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51화 (51/55)

제4장

제국의 패배

“정찰병으로 보이는 놈들이 동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데얀이 담대소천에게 보고했다.

이미 그러한 부분을 염두에 두었던 담대소천은 미리 기사들에게 빠져나가는 적을 면밀히 살피라는 지시를 내려놓았던 것이다. 역시 적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관산악이 적진을 쳐다보며 으르렁거린다.

“그냥 지금 쳐버리자!”

“그놈의 불같은 성질은 여전하군.”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미치겠다.”

그 잠깐이 700년이다.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담대소천이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는 모두를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케이시라는 놈만 사로잡으면 전쟁은 끝난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모두 주공께 돌아간다! 주모님들께도 예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전군! 회군한다!”

느닷없는 철군명령에 관산악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되물었다.

“승전이 코앞인데 이대로 돌아간단 말이냐?”

“저들을 다 죽인다고해서 요란이 망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저들은 황제를 잃었다. 지금 저 케이시라는 자를 죽이면 요란은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그것은 곧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주공께서도 그건 바라지 않으실 거다.”

담대소천의 말을 관산악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데얀을 비롯한 기사들도 은근히 불만을 비쳤다. 그들로서는 케이시라는 거물을 눈앞에 두고 돌아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데얀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케이시 공작, 저놈만 잡으면 확실히 요란을 작살낼 수 있습니다. 장군!”

“그렇습니다!”

다른 기사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자 담대소천의 눈에 한기가 어린다. 갑작스러운 표정변화에 데얀은 내심 뜨끔했다.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그럼 회군을 준비해!”

“예!”

가슴을 쓸어내린 데얀은 재빨리 기마병단의 선두로 전마를 몰아갔다. 진천이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공을 담고는 소리쳤다.

“전군! 왕궁으로 귀환한다!”

* * *

홀베른의 왕궁을 감싸고 흐르는 강변의 마을들은 전쟁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평화로웠다.

엘프의 아이들은 건너편 마을에 정착한 다크 영지의 아낙들이 전해준 과자를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크 영지와 아르소에서 이주해 온 아이들도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과자를 손에 쥐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이게 더 크다!”

“우와! 좋겠다!”

“그래도 내 것이 더 맛있어!”

“깔깔깔!”

저마다 자기가 쥔 과자를 자랑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아이들의 뒤쪽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인간보다 훨씬 예민한 감각을 지닌 엘프의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순간 아이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괴, 괴물이다!”

“꺄악!”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굴 한쪽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괴인영이 아이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에 갑주를 걸친 건장한 체격의 기사도 모습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이곳이 어디냐?”

놀랍게도 괴인영은 칸빌이었다.

그리고 뒤쪽의 기사는 카르스였다. 칸빌은 하나 남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의 반쪽 얼굴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부족한 마나로 인해 텔레포트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곳은 여전히 홀베른입니다.”

카르스가 감정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칸빌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칸빌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꺄악!”

아이들은 다시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의 비명을 들은 주민들이 건너편에서 발을 굴렀다. 그중 몇 명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재빨리 왕궁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남은 사람들이 돌멩이와 집기들을 던졌지만 그것으로 칸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젠장! 흡수할 기운조차 없는 인간들이구나. 이봐, 카르스!”

칸빌이 카르스를 불렀다.

카르스는 차가운 눈으로 칸빌을 응시했다.

“네 힘을 내게 빌려다오.”

“힘이 필요하십니까?”

“마계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힘을 회복한 다음, 다시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는 차원의 문을 넘어갈 힘조차 없구나. 크흐……!”

카르스의 잿빛 눈동자가 새하얗게 빛났다.

“당신이 사라지면 내가 어둠의 제왕이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렇다. 그……!”

“후후후! 그걸 이제야 말해 주다니…….”

카르스의 돌연한 태도에 칸빌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침 그가 물러난 쪽은 아이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곳이었다.

“무능하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게 어둠의 법칙이라 들었지. 물론 당신이 그 법칙을 만들었고 말이야. 그렇다면 당연히 내게 힘을 빌려 달라는 말 따윈 해선 곤란하지. 칸빌!”

“이, 이놈! 카르스! 감히 네놈이 나를 배신하겠다는 것이냐?”

카르스의 입가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배신이 아니라 어둠의 법칙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카르스의 검이 시커먼 빛을 뿜어내며 서서히 드러났다.

칸빌의 하나 남은 눈동자에 절망이 번져갔다. 그러나 대항할 힘이 그에겐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 켈베로스와 마계의 왕자가 폭발을 일으키며 그의 모든 힘을 앗아간 탓이다.

“카, 카르스!”

“후후! 이젠 영원히 어둠 속에 너를 봉인시키겠다. 칸빌! 너를 대신해서 어둠의 세상은 나, 카르스가 지배하겠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흥! 꼬락서니들하고는…….”

카르스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순간 그의 두 눈이 급격하게 커졌다. 칸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가 나타나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신들이 그의 좌우를 함께하고 있었는데, 우측의 여신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신의 입을 통해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껏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칸빌!”

“너, 너희들은… 크악!”

칸빌의 떨리는 목소리가 끝을 보지 못했다.

카르스의 검이 그의 가슴을 갈랐기 때문이다. 한 줌 연기로 화해버린 칸빌의 모든 것이 카르스의 체내로 통해 흡수되었다.

그때 카르스의 지척에 여신이 나타나 있었다. 움찔하는 카르스를 쳐다보지도 않은 여신은 웅크린 아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젠 괜찮단다. 아이들아…….”

그녀의 음성엔 사람을 안정시키는 마력과도 같은 기운이 스며 있었다.

아이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바로 지척에 카르스가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카르스는 항거할 수 없는 마력과도 같은 힘이 여신에게서 발산되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계집들은 도대체 뭐지? 이런 강력한 기운은 또 뭐냐?’

카르스는 잔뜩 긴장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힘이 두 여인에게서 느껴졌는데 그게 어찌나 강력했던지 공격을 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정도였다.

“얘들아!”

그때 아리엘이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아리엘! 아리엘!”

엘프의 아이들이 그녀를 보고는 울먹였다.

아이들을 데려가던 여신이 그녀에게 말했다.

“조금 놀란 것 같으니 데려가서 재워야겠어요. 괜찮겠죠?”

“그, 그러세요.”

아리엘은 여신들과 함께 있는 사내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진한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투명한 액체 또한 살짝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우측의 여신이 매서운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마침 사내와 여신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움찔!

스르릉!

사내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 카르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때 여신이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뜨거운 기운이 몰아치며 카르스의 앞에 여신이 나타났다. 카르스를 향해 다가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화가 난 듯 보이는 여신이 다짜고짜 카르스에게 공격을 펼치며 소리쳤다.

“바람둥이! 고작 몇 년을 헤어졌다고 그새를 못 참고 새파랗게 어린 계집이야! 죽어랏! 이 나쁜 놈아!”

쾅! 쾅! 쾅!

카르스는 연방 뒤로 물러났다.

칸빌의 힘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미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상태였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았다.

“내가 그동안 잠을 자지 않았으면 바람을 어떻게 피워? 그러니까 이게 다 너희 마계의 잡졸들 때문이야! 죽엇!”

여신의 맹공은 폭풍처럼 사납고 거칠었다.

안간힘을 다해 공세를 막아내고 피해가던 카르스가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시커먼 연기로 화해 소멸되었다.

성난 여신은 입으로 연기를 훅훅 불어가며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아리엘은 그녀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지금껏 그녀가 이토록 슬픈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아리엘은 어깨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같은 여인이 봐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신이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리엘은 문득 마음이 포근해짐을 느꼈다. 슬픔도 사라졌고 아픔도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아리엘이라고 했나요? 우리 얘기 좀 할까요?”

* * *

전쟁에서 제국은 언제나 승자로 군림해 왔다.

사소한 전투에선 패배해도 전쟁에서는 언제나 승전은 제국의 몫이었다. 막강한 군사력 외에도 경제적으로 왕국들을 압도하는 까닭에 왕국이 제국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정해진 이치와도 같던 그것이 깨어졌다.

요란 제국의 패배.

홀베른을 침공했던 요란 제국이 대참패를 당했다.

황제가 전사하고 20만이 넘어가는 대군이 목숨을 잃었다. 거기에 국방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 향후 50년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타를 입은, 그야말로 국운이 휘청거릴 정도의 대패였다.

대륙이 들썩였다.

요란 제국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중소국들이 홀베른에 찬사를 보냈다. 요란 제국의 위성국가들과 공국들은 일제히 조공을 끊고 향후 정국의 변화를 기대했다.

요란의 숙적, 케이론 제국도 환호했다.

비록 전사자 7만에 유군 2만이라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숙적인 요란의 패배에 그들은 기뻐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홀베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한입으로 말했다.

“그곳은 초인을 능가하는 초월자들의 고향이다.”

전쟁을 통해 드러난 초월자들의 능력은 입에서 입을 타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 흑안의 마검사들이 있다고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흑안의 마검사가 그곳의 왕이라는 말까지 하고 다녔다.

“기사들이여! 홀베른으로 수련을 떠나자!”

수행을 원하는 기사들이 홀베른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라진 드래곤의 유물을 찾겠다며 세상을 떠돌던 파티들은 홀베른의 강력함이 드래곤의 유물 때문이라 여기고 모조리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의 착취에 힘겨워하던 인근 왕국의 백성들은 홀베른엔 신분의 귀천이 없다고 전해지자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대륙의 여론이 일방적으로 홀베른을 찬양하는 분위기로 이어지자 패전국 요란 제국은 결국 홀베른에 전쟁보상금까지 지불해야만 했고 케이론 제국에도 케논 산맥의 소유권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었다.

요란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된 케이시 공작은 홀베른 대평원에서 스스로 왕관을 벗고 홀베른의 상왕 앞에서 불가침협정과 전쟁예방차원에서 장남을 홀베른에 볼모로 보낸다는 서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 * *

요란 제국의 황궁은 대륙최고,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건물들과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성곽은 이것이 진정 제국의 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요란 제국의 수도는 평온했다. 다만 패전의 영향으로 불야성을 이루던 밤거리가 평소보다 다소 어두울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황궁의 앞은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고 고급술집들이 등을 밝히고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다른 나라의 황궁 주변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성문을 넘어서지만 않으면 뭘 해도 제재하지 않는 곳이 요란 제국이었다. 그래서 고급관료들이 출입하는 성곽 주변은 술집과 고급음식점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성곽 너머는 달랐다.

경계를 서는 기사들의 눈빛은 매처럼 날카로웠고 황궁이 늘어선 거리는 상당히 고요했다. 달이 하늘의 가운데에 떠올랐을 즈음, 경계를 서던 기사들의 하늘 위로 요란의 황궁으로 날아드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달을 가로지르는 그들을 본 기사들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을 이동하는 새의 무리로 여긴 것이다. 그들은 황제가 기거하는 궁전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 * *

요란의 새 황제 케이시는 뒷짐을 지고서 실내를 서성거렸다.

자꾸만 창 쪽을 흘긋거리며 다소 불안함을 드러내곤 했는데 어둠 속을 가르며 날아오는 그림자들을 발견하고는 오히려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가 창문을 열어젖히자 그림자들이 실내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제국의 황제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맞이하는 그림자들은 바로 혁련천후와 그 일행들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는 케이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와 함께 온 흑야와 조윤이 그의 좌우에 시립하듯 섰다.

혁련천후가 케이시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직접 가셔서 확인만 하시면 됩니다.”

“흠! 좋아. 당장 가보도록 하지.”

“아닙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출입구는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케이시의 그와 같은 말에 모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케이시가 다시 말했다.

“켈베로스, 놈이 머물던 곳이 이곳입니다. 제가 황제가 된 이후, 거처를 아예 이곳으로 옮겼습지요. 스스로 경계하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가 케이시를 유심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을 받은 케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걸었다. 조윤과 흑야가 그의 좌우를 따랐다.

케이시가 손을 뻗어 뭔가를 누르자 갑자기 벽면이 좌우로 갈라지며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저곳은……!’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조윤과 흑야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이곳입니다.”

케이시가 붉은색으로 넘실거리는 연못을 가리키자 혁련천후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투명한 방어막이 그가 다가가자 사라졌다.

“중원과 똑같은 지형이군.”

“그렇습니다. 천년금역의 혈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놀랍군요.”

혁련천후가 케이시를 돌아봤다.

그는 연못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곳이 확실한가?”

“틀림없습니다. 이계의 고수들이 그곳을 통해 오간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요.”

흑야가 끼어들었다.

“신교의 고수들이 이곳으로 넘나드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의 다른 존재들이 중원으로 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상당히 위험하겠군. 전혀 새로운 생명체가 중원으로 넘어간다면 생태계 자체가 뒤바뀔 수도 있어.”

조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오우거라는 놈들이 만약 중원의 산악지역으로 넘어간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겠군요. 오크나 고블린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정말 중원으로 넘어간 것들이 있다면 이거, 꽤 심각한데요?”

틀린 말이 아니다.

오우거를 본 중원인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면 쉽게 짐작이 갔다. 물론 전혀 다른 차원이라 반드시 생존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인간이 괜찮다면 몬스터들도 충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가능성이 높았다.

혁련천후가 케이시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최근에 이곳을 들어섰던 자들이 있었나?”

“이곳은 켈베로스와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는 곳입니다. 공작 시절의 저로서는 그것까지는… 다만, 최근에 의문의 실종을 당한 자들은 몇 있습니다. 그중에 죽은 대마법사 율튼의 시신도 포함됩니다.”

“죽은 대마법사의 시신이 사라졌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곳은 차원을 오가는 기능 외에도 죽은 자들을 살려낸다는 기괴한 전설이 깃든 곳이지요. 그래서 제가 전임 황제께 간곡히 부탁하여 율튼을 이곳으로 보냈었는데 연못에 담그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케이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죽은 자를 살려낸다는 기괴한 전설은 또 무엇이며 시신이 사라졌다는 건 또 무엇인가. 혁련천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대마법사라는 놈이 살아서 중원으로 이동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군.”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조윤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케이시에게 물었다.

“대마법사 말고 다른 자들은 누군가?”

“이계에서 넘어왔던 자들인데 레인의 전사소식을 듣고는 곧장 사라져버렸습니다.”

“신교의 놈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공!”

“그렇겠지.”

레인을 추종하는 자들이라면 분명 신교의 인물들일 것이다.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혁련천후는 말없이 붉은 연못을 바라보았다. 조윤과 흑야는 그런 혁련천후를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케이시는 다소곳한 자세로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사실 케이시는 혁련천후에게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여겼다.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은 홀베른의 평원에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전쟁을 원치 않았던 그들은 자신을 추격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며칠 뒤, 케이시는 한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그들을 보고는 기겁을 했었다. 자신의 침실까지 들어선 그들의 능력에 케이시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대신 그 대가로 자신은 요란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바로 차원을 오가는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려주지 않아도 찾아낼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케이시는 무조건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혁련천후가 등을 돌렸다.

“준비가 끝나면 모두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도록 해.”

“그동안 이곳에서 기다리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주모님들과 모두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흑야와 조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제국의 황제인 케이시는 자신의 침실을 당분간 혁련천후에게 내놓아야만 했다.

* * *

뾰르릉!

정겨운 새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혁련소는 눈을 떴다.

자신의 팔을 감고 들어오는 미끈한 감촉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탐스러운 가슴을 살짝 드러낸 연소민이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조금 더 자고 일어나요.”

“그럴까?”

혁련소는 이불을 슬쩍 들추고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물컹한 가슴의 촉감을 혁련소는 무척 좋아했다. 잘 때도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가슴이 무척 떨려요.”

“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찾으러 갈 것을 생각하니 두렵기도, 설레기도 해요. 혹시라도 잘못 되셨다면…….”

혁련소가 고개를 들어 연소민을 응시했다.

“어딘가에 분명 살아계실 거다. 그러니까 걱정 따윈 하지도 마. 중원의 평화와도 관련이 있으니 아버지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실 거야.”

“만약 다시 만나게 되면 정말 잘 해드리고 싶어요. 너무 속을 썩여드린 것 같아요. 그렇게 힘드신 줄도 모르고…….”

“하하! 멋진 사위까지 보셨으니 분명 환하게 웃으실 거야. 무진, 놈도 마찬가지고 말이지.”

“그래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혁련소의 팔이 연소민의 매끄러운 허리를 감아 당겼다.

“불끈 솟았다!”

“어머……!”

뜨거운 춘풍이 다시 실내를 요동쳤다.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지금 출발하신답니다! 늦으면 영영 이곳에서 살아야 한답니다!”

* * *

중원

십팔만리에 걸쳐 펼쳐진 이 광대한 제국은 오늘도 그 고고함을 자랑하며 잠을 자듯 고요했다. 중원의 최북단에는 검에 미쳐서 살아가는 전귀들의 대지 신강이 있다.

신교의 위대함이 하늘을 덮고 대지를 드리웠던 이곳이 언제부턴가 피와 죽음의 땅으로 변모했다.

천축의 마승들과 서장의 살인마들은 툭하면 이곳 신강으로 들어와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신강을 지배했던 신교조차도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강제적인 방관만을 할 뿐이었다.

신교의 앞마당이었던 고란평원은 이미 서장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북해의 패자, 빙궁은 신교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중원침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교를 원망했다.

신강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그들이라면 당연히 세외세력들의 중원난입을 막아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다.

천축의 마승들이, 서장의 살인마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헤집고 다녀도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그들과 항전하다가 죽어간 강호의 고수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북쪽에서 불어온 피바람은 서서히 중원의 중심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천년의 고도 장안이 서장의 살인마들에 의해 무너졌고 청해의 곤륜이 천축의 마승들에 의해 스스로 봉문의 길을 걸었다.

중원의 북방은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대지를 흥건히 적셨다.

보다 못한 정도맹이 나섰지만 그들의 발길을 조금 묶어두는 성과만을 거두었을 뿐, 그들을 패퇴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화산과 무당이 선전을 펼친 탓에 세외세력은 더 이상 중원의 중앙으로 진출을 하지 못하고 사천과 섬서의 경계지역을 가운데 놓고 중원의 연합군과 대치하는 상태로 돌입했다.

대치상태는 육 개월이 넘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은 한곳을 우러르기 시작했다.

무적의 절대자들이 숨을 쉬고 있는 곳, 신마성으로 모든 이들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강호의 은원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철칙을 깨고 강호로 나와 줄 것을 그들은 원했다.

하지만 신마성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곳곳에서 그들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맹이 수차례에 걸쳐 사자를 보내어 간곡히 청했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외면했다.

그러기를 육 개월이 흘렀을 때, 세외세력들의 총공격이 감행되었다.

* * *

산 전체를 두른 자욱한 안개는 고수들의 시야마저도 빼앗아 가버렸다.

스스슥!

수풀이 흔들리며 안개와 어우러진 일단의 무리들이 빠르게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복장이나 간간이 들려오는 언어로 보아 그들은 서장에서 온 자들이 분명했다.

“정지!”

굵직한 목소리에 이동하던 자들이 멈추었다.

핏빛 가사를 걸친 승려들이 잡아선 안 될 대도를 움켜쥐고서 사악한 시선을 북쪽으로 던졌다. 무리의 수는 대략 100여 명, 하나같이 사악한 기운을 발산하는 그들은 바로 천축의 패주라는 뇌음사의 고수들이었다.

“저곳을 넘어가면 곧장 화산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놈들의 매복이 있을 수 있으니 모두 흩어지지 말고 뭉쳐서 이동한다!”

선두에 선 승려가 손을 들어 앞으로 뻗자 이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상당수가 함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숲은 미세한 반응만을 보였다. 모두가 고수라는 것을 대변하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이동하자 유운곡이라는 제법 협곡이 그들을 막아섰다.

이름 그대로 사시사철 구름이 흐른다는 유운곡은 천험의 요새와도 같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두머리가 손가락 세 개를 펼치자 뒤쪽에서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살펴보고 오너라!”

우두머리의 명령에 그들은 빠르게 유운곡으로 스며들었다.

“활불님! 곧장 화산을 치실 생각입니까?”

“북부지역은 놈들만 깨면 거칠 게 없으니 당연히 화산부터 쓸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신마성이 지척에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신마성주가 화산을 총애하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인데…….”

수하의 불안감을 우두머리는 웃음으로 해소했다.

“흐흐! 놈들의 내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껏 중원을 방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첩보에 의하면 아들을 찾으러간 이후에 신마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필시 무슨 일을 당했을 것이야.”

“천하에 그를 어찌할 자가 감히 있겠습니까?”

수하의 여전한 불안감에 그는 다시 사악하게 웃었다.

“어리석긴, 신교가 하루아침에 박살이 나질 않았느냐? 어쩌면 그들과 신마성주가 동귀어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아무리 그자라도 신교의 교수, 수십 명이 덤벼들면 죽을 수밖에.”

“오호! 그럴 수도 있겠군요.”

둘의 대화는 척후를 갔던 승려들이 돌아오면서 끝났다.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지나쳐도 될 듯합니다.”

“좋아! 모두 이동한다!”

뇌음사의 고수들은 일제히 유운곡 안으로 스며들었다.

* * *

화산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천하에 으뜸을 자랑했다.

품은 문파 또한 천하에 으뜸이요, 문파가 품은 인재 또한 천하제일이니 당대의 화산은 모두가 우러르는 태양과도 같았다.

당대의 화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진유자는 매화무적이란 별호로 그 명성이 천하를 떨어 울리는 존재다. 그리고 그의 사제들로 이루어진 화산오웅은 사파의 무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당대의 협객들이다.

한때, 잠시 행방이 묘연해 화산의 애간장을 끓게 만들었던 화산오웅은 화산의 정상에서 천하를 굽어보며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었다.

첫째 진호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사숙조께서 계시지 않으니 별 잡놈들이 다 설치는구나!”

“놈들이 유운곡을 벗어났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이동속도로 보아 내일 오후쯤이면 화산에 도달할 듯합니다.”

둘째 진명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잘못했다. 그때 우리만 돌아올 것이 아니라 함께 남아서 사숙조님을 찾았어야 했을 것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땐 어쩔 수 없었지 않습니까? 만약 태사숙조님과 우리마저 돌아오지 못했다면 강호는 피바람에 잠겨도 벌써 잠겼을 겁니다. 그것을 염려한 태사숙조님의 판단이 옳았음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진명은 진호를 달랬다.

그때 뒤쪽에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섰던 날카롭게 생긴 청년이 둘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문을 열었다.

“미리 출전해서 매복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화산에 더러운 잡놈들의 피를 흘리게 할 셈입니까?”

진청이었다.

“놈들은 결코 약한 상대가 아니다. 진청! 화산으로 끌어들여 일거에 쓸어버리는 것이 앞으로의 판세에 더욱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쩝! 솔직히 판세 따윈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호는 스스로 세외세력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보호요? 젠장! 우리가 왜 그치들을 보호해 줘야 합니까?”

“진청!”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쩝! 화산에서 일거에 핏물로 만들어주지요. 대신 놈들의 대가리는 제 것입니다! 사형들!”

진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하여튼 그놈의 성질머리는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있겠느냐?”

“배우길 이렇게 배우질 않았습니까. 가짜 사부들한테서 말이죠.”

그 말에 진호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자식이 왜 그 양반들 얘긴 꺼내고 지랄이야?”

모두의 얼굴이 우울하게 변해갔다. 뒤쪽에 섰던 막내들도 진청의 뒤통수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뒤통수가 근질거린 진청이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지금 째려보냐?”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에 두 번만 뭐가 들어갔다간 내 뒤통수에 구멍이 나겠네.”

투덜거린 진청은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진호가 등을 돌렸다.

“대사형께 가보자! 지금쯤이면 작전이 다 수립되었을 게다.”

* * *

스르륵! 스르륵!

나뭇잎이 떨어진 연무장을 쓰는 노도인의 등은 주변 산세를 덮고 있는 고목만큼이나 오랜 연륜이 묻어났다.

쓸고 돌아서면 또 다른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지만 노도인은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가 지났을까?

노도인이 드디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허어! 올 겨울은 꽤나 춥겠구나. 벌써 이렇게 나무들이 제 잎을 버리다니… 쯧쯧쯧!”

주름진 얼굴에 시커먼 반점은 노도인이 살아온 세월이 결코 적지 않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하얀 눈썹 속에 감추어진 눈동자는 형형한 안광이 번뜩였다.

“올해도 돌아오시지 않으려나…….”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탈속한 눈동자에 애틋한 그리움이 맺혔다. 그런 그의 뒤로 헌앙한 기도를 자랑하는 장한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노도인은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아는 듯 하늘을 우러르며 말문을 열었다.

“놈들이 벌써 온 모양이구나.”

“반나절 거리에 들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어떻게 하기로 하였느냐?”

“산문으로 끌어들여 일망타진을 할까 합니다. 놓아두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돌아올 놈들이니 죽어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 죽일 생각입니다.”

장한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는 화산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이자 당대 천하의 최고수군에 들어가는 매화무적 진유자란 인물이었다.

“흠! 당연히 그래야겠지. 승려이되 피 맛을 보아 불자가 되기를 포기한 놈들이니 죽여도 무방할 게다. 그건 그렇고 태사조껜 기별을 넣어 드렸느냐?”

“아침에 아이 하나를 보냈습니다. 놈들과의 싸움에 관해선 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러지 말라고 시켰습니다.”

노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더 이상 강호의 추잡한 일로 그분께 폐를 끼쳐선 곤란하지. 잘했다. 잘했어.”

찬바람이 불어와 노도인의 도포자락을 쓸고 지나갔다.

진유자의 얼굴에 근심이 번져갔다.

“바람이 매우 차갑습니다. 어서 태청전으로 드시지요.”

“이 늙은이가 걱정이 되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밤잠을 설치기가 일숩니다. 솔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거립니다. 기침소리만 들려도 맨발로 태청각을 찾게 됩니다. 모두가 제 심정과 같습니다. 장문 사형…….”

그랬다.

노도인은 화산의 당대 장문인 태허자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되어 검조차 들지 못한다. 모두는 혁련천후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다가 마음의 병을 얻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태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들어가자꾸나. 사조들께 제를 올리고 너희들의 무운을 빌어야겠다.”

태허는 진유의 부축을 받고 서둘러 태청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혈승 광요는 뇌음사의 주지임과 동시에 서장 최강의 고수다.

서장의 포달랍궁과 더불어 세외의 양대산맥인 뇌음사를 전성기로 이끌고 있는 광요는 일신에 가공할 사공을 지녔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광요가 수하들을 이끌고 화산의 초입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갈 즈음이었다.

광요의 제자이자 뇌음사의 2인자인 마승 아불타가 화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부님! 놈들의 매복 따윈 없는 것 같습니다. 곧장 화산의 산문을 넘어서 끝장을 보는 게 좋겠습니다.”

“세가 불리하다고 느꼈다면 당연히 산문 안에서 총력전을 생각하고 있을 게다.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데 고개를 들이밀 순 없지. 잠시 대기하라!”

“화산 따위가 아무리 총력전을 펼친다고 해보았자 본 뇌음사의 적수가 될 리 없습니다. 사부님!”

아불타는 당장에 공격을 하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광요의 눈은 매우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리석은! 화산엔 매화무적과 화산오웅이 있음을 잊었느냐? 게다가 신마성의 무공을 이어받은 4대 제자들이 5백을 넘어간다. 결코 서둘러선 될 게 아닌 것이다.”

광요의 질책에 아불타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다소 불만 어린 눈으로 물었다.

“포달랍궁과 함께 오르실 복안이십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어차피 놈들은 산문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곳에서 놈들과 외부세력과의 합류를 차단하며 포달랍궁을 기다릴 것이다.”

광요의 말은 곧 뇌음사의 법이다.

그가 그렇게 단호하게 명을 내리자 모두는 주변에 은신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불타가 다시 물었다.

“그들이 오려면 이틀은 족히 걸립니다. 그럼 그동안 제가 은밀하게 화산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광요는 그것까지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객기는 금물임을 명심하여라.”

“알겠습니다!”

아불타가 자신의 측근 고수들을 몇 데리고 빠르게 산 위로 사라졌다. 그를 바라보는 광요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언젠가 저 급한 성정 때문에 큰 화를 입을 놈이구나.’

언제나 제자의 성급함을 질타했던 광요다.

하지만 천성이 그러했던 아불타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다만 무공에 대한 재질이 워낙 뛰어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뇌음사까지 그에게 넘기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더 컸다.

“전서를 띄워 포달랍궁의 위치와 도착시간을 알아보아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서구가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

방향은 호북이 있는 곳이었다.

* * *

퍽!

검이 베고 지나간 자리엔 어김없이 수급이 뒹굴었다.

머리털이라곤 하나 없는 수급은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감히 세외의 잡놈들이 중원을 넘보다니! 이리 오라!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주마!”

묵빛 검을 든 중년인의 노호성이 천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앞에 수십이 마승들이 중년인을 노려보며 검을 맞잡고 있었는데 붉은 홍포가사를 걸친 포달랍궁의 무승들이었다.

“십지신검! 이놈!”

장대한 체구를 지닌 인물이 장한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십지신검이라면?

그 누가 그를 모를까. 신마성주의 손위 처남이자 당대 천하오객의 일인인 검의 달인, 십지신검 독고무가 바로 중년인이었다.

한 마리 대호를 보듯 강렬한 안광을 번뜩이는 독고무의 주변은 이미 싸늘하게 굳어가는 포달랍궁의 마승들이 수십은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독고무, 그 혼자에게 당한 것이다.

그런 독고무의 뒤쪽엔 독고무가 문주로 있는 십지문의 고수들이 사나운 늑대와도 같은 기운을 발산하며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우측, 그곳엔 독고무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상황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당대 천하를 아우르는 중원의 다섯 개 별, 오성의 일인인 십전무제 영호도성이 영호세가의 무사들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이놈들이 우리의 이동 동선을 파악했단 말인가?’

포달랍궁의 궁주인 야율모영은 분노와 당혹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독고무와 영호도성을 번갈아 살폈다. 그들은 지금 한시라도 빨리 화산으로 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뇌음사와 합류하여 화산을 무너뜨리고 곧장 호북으로 돌아와 무당을 쓸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느닷없이 십지신검과 십전무제가 나타나더니 자신들의 이동을 막아섰다.

그리고 두 시진이 흐르는 지금껏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당한 피해만 입고 말았다.

“신마성주가 자리를 비우니 중원이 우습게보였느냐?”

독고무의 싸늘한 일갈이 야율모영의 귓속을 천둥처럼 울렸다.

생각 이상으로 그의 내공이 고절하자 야율모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포달랍궁은 모조리 뼈를 묻어야 한다.

그때 영호도성이 움직였다.

“돌아갈 때는 허락을 받고 가야 하네. 야율 궁주.”

“흥! 누구의 허락을 받는단 말이냐?”

“누구긴, 염라대제지.”

스르릉!

패를 모른다는 십전무제의 검이 뽑혔다.

야율모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림을 보인다. 그는 빠르게 남은 전력을 살폈다. 생존해 있는 고수들의 수는 대략 50명, 결코 약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야율모영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바로 십전무제와 십지신검이라는 존재들 때문이었다. 하나가 일개 문파에 필적한다는 오성의 일인에다 그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천하오객의 일인이 떡 하니 버티고 섰으니…….

스스슥!

그때 영호세가의 무사들과 십지문의 무사들이 포달랍궁의 마승들을 사방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하나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을 전하는 것과 같았다.

“오냐! 네놈들을 죽이고 본 궁주도 죽겠다. 모두 생사결을 준비하라!”

야율모영의 눈빛이 악독하게 변하자 영호도성은 독고무에게 전음을 보냈다.

[동귀어진을 생각하는 모양이네. 조심하게.]

[어르신도 조심하십시오.]

[봐서 놈을 기습하게나. 광신도들은 원래 머리만 잘라내면 나머지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네.]

[알겠습니다.]

야율모영의 손이 갑작스럽게 시퍼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영호도성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놈! 아주 사악한 것을 익혔구나. 살려줘선 도저히 안 될 놈이 예, 또 있었군.”

“모두들 물러서라!”

독고무도 야율모영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무사들을 멀찌감치 뒤로 물렸다. 포달랍궁의 마승들도 일제히 사악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독고무와 대결을 펼칠 땐 나타나지 않았던 변화였다.

[조심하게! 놈들이 죽음을 각오한 모양일세. 저건 일시적으로 내공을 증폭시키는 마공일세.]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것을 펼치면 후유증으로 이지를 상실하지 않습니까?]

[그렇네. 그만큼 당장의 위기를 뚫어내자는 심산이겠지. 꽤 성가시게 생겼네.]

둘은 전음을 주고받으며 간격을 벌렸다.

그들의 말처럼 포달랍궁의 마승들이 보이는 변화는 일시적으로 내공을 두 배가량 증폭시켜 주는 마공으로서 펼치면 이지를 상실하는 후유증이 있다.

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아니면 마인들도 어지간해선 펼치지 않는 극악한 마공이다. 그런데 야율모영까지 그런 변화를 보인다면 그들이 당장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는 걸 뜻한다.

서로가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결정인 셈이었다.

야율모영의 입을 통해 저주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지를 상실해 악마가 되더라고 네놈들만큼은 죽여주지. 그동안 오성이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십전무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면 당연히 죽어야지. 다음 생엔 자비로운 승려로 환생하여라.”

“후후! 배가공의 위력을 안다면 그따위 허세는 부릴 수 없을 텐데?”

“허! 말이 참 많은 놈이구나! 그 입으로 염불을 외웠으면 좋았으련만…….”

우우웅…….

영호도성의 검이 강기를 둘렀다.

십전무제는 모든 무공에 달통했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다. 그중에서도 검으로 펼치는 무학이 가장 출중한 그였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영롱한 음성이 흘러나오더니 장내를 울렸다.

“할아버지!”

하늘에서 들려온 듯 목소리는 방향을 찾기 힘들 정도로 울렸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허공을 살필 때, 영호도성의 육신은 폭풍을 맞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파파파팍!

포달랍궁의 마승들이 포진한 뒤쪽에서 하얀빛이 연속적으로 작은 폭발을 일으키더니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야를 앗아갈 정도의 빛이 피어났다.

두 눈이 서서히 시뻘겋게 변해가던 포달랍궁의 마승들이 빛을 보더니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아! 이 공기! 바로 이 공기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청아해지는 목소리는 하얀 궁장의를 걸친 여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여인 둘과 헌앙한 청년 한 명이 나타나 있었다.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격동으로 물들어갔다.

여인이 환하게 웃었다.

“저예요. 제가 돌아왔어요. 할아버지!”

“수, 수란아!”

쨍그랑!

영호도성이 검을 땅에 떨어뜨렸다.

“소손! 소도 돌아왔습니다! 하하!”

청년은 혁련소였다.

독고무가 벼락같이 그에게 다가가더니 부릅뜬 두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석을 보듯 살폈다.

“진정, 소구나. 으허허! 돌아왔구나! 이놈!”

“외숙부가 보고 싶어서 곧장 이리로 날아왔습니다.”

와락!

독고무가 거칠게 혁련소를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지 얼굴이 다 시뻘게진 혁련소가 포달랍궁의 마승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이 보고 있습니다.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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