진 침상에 누웠다. 그런 그의 귓속으로 기사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젠장! 망할 놈의 나라! 누군 계집들과 술이나 퍼마시고 누군 허구한 날 경계나 세우고… 씨발! 확 뒤집어졌으면 좋겠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그놈의 불만타령이냐?”
철커덩!
철문이 열리며 손에 술병을 든 기사가 들어서는 것이 맥퀸의 눈에 비쳤다. 기사는 맥퀸을 험상궂게 노려보고는 불만을 늘어놓던 기사의 옆에 앉았다.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자식! 내가 아니면 누가 너 같은 하급기사를 챙기느냐? 여기 술하고 음식 좀 가져왔으니 그만 투덜거리고 화 풀어라.”
“빌어먹을! 누군 태어나면서부터 귀족이고 누군 죽는 그날까지 아무리 용을 써도 하급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니…….”
벌컥벌컥!
기사가 술을 병째로 입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맥퀸이 갇힌 방의 철창을 발로 걷어찼다.
쾅! 쾅!
“야! 요란의 개! 너희 요란은 정말 공만 세우면 평민이라도 신분상승이 가능하냐?”
“이미 전 대륙에 소문이 자자한 걸 네놈들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어리석은…….”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면 재판에 들어가기도 전에 내손에 뒈진다. 돼지!”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미친놈들아.”
“뭐야! 이 새끼가!”
발끈한 기사가 벌떡 몸을 일으키자 다른 기사가 황급히 말렸다.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콰당!
“왜 이린 소란스러운 거냐!”
마침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고함이 울렸다. 기사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부동자세를 취했다. 맥퀸은 새롭게 들어선 자를 응시했다.
상당히 거칠게 생긴 자가 들어섰는데 느껴지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마스터라는 자신에 비해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저런 놈이 고작 간수장이란 말인가?’
맥퀸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놈들이 근무시간에 술을 마셔? 이거 머리가 돌아버린 놈들이잖아!”
“그, 그게 아니라…….”
퍽!
발길질에 당한 기사가 벽에 사정없이 부딪히며 쓰러졌다. 맥퀸과 욕설을 주고받던 기사의 얼굴엔 주먹이 작렬했다.
퍽!
허공을 한 바퀴 돌고 내동댕이쳐진 기사의 입가를 타고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지금은 전시 중이다!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면 어떤 처벌을 받는 것인지 알고 있을 테지? 그것도 포로가 보는 앞에서면 즉참이 가능한 죄다.”
스르릉!
시퍼런 빛을 번뜩이는 검이 섬뜩한 소리를 울리며 뽑혔다.
기사들이 사색으로 변했다.
술을 들고 뒤늦게 들어섰던 기사가 엎드려 빌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그냥 저녁도 먹지 못하고 근무를 서는 게 측은해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닥쳐라! 감히 국왕 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포고를 어기다니, 네놈들의 목을 잘라 본을 삼겠다!”
“제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 가진 전 재산이라도 받치겠습니다! 그러니…….”
“닥쳐라! 감히 매수까지 하다니, 당장 네놈의 목을 쳐버리겠다!”
검을 위로 치켜 든 기사가 막 내리치려고 할 때, 누군가가 급하게 들어섰다.
“후작님!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전하께서?”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대전으로 드시랍니다!”
기사는 둘을 한차례 노려보고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이놈들을 감시하고 있어라! 군법을 어긴 놈들이니 여차하면 목을 베도 좋다!”
섬뜩한 명령을 내린 기사가 황급히 철문을 빠져나갔다.
금발에 잘생긴 얼굴을 한 기사가 무릎을 꿇고 있는 둘에게 물었다.
“너희들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야?”
“술을…….”
금발기사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빛으로 물들었다.
“공무 중에, 그것도 나라가 전시 중인 이때에 술을 마셨다고? 너희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쯧쯧!”
둘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맥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음주로 인해 즉참을 당할 뻔했던 기사들이 금발기사를 칼로 베어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잘려진 머리가 하필이면 맥퀸이 있는 철창으로 굴러오더니 멈추었다.
“씨팔! 앉아서 죽을 순 없지.”
금발기사의 머리를 쳐낸 기사가 맥퀸이 갇힌 철창문을 열며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을 풀어주겠소. 대신 우리를 요란으로 망명시켜 주시오!”
말투도 바뀌었다.
맥퀸은 급박하게 바뀐 상황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이런 호기를 어찌 놓칠까? 그는 눈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내, 후작이라는 직위를 걸고 약속하겠다!”
“고맙소! 이것을 들고 우리를 따라오시오!”
맥퀸은 죽은 기사의 검을 잡아들고는 둘의 뒤를 따라 철문을 빠져나갔다.
죽은 자의 육신과 핏물만이 남은 철창이 이내 적막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목이 잘려 죽었던 금발기사가 벌떡 일어섰다. 잘려 나갔던 머리는 멀쩡하게 육신에 붙은 모습으로 말이다.
씨익!
“제대로 속았겠지? 이게 바로 나, 진천의 최상급 환술이지. 후후후!”
기사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는 진천이었다.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돌린 그는 묘한 웃음을 남기고 밖으로 사라졌다.
* * *
탈출한 셋은 상당한 속도로 평원을 질렀다.
맥퀸과 두 기사 간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혼자 가면 어떡하오! 같이 갑시다!”
맥퀸이 속도를 늦추었다.
둘이 가까이 따라붙자 맥퀸은 묘한 눈으로 둘을 응시했다. 기사들이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설마, 우리를 죽이지는 않겠지요?”
“같이 가자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네놈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소. 약속했잖소. 망명을 돕기로…….”
“너희 같은 쓰레기를 받아줄 요란이 아니다!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하고 썩 갈 길을 가거라!”
맥퀸의 호통소리에 기사들은 질색을 하며 매달렸다.
“이보시오! 아니, 후작 각하! 이대로 우리만 떨어지면 우린 잡혀죽습니다! 망명을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우리를 요란의 국경까지만 데려다 주십시오.”
우웅!
맥퀸의 검이 오러를 품었다.
“죽여줄까?”
“헉!”
둘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고 간절한 눈빛을 맥퀸에게 주었다. 맥퀸이 다시 소리쳤다.
“어디 산에나 처박혀 사냥이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거라. 흥!”
맥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소리쳤으나 맥퀸은 빠른 시간에 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따, 새끼 정말 빠르네.”
“그러게 말입니다. 놓아주기엔 조금 아까운 놈인데요?”
기사들의 표정과 말투가 바뀌었다.
그리고 얼굴과 몸집이 서서히 변하더니 사공진무와 데얀이었다. 비열한 기사를 연기했던 사공진무가 기지개를 쭉 펴며 중얼거렸다.
“후후! 놈의 기억에 새겨진 진천의 환술이 작용하면 꽤나 혼란스러울 거다.”
“정말 이런 변신술은 처음입니다.”
데얀이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는 사공진무가 해준 변신이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뭘 쓰거나 붙이는 것이 아니고 골격 자체를 바꾸는 축골공을 데얀이 어찌 알까?
“가자! 주공께 보고를 드려야지.”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