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시작된 제국과의 전쟁
레인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마스터라는 작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오더니 3,000이 넘어가는 기마병들과 마법사들이 포로로 잡혔단다.
자신도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이렇게 돌아온 거란다.
“그게 진정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전마는 모조리 적에게 압수되어 적의 군마로 쓰인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틀 후에 놈들이 10만의 기병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아군을 요격하려고 출전한다고 했습니다.”
레인은 엄청난 정보에도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포로로 잡혔다던 네가 그런 기밀을 어찌 들었단 말이냐?”
“탈출을 하는 과정에서 적의 수뇌부가 수군거리는 걸 들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단장님!”
맥퀸은 자신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늘어놓았다.
뇌에서 내려진 명령이 그대로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모두가 진천의 환술이 작용한 탓이다.
물론 맥퀸, 본인은 그걸 느끼지 못했다.
“루턴, 자네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심쩍긴 합니다만 흘려듣기엔 워낙 큰 정보라…….”
맥퀸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정찰병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미리 보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레인과 루턴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게 좋겠군. 그리고 자네!”
레인이 맥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순간 맥퀸은 전신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 하는 느낌을 받았다. 레인의 눈동자가 붉은 혈광을 순간적으로 발산했다가 사라졌다.
“아무 이상이 없군. 좋다! 일단 거처로 돌아가 쉬어라. 자세한 건 내일 다시 만나서 말하도록 하지.”
맥퀸이 돌아가자 루턴 후작이 물었다.
“적의 마법사들이 저 친구에게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닐까요?”
“그건 아니다. 방금 살펴보았더니 그런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기마병들이 3,000기나 포로가 되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마병이 포로가 되었다면 적의 대군을 만나 사방을 완전하게 포위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마병이 포로가 될 순 없습니다.”
“단 한 기의 기마조차도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의 포위가 가능한 거라고 보는가? 그 넓은 평원에서 말이네.”
“그건…….”
레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중얼거렸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느낌이…….”
* * *
홀베른 왕궁의 성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기마병들이 지축을 흔들며 쏟아져 나왔다. 휘황찬란한 부대기들을 앞세우고 햇빛에 번쩍이는 갑주를 걸친 그들은 단호한 결의를 담은 눈빛으로 북쪽을 응시하며 달렸다.
평원의 초입에 이르러 세 방향으로 나뉜 그들은 평원에 접어들자 질풍처럼 내달렸다.
각각 5,000기로 이루어진 기마병단들이 삼면으로 빠져나가자 뒤이어 10,000만에 달하는 한 무리의 기마병들이 다시 정문을 통해 쏟아졌다.
선두에 갑주가 아닌 장포를 걸친 혁련천후가 늠름하게 앉아 있었고 좌우를 팔왕이 호위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쪽은 데얀을 비롯한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과 혁련소, 연소민 등이 따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홀베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전면전에 앞서 적의 선봉을 꺾어 놓은 작정으로 요격에 나서는 길이다.
그들이 출발한 뒤, 반나절 간격을 두고 룻거 후작이 전 병력을 몰고 평원의 끝부분에 본진을 차리기로 이미 약조되어 있었다.
두두두두…….
그들이 일으킨 눈가루가 폭설이 내리듯 하늘을 덮었다.
성곽 위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들에게 열렬히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본토에 남기로 한 홀베른 국왕도 첨탑에서 경건하게 허리를 숙여 혁련천후를 배웅했다.
“홀베른 만세!”
“제국의 콧대를 밟아주십시오!”
“무사히 돌아오세요!”
백성들은 저마다 목청을 높였다.
모든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1만의 전사들은 빠르게 평원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한편, 요란 제국의 본진에서도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각각 세 방향으로 나뉘어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 막스는 본진에 앉아 출전하는 자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일단은 세 방향에서 몰려오든 놈들을 먼저 쓸어버리고 곧장 왕궁으로 향할 것이다! 가서 제국의 위대함을 놈들에게 보여주고 오너라!”
우와!
10만 대군이 함성을 지르자 천지가 진동했다.
출전을 하지 않는 레인은 막스 황제의 뒤에 시립한 채, 중앙군 3만을 이끌고 나서는 루턴 후작을 바라보았다.
[무조건 살아서 돌아오게!]
[적장의 목을 들고 오겠습니다!]
루턴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막스 황제의 황제검이 하늘로 올라가자 대군은 눈가루를 일으키며 삼면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 * *
평원의 우측을 가로질러 적, 본진의 좌측으로 출전한 홀베른의 마스터 드송크 후작은 5천 기병과 함께 속도를 줄여가며 북진했다.
“우리는 적의 시야를 흐릴 목적으로 출전을 한 것이니 적의 기병과 마주치면 곧장 후방으로 후퇴해라! 어리석은 만용으로 작전을 방해하는 자는 엄히 다스릴 것이다!”
“예!”
그랬다.
그들은 일종의 미끼였다. 적에게 흘린 정보를 사실로 믿게 만들려고 출전한 그들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기사들로 변장하여 섞여 있는 마법사들이 적의 출현을 발견하기만 하면 곧장 말 머리를 돌려 왕궁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물론 적이 자신들을 발견했을 때, 후퇴해야 한다. 그래야 믿으니까.
드송크 후작은 다시 명령을 이어갔다.
“적이 계속 추격하면 왕궁이 아닌 상왕 전하가 계신 곳으로 유인할 것이다. 모두들 머리에 작전을 새겨 넣고 유사시에 추호의 당황함도 보여선 안 될 것이다!”
예!
기사들의 대답소리는 꽤나 우렁찼다.
“대형을 횡렬로 바꾸어 이동한다!”
“대형을 횡렬로 바꾼다!”
기사들이 익숙하게 진형을 종렬에서 횡렬로 바꾸었다.
넓은 평원이라 유사시 더 높은 속도를 낼 수 있기 위함이었다. 쏟아지던 눈과 우박은 이미 아침나절에 멈추었다.
다만 쌓인 눈 때문에 그들이 이동한 흔적은 고스란히 평원에 남았다.
“자작님! 왜 적에게 발견되면 싸우지 않고 후퇴해야 합니까?”
기사 하나가 물었다.
“작전이니 그리 알아라!”
기사들은 작전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의 상황을 감안하여 평기사들에겐 비밀로 한 것이다. 만약의 상황이란 추격전을 펼치는 와중에 낙마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포로가 되는 경우인데 그로 인해 작전이 누설될 것을 꺼린 것이다.
드송크 자작의 좌우에는 다소 갑주가 어색해 보이는 기사들이 있었는데 드송크 자작도 그들에겐 공경한 자세를 취했다.
바로 기사로 분장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장거리 탐지능력이 뛰어난 마법사들이다. 그들이 적을 빨리 발견하고 못 하고의 차이에서 위험의 정도가 결정된다. 적보다 먼저 발견하면 적당히 모습을 비쳐주고 곧장 도주하면 별다른 위험은 없다.
“전마에게 건 라이트 마법에 이상이 없는지를 세밀히 살펴야 한다!”
마법사는 기사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앞서 전마를 몰아갔다.
빠르게 둔덕으로 올라 선 마법사들은 캐스팅을 하고는 시계를 넓혔다.
“아직 보이지 않는군. 설마 놈들이 눈치를 챈 것은 아니겠지?”
“그분들이 보통 분들인가. 분명 놈들도 세 방향으로 나뉘어 출전을 했을 것이네. 다만 병력이 어느 정도가가 문제겠지.”
그때, 마법사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평선 너머에서 눈가루가 일어나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놈들이군. 저 정도 최소 수만 명은 되겠어. 작정을 하고 나선 모양이네.”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쉽게끔 둔덕을 넘어서 적당히 움직여주는 게 좋겠군. 가세나!”
둘은 재빨리 기사들에게로 돌아와 적의 출현을 알렸다.
“둔덕을 넘어간다!”
드송크 후작의 명령에 모두는 빠르게 둔덕을 넘어 평지대로 들어섰다.
일부러 전마들을 좌우로 움직여 눈가루를 자욱하게 날게끔 만들었다. 병력의 수를 많아 보이게 하고는 재빨리 돌아갈 심산이었다.
“적의 척후병입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과연 전방에 몇 기의 기마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도 이쪽을 발견한 듯 전마를 세우고는 한동안 유심히 쳐다보았다.
“눈가루를 더욱 많이 일으켜라!”
전마들이 더욱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마침 바람이 뚝 멈추는 바람에 눈가루가 좀처럼 날리지 않았다. 적의 척후병들이 말 머리를 돌려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기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드송크 후작을 응시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들어오면 그때 후퇴한다! 모두들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라!”
마법사들은 다시 조금 앞으로 나서서 적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잠시 후, 마법사가 목청을 높였다.
“돌아간다!”
“말 머리를 돌려라! 왕궁으로 돌아간다!”
5천의 기마병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려 도주를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품속에서 새를 꺼내더니 어디론가 날려 보내고는 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 * *
요란의 좌군을 맡은 캘로그 후작은 목청껏 소리쳤다.
“추격해라!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섬멸하라!”
두두두두…….
3만 기병이 바람처럼 달렸다.
선두에서 질주하는 상위귀족들의 전마들이 조금씩 앞서기 시작하더니 1천 기 정도의 전마가 상당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엄청난 가격의 마갑을 입힌 탓이다.
최상급 마갑에는 상위서클의 마법사들이 걸어놓은 라이트 마법이 처져 있다. 덕분에 그들은 훨씬 빠른 속도로 홀베른의 기마병들을 추격해 들어갔다.
“쥐새끼들! 모든 작전이 드러났음을 모르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모조리 쓸어주마! 이랴하!”
캘로그 후작은 전마에 박차를 가했다.
거리가 점점 좁혀들기 시작했다.
도주하던 드송크 후작은 생각 이상으로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자 내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벌써 500미르 거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곧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그때 마법사들이 말위에서 거꾸로 돌아앉았다.
대단한 기마술을 그들이 보여주었다.
“어서 쫓아와 보아라! 이놈들!”
치르륵!
둘의 양손이 마나를 품었다.
사정거리에 들면 그대로 화염계열의 장거리공격을 펼칠 심산이었다. 다행히 추격해 오는 적군에는 마법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들은 갑주를 믿거나 뛰어난 고수들이 오러를 뿜어서 막아야만 한다. 달리는 와중에 그러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속도를 높여라!”
드송크 후작은 목청껏 소리쳤다.
그는 일부러 가장 뒤쪽에서 마법사들과 함께 속도를 맞추었다.
“제크! 놈들의 앞쪽에 한 방 먹이게!”
“알았네!”
제크라 불린 마법사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가더니 곧장 매섭게 앞으로 뻗어갔다. 그의 손에서 발출된 화염은 점점 더 크게 확산되더니 15미르에 달하는 넓이를 막아서며 바닥에 화염을 일으켰다.
콰과광!
놀란 일부 전마들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기사들 몇이 중심을 잃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뒤이어 달려온 전마들에 의해 참혹한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캘로그 후작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속도를 줄이려는 심산이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떨어지는 자들을 피하지 말고 곧장 직선으로 달려라!”
참으로 악독한 명령이 떨어졌다.
화염은 계속해서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며 떨어졌다. 죽어가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결코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악독한 놈들!”
드송크 후작은 적의 악독함에 치를 떨었다.
덕분에 속도를 줄여보겠다는 작전이 소용이 없어졌다. 오히려 독기에 받힌 그들은 더욱 빠르게 쫓아오는 듯 보였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린다.
“후작! 아무래도 상왕 전하께서 이동하시는 곳으로 가야겠소!”
“동쪽으로 선회하라! 동쪽으로 선회하라!”
드송크 후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파이어!”
자크의 손이 또다시 화염을 쏟아냈다.
쾅!
“우악!”
이번엔 제법 많은 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트는 와중에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 탓이다. 지금껏 공격을 하지 않던 다른 마법사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주 작은 유리알을 듬뿍 쥔 그는 적의 기마병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거리는 50미르 정도로 무척 가깝게 좁혀진 상태였다. 이 정도면 전마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공격사정권에 접어드는 거리였다.
“자크! 내가 공격하면 넌, 놈들의 머리 위에 파이어 볼을 터트려라!”
“알겠소!”
현재로서는 드송크 후작의 부대를 보호할 존재들은 둘뿐이었다.
* * *
1만의 최정예를 이끌고 이동 중이던 혁련천후의 부대에서 각기 세 방향으로 떨어져나가는 기사들이 보였다.
조윤과 흑야가 2천을 이끌고 북쪽으로, 담대소천과 왕전이 2천을 이끌고 서쪽으로, 북궁천소와 혁련소가 역시 2천을 이끌고 둘을 가운데 방향으로 바람처럼 질주하며 사라져갔다.
적을 교란하려고 출전했던 세 부대가 동시에 전령을 보내온 것이다.
진천이 혁련천후를 보며 말했다.
“하루거리에 놈들의 본진이 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쯤이면 룻거가 전 병력을 이끌고 평원에 본진을 꾸려놓았을 겁니다!”
혁련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주변 지형을 세밀히 살펴보도록 해.”
“지형이라야 평지뿐입니다. 전차부대를 활용하기에 딱 좋은 곳이긴 합니다만 본진과 너무 먼 곳이라…….”
“기동력이 느린 전차부대는 본진과 가까운 곳에서만 활용해야 한다. 이곳은 기병으로 유격전술만 펼치는 게 좋겠지. 진천! 진무!”
둘이 빠르게 다가왔다.
“나와 놈들의 본진이 꾸려진 곳을 가봐야겠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슬쩍 살펴보고 돌아오는 거니 괜찮아.”
“저들은 본진으로 돌려보냅니까?”
사공진무가 데얀을 비롯한 4천 기병을 가리켰다. 혁련천후가 갑자기 말을 몰아 그들 앞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혁련천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아리엘이 함께하고 있었다.
“출발하지!”
진천과 사공진무가 멀뚱한 표정으로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제가 지켜 줄게요!”
싱긋 웃는 그녀를 둘은 황당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가는 아리엘을 가리키며 사공진무가 말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돌려보낼 재주가 있으면 제발 그렇게 해봐.”
“…없죠.”
* * *
구슬이 둥실 떠올랐다.
10개 남짓해 보이던 수가 서서히 늘어나면서 햇빛에 반사되어 빛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뒤를 쫓아오는 요란의 기마병들은 미처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태양을 마주보고 질주하는 데다가 다른 곳에 비해 많은 눈이 깔려 있었던 탓에 하얀 빛으로 반짝이는 구슬을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아이스 붐!”
마법사의 양손이 앞으로 쭉 뻗어갔다.
동시에 구슬들이 요란의 기마병들을 향해 빛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동시에 자크의 파이어 볼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폭발을 일으켰다.
쾅!
퍼퍼퍼퍼퍽!
하얗게 빛나던 구슬들이 시뻘건 불꽃으로 바뀌어 사정없이 전마와 기사들의 육신을 꿰뚫었다. 갑주가 있는 곳은 튕겨나갔지만 얼굴이나 허벅지 같은 곳은 어김없이 피가 솟구쳤다.
따다다당!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구슬들을 막아낸 캘로그 후작은 악에 받힌 고함을 질러댔다.
“조금만 더 달리면 따라잡는다! 속도를 늦추지 마라!”
20미르!
캘로그 후작의 검이 오러를 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상당한 피해를 준 기사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들이 기사로 변장한 마법사임을 진즉에 간파하고 있었다.
“죽여주마! 으드득!”
수백에 가까운 기사들이 둘의 마법공격에 당했다.
전마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해 나간 기사들까지 합치면 2천에 가까운 기사들이 전투력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작 둘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엔 상당한 피해였다.
* * *
“후작! 산개합시다! 이대로 가면 모두 당할 수밖에 없소!”
자크의 말에 드송크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거리가 거의 잡힐 지경까지 좁혀든 상태였다. 둘의 마법공격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둘은 이미 마나의 소모가 극심한 상태라 더 이상의 공격도 힘들어 보였다.
소수라도 살려면 산개해서 도주해야 한다.
“홀베른의 잡종들!”
적장의 고함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드송크 후작은 어쩔 수 없이 산개하기를 결심했다. 모두를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입을 벌려 산개를 명하려고 할 때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강력한 파이어 볼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자크가 펼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것은 곧장 요란의 기마병들 전방에서 폭발했다.
콰앙!
“으악!”
히히힝!
전마와 기사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날아갔다.
“아군이다! 아군이 왔다!”
“공주님이시다! 공주마마께서 오셨다!”
드송크 후작은 놀란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햇살처럼 밝아졌다. 능선을 타고 폭풍처럼 질주해 들어오는 기마병들, 선두에 사납기가 세상에서 으뜸이라는 북궁천소가 보였고 눈부신 은발을 휘날리는 혁련소도 있었다.
그리고 양손에 마나를 두르고 질풍처럼 달려오는 에이미 공주와 연소민도 보였다.
“좌우로 선회하며 적들을 맞이하라!”
드송크 후작의 입에서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기사들이 두 부대로 나뉘어 좌우로 방향을 틀어가며 생긴 공간으로 북궁천소가 이끄는 2천의 기마병들이 짓쳐들었다.
“후후! 새로 얻은 대도가 사람에겐 어느 정도로 먹히는지 궁금했었다.”
북궁천소의 대도가 태양에 반사되어 섬뜩한 빛을 뿌렸다.
* * *
“각하! 적의 구원병입니다! 엄청난 마법사도 끼어 있습니다!”
부관의 다급한 외침에 캘로그 후작은 목청껏 외쳤다.
“수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우세하다! 그대로 쓸고 지나간다!”
캘로그 후작은 수를 믿었다.
적병은 두 부대를 합쳐 어림잡아도 1만이 안 되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3만, 적에게 강력한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승산은 충분했다.
“모두 우회하여 적을 에워싼다!”
홀베른의 쫓기던 기병들이 좌우로 돌아서 말 머리를 자신들에게로 돌리자 캘로그 후작은 대열을 횡렬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3만에 달하는 대병력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신속하게 대열을 바꾸었다. 그러나 미처 우회하지 못한 기마병들에게로 북궁천소와 2천의 기병들이 돌진해 들었다.
콰지지직!
전마와 전마가 그대로 육탄으로 충동하며 피와 비명이 난무했다. 떨어져 나간 전마들은 모조리 요란의 것들이었다.
홀베른의 선두에는 북궁천소와 혁련소 같은 무지막지한 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이 발산한 강력한 호신강기는 철갑으로 무장한 전마라도 감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으악!”
“요란의 개들을 쓸어라!”
측면이 허무하게 돌파를 당하자 캘로그 후작의 눈이 불을 뿜었다.
“저놈들! 새롭게 나타난 저놈들을 집중 공격하라!”
방향을 튼 기마들이 질풍처럼 북궁천소 등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숙부! 저놈이 수장이네요. 놈은 제가 잡습니다!”
“쩝! 그래라.”
수만 기병이 지축을 흔들며 달려들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아리안으로 살아갈 때의 갑주를 걸친 연소민은 혁련소의 옆을 바짝 붙어서 움직였다.
지난날과는 비교불가의 경지에 접어든 그녀는 벌써 상당수의 적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에이미! 놈들에게 혼란을 좀 줘봐!”
혁련소의 말에 에이미 공주는 양팔을 다시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어쩌면 지금 요란의 기마병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그녀일 수도 있었다. 대량살상이 가능한 마법공격이 그녀에겐 무척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가급적 대량살상용 마법은 자제하고 있었다. 심성이 너무 착한 탓이다.
“봐줄 것 없다! 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홀베른의 백성들이 죽는다.”
북궁천소의 말에 에이미 공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치르르르…….
그녀의 양손이 뇌전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빛으로 둘러졌다.
“모두 물러서라! 접근하지 마라!”
혁련소의 외침에 적에게 달려들던 기마들이 재빨리 방향을 틀어 좌우로 빠져나갔다. 그에 맞추어 에이미 공주의 손에서 강렬한 빛의 번쩍임이 보였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쩌저저저정!
평원이 굉음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모두는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캘로그 후작은 엄청난 빛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세상이 백색의 빛으로 둘러지는 기묘한 광경도 보았다.
살기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멍하니 변해갔다.
“…종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 * *
초원을 가득 덮은 천막들 위로 화려한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전마들을 풀어놓은 곳에는 각양각색의 마갑을 두른 전마들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포효하고 있었고 초원의 한곳에서 훈련을 하는 기사들은 힘이 넘쳐났다.
“대단하군요. 역시 제국은 그냥 제국이 아닌가 봅니다.”
“정예란 정예는 모조리 끌고 온 모양입니다.
진천과 사공진무가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지금 초원의 우측에 자리한 낮은 산의 꼭대기에서 요란의 본진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혁련천후의 시선은 오직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진영의 가장 중앙에 거대하게 솟아올라 있는 구조물, 그곳의 지붕엔 요란을 상징하는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그곳이 황제가 기거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저곳에 켈베로스라는 놈이 있겠군.’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묘한 흥분이 생겨났다.
중원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강적에 대한 호기심과 조금의 긴장감은 모처럼 그를 광포했던 지난날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놈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무척 궁금합니다.”
진천이 역시 같은 곳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모두에게 가장 궁금한 존재는 단연 켈베로스였다. 그를 넘어서야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승리를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미지의 존재에 대한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놈이 트로이안의 심장을 지니고 왔다면 우리도 아이아스의 심장을 직접 지니고 출전했다는 것을 놈들에게 흘려야 한다.”
“놈이 왕궁으로 난입하는 것을 염려하십니까?”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그랬다.
켈베로스는 아이아스의 심장이 있는 곳을 왕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여의치 않을 경우 분명 왕궁으로 난입하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에겐 오직 그것이 목적이니까.
“놈과 나의 정면대결로 이끌 것이다. 무조건 둘 중 하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끝나는 싸움이 되겠지.”
혁련천후의 눈이 강렬한 빛으로 이글거렸다.
우르릉…….
다시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눈이 내리기 전에도 뇌전이 몰아친다. 몰아친 뇌전의 여운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하늘은 하얀 눈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드드드드…….
케논 산맥의 옹고르 분화구가 강력한 진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천 년 전에 폭발했던 화산이 다시 폭발을 일으키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진동은 점점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더욱 강력하게 변해갔다.
쩌저적!
암벽들이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내렸다. 언제 모여들었을까? 사라졌던 몬스터들이 옹고르 분화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괴성을 질러댔다. 암벽이 무너져 깔려죽는 몬스터들도 속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피하는 몬스터는 없었다.
인간과의 전쟁으로 수십만이 죽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엄청난 수를 자랑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이 다시 모인 것일까?
크르르…….
끼아악…….
허공을 선회하는 와이번들이 마치 무엇인가가 다가왔음을 알리듯 쉬지 않고 울부짖었다.
쩌저저적!
다시 암벽 하나가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를 피워냈다. 그리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번쩍 하는 빛이 보였다.
몬스터들이 더욱 광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몬스터들이 빛이 번쩍인 곳으로 몰려들었다. 오우거에 밟혀죽는 고블린들이 속출했고 서로 빨리 다가가려고 동족을 죽이는 참상도 벌어졌다.
번쩍!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희미한 그림자가 그곳에 나타났다. 처음엔 하나였던 것이 둘, 셋, 넷까지 늘어나더니 몬스터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후후후! 오랜만에 다시 돌아왔군.”
허공을 웅웅거리는 굵직한 목소리가 옹고르 분화구 전체를 울렸다.
핏빛처럼 붉은 갑주를 걸친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광기를 드러내는 몬스터들을 보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암흑의 왕이시여! 저곳에서 켈베로스, 놈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누군가가 북쪽을 가리키며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놀랍게도 그는 황태자 카르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은 폭스 후작과 크루즈 백작이 더욱 사악해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렇다면?
“후후후! 나 칸빌이 궁극의 힘을 얻어 돌아왔도다. 켈베로스를 죽이고 그 인간 놈들마저 죽인 다음 이 세상을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겠노라!”
역시 칸빌이었다.
그는 지난날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체격도 보통의 사람과 비슷했고 뿔과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왕이시여! 마계의 왕자가 인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놈도 반드시 소멸시켜야 합니다.”
“당연하지. 하지만 놈은 아직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할 터, 켈베로스와 그 인간들부터 소멸시킬 것이다. 아이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갈 것이다!”
* * *
요란 제국의 황제, 막스는 분노했다.
세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첩보를 접하고 출전했던 10만 대군의 절반이 목숨을 잃고 고작 5만이 돌아온 것이다.
참패도 대참패였다.
게다가 주요 인사 중 하나인 루턴 후작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전사했다는 보고는 없었으나 그가 돌아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요란은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이라고 봐야 했다.
비교적 느긋하게 전쟁을 바라보았던 막스는 스스로 전 병력을 이끌고 홀베른으로 출격하기에 이르렀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평원을 새카맣게 물들이고 전진하는 요란 제국의 대병력은 복수의 칼을 갈며 홀베른으로 한걸음씩 나아갔다. 분노는 했지만 여전히 승리에 자신이 넘쳤던 막스 황제는 스스로 갑주를 갖추어 입고는 마차가 아닌 전마에 몸을 싣고 선두에서 달렸다.
레인은 막스 황제의 옆을 이동했다.
막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홀베른으로 보냈던 아이들에게선 소식이 없느냐?”
“아직은 없습니다만 곧 첩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이아스의 심장을 보관하고 있는 곳에는 분명 가장 강한 놈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너와 크로우기사단이 먼저 놈들에게 혼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다음에 어둠의 마법사들이 스승님과 함께 그곳을 칠 것이니 너희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말고 홀베른으로 숨어들 기회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대단한 놈들임에는 분명하구나. 고작 수천 기로 아군을 그토록 쓸어버릴 수 있다니…….”
“출전했던 기사들이 수에 비해 정예는 아니었으니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십시오. 전면전에서 일거에 쓸어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막스 황제는 레인의 그 같은 말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레인이 문득 뭔가를 생각했다는 듯 물었다.
“케이시 대공을 부르시지요. 루턴이 없으면 그분이라도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들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내일쯤이면 짐과 합류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데려올 것을…….”
막스 황제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자신의 동생이자 제국의 이인자였던 케이시 공작은 황태자였던 카르스와의 정치적인 싸움에서 밀린 탓에 지금까지 전면에서 멀어져 있었다. 막스 황제도 그를 지금껏 내버려두었으나 대군을 이끌어야 할 루턴이 행방불명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케이시 공작을 사면하고 전장으로 부른 것이다.
케이시 공작은 누가 뭐래도 제국 최고의 전략가이자 군인이었다.
“전쟁에서만 중용하십시오. 그분은 야심이 너무 큽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면 자칫 폐하께 크나큰 짐이 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그분을 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점은 짐도 생각하고 있으니 안심하여라. 어리석은, 이럴 때 짐의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꼬…….”
막스 황제는 아들 카르스를 떠올렸다.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막스 황제는 알고 있었다. 케논 산맥에서 카르스를 보았다는 기사들의 말로 추측해 보면 영혼이 봉인을 당한 데스 나이트가 되었음이 분명했다.
레인이 그를 위로했다.
“폐하께서 이토록 강녕하신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황자를 생산하시어 그분께 제국을 맡기십시오. 신이 옆에서 충성으로 보필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이 되면 너를 대공의 위에 올릴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짐에게 충성토록 하여라!”
레인의 어깨를 두들겨준 막스 황제는 시선을 다시 전방으로 던졌다.
홀베른이 본진을 차렸다고 전해진 곳까지는 아직 하루를 더 이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벌써 승리를 거머쥔 듯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아스의 심장을 얻고 케이론만 쓸어내면 짐은 명실상부한 대륙의 일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년만년을 이어갈 위대한 제국을 나, 막스가 세울 것이다.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 최고최강의 제국을 말이다.”
막스 황제의 포부가 바람을 타고 홀베른으로 날아갔다.
내리던 눈발이 점점 거세게 변해갔다.
그럼에도 요란의 대병력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홀베른으로의 동진을 계속했다.
* * *
레이나 공주는 친히 갑주를 걸치고 대군을 이끌었다.
홀베른에서 날아온 통신에 의하면 오늘 아침 요란의 주력군이 홀베른으로 대대적인 출진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의 배후를 치고자 15만의 정예를 이끌고 홀베른의 대평원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루안이 함께하고 있었다.
지금껏 홀로 움직였던 그가 함께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레이나 공주는 내심 무척 기뻤다. 그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엄청나다.
특히 그녀가 얻는 심적인 안정감은 상당했다. 가끔 루안을 돌아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미소로 화답해 준 그녀는 전마에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반나절을 이동했을 때였다.
척후를 나갔던 기사들이 돌아와 뜻밖의 상황을 알렸다.
“상당한 수의 몬스터들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수가 10만에 육박하는 엄청난 대군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깜짝 놀라서 블랙 오우거의 존재를 물었으나 다행히 블랙 오우거는 없다고 하자 다소 마음을 놓았다.
루안이 중얼거렸다.
“몬스터가 그 정도로 움직인다면 지난번처럼 마계의 누군가가 또 넘어왔다는 것인데…….”
“어떡하죠? 그들이 이동하는 방향이 우리와 겹쳐요.”
“어쩌긴, 없애고 가야지.”
“수가 너무 많아요.”
“그깟 몬스터 따위는 백만이라도 별것 아니야. 블랙 오우거가 있다면 몰라도…….”
루안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레이나 공주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명령을 내렸다.
“좋아요! 몬스터를 먼저 치기로 해요! 각 부대장들에게 전달하세요!”
케이론의 대군들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조금이 지나서 몬스터대군과 맞닥뜨렸다.
* * *
혁련천후는 적이 총공격을 감행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는 모든 부대에 평원에 진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부대들이 훈련 때처럼 각자 정해진 위치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여전히 전차부대는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적이 평원에 들어섰을 때, 선봉으로 나서 적의 가운데를 휩쓸 예정이었다. 마법병단을 이끄는 진천과 사공진무는 가장 먼저 능선에 자리 잡고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가능한 장거리 공격으로 적의 대열을 최소한이라도 어지럽힐 목적이었다. 물론 가능하면 적의 마법사들을 요격할 생각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사공진무는 드래곤의 뼈로 만든 암기들을 잔뜩 몸에 지닌 상태였다.
“조금은 긴장되는데…….”
“나도 그렇다. 이건 정말 중원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전쟁이잖아.”
“기병의 수로만 놓고 보면 중원도 이 정도는 아니다. 처절한 경험이 될 거다.”
둘은 조금은 긴장한 기색으로 평원의 끝을 바라보았다.
에이미 공주도 그들의 옆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요란 제국의 기마병단을 상대로 가공할 살상 능력을 보여준 그녀를 모든 마법사들은 경외하고 있었다.
홀베른의 마법사들도 그녀가 그 정도로 강력한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은 에이미 공주가 대마법사를 능가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에이미! 이번에도 제대로 한번 쓸어봐.”
“쉽지 않을 테죠? 전군이 온다면 분명 그들도 상위마법사들이 있을 테니까…….”
“후후! 몇 놈은 내가 골로 보내줄 거다.”
사공진무가 손에 날카롭게 생긴 표창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마법사들은 사실 그것을 믿지 못했다. 팔왕 중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이가 바로 사공진무였다. 그리고 지금껏 진법 외에는 별다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물론 데얀과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은 예외다.
특히 사공진무와 가장 먼저 겨루었던 데얀은 은근히 그를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온다!”
진천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모두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들어갔다. 평원의 끝에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까만 점들, 그것은 점점 커지고 많아지더니 이내 지평선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드드드드…….
그들이 서 있는 곳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사공진무가 뒤를 돌아보며 적이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숲에서 전차부대가 위용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크르르르…….
북궁천소와 혁련소가 선두의 전차에 올라타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갑주를 걸친 모습이다. 그들을 막아선 능선 때문에 적은 능선 위에 있는 마법병단만을 볼 뿐이다.
혁련천후가 눈빛을 보내자 모든 부대들이 능선을 가운데로 하여 좌우로 포진했다.
측면을 공격할 돌격부대는 이미 이동지로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혁련천후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카루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뭔가를 다짐하기라도 하듯 앙증맞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난 죽지 않아. 살아서 꼭 중원이라는 곳에 갈 거야.’
카루가는 혁련천후의 팔을 꼭 잡았다.
“두려우냐?”
“응! 조금…….”
“후후! 우린 승리한다. 무조건…….”
능선에 진을 쳤던 마법병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이미의 양손이 하늘로 올라갔고 진천의 육신은 이미 극강의 환술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사공진무의 낭랑한 외침이 모두의 귓속을 울리며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하! 신마성의 팔왕, 사공진무가 여기 있다!”
「흑안의 마검사」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