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카루가의 눈물
왕궁은 고요했다.
요란 제국과의 전투가 왕궁과 제법 가까운 곳에서 벌어졌음에도 백성들은 무척 침착했다. 그들은 스스로 방어군을 모집하여 방향을 잃고 산발적으로 왕궁으로 들어서는 요란의 패잔병들을 맞아 싸우기도 했다.
“상왕께서 오신다! 성문을 열어라!”
성곽에 있던 홀베른 국왕이 소리쳤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혁련천후와 조윤 등이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육중한 성문이 조금 열리기가 무섭게 그들은 궁으로 빠르게 들어섰다. 홀베른 국왕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혁련천후의 얼굴이 제법 굳어 있자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놈이 이곳으로 온 것 같아.”
“놈이라시면… 설마, 켈베로스 말이십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는 곧장 아내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대는 여기서 전황을 살피는 게 좋겠어.”
뒤를 따르려던 홀베른 국왕은 혁련천후의 그 같은 말에 움직이려던 몸을 멈추었다. 그는 가볍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기운조차 느끼지 못했거늘…….”
그때, 성곽 아래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전하! 케이시 공작이 이끄는 요란의 지원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 하옵니다!”
“흠! 역시 제국은 제국이란 소린가?”
지원군이 올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 밖으로 빨랐다.
어지간한 왕국의 전력을 능가하는 세력을 잃고서도 곧장 그와 비슷한 대군을 보낸다는 건 제국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답답하구나. 상왕 전하의 명만 아니었다면 내가 직접 나설 것을…….”
평원에서의 전황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막스 황제가 직접 이끈 대군을 물리쳤다는 것에 얼마나 기뻐했는가? 하지만 지원군을 이끌고 오는 자는 어쩌면 막스 황제보다 더 힘든 상대라 할 수 있는 케이시 공작이다.
“오직 그분을 믿을 수밖에…….”
그는 담대소천의 믿음직한 얼굴을 떠올리며 짙은 숨을 내쉬었다.
* * *
수정관 속의 아내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혁련천후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함께 달려온 카루가가 초조함을 드러냈다.
“놈의 기운이 느껴지지가 않아. 텔레포트로 아주 먼 곳으로 도망친 것은 아닐까?
카루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켈베로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그렇게 말했다. 조윤도 같은 뜻을 내비쳤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혼자서는 역부족이란 판단을 내렸을 수도…….”
혁련천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대답을 못 했다.
흑야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놈은 막스라는 기반을 잃었습니다. 더욱이 제국최강의 초인이라는 테세우드도 잃었으니 카루가의 말처럼 후일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숨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혁련천후는 극복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질 것이다.
아내들을 회생시킬 방법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찾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을 찾아야 한다.”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혁련천후가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들의 말처럼 켈베로스가 훗날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숨었다면 아내들을 회생시킬 트로이안의 심장 역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서는 최악의 경우가 되는 셈이다.
그가 카루가를 갑자기 돌아보며 물었다.
“마계의 힘을 이용해 놈의 종적을 찾을 수는 없느냐?”
“불가능해. 이젠 나도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어. 마계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전까진… 미안해.”
“빌어먹을!”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무도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지 못했다.
그때였다.
카루가가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고는 소리쳤다.
“마기야! 엄청난 암흑마기가 느껴져!”
“어디냐? 어디서 느껴지는 것이냐?”
“북쪽이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나 봐!”
모두는 카루가의 뒤를 쫓았다.
* * *
번쩍!
콰아아아아…….
거대한 폭발이 홀베른 왕궁의 북쪽 산을 뒤흔들었다.
산천초목이 흔들리며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불기둥의 상공에 몇 개의 그림자들이 어우러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흐흐! 켈베로스! 네놈의 그 허약한 몸으로는 그 인간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러니 네놈의 모든 힘을 내게 넘겨라!”
“어리석은, 네놈 따위가 감히 내게 덤비다니…….”
묵빛이 감도는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는 바로 혈지에서 혁련소를 강제로 소환시켰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켈베로스.
어둠의 신이라는 바로 그 켈베로스였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칸빌과 카르스, 그리고 폭스와 크루즈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네놈이야말로 암흑마기를 내게 넘겨라. 그러면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해주겠다. 칸빌!”
“크크크! 고작 이따위 세상에 만족할 나로 보였느냐?”
“칸빌! 놈이 오면 너나 나나 모두 소멸을 길을 걸어야 한다. 다시는 환생할 수 없는 어둠의 길을 말이다. 그러니 어서 넘겨라!”
“크크크! 내 말이 그 말이지. 네놈이야말로 힘을 내게 넘기면 이 세상을 넘겨주마.”
둘은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서로가 차원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지녔으니 양보할 리 만무했다. 그때 카르스와 크루즈, 그리고 폭스가 느닷없이 켈베로스를 덮쳤다.
그리고 시간 차를 두고 칸빌이 날아들었다.
켈베로스의 붉은 눈동자가 섬광을 발하며 그의 육신이 빛처럼 빠르게 지상으로 쏘아졌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셋은 허공을 한 바퀴 선회하고는 켈베로스의 뒤를 쫓았다.
콰과과광…….
셋의 손에서 발출된 섬광이 연속적으로 지상으로 떨어졌다.
주변 숲이 이내 거대한 화염으로 휩싸이며 시계를 가려버리는 자욱한 연기가 치솟았다. 그것은 칸빌의 실수였다.
연기 때문에 켈베로스의 기척을 감지하는 것이 꽤나 힘들어진 것이다. 그는 자유자재로 힘을 숨겼다가 드러내는 재주를 지녔다. 시각으로만 찾아야 하는데 불길로 인해 솟아오른 연기가 그것을 방해했다.
“빌어먹을! 흩어져서 놈을 찾아라!”
셋이 빠르게 좌우로 흩어졌다.
그러나 종적을 감춘 켈베로스는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열한! 어서 모습을 드러내거라! 켈베로스!”
칸빌은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그때, 우측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졌다. 그곳은 폭스가 이동한 곳이다. 칸빌의 육신이 쏘아진 화살처럼 비명이 울린 곳으로 날아갔다.
칸빌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폭스!”
미처 사라지지 못한 시커먼 연기가 폭스의 죽음을 알려왔다. 켈베로스에게 당한 것이다. 칸빌의 전신이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켈베로스! 이노오오옴!
* * *
크루즈는 칸빌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포효를 듣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는 빠르게 칸빌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순간 시커먼 물체가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며 허공으로 몸을 뽑았다.
퍽!
“크으으…….”
하지만 오른쪽 어깨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며 팔이 뚝 떨어져 날아갔다.
“감히 내게 덤비다니, 그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느끼게 해주마.”
켈베로스였다.
그의 시뻘건 눈동자가 지독한 분노로 이글거렸다.
파앗!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크루즈는 재빨리 칸빌이 있는 곳으로 도주했다.
동시에 켈베로스의 육신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지며 크루즈를 추격했다. 속도는 켈베로스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퍽!
“끄아아아…….”
얼마 못 가서 크루즈의 육신이 허공에서 한 줌 연기로 화해 흩어졌다.
켈베로스는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꽤나 거추장스러웠던 둘을 먼저 제거하고 칸빌을 상대하기로 작정한 자신의 계략이 맞아떨어지자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감히 나를 배반하다니, 칸빌! 네놈만큼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주마. 으드득!”
크루즈의 비명을 듣고 날아온 칸빌은 허공을 흩날리는 크루즈의 잔재를 발견하고는 분노했다.
“비열한 놈!”
“크흐흐! 이제 네놈 혼자서 나를 상대해야 한다. 칸빌! 아직도 늦지 않았다. 순순히 네 힘을 내게 건네면 여전히 넌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나의 수족들을 소멸시켰으니 네놈을 수족으로 부려야겠군. 나 칸빌의 위대한 능력을 지금부터 보여주마.”
드드드드…….
칸빌이 밟고 선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켈베로스의 시뻘건 눈동자에 은은한 긴장감이 어렸다. 눈으로는 칸빌을 쳐다보면서도 그는 주변 기척에 신경 썼다. 아직 카르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스스슥!
켈베로스는 뒤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다. 그가 신경을 순간적으로 그곳에 쏟을 때, 칸빌이 날아들었다.
“죽이겠다! 켈베로스!”
“네놈이야말로 죽여주마!”
켈베로스의 양손이 좌우로 교차하며 강력한 방어막을 생성함과 동시에 한줄기 섬광이 뒤쪽으로 쏘아졌다.
콰아앙!
또다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뜨거운 열기에 이어 강력한 후폭풍이 일어나며 주변 숲이 초토화로 변해갔다. 그 와중에 카루가의 커다란 목소리와 처참한 비명이 동시에 숲을 흔들었다.
“켈베로스! 이 나쁜 놈!”
“끄아아악!”
드드드드…….
콰지지직…….
치솟아 오른 돌들과 잘린 나무의 파편들이 폭풍에 휘말려 사납게 요동쳤다.
숲을 휘감은 화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넓고 높게 치솟으며 폭풍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늘로 치솟았던 파편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차라리 장엄할 지경이었다.
휘이이이…….
폭풍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우르릉!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뇌전을 울리며 시커멓게 변해갔다. 그리고 곧 굵은 빗줄기가 세상을 적시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화염이 죽어가며 숲은 처참한 상흔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곳에 혁련천후가 서 있었다. 검을 늘어뜨린 그는 폭우를 맞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조윤과 흑야, 그리고 아리엘은 그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카루가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떨리는 목소리가 폭우 속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켈베로스의 육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심장에 박혀 있는 어린아이의 손, 그것은 심장을 관통하고 등 뒤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시커먼 핏물을 머금은 손이 파르를 떨리고 있었다.
“네가 살아 있는 인간의 심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아버지가 알려줬어.”
“카, 카루가! 이놈…….”
손의 주인은 카루가였다. 그는 켈베로스의 몸을 강력한 힘으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미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켈베로스가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카루가는 요지부동이었다.
켈베로스의 입을 통해 기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
“이제, 너는 나와 함께 마계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다시는 인간 세상에 강림하지 못하게 될 거야.”
“끄으으으…….”
켈베로스의 육신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안간힘을 써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카루가 역시 혼신의 힘으로 그의 육신을 꼭 껴안고 있었던 탓에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루가가 고개를 돌려 혁련천후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슬픔이 진하게 배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나쁜 놈이 사라지면 트로이안의 구슬이 남게 될 거야.”
“그만 떨어져라. 카루가!”
혁련천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무엇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일까? 차갑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카루가는 처연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저씨 고향에 가보고 싶었는데…….”
“내가 데려가주마.”
“미안해…….”
카루가의 육신이 하얀빛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모두는 보았다. 카루가의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액체를…….
“안녕…….”
번쩍!
콰아아앙!
“카루가!”
* * *
콰지지직!
담대소천을 태운 전마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자와도 같았다.
퍽!
드래곤의 뼈로 만든 청룡언월도는 사나운 한 마리 야수처럼 적을 휩쓸었다. 그가 지나간 곳은 오직 죽은 자의 비명과 핏물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우아아아…….”
그를 따르는 홀베른의 기사들은 용맹하고도 사나웠다.
20만 대군의 가운데를 돌파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적진을 유린했다.
그러나 전황은 그들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요란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케이론의 기사들이 너무 무기력했던 까닭이다.
정예라고 추려서 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정예는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에 반해 요란은 워낙 풍부한 인적자본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기사들을 배출해내고 있었기에 케논 산맥에서의 크나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우측 공격을 맡았던 케이론의 우군이 반 수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서 그대로 퇴각을 해버리자 전황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공주가 위험하다! 좌군을 도와라!”
담대소천은 적에게 휩싸인 레이나 공주를 발견하고는 전마를 좌측으로 틀었다.
홀베른의 기마병단이 겹겹이 에웠싼 적을 돌파하며 레이나 공주를 호위하는 좌군을 향해 질주했다.
쾅!
그들이 달려가는 허공에서 마법병단의 화염공격이 폭발했다.
“으악!”
한꺼번에 수십 명의 기사가 화염에 휩싸여 쓰러졌다. 담대소천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그의 눈이 사나운 기운을 발하며 전마에서 뛰어내렸다.
“내 주변으로 다가오지 마라!”
그는 기사들에게 떨어질 것을 명령하고는 육탄으로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투왕 담대소천은 가장 파괴적인 사내다. 그 누구보다 인자하며 동시에 그 누구보다 광포한 사내가 바로 담대소천이다.
그가 분노했다.
투왕의 분노를 감당할 자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다.
콰지지지직!
청룡언월도가 내뿜는 강기는 이 세상에서 오러라고 부르는 강자들의 전유물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발휘했다.
걸려드는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죽어가는 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담대소천이 이동하는 동선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피, 피해라!”
“부딪히면 죽음이다! 물러서라!”
용맹한 요란의 정예들도 저런 가공할 위력은 처음 당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기에 급급했다.
그가 헤집어 놓은 전장을 홀베른의 기사들이 쓸고 지나갔다.
마법사 하나가 레이나 공주의 뒤쪽에서 화염공격을 펼치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기도 전에 허리가 잘려 피를 뿌렸다.
“이쪽으로 오시오!”
담대소천이 레이나 공주의 가냘픈 허리를 낚아채고는 뒤쪽으로 당겼다. 그때 난전을 치르고 있었던 루안이 그녀의 곁으로 날아왔다.
“멍청한! 너는 공주를 보호하라!”
“뭐, 이 자식이!”
짝!
담대소천의 손바닥이 루안의 얼굴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용서는 이번뿐이다. 애송이!”
루안을 사납게 노려본 담대소천이 등을 돌리며 소리쳤다. 멍한 표정이 되어버린 루안은 등을 돌린 담대소천을 쳐다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능선으로 후퇴한다! 퇴로를 뚫어라!”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사들은 오직 홀베른의 기마병단이었다. 케이론의 기사들은 명령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시오!”
담대소천은 레이나 공주에게 주의를 준 다음 곧장 직선으로 돌파를 감행했다. 헤론 후작이 그를 돕기 위해 옆으로 다가왔다.
“위험하니 떨어지시오!”
헤론 후작은 담대소천의 눈동자를 보고는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육신 주변이 가공할 기운으로 일렁거렸다. 아군조차도 일정거리를 두어야 할 정도로 난폭한 기운이었다.
쾅! 쾅! 쾅!
담대소천의 왼손이 연거푸 장력을 뿜었다.
측면에서 달려들던 적들이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은 거침없이 청룡언월도를 휘둘렀다.
핏물과 육신의 파편들이 난무하며 솟구쳤다.
“으… 이, 인간이 아니다.”
극한의 두려움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반경 5미르 내의 적들은 감히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뒤를 따르던 루안이 인상을 그리며 자신도 좌우측을 가리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의 살상력 높은 마법공격은 짧은 시간에 상당한 적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았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들은 서서히 그들에게서 체력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강력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담대소천의 눈에 적의 수장인 케이시 공작과 한 무리의 마법병단이 질주해 들어오는 것이 잡혔다.
“어서 공주를 능선으로!”
그가 등을 돌리자 레이나 공주 일행이 오히려 그를 방해하는 형국이 되었다. 루안이 그녀를 안고 빠르게 능선으로 날아올랐다.
“너희들은 공주를 홀베른으로 호위하라!”
그는 홀베른의 기마병단에게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고는 바닥을 차고 올라 케이시 공작을 향해 돌진했다.
“장군!”
“담대 숙부!”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이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 * *
“젠장! 완전히 거꾸로 되었잖아! 왜 장군님이 사지로 뛰어드셔야 하는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홀베른의 기사들은 달리면서도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 그들의 뒤쪽에는 레이나 공주와 케이론의 주요 인물들이 따르고 있었다. 후퇴하는 케이론의 병력은 고작 수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죽거나 빠져나오지 못하고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천인장 하나가 소리쳤다.
“위험 지역을 벗어난 곳까지만 공주를 호위하고 돌아가서 장군님을 돕는다! 속도를 높여라!”
“얼른 얼른 따라오쇼!”
기사들은 전마에 박차를 가했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무척 어두웠다. 도움을 주려고 왔다가 오히려 짐이 되어버리자 참담함과 부끄러움이 몸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생겨났다.
그녀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담대소천이 남겨졌다. 그가 왜 자신을 위해 사지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무사하기만을 신께 빌고 또 빌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그러니 제발 무사하기를…….’
기어코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전마들이 거친 호흡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법을 두른 전마라도 무한대의 체력을 지닐 순 없는 것이다. 이대로 조금을 더 질주하면 전마들은 그대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멈출 수가 없었다.
두두두두!
그들이 전장을 벗어나 능선을 막 넘어서려는 때였다. 전방에서 일진광풍과 함께 한 무리의 기마병단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다.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씨가 새겨진 깃발이 선두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케니언 크로우다!”
“아군이다! 아군이 온다!”
홀베른의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두두두두…….
수천의 기마들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렸다. 짧은 시간에 퇴각하던 기마병단에 이르자 서로가 기동을 멈추었다.
데얀이 아닌 다른 인물이 바람처럼 전마를 몰아오며 물었다.
“소천이 저곳에 있나?”
“그렇습니다!”
“퇴각하는 건가?”
“장군님께서 이분들을 호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갑주가 아닌 생소한 복장의 사내는 엄청난 크기의 대도를 쥐고 흑발을 날리며 전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모두는 의아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때 데얀이 다가오며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서두르시지요. 장군께서 포위당하셨습니다.”
“저 정도로 죽을 놈은 아니지. 그건 그렇고 당신들은 누구야?”
사내의 시선이 레이나 공주에게 향했다.
그 오만한 말투에 루안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헤론 후작도 은은한 노기를 드러냈다.
“이분은 케이론의 왕녀이시다! 말을 조심하라!”
“왕녀? 왕녀라면 왜 퇴각을 하는 거지? 저기 저놈들은 너희들의 기사들인 것 같은데?”
“무엄하다!”
스슥!
호통을 치던 헤론 후작의 목에 어느새 사내의 대도가 겨누어졌다. 사내의 입가가 올라가며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난, 수하를 남겨두고 도망치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헤론 후작의 목을 타고 핏물이 흘렀다.
공주를 호위하고 달려온 홀베른의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주시했다. 이런 존재를 그들도 본 적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사내의 흑발을 쓸고 지나가자 한 마리 야수와도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새카맣게 빛나는 눈동자엔 광극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 칼을 치우세요!”
레이나 공주가 소리쳤다.
사내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웃었다.
“이놈보다는 저기 저놈들을 살릴 궁리를 했어야지.”
레이나 공주는 말문이 막혔다.
사내의 시선이 다시 전장으로 향해졌다.
“후후! 모처럼 깨어났더니 또 싸움인가? 좋지, 좋아…….”
“서두르셔야 합니다!”
데얀의 재촉에 사내는 대도를 비껴들고는 전마의 말 머리를 전장으로 틀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허락받은 살인이라면 마다할 나, 관산악이 아니다. 가자!”
* * *
진천은 혁련소와 연소민을 데리고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초원으로 달렸다.
케이론의 병력과 합세하여 요란의 지원병력을 요격하려고 떠난 담대소천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마법사들이 전해온 것이다.
돌처럼 굳어진 진천과 혁련소의 얼굴이 바람에 쓸려 꿈틀거렸다. 뒤쪽에서 따르던 에이미 공주 역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정도 마나를 회복한 그녀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을 보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라이트 마법을 두른 전마들은 가공할 속도로 달렸지만 좀처럼 전투가 벌어진 초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과 뒤를 따르는 기사들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그리고 조금이 지나자 기사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연소민이 혁련소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아버님께선 놈을 처치하셨겠죠?”
“당연하지!”
“그럼 우리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아직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건 아니야! 하지만 방법이 있을 거니까, 걱정 말라고!”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그들은 초원의 가로지른 얕은 능선에 도달하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던 에이미 공주가 소리쳤다.
“저곳인가 봐요!”
“좋아! 말을 버리고 경공으로 가자!”
진천의 육신이 전마를 버리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다른 이들도 이내 그의 뒤를 쫓아 몸을 솟구쳤다. 조금을 더 접근하니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혁련소와 연소민이 달려가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진천이 소리쳤다.
“에이미! 사정 보지 말고 무조건 퍼부어야 해!”
“알겠어요!”
능선을 넘어서자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대군에 포위를 당한 채, 난전을 버리고 있는 홀베른의 깃발이 보이자 모두는 그곳으로 폭풍처럼 달려갔다.
선공은 진천의 환술로 펼쳐졌다.
“죽여야만 한다면 모조리 다 죽여주마!”
화르르륵!
그의 손이 거대한 불꽃을 피워내며 앞으로 뻗어졌다. 동시에 에이미 공주도 강력한 화염계열이 마법을 소환해서 펼쳤다.
콰과과광!
병력이 밀집되었던 요란의 측면에 불꽃이 일었다. 예상치 못했던 기습공격에 상당수의 기사들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공격은 재차 이어졌고 불길에 휩싸여 몸부림치는 자들이 속출했다. 검을 뽑아 든 진천이 전장으로 난입했다.
혁련소의 분노에 찬 함성이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죽고 싶으면 덤비라고! 자식들아!”
퍼퍼퍼퍽!
피와 살이 난무하며 사방으로 솟구쳤다.
학살에 가까운 난폭함을 보이는 그들의 공격은 삽시간에 요란의 진영을 흔들어놓았다. 그들을 막고자 날아들던 마법사들은 에이미 공주에 의해 공중에서 요격을 당해 죽어나갔다.
“저기! 소천 숙부가 계십니다!”
혁련소가 담대소천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기운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아군 중에서 저 정도의 기운을 발산할 존재는 담대소천뿐이라 여긴 그들은 거침없이 그곳으로 돌진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불꽃이 떨어졌다.
“앗!”
뒤늦게 발견한 연소민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펑!
강력한 기운이 날아와 불꽃을 소멸시켰다. 동시에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속을 울렸다.
“주변을 잘 살펴야지!”
“숙부!”
“소천님!”
담대소천이었다.
그때 진천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저, 저게 형님이 아니었네? 그럼 누구지?”
분명 담대소천은 여기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저토록 광포한 기운을 발산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그곳에선 피와 살들이 사방으로 난무하고 있었다. 담대소천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놈이 깨어났다.”
“놈이라뇨?”
“산악!”
“예에?”
* * *
“감히! 이 홀베른을 침략했단 말이지? 감히 이 관산악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홀베른을 말이다!”
쾅!
관산악의 대도는 용서를 몰랐다.
이미 그가 움직이는 주변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시신이 피를 흘리고 쌓여 있었다. 그중엔 요란의 마스터 몇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공께서 내게 명령을 내리셨다! 네놈들을 모조리 도륙을 내버리라고 말이야! 크하하하하!”
퍽!
뒤에서 암습을 노리던 기사의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날아갔다.
어른의 등판만 한 넓이를 자랑하는 그의 대도는 죽음을 인도하는 사자와도 같았다.
그와 케니언 크로우기사단이 휩쓰는 곳은 죽은 자들의 시신과 핏물이 산과 바다를 이루었다. 죽은 자들보다는 부상을 입은 자들의 처절한 비명이 전장의 참혹함을 한눈에 보여 주었다. 그들은 바닥을 기다가 전마의 발굽에, 동료들의 발에 짓밟혀 죽어나갔다.
요란의 기사들이 치를 떨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으… 인간이 아니다! 물러서라!”
그들을 감당했던 부대의 수장이 기어코 퇴각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이미 그들의 뒤쪽으로 결코 그에 떨어지지 않는 무서운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이 대가리였군.”
서걱!
관산악의 대도가 번쩍 빛을 발하자 명령을 내렸던 기사의 머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퇴각을 준비하던 기사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갈팡질팡하는 그들에게 시뻘건 화염이 떨어졌다.
쾅!
“으아아…….”
관산악의 고개가 화염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순간 그의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후후후! 꼬맹이!”
“산악 숙부!”
“으하하하! 어서 오너라! 꼬맹이!”
혁련소의 얼굴이 관산악의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진천의 얼굴이 함께하고 있었다.
“형님!”
“후후! 노랑머리, 여전히 뺀질거리는 모습이군.”
“숙부! 어머니들도 깨어나셨습니까?”
“지금쯤 주공과 회포를 풀고 계실 거다! 우하하하하!”
* * *
케이시 공작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넋을 놓았다.
홀베른을 지원하려고 이동하던 케이론의 10만 대군을 물리칠 때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존재들이 나타나면서 전세는 급속도로 불리하게 기울어갔다.
수는 여전히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전장에 작렬하는 대량살상용 화염공격으로 인해 기사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된 것이 역전을 허용한 주된 요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마법사들의 몰살이었다.
마나를 감추고 기사들 틈에 은신해도 적은 신기하게도 그들을 골라 요격했다. 그렇게 되자 적의 마법공격을 중도에서 막아줄 방법이 사라져버렸다.
더욱이 퇴각하는 것으로 보였던 케이론의 레이나 공주가 다시 전장에 합류하자 곳곳으로 흩어졌던 케이론의 잔여병력까지 전장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설마, 폐하께서도 패하셨단 말인가?”
새롭게 합류한 홀베른의 수천 기병은 분명 동쪽에서 난입했다.
그곳은 요란과 홀베른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곳이다. 막스 황제가 이끄는 주력병력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구원 병력을 보낼 만한 여력이 홀베른엔 없다.
그렇다고 전장을 이탈해 떠도는 유군으로 보기엔 그들은 지나치게 강력했다. 특히 하얀 갑주를 두른 20명 남짓한 기사들은 자신도 믿지 못할 만큼 초강력 파워를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부관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아직 폐하의 군대에게서 전령이 오질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보낸 전령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빌어먹을! 율튼이 없으니 통신체계가 엉망이구나!”
대마법사 율튼은 통신 쪽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인물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지니지 못했던 능력이 그에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잠시 전장을 뒤쪽으로 물린다! 모두에게 퇴각나팔을 불어라!”
뿌우웅!
전장에 요란의 뿔나팔이 울렸다.
그러자 썰물이 밀려나듯 요란의 대군이 북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심에서 난전을 벌이던 병력들은 여전히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빠져나갈 공간이 없었던 탓이다.
담대소천이 이끌고 온 기마병단은 여전히 1만에 가까운 군세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죽은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그들의 검은 적의 퇴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장에 담대소천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렸다.
“추격하지 말고 전열을 재정비하라!”
“모두 능선으로 이동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홀베른의 기사들도 살육을 중단하고 능선 쪽으로 전마를 몰아갔다. 짧은 시간에 양군은 죽은 자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전장을 가운데 놓고 양쪽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대치상태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그곳엔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부상병들의 절규가 가득했다.
두두두두…….
요란 진영에서 백기를 꽂은 전마가 질풍처럼 달려왔다.
“부상병들의 인도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데얀이 담대소천에게 다가갔다. 담대소천도 고개를 끄덕여 같은 뜻을 드러냈다. 홀베른의 기사들도 상당수 전장에 남았던 까닭이다.
“저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속히 부상병들을 데리고 와라!”
“예! 장군!”
양측은 잠시 전투를 중단하고 각자의 부상병들을 데리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남은 수를 헤아려 보니 홀베른은 1만5천, 요란은 6만 정도가 되었다.
홀베른과 케이론의 연합군의 전사자가 11만, 요란의 전사자가 14만에 달하는 그야말로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케이론 제국의 10만 병력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생존한 1만5천은 대부분이 담대소천이 이끌고 온 2만 기마병들과 후에 도착한 관산악과 진천 등이 이끌고 온 기사들 중 살아남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살아남은 자는 1만에 수백뿐이었으니 적을 물리쳐도 물리친 것이 아니었다.
레이나 공주는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참혹한 결과에 그녀는 망연자실 넋을 놓아야만 했다.
담대소천의 거친 목소리가 홀베른 진영을 흔들었다.
“적의 황제가 이끌던 병력들은 이미 상왕 전하에 의해 궤멸되었다! 적의 황제도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여우, 케이시 공작뿐이다! 본국에서의 지원은 기대하지 마라! 전투는 오직 우리들의 손으로 끝을 낼 것이다! 너희들이 흘린 피가 홀베른을 영원불멸의 강국으로 만들 것이니 모두들 검을 들어라!”
“우와아아아!”
천지가 진동했다.
내공을 담고 소리쳤던 담대소천의 목소리는 건너편에 진을 친 케이시 공작의 병력에도 들렸다. 막스 황제의 죽음과 패전소식을 듣자 요란의 기사들이 작은 소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케이시 공작이 소리쳤다.
“적의 간교한 술책이다! 흔들리지 마라!”
“폐하께서는 무사하시다! 지금쯤이면 홀베른의 왕궁을 불바다로 만들고 계실 것이니, 동요하지 마라!”
수뇌부들이 기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연방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자 동요는 금방 수그러들었다.
케이시 공작은 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폐하께서 패했다면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 돌아가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시간을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할 최선의 방법이다.’
막스 황제가 패했다면 적의 지원병력이 곧 올 것이다.
당장, 눈앞의 1만5천조차도 감당할 자신이 그에겐 솔직히 없었다. 몇몇 강자들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자칫 그들이 난전을 틈타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면 상당히 위험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본국으로 퇴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막스 황제와 선발군의 상황을 알아야만 했다.
그는 부관을 불러 은밀하게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 몇을 데리고 측면을 돌아 폐하와 선발군의 정보를 알아내어 오너라. 어서 서둘러라!”
명령을 받은 부관이 재빨리 마법병단에게로 뛰어갔다.
‘설마, 설마 패한 것은 아니겠지? 홀베른에 제아무리 강자들이 많다고 해도 폐하의 선발군을 당해내지는 못한다. 결코!’
케이시 공작은 주먹을 말아 쥐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