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53화 (53/55)

제6장

태백산

태백산의 북동쪽 능선은 무림맹과 강호의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 천막들의 수는 수백을 넘어갔다. 주둔 병력만 1천을 넘어가는 이곳의 책임자는 오성의 일인인 천기수사 적용백이란 절대고수였다.

별호에서 느껴지듯 그는 천문지리에 달통했으면 고강한 무공만큼 학문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위인이었다.

그의 뛰어난 책략 덕분에 강호는 사천에서 세외연합군의 발길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무척 믿고 따랐다.

팽팽한 대치전으로 골머리를 앓던 적용백에게 낭보가 날아든 것은 해가 막 떠오른 아침 무렵이었다.

“하하! 화산이 진정 큰일을 해주었구나. 설마 놈들이 그곳까지 들어갔을 줄이야.”

적용백의 노안에 모처럼 큰 웃음이 걸렸다.

지켜보던 다른 중진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화산을 대표해서 연합군에 파견되어 있던 진승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이놈 진승아! 네놈들 사문이 내게 한숨 돌리게 해주는구나. 허허허!”

평소에 진승을 각별히 아꼈던 적용백이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말하자 진승의 머쓱함은 더 해만 갔다.

헌앙한 기도를 지닌 청년도인이 관승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역시 너희 화산은 대단하구나. 하하!”

“그만 해라.”

“나 도량의 몸을 흐르는 피의 반은 화산의 것이 아니냐? 머쓱해하기는…….”

“그만 좀 하라니까. 쪽팔리게…….”

“하하하!”

도량이 껄껄 웃자 진승은 그의 옆구리를 세게 쥐어박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량은 무당의 기재다. 지난 날 혁련천후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은 그는 화산을 무당 못지않게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돌아가는 진승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혹시 소식 없었냐?”

“무슨 소식?”

“그분들께서 나오셨다는 소식 말이다.”

“전혀!”

진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혁련천후와 팔왕의 부재는 신마성과 화산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다. 만약 그것이 알려지면 강호는 혼돈에 빠져들 것이 분명했다.

세외세력들도 그들이 신교와 상잔했을 거란 풍문만으로 강호를 침공하지 않았는가. 도량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휴! 그분들이 나오시면 그냥 깨끗하게 정리가 될 것을…….”

진승이 매서운 눈으로 도량을 노려본다.

“그래서 불만이냐?”

“하하! 불만은… 그냥 너무 방관하는 것이 아니냐고 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다.”

“이젠 스스로 강호를 지켜낼 역량을 길러야 한다며 역설한 게 무림맹임을 잊었느냐? 그분들도 그런 부분 때문에 다시는 강호의 일에 관여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고 말이다. 어떤 놈이 그분들을 욕하더냐? 젠장맞을 인간들!”

진승이 발끈하자 도량이 그를 달랬다.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째 진청, 그분과 똑같으냐? 그만 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 몰래 숨겨놓은 술이 몇 병 있다.”

“정말이냐?”

진승의 눈이 대번에 번쩍 빛을 발한다. 도량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눈에 불을 켤 때는 언제고…….”

둘이 빠르게 모종의 장소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소란스러움이 전해졌다.

도량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설마 벌써 맹의 지원군이 오기라도 한 걸까?”

“그 사람들이 무슨 새냐? 벌써 오게?”

“가보자!”

도량이 몸을 날리자 진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술은 인마!”

“지금 술이 문제냐?”

“젠장!”

진승도 소란이 인 곳으로 몸을 날렸다.

* * *

상당수의 무사들이 한곳에 모여 누군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기에 분주했다.

도량과 진승은 환호성을 지르던 무사 하나에게 물었다.

“누가 온 것인가?”

“매화무적께서 오셨답니다. 화산오웅도 함께요.”

진승의 눈이 번쩍 불꽃을 피웠다.

그는 비좁은 틈으로 몸을 쑤셔 넣고는 재빨리 앞으로 나아갔다. 눈총을 받아가며 앞으로 나선 진승은 매화무적 진유의 모습이 보이자 바람처럼 그곳으로 날아갔다.

“대사형!”

“오! 진승이구나. 하하! 별일 없었느냐?”

“별일이야 있을 건덕지나 있습니까?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 일은, 싸우러 왔지.”

진유는 무척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때 뒤쪽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자식아! 우린 눈에 뵈지도 않냐?”

진청이었다.

진승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사형들!”

“용케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제가 어딜 봐서 죽을 놈처럼 보입니까? 백 년은 더 살다 갈 겁니다.”

어느새 인파를 뚫고 온 도량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너희 둘이 죽이 척척 맞겠구나. 감춰둔 술은 당연히 있겠지?”

“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하하!”

진승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도량은 환하게 웃었다. 그때 한쪽이 다시 웅성거렸다. 신기수사 적용백과 수뇌부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유가 황급히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화산의 진유가 수사님을 뵙습니다!”

“허허! 이거 화산이 오니까 전선에 활기가 솟는구먼. 잘들 오셨네. 자, 어서 들어가세.”

“진즉에 왔어야 했습니다만, 이제야 미력한 도움이나마 줄 수 있어서 무척 송구합니다.”

“허허! 미력하다니, 그 사납던 마승들을 화산이 쓸어버렸음은 이제 온 세상이 알고 있다네. 동도들을 대신하여 진정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네.”

진심이 묻어나는 적용백의 태도에 진유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강호의 일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흡족한 시선으로 진유를 바라보던 적용백이 넌지시 물었다.

“다른 분들은 오시지 않는가?”

“아닙니다. 장문 사형께서도 곧 이곳으로 오십니다. 일이 있어 저와 사제들이 먼저 사문을 나서는 바람에 저희들이 조금 일찍 온 것 같습니다.”

적용백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장문인께서 직접 오신단 말인가? 몸이 불편하단 말이 있어 심히 걱정을 하고 있었네만?”

“다행히 쾌차하셨습니다. 장로님들과 곧 이곳으로 오신다고 기별을 미리 넣어 달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허허! 그거 정말 다행이군. 이거 오늘 내가 기분이 무척 좋아지는군.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들어가세.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반가운 손님이 왔으니 술 한잔은 해야겠지.”

적용백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배분으로 따진다면 진유는 적용백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오성은 강호최고의 배분이다.

하지만 천성이 소탈한 적용백은 배분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더욱 따르는 것이다.

진유가 적용백을 따라 사령막으로 들어가자 화산오웅은 슬그머니 뒤로 빠지더니 진승과 도량에게 눈짓을 보냈다. 얼른 다른 곳으로 안내하란 뜻이었다.

물론 목적은 도량이 준비해 놓았다는 술이었다.

* * *

신강의 겨울은 그 어느 곳보다 혹독하다.

지형적으로 산림이 적고 탁 트인 벌판이 많은 데다가 강한 바람이 끊이지 않는 탓에 인적이 극히 드물었다.

본토를 오가는 상단들이 간혹 보일뿐 그 외엔 세상을 덮은 눈과 간혹 보이는 짐승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두터운 털옷을 걸친 30명에 달하는 자들이 고란평원에 나타난 것은 해가 중천에 걸릴 즈음이었다. 그들이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인지는 몰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의 가운데에서 마치 솟아나듯 모습을 나타낸 그들은 한동안 평원의 가운데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눈으로 덮인 평원은 짐승의 발자국조차도 없었다. 간간이 솟아 있는 나무들이 이곳이 땅임을 알려줄 뿐, 그저 망망대해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휘이잉!

거센 바람이 눈보라를 일으키자 사위는 온통 뿌연 눈발로 가려졌다.

눈보라로 인해 시계가 10장 정도로 좁혀졌음에도 무리들의 하나가 북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는 빠르게 그곳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간 눈 위엔 당연히 있어야 할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귀신이 아니면 답설무흔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 둘 중 하나임을 뜻하는 것이다.

답설무흔의 경지는 최소 절정으로 본다.

절정을 넘은 고수들이 한꺼번에 서른 명이 나타난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같은 복장을 한 무리들이 평원의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먼 곳에 희미하게 드러나 있는 거대한 성곽이 보였다.

“드디어 돌아왔군.”

누군가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었던 귀환입니다. 놈을 처치하고 다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다른 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후후! 당연하지. 놈은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괴력을 얻어서 말이지. 이번만큼은 놈을 반드시 넘어줄 것이다. 놈이 이루었던 모든 신화를 본좌의 것으로 만든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천년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넌, 아이들을 보내 중원의 정세를 알아보고 오너라. 그리고 놈의 행방까지도 말이야.”

“존명!”

눈보라 속으로 몇이 사라졌다.

휘이잉!

바람이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회오리처럼 일어나 주변을 요동쳤던 눈발이 가라앉았을 때 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조금이 지났을 때였다.

“후후! 역시 이곳으로 오는군.”

무리들이 사라졌던 곳에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역시 두터운 털옷을 걸친 인물은 어깨에 기다란 검을 메고 있었는데 눈부신 금발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성곽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흠! 역시 주공은 대단하신 분이군. 이런 변수까지 예측하고 계셨다니…….”

놀랍게도 그는 진천이었다.

아직 이계에 남아 혁련천후의 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그가 어떻게 이곳 신강에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정확하게 이곳이 겨울임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두터운 털옷까지 걸쳤으니…….

그렇다면 이전의 무리들도 진천과 같은 곳에서 넘어온 자들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흠! 덕분에 개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 값은 제대로 받아주마. 죽을 놈들! 으이구, 추워라!”

진천의 입을 통해 나온 입김이 하얀 안개처럼 주변으로 흩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곧 떨어질 듯했다. 북방의 겨울은 무척 짧다. 진천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 * *

신교.

전귀들의 대지라는 신강의 절대패자이자 전신 마교의 고수들을 일부 흡수하여 정도맹과 쌍립을 이루었던 그곳은 두 번에 걸쳐 핏빛 폭풍을 만났었다.

한번은 장로 동승을 비롯한 주축세력들의 반란으로 인해 교주 연유극과 그의 아들 연무진인 행방불명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었고, 다른 한 번은 신마성주와 팔왕이 신교를 쓸어버린 것이 그것이다.

그 이후로 쇠퇴의 길을 걸었던 신교는 세외세력들의 침공으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치욕의 나날을 걷고 있었다.

행방불명이 된 교주와 소교주는 여전히 그 행방이 오리무중이었고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은 언젠가부터 신교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고수들이 재기를 꿈꾸고는 있었지만 한 번 무너진 세력을 회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유극의 명령을 받고 중원에 들어갔었던 절대고수 철우가 신교로 돌아와 재건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신교를 아우르고 또 흩어졌던 고수들을 찾아 다시 신교로 복귀시키는 작업을 통해 서서히 기틀을 마련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교는 교주파와 장로파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철우로서도 쉽게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과 같았다.

각설하고.

철우는 자신의 거처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오직 홀로 제사를 모시고 있는 철우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함을 자아냈다. 그는 정성껏 절을 올리고는 술잔에 술을 채워 제상에 놓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철우는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향이 거의 반쯤 남았을 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전주님!”

철우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반절을 하고는 등을 돌렸다.

“누구냐?”

“대용입니다!”

“무슨 일이냐?”

“객이 찾아들었습니다. 매우 이상한 자들입니다.”

철우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교에 들 객은 없다. 특히 요즘처럼 심란한 시기엔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객이라니…….

“신분은?”

“그게…….”

대용이 머뭇거리자 철우는 문을 열고 대용을 들였다. 상당히 강직한 인상을 한 대용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위기가 수상한 자들입니다. 다짜고짜 교의 책임자를 불러오라고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 말에 철우는 말없이 대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난동을 부릴 정도로 고수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벌써 몇이 다쳤습니다.”

“가보지.”

철우가 걸음을 옮기자 대용은 재빨리 벽면에 걸린 철우의 대도를 쥐고는 뒤를 따랐다. 걸어가면서 철우는 생각했다.

아무리 신교가 바닥을 긴다고는 하지만 그 누구라도 이곳에서 난동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신교엔 수백의 고수들이 있었고 대용이 직접 보고를 할 정도라면 벌써 교내로 진입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수백의 고수들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고수라는 걸 뜻한다. 진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부분이었다.

철우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 * *

진천은 신교의 첨탑 꼭대기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교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곽을 넘어 본관의 앞마당에 늘어선 자신들이 쫓는 자들도 보였다.

“한판 뒤집을 셈인가? 아니면 다시 신교를 먹으려는 거야?”

진천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때 그의 눈에 본관의 문을 열고나서는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보였다.

철우였다.

진천으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오호! 꽤 강한 친군데? 이곳까지 기운이 전해지다니, 놀라운걸?”

철우는 신교에서 손꼽히던 강자였다.

비록 교주 연유극의 명으로 중원의 모처에서 비밀스럽게 활동을 한 탓에 세상에 그 명성이 없었을 뿐이다.

그때였다. 진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그대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하! 성격 한번 죽이는군. 완전 형님들을 빼다 박았어.”

진천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조금 더 가까운 건물의 지붕으로 이동했다. 나는 새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그를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 접근하자 싸우는 자들의 호흡소리까지 들렸다. 그리고 철우의 대도가 발산하는 강력한 강기까지 전해졌다.

“교의 배신자들! 모조리 죽여주마!”

쾅! 쾅!

철우의 대도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싸우던 자들이 막기를 포기하고 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은 그가 얼마나 강한지를 대변했다.

다른 무사들은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서 주변을 멀찌감치 포위했다. 자칫 끼어들었다간 강기에 그대로 목이 날아간다.

“철우! 네놈이 지금껏 살아 있었다니…….”

“네놈들을 죽이기 전에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지. 쓰레기들!”

“후후! 아깝지만 네놈은 오늘 이곳에서 죽어야겠다. 오늘 이후로 신교는 다시 우리가 접수하는 것으로 하지.”

“능력이 있으면 마음껏 해보시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털옷을 걸친 자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자 철우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선두에 선 자의 양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것을 본 진천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마법을 펼치려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저 곰 같은 놈이 당해낼 순 없겠지?’

진천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신교가 놈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모든 게 틀어진다. 자신이 받은 명령은 신교를 보호하고 연유극과 연무진의 행방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신교를 돕게 되다니… 쩝!’

팟!

그의 육신이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양손을 좌우로 펼친 진천은 대붕이 강하하듯 대지로 떨어져 내렸다.

“비켜! 자식들아!”

진천의 낭랑한 외침에 막 마법공격을 펼치려던 자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진천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쿵!

진천이 내려선 바닥이 심하게 진동했다.

난데없이 끼어든 진천을 철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바라보았다. 최소한 적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특별한 경계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싸우던 자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를 갈았다.

진천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봐! 적이 아니니까 인상 풀어. 그리고 저놈들은 내가 맡을 테니까 뒤로 빠져 있어 줄래?”

황당하기는 철우나 상대편이나 같았다.

난데없이 뛰어들어서는 아무도 안중에 없는 듯 굴어대는 진천이다. 철우는 진천을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는 어딘가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금발머리에 준수한 얼굴, 그리고 저 정도의 기운이라면……!’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철우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팔왕!’

그랬다.

고금최강의 환술을 바탕으로 중원을 뒤 흔든 존재, 팔왕의 하나이며 따로 환영왕이라 불리는 존재, 바로 그가 눈앞의 존재라 여겼다. 철우는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신마성에서 오셨습니까?”

“눈치는 제법이군. 그렇다면 뒤로 빠져야 하는 이유도 알겠지?”

“돕겠습니다.”

“저놈들은 마공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요상한 술법을 쓰는 놈들이다. 빠져서 보고 있다가 여차하면 돕든가, 일단은 물러나 있는 게 돕는 거다.”

“알겠습니다.”

철우는 사나운 눈길로 무리들을 쓸어보고는 뒤로 조금 물러났다. 눈빛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가 왜 신교를 도우려는 걸까? 신마성은 화산이 아니면 절대 강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들은 마의 종주라는 신교다.

정파의 상징인 신마성이 도울 일은 없는 곳이 바로 신교가 아닌가.

하지만 일단은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아니 들어야 했다. 팔왕은 거부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진천이 다시 무리들을 향해 낭랑한 음성을 토해냈다.

“머릿수를 세어 보니 모조리 넘어온 것이 분명하군. 네놈들 찾는다고 개 고생한 걸 생각하면 목을 분질러야 속이 풀리겠다만 주공 때문에 참는다. 자식들아!”

그때 가운데 섰던 인물이 손을 들어 진천을 가리켰다.

“설마, 다, 당신이……!”

“당신이 뭐?”

“흑안의 마검사와 함께 움직였다는 그 마법사?”

진천이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이곳에서 그 소릴 들으니 무척 쑥스러운데. 귀는 있어서 들을 건 다 듣고 산 모양이군. 알고 있으니 깨놓고 말하지. 어디 숨겨놓았지?”

“무엇을 말이냐?”

“신교의 교주 말이야. 애타게 찾는 아이가 있어서 말이지. 얼른 불면 목숨은 보장하마.”

진천의 그 같은 말에 당황한 무리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뒤쪽에 빠졌던 철우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신교주의 행방에 대한 말이 거론되자 철우의 얼굴은 사나운 맹수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조심해. 놈들이 일거에 치고 들어올 태세니까.]

철우는 진천의 전음에 눈빛으로 감사를 표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왜 자신들을 돕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치르륵…….

진천의 육신이 하얀빛으로 둘러졌다.

동시에 무리들의 공격이 펼쳐졌다.

* * *

청룡단 소속의 무사 관호는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좌우측으로 수십 명의 동료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호흡을 고른 관호는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던졌다.

그는 화산의 속가제자다.

매화무적에게 사사받은 스무 명의 제자들 중 하나로 장래가 무척 촉망되는 기재이기도하다. 그는 지금 동료들과 함께 태백산의 곳곳에 매복 중인 적을 제거하는 임무에 투입된 상태다. 투입된 무사들의 수는 백이 넘어갔다.

상당수의 부대가 곳곳으로 나뉘어 태백산을 샅샅이 수색중이다. 관호가 속한 부대는 무당의 도량이 책임자로 나섰는데 그는 지금 대열의 가운데를 이동하고 있었다.

스스슥!

부딪힌 나뭇가지들이 울음을 토해낸다.

가운데와 가장 끝부분에 상대적으로 강한 고수들이 배치된 것은 혹시 모를 적의 기습에 대비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관호는 가운데에 배치되었다.

그때 선두에서 척후로 나섰던 무사 하나가 팔을 뻗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모두가 이동을 멈추고 호흡을 죽였다.

도량이 은밀하게 척후조에게로 다가갔다.

[적입니다.]

[몇 명이냐?]

[넷입니다. 그중 하나가 환술사로 보입니다.]

[알았다.]

전음을 주고받은 도량이 다시 대열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으로 암호 같은 것을 보내자 모두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량이 가장 끝부분에 배치되었던 고수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전방의 우뚝 솟아오른 암벽의 지척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암벽 뒤쪽에서 시뻘건 화염이 도량과 고수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해라!”

“환술공격이다!”

콰광!

폭발을 일으킨 곳에 화염이 솟구쳤다.

다행히 도량과 고수들은 화염공격에서 무사했지만 더 이상의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염공격은 다시 이어졌다.

쾅! 쾅! 쾅!

연속적인 공격으로 암벽 근처는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화염으로 둘러졌다.

“강전!”

도량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사들이 벌떡 일어서더니 일제히 강전을 쏘아댔다. 관호도 이동식 활을 손에 쥐고는 화염이 날아온 곳으로 강전을 날렸다.

쐐애액!

따다다다당!

암벽 윗부분에서 수많은 불꽃이 생겨났다. 어떤 방어막 같은 것에 강전들이 부딪히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환술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낱 매복조에 환술사라니… 도대체 환술사가 몇 명이나 된단 말이지?”

도량은 난감했다.

세외세력과의 전투에서 가장 골머리를 섞는 부분이 바로 환술사들이었다. 기상천외한 공격수법으로 무장한 적의 환술사들은 화염공격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고수들의 이동은 손쉽게 간파해내는 묘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정도맹은 지금껏 단 한 번의 기습도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서로 얽혀 난전을 벌이는 와중에 피아를 막론하고 퍼붓는 화염공격 때문에 상당한 수의 무사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일단 일정거리 밖으로 물러난다!”

도량은 어쩔 수 없이 뒤쪽으로 빠졌다.

적은 높은 곳에서 자신들을 환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리해서 올라가선 곤란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모두는 20장 밖으로 물러나 그곳에 진을 쳤다.

화염소리를 들은 다른 부대들이 속속들이 들어섰다. 3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끄는 화산의 진승이 가장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인사를 하는 관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진승이 도량에게 물었다.

“고작 다섯에게 발이 묶인 거냐?”

“다섯이 아닌 것 같아. 뒤쪽에 매복한 놈들이 더 있어. 환술사들도 제법 되는 것 같고 말이지.”

진승이 적의 매복한 곳을 살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흠! 좌우에 암벽, 그리고 통하는 길은 좁고… 몇 놈만 매복시켜도 수백은 거뜬히 막아낼 수 있는 지형이군. 돌파하기가 쉽지 않겠어. 그렇다고 암벽을 타고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흠! 이걸 어쩐다?”

고심은 하지만 표정과 태도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도량이 슬쩍 불만 어린 투로 물었다.

“고민을 하긴 하는 거냐?”

“그럼 내가 지금 웃고 있냐?”

“이런… 됐다! 인간아!”

진승이 도량을 보며 환하게 웃을 때, 암벽 위에서 퍽퍽 하는 소리가 모두의 귓속을 울렸다. 마치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였다.

“또 무슨 개수작을 떨려고 저러는 걸까?”

“글쎄…….”

그때였다.

암벽 위에서 시커먼 물체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순간 진승과 도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떨어진 물체들은 분명 사람의 머리였다.

사람의 머리만 떨어진 게 아니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자신들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사숙님들입니다!”

관호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다가오는 사람들은 화산오웅들이었다. 잔뜩 긴장했던 무사들이 환호성을 질러 그들을 환영했다. 진승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휴! 하여튼 저 양반들은 귀신처럼 사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니까.”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도량이 재빨리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모두 죽이셨습니까?”

진청이 대답했다.

“다섯 놈뿐이던데?”

“그랬습니까? 저는 더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지형 때문에 소수만 배치했겠지. 그건 그렇고 모두들 다 모인 거냐? 머리들만 잠깐 모이도록 해봐. 따로 지시할 게 있으니까.”

곧 부대장들이 화산오웅에게로 다가왔다.

모두가 장래가 촉망되는 후기지수들이었다. 상대적으로 이곳은 적의 주력이 그다지 많은 곳이 아니라 신진고수들로 이루어진 부대만 출전했다.

그들의 눈에 화산오웅은 그저 하늘로 여겨졌다. 진호가 가볍게 호흡을 고르고는 모든 무사들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말했다.

“우린 곧장 태백산을 넘어 사천으로 들어간다! 맹의 주력부대들도 벌써 곳곳으로 출전을 한 상태이니 모두들 각오를 다지도록!”

웅성웅성!

무사들이 동요를 보였다. 사천은 적진이다. 그 말은 곧 적과 전면전을 불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진호가 피식 웃고는 물었다.

“두려우냐?”

“아닙니다!”

백이 넘어가는 무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하자 산천초목이 흔들렸다.

“아예 적에게 우리가 여기 있소! 라고 외치는군. 쯧쯧!”

진청의 투덜거림에 이어 진호가 다시 말했다.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물론 승리는 우리가 할 것이다. 왜인 줄 아느냐?”

무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부대장들도 진호의 입만을 주시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진호가 무사들을 느릿하게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곧 전장으로 그분들이 오신다. 역사상 최초로 무적이라 칭송받는 그분과 함께 팔왕! 그분들이 우리를 도우러 오실 것이다! 이쯤 되면 무조건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냐? 하하하하!”

* * *

태백산의 정상은 두텁게 쌓인 눈으로 지형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회오리처럼 불어 어지간한 고수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그곳에 혁련천후를 비롯한 모두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리엘이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에요.”

사천의 우거진 수림으로 모두는 시선을 던졌다. 광활하게 펼쳐진 수림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아미파와 당문으로 대변되는 사천의 강호는 지금 세외세력으로 인해 치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혁련천후의 눈가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놈들을 배후에서 사주한 놈을 찾아서 없애야 한다.”

“이번 기회에 아예 그곳으로 통하는 문을 없애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게 좋겠지. 어차피 그곳이 아니라도 왕래할 방법이 있으니까…….”

혁련소가 나섰다.

“저곳에 장인어른이 계실까요?”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말끝을 흐린 혁련천후는 연소민을 돌아봤다.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한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무사하실 거야. 무진도 그렇고…….”

혁련소가 연소민을 달랬다.

검후, 독고혜가 바람에 흐트러진 혁련천후의 옷깃을 여며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문에서 모두 집결하기로 했다면 서둘러야지 않을까요?”

“그래야겠지.”

“이번이 당신의 마지막 싸움이었으면 좋겠어요. 미래의 강호는 이제 소에게 맡겨요.”

“그럴 생각이오.”

둘이 혁련소를 돌아봤다.

머쓱한 표정이 된 혁련소는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했다. 담대소천이 피식 웃는다.

“놀러 다니고 싶어서 어떻게 할 거냐?”

“쩝! 강호는 숙부들이 좀 어떻게 해보시죠. 전, 그런 체질이 아니라…….”

“우리도 그만 물러나야지. 대신 화산의 꼬맹이들이 널 도울 거다. 그리고 셋째 주모님의 동생들도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다.”

셋째 주모라는 말에 아리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샐쭉한 영호수란과는 달리 독고혜는 포근한 웃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호수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배고파 죽겠네. 빨리 가요!”

모두는 사천으로 몸을 날렸다.

* * *

사천의 우거진 수림은 독물들의 천국이다.

독을 주종으로 사용하는 사천당문이 번성할 수 있었던 원인도 중원에서 가장 많은 종의 독물들이 서식하는 수림 때문이다.

물리면 촌각 안에 즉사하는 독사부터 고수들의 호신강기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늪지의 독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세외세력들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은 이유도 바로 천연의 방어막을 형성해 주는 독물들 때문이다.

때문에 중원도 지금껏 세외세력들의 주둔지를 직접 공격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주둔지까지 들어서는 동안에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천당문이라도 건재했다면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들은 가장 먼저 세외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멸문의 위기까지 처한 상태였다.

사천의 맹주였던 사천당문과 아미파의 몰락으로 사천은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변한 상태였는데, 그런 사천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곳곳에서 은밀하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외세력들의 본영을 치려는 중원의 무사들이었다.

소수로 나뉘어 적의 감시망을 피하거나 우회해서 들어온 무사들의 수는 벌써 200에 이르렀고 여전히 500에 가까운 고수들이 사천을 향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태백산을 넘은 무사들은 화산오웅이 이끄는 부대였다.

신진고수들의 집합체인 청룡단을 이끌고 사천으로 들어선 화산오웅은 일차 집결지인 사천당문으로 향했다.

사천당문은 적의 지원부대가 수림 속의 본영으로 향하는 방향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러한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도중에 적의 지원과 보급을 끊으려는 속셈으로 집결지를 사천당문으로 정한 것이다.

“젠장! 겨울 맞아? 왜 이렇게 더워.”

진청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짜증을 부렸다.

사천은 이상기온이라도 찾아온 듯 상당히 더운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옆을 걷던 진명이 핀잔을 준다.

“한서불침은 놔뒀다가 엿을 바꿔먹으려고 그러느냐?”

“내공을 아껴야죠. 펑펑 쓰면 누가 채워준답니까?”

“그래, 많이 아껴라.”

사실 진청 정도의 고수는 조금의 내공만 사용해도 더위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추위도 물론이다.

하지만 진청은 평소에도 쓸데없이 내공을 운용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다른 고수들과는 달리 그는 여름용, 겨울용 무복을 따로 지니고 다닌다. 묵묵히 선두에서 이동하던 진호가 둘을 나무랐다.

“적들이 도처에 깔렸으니 목소리를 낮춰야지.”

둘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30명의 청룡단원들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각 문파에서 차출된 최고의 기재들로 이루어진 무력부대가 청룡단이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 대부분이라 긴장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세외의 고수들은 잔혹하기로 소문이 난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는 말문을 꾹 닫고 적당한 대형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조금을 더 갔을까?

선두에서 이동하던 진호가 손을 들어 모두를 세웠다. 다른 오웅들이 다가왔다.

[적입니까?]

[상당수가 앞쪽에 매복하고 있다. 아이들을 조금 뒤쪽으로 물리고 대열을 횡렬로 바꾼다.]

청명이 재빨리 뒤쪽으로 이동해 청룡단의 무사들에게 명령을 전했다.

무사들은 빠르게 횡으로 늘어서며 은밀하게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일순 주변에 무거운 적막감이 흘렀다.

그때였다.

전방의 숲 속 창공에서 폭죽이 터졌다.

펑!

“우와아!”

동시에 사방에서 적들이 뛰쳐나오며 괴성을 질러댔다. 진호를 비롯한 화산오웅은 재빨리 청룡단원들에게로 이동했다.

“흐흐흐! 겁 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군. 고작 그따위로 태백산을 넘어오다니…….”

장대한 체구를 지닌 흑포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가슴에 혈 자를 새겨 넣은 것으로 보아 혈교의 인물이 틀림없었다. 진호는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적의 수는 거의 100명에 이르렀다. 수적으로 세 배에 달하는 인원이다.

위기였다.

자신들만 있다면 싸우다가 물러나면 그뿐이다.

하지만 청룡단원들이 있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은 상당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혈교의 졸자였냐?”

호흡을 가다듬은 진호가 사납게 물었다.

“흐흐! 네놈들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설친다는 화산의 다섯 마리 개새끼들이군?”

“이런 개새끼가!”

성정이 불같은 진청이 그대로 흑포인을 덮쳤다.

진호가 말릴 사이도 없이 벌어진 상황은 곧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버렸다. 진명이 소리쳤다.

“모두 방진으로 대형을 바꾸고 방어에 치중한다!”

“방진!”

청룡단원들이 훈련받은 대로 빠르게 최적의 방어진이라는 방진으로 대열을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화산오웅의 막내인 청명과 청진이 섰다.

그리고 진호와 진명은 곧장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미친 개새끼가 얼마나 무서운 줄 보여주지.”

* * *

진청의 검은 사납고 난폭했다.

혁련천후에게서 직접 수련을 받았던 그는 누구보다 파괴적인 검법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그와 격돌한 혈교의 고수는 격돌이 벌어진 이후 단 한 번도 반격을 가하지 못하고 수비에만 급급했다.

깡! 깡! 깡!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의 충격이 연이어 전해지자 흑포인의 방어망에 허점이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초절정에 이른 진청이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병신새끼!”

서걱!

흑포인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잘린 부분에선 피조차 튀지 않았다.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발로 밟아버린 진청은 주변을 살폈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모습을 드러낸 자들치고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진호와 진명의 검이 연이어 적의 목을 끊어내고 있었고 청룡단원들을 덮쳤던 자들은 청명과 청진의 환술에 가랑잎처럼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적이 자신들을 과소평가한 것이라 여긴 진청의 눈매가 사납게 돌아갔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살기를 품은 진청이 한 마리 범처럼 전장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 * *

펑! 펑! 펑!

하늘이 빨간색과 파란색의 연기로 자욱하게 채워졌다.

빨간색은 세외세력의 신호탄이고 파란색은 정도맹의 신호탄이었다. 의외로 화산오웅의 무공이 강력하자 적은 여러 발의 신호탄을 연이어 쏘아댔다.

그리고 청룡단원 하나도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적의 지원병력을 염려한 것이다.

“적이 옵니다!”

“적의 지원병력입니다!”

숲 저쪽에서 적들이 달려오는 것을 본 무사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젠장! 근처에 몰려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 잠시 물러난다! 너희들은 아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퇴로를 열어라!”

전장을 휘젓던 화산오웅은 재빨리 퇴로를 열고자 뒤쪽으로 이동했다.

사방에서 적들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 후퇴한다!”

“숲 안쪽으로 들어가라!”

적의 수가 워낙 많았기에 그들은 울창한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

워낙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던 까닭에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오기 힘든 곳이라 수비를 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반면 고립이 될 가능성도 높은, 양날의 검과 같았지만 당장 처한 위기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숲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태양이 사라졌다.

쐐애액!

적들이 쏘아댄 강전들이 날아들었지만 천연의 방어막을 형성해 준 숲 때문에 아무도 해를 입지는 않았다.

“신호탄은 쏘았느냐?”

“예! 두 발을 모두 쏘았습니다!”

“좋아! 지원군이 올 때까지 이곳에서 버틴다!”

좁은 길목을 화산오웅이 막아섰다.

가장 먼저 뛰어들던 적들이 그들의 칼날 아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점점 밀려드는 수가 엄청나게 늘어갔다.

진호가 소리쳤다.

“청명, 청진! 환술로 놈들을 막아라!”

“예! 사숙!”

청명과 청진의 양손이 기괴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진천에게서 배운 환술로 그들은 주변의 사물을 대번에 다른 풍경으로 변화시켰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지?”

“대략 한 식경 정도에 불과합니다!”

“젠장!”

한 식경 안에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크나큰 피해를 불을 보듯 뻔했다.

사방에서 적들의 고함이 들렸다.

갑자기 그들이 사라지자 적은 마구잡이로 강전을 쏘아댔다. 모두는 나무를 엄폐물로 삼아 강전세례를 피했다.

하지만 환술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자 청룡단원들이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진명이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거긴 적의 본영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방어하는 게 최선이다. 진명!”

“얘들이 위험해집니다!”

“들어가면 더 위험해! 일단 기다려!”

진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옅어진 환술 사이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면과 측면까지 완벽하게 포위한 적의 수는 어림잡아 오백은 넘어 보였다.

“젠장! 마음대로 싸울 수도 없고, 빌어먹을!”

“침착해라! 곧 지원군이 들이닥칠 것이다.”

“제가 포위망을 뚫고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진청이 나섰으나 진호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빠지면 방어에 허점이 생겨, 그러니까 기다려 봐!”

“빌어먹을!”

진청이 신경질적으로 나무를 후려치고는 전방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쐐애액!

퍼퍼퍼퍽!

강전이 날아들어 주변 나무들을 흔들었다. 대부분이 그들이 모인 곳에 집중된 것으로 보아 위치가 드러난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고함이 들렸다.

“여기다! 놈들이 여기 있다!”

“좋아! 모두들 흩어지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싸운다! 가자!”

우아아아!

청룡단원들은 두려움을 몰아내려는 듯 악을 쓰며 적들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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