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49화 (49/55)

제2장

켈베로스의 정체

“으합!”

혁련소의 전신은 시커먼 마기로 둘러져 그 어떤 것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천살강기는 잃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마계의 기운을 얻은 그는 지난날보다 더욱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소민도 제국 최초의 여 마스터라는 소문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다.

혁련천후에게서 전수받은 천살강기까지 펼쳐내자 제국의 초인이라는 자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강자로 변신해 있었다.

전차를 버리고 전마에 올라탄 둘은 기사들을 이끌며 적진을 유린하고 다녔다. 그러나 상대도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간간이 기사들 틈에 섞여 있던 마법사들의 저격은 꽤나 위험했다. 그들이 공격을 가하기 전에는 결코 마법사임을 눈치 챌 수 없었던 까닭에 상위귀족들, 상당수가 그들의 저격에 쓰러졌다.

혁련소는 능선에서 빛을 번쩍이며 싸우고 있는 아버지와 숙부들을 응시하고는 호흡을 골랐다.

“숙부가 저곳에 있으니 놈들이 활개를 치는구나! 소민! 아무래도 우리가 적의 마법사들을 요격하는 것이 좋겠어!”

“알았어요! 조심해요!”

둘은 곧장 전마를 버리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이 사라져간 곳에 어둠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동시에 왕전과 북궁천소, 사공진무가 그들을 쫓아 내려섰다.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어둠의 마법사들은 의외로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상성의 기운이 존재했을까? 이미 상당수가 왕전 등에 의해 환생이 불가능한 소멸을 당한 상태였다.

“이놈들만 해치우고 주공을 돕는다!”

“좋다!”

쾅!

그들이 섰던 곳에 화염계열의 마법이 작렬했다.

전장에 몸을 숨겼던 마법사들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에 당할 그들이 아니다.

이미 신형을 뽑은 왕전은 어둠의 마법사를 덮쳤고 북궁천소와 사공진무는 기습을 가한 마법사의 목을 잘라냈다. 허공에서 괴상한 소리가 울리며 어둠의 마법사 하나가 연기처럼 소멸되는 광경이 보였다.

왕전의 고함이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머지는 진천에게 맡기고 우린 주공을 도우러 가자!”

셋의 육신이 능선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걸려드는 요란의 기사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이 좌우로 갈라졌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전장에서도 그들의 광포함은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두려움에 길을 터주자 셋은 빠른 시간에 능선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 * *

콰과과광!

화염이 연속적으로 한곳에 집중되어 떨어졌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마법사들의 공격에 진천은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그들을 저격해 나갔다.

“나쁜 놈들! 그냥 막 퍼붓는구나!”

진천의 감각에 마나의 순간적으로 강하게 움직인 기사가 걸려들었다.

“그곳에 숨었더냐?”

진천의 손이 쫙 펼쳐졌다.

그러자 다섯 줄기 지풍이 화살처럼 날아가더니 요란의 기사들, 다섯이 목에 구멍이 뚫리며 쓰러졌다. 그중 하나가 마법사였다.

깡!

진천의 어깨에 검이 작렬했다.

워낙 난전이라 뒤쪽에서 날아든 것을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진천은 멀쩡했다.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그의 갑주를 뚫지 못한다. 더욱이 호신강기까지 두르고 있었으니 마스터 급이 아니면 그의 육신에 상처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시원했어! 고마워!”

퍽!

기습을 가한 자의 가슴에 구멍이 뚫리며 피분수를 쏟아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보인 진천이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여전히 팽팽했지만 확실히 홀베른이 유리한 고지를 점해가고 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때 진천의 눈이 살짝 이채를 발했다.

“무식한 놈들이군!”

전장의 가장 외곽에 요란의 기마병 5천 정도가 상당히 길고 육중한 랜서를 무기로 홀베른의 기병들을 몰아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워낙 중병에 사정거리가 길었던 탓에 홀베른의 기사들이 다가가지 못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진천의 육신이 바닥을 차고 올랐다.

따다다당!

마법사들이 펼친 저격은 모조리 그의 호신강기에 튕겨나갔다.

“수고해!”

진천에게 저격을 가했던 마법사들은 케니언 크로우기사 단원들에 의해 목이 잘렸다. 마나를 발출하면 어김없이 그들은 죽어나갔다.

기사들에게 소리쳐 준 진천은 곧장 기사들의 머리를 도약판으로 삼아 외곽으로 날아갔다.

진천이 그곳에 미처 다다르기도 전이었다.

번쩍!

콰앙!

요란의 기마병단에 거대한 빛이 떨어져 폭발했다.

사람과 전마가 한꺼번에 사방으로 날아갔다. 한가운데에 정통으로 떨어진 탓에 화염이 몸에 옮아서 쓰러진 자들까지 합하면 1백 명 이상이 단 한 번의 폭발에 날아간 것이다.

놀라운 위력을 보인 공격은 바로 에이미 공주가 펼친 것이었다.

“하하! 역시 대단하구나!”

“조심하세요!”

에이미 공주의 손이 다시 거대한 빛줄기를 뿜어댔다.

기겁을 한 요란의 기사들이 황급히 산개하며 집중포화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들보다는 에이미 공주의 공격이 더 빨랐다.

다시 한 번 엄청난 수의 기사들이 화염에 휩쓸려 날아갔다.

“저는 잠시 쉬어야 해요! 마나가 거의 소진되어서…….”

에이미 공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진천에게 말했다.

“흠! 혼자서는 위험한데…….”

“괜찮아요! 잠시 마나를 보충하고 다시 올게요.”

진천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에이미 공주를 보호할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마나가 소모된 상태라면 어지간한 기사들의 검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백병전을 벌이느라 몸을 뺄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때 요란의 기병들이 용감하게 둘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라!”

수백 발의 오러가 둘이 섰던 곳에 떨어졌다.

그러나 진천은 이미 에이미 공주의 육신을 안고 먼 곳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진천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마나를 회복할 때까지 보호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내가 보호해 주마!”

그는 빠르게 전장으로부터 벗어났다.

평원의 좌측에 솟아 있는 산으로 질주한 그는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내려섰다.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에이미 공주가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요!”

“어서 회복하기나 해.”

“진천님께서 빠지면 상당한 차질이 생길 텐데…….”

“나보단 네가 더 필요하니 어서 마나나 회복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초 양측을 통틀어 40만에 달하는 엄청난 군세였지만 하루가 지나가는 시점에서 반 이상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렇다고 20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평원의 곳곳으로 흩어진 부대도 있었고 개중엔 두려움을 집어먹고 도주한 자들도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엄청나게 많은 기사들이 전사한 것은 분명했다. 특히 대규모 살상마법공격을 엄청나게 맞아버린 요란 제국의 피해는 홀베른의 수배에 달했다.

“마법사들의 능력에서 결판이 나버렸군.”

진천은 새삼 마법의 힘에 감탄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전장은 푸른색 깃발이 붉은색 깃발을 서서히 몰아내고 있었다. 이미 능선에 포진한 황제의 마차를 넘어서서 전투를 벌이는 부대들도 있었다.

그만큼 요란 제국이 뒤쪽으로 상당히 밀려났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비슷한 기사들 간의 무력을 감안하면 에이미과 가인, 카츄 등과 같은 대마법사에 준하는 마법사들의 공로라고 봐야 했다.

물론 가장 큰 공은 혁련천후를 비롯한 팔왕에게 있었다.

그들 때문에 요란의 마법병단은 제대로 된 공격조차 펼쳐보지 못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개전초기에 입고 말았다.

그것이 승패를 가른 것이다.

“하하! 이거 왕국이 제국을 이길 거 같은데?”

“모두가 상왕 전하께서 저희를 보호해 주신 덕분이죠.”

“응? 너 아직 뭐 해?”

“뭘요?”

“아!”

진천이 자기 머리를 툭 쳤다.

그는 에이미 공주가 운기조식을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운기조식을 어찌 알랴? 진천은 당혹한 표정으로 에이미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마나를 빨리 회복할 방법은 없나?”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이런!”

진천은 난감했다.

그저 자신들처럼 운기조식 한 번이면 기운이 회복되는 것으로 그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한동안 전장에 뛰어들지 못한다.

그것은 곧 대마법사보다 강력한 존재가 전력에서 이탈하는 것을 뜻한다. 홀베른으로서는 엄청난 전력의 손실인 것이다.

“그냥 저를 두고 전장으로 가세요. 전장에서 먼 곳이라 괜찮을 거예요.”

“그럴 순 없지. 흠! 방법을 찾아보지.”

진천은 손으로 턱을 괴고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에이미 공주를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 믿지?”

“……?”

“시간이 없으니 무조건 날 믿어라! 그 방법밖에 없다!”

“무슨……?”

진천이 느닷없이 그녀를 안고는 등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는 갑주를 벗기고 속옷까지 벗겼다. 깜짝 놀란 에이미 공주가 뭐라 말을 할 사이도 없이 그녀의 상체는 고스란히 알몸이 되었다.

“이게 지금 뭐 하시는… 흡!”

“말하지 말고 기운을 받아들여. 아플 수도 있으니 참아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로 엄청난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부끄러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것은 뜨거운 고통을 동반했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절대 입을 벌려선 안 되니 무조건 참아!”

에이미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를 꼭 깨물었다.

그들이 묘한 그림을 연출하고 있을 즈음 레이나 공주가 이끄는 케이론의 기병들은 또 다른 적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화아아악!

크루즈와 폭스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지난날보다 더욱 강력해진 상태였고 루안은 그런 그들을 홀로 맞아 싸우고 있었다. 둘을 제외하면 다른 몬스터들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몬스터들이 기마병들에 의해 도륙을 당한 상태였고 나머지도 본능적으로 케논 산맥이 있는 곳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도주하는 방향에서 요란의 대군이 몰려들고 있음을 레이나 공주는 보았다. 홀베른으로 가는 지원 병력으로 보이는 그들은 20만에 육박하는 엄청난 군세였다.

“적이다! 요란 제국이다!”

뿌우웅!

고함과 나팔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한숨 놓으려던 케이론의 기사들은 다시 검을 뽑아 들고 밀려오는 적을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렸다.

“수가 저토록 많다니…….”

지원군으로 보기엔 과할 정도로 큰 군세였다.

레이나 공주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명령을 내렸다.

“저들과 부딪히지 말고 곧장 홀베른으로 향하세요. 마법병단은 나와 함께 루안 공을 도우세요!”

“마마! 위험합니다!”

헤론 후작이 소리쳤다. 그러나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후작께선 어서 기사들을 이끌고 홀베른으로 가세요! 어서요!”

“마마…….”

“루안이 있으니 저는 걱정 마세요. 홀베른에서 뵐게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훌쩍 루안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헤론 후작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명령을 내렸다.

“전군! 홀베른의 대평원으로 이동한다!”

“전군, 전진하라!”

15만에 달하는 케이론이 병력들은 빠르게 북진을 시작했다.

* * *

“각하! 케이론입니다!”

부관이 전방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케이시 공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명령을 내렸다.

“몬스터들은 그냥 돌진해서 쓸고 지나간다!”

“랜서병단! 전방으로!”

“돌격부대 전방으로!”

육중한 중장비를 걸친 전마들이 부대의 앞쪽으로 늘어섰다. 케이시 공작은 케이론의 병력에 쫓겨 자신들을 향해 도주해 오는 수만의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돌아온 나, 케이시의 무서움을 네놈들이 먼저 맛보는구나.”

그의 손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동시에 거대한 깃발이 앞으로 내려갔다.

“돌격하라!”

두두두두…….

중장기병들이 지축을 흔들며 뛰어나갔다. 몬스터들은 당황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란의 기병들은 이미 좌우측을 막아서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꽤애액!”

육중한 전마들이 몬스터들을 그대로 짓밟고 지나갔다. 덩치가 큰 몬스터들은 기사들이 내지른 창과 검에 의해 피를 뿌렸다.

퍽!

날아든 베틀 엑스가 오우거의 머리를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지나갔다. 갑주조차 걸치지 않고 상체를 드러낸 자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보였다. 모두 머리를 밀어 햇빛에 반짝일 정도인 그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베틀 엑스를 지니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괴력을 뽐내며 돌진하는 그들에 의해서 오크 부대가 삽시간에 몰살을 당했다. 고블린들이 쏜 독침도 그들의 육신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갈 뿐이었다.

“우하하하!”

퍽! 퍽!

한손에 하나씩, 한번 휘두름에 둘씩 죽어나갔다.

“각하! 저길 보십시오!”

케이시 공작은 부관이 가리키는 곳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저자들은 누군가?”

“복장으로 보아 케이론의 기사로 여겨집니다만, 상대하는 자들은…….”

“저들은 데쓰 나이트!”

케이시 공작의 옆에 섰던 마법사 하나가 놀란 소리를 냈다. 백마법사인 그들은 대번에 크루즈와 폭스의 기운을 알아챘다.

그르르르…….

그들의 싸움은 초인이라는 케이시 공작도 놀랄 정도로 대단했다. 상당한 거리 밖임에도 불구하고 진동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각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부관들이 재촉하자 케이시 공작은 즉각 명령을 내렸다.

“집중포화를 저곳에 퍼붓는다. 마법사들은 궁병을 도와라!”

명령이 떨어지자 요란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궁병들이 재빨리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도 궁병들의 뒤를 따랐다.

* * *

“루안! 일단은 이곳을 피해야겠어요!”

레이나 공주는 요란의 궁병들이 접근하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루안도 이미 그것을 보았는지 둘에게 강력한 공격을 퍼붓고는 재빨리 뒤로 몸을 뺐다.

“하필이면 이때에…….”

무시무시한 둘을 상대로 격전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루안은 매우 담담한 기색을 보였다.

폭스와 크루즈도 다가오는 요란의 궁병들과 마법사들을 발견하고는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다.

“크흐흐흐! 운이 좋은 인간이군. 네놈은 다음에 반드시 죽여주마.”

“닥쳐!”

루안의 양손이 강력한 화염을 뿜어냈다.

둘이 피해버린 공간에서 터져버린 그것은 이내 초원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폭스와 크루즈가 빠르게 북쪽으로 내달렸다.

레이나 공주가 재촉했다.

“우리도 어서 홀베른으로 가요! 서둘러요!”

“쳇! 어쩔 수 없군.”

“홀베른으로 가세요!”

마법사들에게 명을 내린 레이나 공주는 루안의 손을 잡고는 전마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요란의 궁병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질풍처럼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들이 그대로 북쪽으로 도주하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버린 케이시 공작은 곧장 전군을 북쪽으로 진군시켰다.

* * *

철퍼덕!

강물에 내디딘 발이 가늘게 떨렸다.

테세우드의 얼굴을 한 막스 황제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돌아보니 전장에서 한참을 멀어진 곳에 와 있었다.

병사들의 함성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당히 먼 곳까지 온 것이다.

‘순수한 인간의 힘이 이토록 강할 수 있다니…….’

지금 자신에겐 대륙에서 가장 강했던 초인의 힘이 고스란히 탑재되어 있다. 거기에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본연의 힘과 스승이 심어준 암흑마기까지…….

그런데 눈앞의 인간들은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없는 상태가 벌써 몇 시간이 이어졌다.

“정말 놀라운 놈들이구나. 레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자가 있다더니 네가 바로 그놈인가 보군?”

막스 황제의 눈동자는 혁련천후에게 고정되었다.

“켈베로스를 부르지 않으면 네놈도 놈의 뒤를 따라갈 거다.”

흠칫!

“설마, 레인이 죽었단 말이냐?”

“웃으면서 갔다. 아주 먼 곳으로…….”

“이, 이놈!”

레인이 혁련천후에 의해 죽었음을 직감한 막스 황제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쩌저저정!

흐르던 강물이 대번에 하얀 얼음으로 변했다.

“네놈이 진정 레인을 죽였단 말이냐?”

“내가 죽인 자는 레인이 아니라 동승이라는 신교의 인물이었다. 물론 켈베로스의 꼬임에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온 멍청이기도 하고.”

“이이이…….”

드드드드…….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막스 황제의 육신을 두른 시커먼 연기들이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며 사납게 요동치자 혁련천후의 눈동자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조심해야겠어.”

“이놈도 변신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랬다.

그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때 조윤이 일성 기합을 지르며 창을 던졌다. 만근 바위라도 부술 조윤의 창이 그대로 막스 황제의 육신을 꿰뚫고 지나갈 듯 굉음을 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 막스 황제의 변신은 전혀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까앙!

조윤의 창이 강력한 반탄력에 상당한 거리로 튕겨져 날아갔다.

“테세우드, 놈입니다!”

“역시 마물들은 별 요상한 짓거리들을 다 하는군.”

막스 황제는 완벽하게 테세우드 공작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새로운 육신을 얻은 듯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후후후! 멍청한 놈…….”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는 자신의 손바닥까지도 살펴보고는 시선을 혁련천후와 흑야 등에게 던졌다.

“테세우드라고 불러야 하나?”

“후후! 그동안 미련한 놈과 싸우느라 수고가 많았다. 이젠, 나 테세우드가 너희들을 상대해 주마.”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혁련천후조차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 세상에 와서 가장 강적을 만난 셋은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이 정도면 켈베로스는……?’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아직 켈베로스는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다만 눈앞의 마물을 처치하면 그가 나올 거라는 막연한 심정일 뿐이었다.

“생전에 더 강했던 놈이 육신을 차지한 게 더 강해진 이유인 것 같습니다.”

조윤이 긴장감을 드리우며 말했다.

“그래도 죽여야지. 무조건…….”

혁련천후는 입술을 굳게 물었다.

그도 지금껏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궁극의 공격이 그에게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테세우드는 강력해 보였다.

“네놈을 죽여야만 켈베로스, 놈이 나온다면 시간을 끌 아무런 이유가 없겠군. 펼쳐봐! 네놈이 가진 모든 것을……!”

“후후후! 만용을 부리는군. 너희들 정도라면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했을 텐데도 여유를 부리다니.”

혁련천후는 대답하지 않고 전음으로 조윤과 흑야를 불렀다.

[조윤! 흑야!]

둘은 그를 응시했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공격할 것이다. 너희들은 혹시 모를 켈베로스의 등장에 대비하여 모든 힘을 드러내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쾅!

혁련천후가 곧장 테세우드를 덮쳤다.

혁련천후는 지금껏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펼친 적이 없었던 자신만의 비기를 펼쳤다. 화산의 검법에 가문의 비기를 혼합해서 창안한 그것은 그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위력이 될지는 몰랐다.

쩌정!

공간이 깨지는 듯한 굉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파생된 음파가 얼어붙은 강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자 주변 공간이 하얀 얼음가루로 채워졌다.

“엄청나군.”

“저 정도이셨나?”

조윤과 흑야가 혀를 내둘렀다.

그들도 지금 혁련천후가 펼치는 무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무적으로 살아온 그가 아닌가? 둘의 얼굴이 이내 긴장감을 보인다.

그만큼 상대가 강하다는 반증이다.

둘은 날카롭게 사위를 살폈다. 어딘가에서 있을 켈베로스의 등장을 경계해야만 했다. 그가 만약 테세우드보다 강하다는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면 그야말로 상당한 위기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최소한 기습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보다 강한 자의 기습을 막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 * *

두두두두…….

난전을 중단하고 전마에 몸을 실은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은 도주하면서도 여전히 저항을 멈추지 않는 요란의 기병들을 노렸다. 그야말로 최강의 철벽방어를 보여준 그들이 돌진해 들어오자 적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바빴다.

“단장님! 저쪽을 보십시오!”

기사 하나가 평원의 우측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딜 가시는 거지?”

데얀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평원의 우측을 질주하는 한 무리의 부대가 있었는데 그 선두에 담대소천이 보였다. 그는 2만기 정도의 기병을 이끌고 빠르게 평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우리도 담대 장군님을 따라간다!”

“이랴하!”

데얀의 명에 의해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은 빠르게 방향을 선회하여 담대소천의 뒤를 쫓았다.

쾅! 쾅!

여전히 곳곳에서 강력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요란이 퇴각을 하고는 있지만 전장엔 여전히 수만에 달하는 적이 남아 있었다. 퇴각하는 다른 부대와는 달리 그들은 매우 용맹하게 싸웠지만 가인과 카츄를 비롯한 마법병단의 집중포화에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으악!”

육신이 타들어가는 참혹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는 적을 바라보며 홀베른의 기사들도 몸을 떨었다.

“항복해라! 목숨을 살려줄 것이다! 항복해라!”

마법사들은 연방 확성마법을 통해 항복을 권고했다.

이미 승패는 기울었다. 도주하던 적을 쫓았던 기마병들이 전부 되돌아와 남아서 저항하던 요란의 기사들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요란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남은 요란의 기사들은 끝까지 항전을 고수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어둠의 마법사들이 날아들었다.

“망할 새끼들!”

걸쭉한 욕설과 함께 허공에서 왕전이 떨어져 내렸다. 어둠의 마법사들이 떨어져 내린 공간에 왕전의 대도가 작렬했다.

콰앙!

“끄으으…….”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어둠의 마법사 셋이 바람에 날려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한낱 인간이 휘두른 칼이 어찌 이런 위력을 보일 수 있을까?

요란 만세를 외치며 항전의 뜻을 드러내던 요란의 기사들이 절망 어린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들의 눈에 왕전은 제국의 초인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런 미친 새끼들! 네놈들의 황제는 도망쳤다! 그런데도 싸울 거야? 좋아! 원한다면 내 손으로 모조리 죽여주지!”

왕전이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그 옆에 사공진무가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너희들을 도와줄 마법사는 모두 죽었어. 그러니 어서 항복하는 게 좋을거야. 그리고 잘난 너희들의 황제도 곧 죽을 거다.”

“닥쳐라! 곧 케이시 대공께서 대군을 몰고 오실 것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래! 케이시 대공께서 반드시 오실 것이다. 끝까지 항전하라!”

“항복은 요란의 수치다! 끝까지 싸우자!”

그러자 동요하던 기사들이 다시 적개심을 드러냈다.

“쩝! 어쩔 수 없군요.”

사공진무가 왕전을 돌아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왕전과 사공진무가 슬쩍 뒤로 물러나자 룻거 후작이 손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가 앞으로 내렸다.

“공격하라!”

평원의 가운데에 완벽하게 포위를 당한 요란의 기사들을 향해 사방에서 마법공격과 화살들이 쏟아졌다.

요란의 기사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서 사방으로 뻗쳐 나오며 마구잡이식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이는 자의 마음이 오히려 슬플 정도의 무자비한 살육전은 전쟁의 참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서서히 그 막을 내려갔다.

“우와아아…….”

평원이 떠나갈 듯 함성이 진동했다.

대륙의 누구라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가 벌어졌다. 환호성을 지르는 홀베른의 기사들은 서로를 부둥켜 앉고 믿기지 않는 승리에 열광했다.

룻거 후작이 칼을 들어 소리쳤다.

“홀베른 만세!”

“상왕 전하 만세!”

“국왕 전하 만세!”

기사들도 목청껏 소리쳤다.

요란의 황제가 타고 왔던 거대한 마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던 막스 황제의 시녀들은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항복한 몇 되지 않는 기사들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오열을 터트렸다.

홀베른과 요란 간의 첫 전면전은 이렇게 홀베른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쾅!

허공이 무수한 불꽃으로 난무했다.

경천지경의 수준에 올라선 초월자들 간의 격돌은 주변 풍경을 초토화 시켜가며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혁련천후가 검을 그으면 테세우드는 괴상한 술법으로 막아냈다. 테세우드의 검이 화염을 뿜으며 날아들면 혁련천후는 피하지 않고 검으로 맞받아쳐서 방어했다.

폭발의 여파로 파생된 기운들은 마스터들도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위력을 내포하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퍼퍼퍽!

굵직한 나무들이 삭둑 잘라지며 강물로 떨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놈이군. 두 힘이 합쳐졌다고는 하지만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흑야와 조윤은 불신으로 가득한 눈으로 둘의 대격돌을 지켜보았다.

천하를 떨어 울리는 그들조차도 둘의 격돌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둘은 혁련천후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건 혁련천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둘의 옆에 한 줌 미풍이 불더니 아리엘과 카루가가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조윤과 흑야가 놀란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어가나요?”

“보다시피…….”

“영혼이 봉인되어 버린, 이미 죽은 자로군요.”

아리엘이 테세우드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리엘의 손을 잡고 선 카루가의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굳어 있었다. 테세우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윤이 카루가의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말했다.

“표정이 왜 그래?”

“응? 아, 아니야.”

“걱정 마라. 세상에 주공을 이길 놈은 없으니까.”

“그래, 여차하면 여기 있는 우리가 몽땅 달려들면 되잖아.”

아리엘도 카루가를 다독거렸다.

그들은 카루가가 혁련천후를 걱정하는 것이라 여겼다. 물론 그것도 옳았지만 그에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카루가는 테세우드에게서 켈베로스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이상해. 왜 저자에게서 그놈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설마 영혼을 잠식하는 수준까지 높아진 걸까?’

카루가의 눈동자는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연방 반짝거렸다.

그러나 좀처럼 확신이 들 만큼의 확실한 무엇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조윤이 나지막이 소리쳤다.

“됐다! 잡았어!”

“후후후! 역시 대단하신 분이군.”

흑야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 * *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섬광이 돌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테세우드의 검을 수도로 후려치고는 탄력을 이용해 검을 세워 테세우드의 겨드랑이에 박아 넣었다.

푹!

묵직한 느낌과 함께 테세우드의 육신이 크게 휘청거리는 것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테세우드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육신을 파고든 검을 빼기는커녕 손으로 움켜쥐고는 육탄으로 혁련천후를 공격했다.

쾅!

둘의 육신이 반대방향으로 튕겨 날아갔다.

찰나의 순간에 혁련천후는 자신의 검을 빼낼 수 있었지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크으으으…….”

영혼이 봉인된 죽은 자도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테세우드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칼이 관통했던 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테세우드의 전신을 둘렀던 시커먼 연기가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네놈의 한계가 이곳까진가 보군.”

“크으으… 어림없다.”

테세우드의 두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불신과 경악, 분노가 어우러진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뒤틀렸다. 전생에 그토록 권력에 집착했던 그였기에 영혼까지도 자신의 패배를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무슨 말을 하려던 테세우드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다른 형태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혁련천후는 내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벼락같이 테세우드를 덮쳤다. 그의 검이 번쩍하는 빛을 작렬시키며 테세우드의 육신을 자르고 지나갔다.

“크아아아아!”

테세우드의 육신이 두 조각이 나며 한 줌 연기로 흩어졌다. 허공이 시커먼 연기로 가득 채워지며 시야가 완벽하게 흐려지자 혁련천후의 육신이 그것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초조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툭!

그들의 뒤쪽에서 혁련천후가 바닥으로 내려섰다.

한순간에 내공을 응집시킨 후유증일까? 혁련천후의 얼굴이 상당히 창백하게 변해가며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비쳤다.

“어머!”

아리엘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조윤과 흑야도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등에다 손을 대고는 기운을 불어넣었다. 카루가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혁련천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아리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혁련천후의 손을 부여잡고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그때 조윤이 짤막하게 외쳤다.

“다른 힘은 안 돼!”

아리엘이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흑야가 힘을 넣어주고 있다. 자칫 섞이면 낭패를 볼 수가 있으니 그냥 있어라.”

“아, 알았어요.”

그토록 쾌활하고 사내들보다 더 강인하게 여겨졌던 아리엘이 지금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여인에 불과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조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그녀와 혁련천후를 번갈아 응시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주변을 살폈다.

테세우드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공을 가득 메웠던 연기도 깨끗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켈베로스가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주공! 운기를 하셔야 합니다.”

흑야가 손을 떼며 말했다.

혁련천후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에 선혈이 그치지 않았다.

“아직 놈이 나타나지 않았다. 주변을 잘 지켜봐.”

“주변에서 걸려드는 기운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조윤이 기감을 열어 주변을 샅샅이 감지했었다. 그러나 짐승들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포착되지 않았다.

혁련천후는 카루가를 응시했다.

카루가도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어. 분명 조금 전까진 느껴졌었는데…….”

“혹시 놈이 순간이동을 하는 마법……!”

중얼거리던 혁련천후가 갑작스럽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왕궁이 있는 동쪽으로 향해 던져졌다.

꽉!

‘설마…….’

불안감이 가슴을 채우고 올라왔다.

“왕궁으로 간다!”

쾅!

* * *

담대소천은 평원의 끝부분에 우뚝 솟아오른 돌로 이루어진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데얀이 그의 옆을 함께하고 있었다.

담대소천은 초원을 달려오는 대군을 응시했다.

“케이론의 병력들입니다. 조금 늦는군요.”

데얀이 다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담대소천은 케이론의 병력,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20만에 달하는 대군이군. 역시 제국이란 말인가?”

데얀이 그제야 케이론의 병력 뒤쪽을 질주해 오는 요란의 구원군을 발견했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초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양측을 합해 30만에 달하는 대군이 세상을 새카맣게 채우고 밀려오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둘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빌어먹을 놈들이 쪽수로 밀어붙일 모양입니다. 서둘러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열을 재정비하고 하려면 시간이 촉박합니다. 장군님!”

홀베른의 모든 이들은 담대소천을 중원의 언어로 장군이라 칭했다.

담대소천은 데얀의 재촉에 고개를 저었다.

“기사들을 이끌고 돌아가라! 가서 모든 병력들을 재정비하고 내가 명령을 전달할 때까지 평원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라!”

“예?”

“난, 케이론의 병력들과 조우해서 할 일이 있다. 서둘러!”

담대소천의 곧장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데얀을 한번 쳐다본 그는 이내 기마병단을 이끌고 케이론의 병력이 이동하는 곳으로 질주했다.

“단장님! 저희들도 도와야지 않겠습니까?”

“아니다! 장군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지. 돌아간다! 서둘러라!”

* * *

두두두두…….

조금의 시간 차를 두고 질주하는 케이론과 요란의 대군으로 인해 땅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요란 제국이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몬스터들을 전멸시킨 까닭에 두 병력 간의 거리는 전마로 달렸을 때 고작 30분 거리에 불과했다.

루안의 도움으로 상당히 빠른 시간에 본진과 합류한 레이나 공주는 자신들이 질주하는 전방에서 일단의 기마병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긴장한 빛을 드러냈다.

“적인가요?”

그녀는 루안에게 물었다.

하지만 루안도 워낙 거리가 멀었던 탓에 식별이 불가능했다. 헤론 후작이 소리쳤다.

“2만에 육박하는 병력입니다!”

“설마, 벌써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겠죠?”

눈앞의 병력이 어느 국가의 병력이든 간에 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전투를 도외시하고 전력에서 이탈할 순 없다.

그렇다고 퇴각하는 부대로 보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그때 루안이 중얼거렸다.

“적색바탕에 황금색 글씨라면 홀베른의 병력이군.”

역시 그가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에 떠올랐던 긴장이 사라졌다. 잠시 후, 루안이 다시 말했다.

“그때 그 작자군. 나와 싸웠던…….”

“숙부들?”

“무식하게 큰 무기를 들고 다니는 그 작자가 확실해.”

루안의 말에 레이나 공주는 반가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담대 숙부로군요. 그런데 전장을 버려두고 왜 이곳으로 오는 거죠?”

“후후! 직접 물어봐.”

양측 간의 거리는 순식간에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의 거리로 좁혀졌다.

레이나 공주는 부대의 이동을 멈추게 하고는 전마를 몰아 측면으로 돌아갔다. 담대소천도 방향을 우회하여 케이론 제국의 병력의 측면으로 접근했다. 이미 전 제국에 소문이 파다한 그의 등장으로 케이론의 기사들은 경외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꿈틀거리는 전마의 등에서 담대소천은 루안을 한번 쳐다보고는 레이나 공주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담대 숙부! 이곳엔 어쩐 일로?”

“뒤쪽에 적이 오고 있소.”

“알고 있어요. 병력이 너무 많아서 홀베른과 합세한 후에 싸우려고 이동하던 중이에요.”

담대소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곳의 전투는 이미 막바지로 치닫고 있으니 이곳에서 놈들을 저격하는 게 좋겠소만…….”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럼, 홀베른이……?”

“내가 여기에 있다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만.”

모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말은 곧 홀베른이 이겼다는 걸 뜻하는 것이 아닌가. 황제가 직접 이끈 제국군을 왕국인 홀베른이 물리쳤다니…….

모두가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자 담대소천이 서둘러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왕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야 하니 병력을 내게 넘겨주시오.”

“그게 무슨 소리야? 병력을 넘겨주라니?”

루안이 발끈했다.

레이나 공주가 그를 말리고는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담대소천에게 물었다.

“적은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자 강병인데 우리들만으로 가능할까요? 그것도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초원에서라면…….”

“약속을 잊은 것 같소.”

담대소천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시 발끈하려던 루안에게 담대소천은 경고했다.

“다시 한 번 나서면 그땐 너의 목부터 베어버리겠다. 그리고 공주! 지휘권을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병력을 케이론으로 돌리시오.”

단호했다.

그리고 서릿발 같은 위엄이 그의 전신에서 느껴졌다.

“좋아요! 약속은 지키겠어요. 병력의 지휘권을 담대 숙부에게 넘겨줄게요.”

“레이나!”

루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때 헤론 후작이 나섰다.

“국가 간의 약속이었소. 그러니 지휘권은 저분께서 이끄시는 게 옳소. 루안 공!”

“이런, 빌어먹을!”

헤론 후작까지 그렇게 나오자 루안은 거친 말을 쏟아내고는 뒤로 빠졌다. 담대소천은 루안을 싸늘하게 쳐다보고는 내공을 실어서 소리쳤다.

“방향을 북쪽으로 돌린다!”

“전군! 방향을 북쪽으로!”

헤론 후작이 명령을 받아서 다시 소리쳤다.

케이론의 병력들이 이동방향을 반대로 바꾸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담대소천은 헤론 후작에게 고마움의 눈빛을 주고는 전마를 몰아 병력들의 앞으로 달려갔다.

헤론 후작이 그의 옆을 바짝 따라붙었다.

“병력을 세 개 부대로 나누어 주시오!”

“알겠소!”

헤론 후작은 서둘러 부대를 세 개로 나뉘고는 수장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대부분이 후작인 귀족들은 담대소천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러나 담대소천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곧장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부대명은 간단하게 명명하겠소. 좌측은 좌군,가운데는 중군, 우측은 우군으로 하고 내가 이끄는 부대는 선봉군으로 명명하겠소. 지금 즉시 좌, 우군은 초원의 바깥쪽 능선으로 이동하여 적과 부딪히면 그때, 측면을 노리시오. 그리고 중군과 선봉군은 곧장 적의 정면을 돌파할 것이오!”

중군은 헤론 후작이 맡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으나 다른 이들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담대소천의 눈에 섬광이 돌았다.

“내겐 그대들을 즉참할 권리가 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목을 치겠다. 그리고 전투 중에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그 사나움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모두는 재빨리 명령대로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 좌우로 빠르게 흩어졌다.

담대소천이 전마를 기사들에게로 돌리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전군! 돌격!”

“전군! 돌격!”

두두두두두…….

중군과 선봉군, 5만이 질풍처럼 요란의 병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담대소천이 가장 선두에서 달렸고 좌우를 헤론 후작과 레이나 공주, 루안이 함께했다. 루안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레이나 공주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심하고는 전마에 박차를 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