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안의 마검사-54화 (54/55)

제7장

돌아온 무적의 수신호위들

전투는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

비교적 강자들로 구성된 정도맹의 질풍대와 구파의 연합부대는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평원은 이미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가득했다.

청룡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고수로 이루어진 그들이었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았던 탓에 죽어가는 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지원군이 곧 올 것이다! 물러서지 말고 맞서 싸워라!”

묵풍대주 관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평원을 울렸지만 이미 기울어버린 기세는 되돌리기 힘들었다.

“으악!”

또 다른 희생자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전신에 박힌 암기는 죽은 자의 용모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수가 엄청났다. 적들이 사용하는 암기는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호신강기도 쉽게 관통해버리는 그것들은 정도맹의 고수들이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젠장!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이토록 예리하고 날카롭단 말이냐?”

관포는 당혹함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호신강기를 뚫어내니 검이나 도로 막아내는 방법밖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엄청난 수가 한꺼번에 집중되다 보니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죽어간 고수들 대부분이 적의 암기세례에 쓰러졌다. 관포 자신도 곳곳에 몇 발을 명중당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암기에 독이 없어서 내공이 강한 고수들은 견뎌낼 수 있었다.

따다다다당!

관포가 휘두른 대도에 암기들이 불꽃을 일으키며 튕겨서 날아갔다.

“으윽!”

“용성!”

묵풍대의 부대주 용성이 어깨에 암기 몇 발을 맞고 휘청거리자 관포가 재빨리 그를 보호했다. 날아든 암기들을 대도로 막아낸 그는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살아 있는 아군의 수는 스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적은 여전히 수백을 넘어갔다.

으드득!

“빌어먹을 오랑캐새끼들!”

관포는 이를 갈며 대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데려가고자 마음을 먹고는 자리를 박차고 날았다.

그때였다.

적의 후방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으아악!”

평원 전체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폭발은 처참했던 전투를 일시에 중단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화, 화산입니다!”

“아닙니다! 저, 저건 신마성의 깃발입니다! 오! 신마성이 왔습니다! 우린 이제 살았습니다!”

질풍대의 무사들이 적의 후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관포의 눈에 전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비쳤다. 은발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을 선두로 흑발을 늘어뜨린 존재와 그의 좌우를 걸어오는 여신과도 같은 여인들…….

순간, 관포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시, 신마성주께서 오셨다…….”

* * *

“역시 대단한 위력이야. 정말 대단해, 아리엘.”

“쑥스럽게 왜 그러세요? 언니.”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독고혜에게 아리엘은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의 폭발은 아리엘의 마법공격에 의한 것이다.

“그거 나도 좀 가르쳐줘야 해?”

영호수란이 샐쭉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가장 먼저 적진으로 걸었다.

“나도 본때를 보여줄게요.”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영호수란은 처음 만났을 적 그대로였다. 맑고 명랑했으며 질투심도 여전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는 웃음만을 보이는 그녀다.

“소천! 저항하는 놈들은 살려두지 말도록 해!”

“알겠습니다.”

담대소천과 왕전, 그리고 매화무적 진유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관산악이 흑색무복을 걸친 무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난입을 준비했다. 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그들이 바로 집단전에선 천하최강이라는 신마각의 신마대였다.

관산악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주공께서 허락하셨다. 반항하는 놈은 모조리 죽이라고 말이지. 모두 준비들 되었냐?”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흐흐! 좋아! 천하가 왜 우리 신마성을 두려워했는지 오랑캐 놈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자꾸나! 전원 돌격!”

관산악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마대원들은 전장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 * *

“잘 견뎌줬다! 관포!”

매화무적 진유는 묵풍대주 관포의 어깨를 툭 쳐주며 위로했다.

“젠장! 올 거면 좀 빨리 올 것이지.”

말투와는 달리 관포의 얼굴엔 안도감이 묻어났다. 그때 혁련천후가 앞에 모습을 나타내자 관포와 생존한 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관포가 신마를 뵙습니다.”

“신마를 뵙습니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치료를 받도록!”

혁련천후는 짧게 말을 하고는 뒷짐을 지고 전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전장은 살육의 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담대소천과 왕전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더욱이 천하에서 가장 난폭한 무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신마대원들이 성난 맹수처럼 전장을 헤집고 있었으니…….

“아픈 사람들은 이쪽으로 와요.”

아리엘이 허리에 손을 짚고서 말했다.

이국적인 그녀의 용모는 전장에서도 눈부셨다. 죽음의 혈전을 치른 무사들이 잠시 그것을 망각할 정도였다.

암기세례를 받았으니 성한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관포가 가장 먼저 아리엘의 마법치료를 받았다. 손을 몇 번 휘젓자 통증이 싹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셋째 사모께서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셨다. 어쩌면 팔왕, 저분들만큼 강하실걸?”

진유의 그 같은 대답에 관포는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팔왕에 버금가는 고수라는 말도 놀라웠지만 셋째 사모라는 말이 호흡조차 떨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배분으로 따지면 자신은 얼굴을 들어서도 안 되는, 그야말로 저 하늘 끝에서 노는 존재가 아닌가?

“아름다우시지?”

“그, 그래…….”

“정신 차리고 이동할 준비나 하고 있어라. 나도 사부들을 도와야겠다.”

반쯤 얼이 빠진 관포를 뒤로하고 진유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 *

“이런 개새끼들! 모조리 내게 덤벼!”

성난 진청의 고함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전투는 난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토록 견고하던 방진이 깨어지자 적과 아군이 뒤섞여버렸다. 화산오웅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섯의 청룡단원이 아까운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른 모두도 얼마 견디지 못할 듯 보였다.

쾅!

진호의 검이 맹렬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워낙 수적에서 밀리다 보니 그는 무리를 해서라도 대량살상용 수법만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죽은 적이 수십을 넘어갔다. 그러다 보니 그가 움직이는 주변엔 적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서 암기만 던져댈 뿐이었다.

서걱!

진명의 검이 꽤 사납게 보이던 혈교의 고수를 두 동강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자리엔 이내 다른 자들이 들어서서 진명을 몰아쳤다.

“악!”

뾰족한 비명이 화산오웅의 가슴을 울렸다.

돌아보니 청룡단의 여무사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마승의 검이 가슴을 뚫고 등까지 삐져나와 있었는데 베어진 옷자락 사이로 풍만한 가슴이 드러났다. 주변의 마승들이 그것을 보며 킬킬거리는 모습에 진호가 대노했다.

에움을 뚫고 그곳으로 쇄도해 들어가려던 진호가 멈칫했다.

퍽! 퍽! 퍽!

여무사의 주변을 섰던 마승들의 머리통이 피 안개를 만들어내며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육신이 통나무처럼 바닥으로 쓰러지며 진한 핏물을 쏟아냈다.

동시에 그 자리에 누군가가 모습을 나타냈다.

진호를 비롯한 화산오웅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태사조님!”

“우와! 태사조님!”

“수고들이 많았구나. 이젠 물러나서 쉬고 있으렴.”

화산오웅을 마치 손자를 대하 듯 하는 그는 누굴까?

화산오웅이 태사조라 부르는 인물은 오직 하나뿐이다. 신마 혁련천후가 유일하게 고개를 숙이는 존재인 그의 조부, 혁련강이 드디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신마보다 더 강할 거라 말하기도 한다.

“안녕하십니까! 하하하!”

“모조리 죽여주마!”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이젠 정겹기까지 한 광포한 음성이 전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혁련강의 옆으로 혁련소와 북궁천소가 나타났다.

전장을 둘러본 북궁천소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작 이따위 새끼들한테 그 고생이냐? 전쟁이 끝나면 네놈들은 다시 지옥수련을 할 테니 각오들 단단히 하고 있어!”

북궁천소가 대도를 휘두르며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혁련소가 마계의 암흑마기를 두르고 마승들의 가운데로 질주해 들어갔다. 그리고 무적의 최종병기, 천살강기가 적진의 한가운데서 광포함을 드러내자 적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 * *

백리세가의 가주 백리추는 급격히 기울어가는 전황에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오대세가에서 차출된 고수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던 그는 1천에 가까운 적의 대규모 공격에 사천의 초입에서 발이 묶였다.

하나하나가 상당한 고수들로 이루어진 부대라 수를 바탕으로 밀어붙이는 적의 공격에도 지금껏 버텨낼 순 있었지만 그들도 내공과 체력에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아직 죽은 자들은 없으나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고수는 몇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조금만 지나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신호탄을 있는 대로 다 쏘아 올렸지만 지원군은 지금껏 오지 않았다.

백리추의 동생이자 정도맹의 호법인 백리관이 소리쳤다.

“형님! 이대로 가면 전멸입니다. 힘을 한곳에 집중하여 에움을 뚫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빌어먹을! 중원에 오랑캐가 더 많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냉철함을 잃어선 안 된다! 사람들에게 한곳으로 모이라고 전하여라! 어서!”

달려들던 적의 머리를 베어버린 백리관이 포효하며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작전을 전하자 사방을 흩어졌던 고수들이 점차 백리추가 있는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적이 눈치를 챘는지 뒤쪽에 빠져 있던 자들까지 전장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자가 고립되는 형국으로 변해버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서장의 고수들이 전장에 투입되자 전황은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파뢰음사의 고수들입니다!”

그들은 무척 사납고 강했다.

체력이 바닥까지 다다른 고수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상대였다. 짧은 시간에 하북팽가의 고수 셋이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관! 위험하다!”

백리추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좌충우돌하면서 전장을 휘젓던 백리관에게로 파뢰음사의 고수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그는 주변을 둘러싼 적의 목을 잘라내며 그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인의 장벽으로 인해 쉽게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이미 백리관은 파뢰음사의 고수들과 검을 섞고 있었다.

백리추의 눈이 불을 뿜었다.

“비켜라! 이놈들!”

쾅! 쾅! 쾅!

혼신의 힘으로 대량살상용 강기를 펼쳐낸 그는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하수들 사이에 섞여 있던 적의 고수 몇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뜬 그를 향해 날아올랐다.

“백리세가주! 오늘로서 네놈도 끝이다!”

“……!”

백리추는 허공에서 호흡을 가다듬고는 곧장 백리관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뒤를 쫓는 적의 공격을 모두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동생의 위기 때문에 냉철함이 다소 흐트러진 결과가 크나큰 위기로 이어졌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백리추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리고 차가운 사내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흑발을 날리며 언제나 죽음과 함께하는 사내, 하지만 자신들에겐 세상의 누구보다 따뜻하게 대해주는 그가 보고 싶어졌다.

백리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을 휘두르면 하나는 더 죽일 수 있었지만 그는 이대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다.

그때였다.

백리추는 광포한 기운이 주변을 몰아침을 느꼈다.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목소리.

“어리석은! 목숨을 포기하다니!”

감은 눈이 떠지며 격동이 어렸다.

목소리는 죽음 직전에 떠올랐던 사내의 것이었다. 떠진 그의 눈동자에 자욱한 피안개가 비쳤다. 그리고 전장으로 떨어져 내리는 흑발사내의 모습도 보였다.

“매, 매형!”

“나중에 얘기하자!”

흑야였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 장창을 비껴들고 전장을 바라보는 창왕 조윤과 가슴에 신마성의 표식을 새긴 일단의 무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곧장 전장으로 난입했다.

한줄기 포효성에 적들의 참혹한 비명이 이어지고 신마성 무사들의 광포한 몸짓에 파뢰음사의 고수들이 핏물로 화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살왕께서 오셨다!”

“창왕이 오셨다! 힘을 내자!”

“신마성이다! 신마성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 모두들 힘을 내라!”

정도맹의 고수들이 환호했다.

신마성이란 단어만으로도 전황은 급격히 반전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팔왕의 둘이 나타나자 적의 수뇌부는 전장을 포기하고 꼬리를 말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그들의 옆에 흑야가 나타났다. 그 엄청난 경공에 적의 수뇌부들은 기절초풍을 했다. 흑야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죽음의 미소였다.

“그만 죽어야지?”

서걱!

파뢰음사의 수장이 칼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나며 쓰러졌다.

팔왕은 듣는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존재들, 그런 팔왕이 눈앞에서 검을 들고 있었으니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개자식들! 어딜 도망가느냐!”

“멈춰!”

분노한 백리관이 도주하는 적을 쫓아 움직이려고 했으나 흑야가 잡아서 말렸다. 살아남은 고수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인원을 파악하던 백리추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반 수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흑야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어!”

“매형!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백리관이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가왔다. 환한 기쁨이 얼굴 가득 채워졌다.

생존한 고수들이 흑야와 조윤에게 허리를 굽혔다.

조윤이 말했다.

“모두들 주공께 간다.”

모두가 경악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변했다. 팔왕의 주인이라면 당연히 신마 혁련천후다.

“신마께서 참전하셨습니까?”

“정말 신마께서도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고수들이 확인을 해야 안심이 되겠다는 듯 물어온다. 흑야가 남쪽으로 등을 돌리며 말했다.

“잡을 놈이 있어서…….”

조윤이 뒤를 따르며 거들었다.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다. 모두들 사천당문으로 이동한다!”

* * *

사천당문은 모여드는 군웅들로 점차 붐비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구파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부대는 다행히 적의 기습을 받지 않았던 까닭에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로 도착한 부대들도 적의 기습을 받지 않았던 까닭에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출발인원이 절반가량 줄어든 부대도 있었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부대도 있었다. 그 와중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곤륜과 청성이었다. 그들은 적의 기습에 장문인들을 잃었다.

지리적으로 북쪽에서 오다 보니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이 큰 피해를 입은 원인이었다.

고수들의 호위 속에 가장 먼저 사천당문에 도착한 정도맹주 남궁기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부대들의 상황파악에 주력했다. 정도맹의 첩보를 관할하는 비영전의 무사들이 그의 명령을 받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뒤늦게 도착한 신기수사 적용백이 남궁기에게 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 어느 부대요?”

“다섯 곳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다른 곳도 걱정이오만 젊은 아이들이 주축인 청룡단과 질풍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심히 걱정이오.”

적용백의 미간에 수심이 어렸다.

모두가 장차 강호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성장할 인재들이 그들이다. 더욱이 청룡단엔 자신의 증손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마성에선 소식이 없소?”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도 도중에 적에게 요격을 당한 듯합니다. 전서가 되질 않는 곳이니…….”

“화산이 움직였으니 기대를 해봅시다. 화산에 대한 신마성주의 각별함이야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노부도 오직 그것에만 기대할 뿐이라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산발적으로 도착하는 고수들이 제법 있었다. 대부분이 기습으로 인해 부대에서 낙오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무사들이 그들에게 일일이 소속을 물었으나 청룡단과 질풍대 소속의 무사는 아무도 없었다. 호법 관승이 낙담한 빛으로 남궁기를 돌아봤다.

“희망을 가집시다. 화산오웅이라면 충분히 그 아이들을 무사히 이곳까지 데리고 올 것이오.”

남궁기는 스스로 위안이라도 삼겠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꽈르릉…….

갑자기 하늘이 천둥번개를 몰아치며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습한 기후를 보이는 사천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한 것이라 모두는 미리 준비한 천막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사천당문의 본가에 사령실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부대들 때문에 모두는 바깥을 지켰다.

쏴아아아…….

내리는 비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특히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오는 자, 아무도 없었다. 정보를 알아보러 떠난 비영전의 고수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지쳐갈 때 전방 숲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대세가의 고수들입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기도 벌떡 일어나서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살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가장 강력한 부대들 중 하나였던 그들이 보고된 인원의 절반가량밖에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설마, 저들이 반 수 이상을 잃어버리는 피해를 당했단 말인가?”

“맹주! 뒤쪽에 더 있소이다!”

적용백이 소리쳤다.

그랬다.

오대세가의 고수들 뒤쪽에 다른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크게 놀란 소리로 외쳤다.

“시, 신마성입니다!”

“뭣이! 신마성!”

집결했던 고수들이 들썩였다.

어지간한 남궁기와 적용백마저도 큰소리를 낼 정도였다. 남궁기와 적용백이 빗속을 헤치고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신마성은 아무리 맹주라도 가만히 앉아서 맞이할 곳이 아니다.

“와! 살왕께서 오셨다!”

“창왕도 오셨다!”

흑야와 조윤의 정체를 알아본 고수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전쟁으로 인해 드리웠던 지독한 암울함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남궁기가 두 손을 뻗어 흑야의 팔을 잡았다.

“어서 오시오. 살왕.”

“오랜만입니다. 맹주님!”

“허허! 창왕께서도 오셨구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맹주님!”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둘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보기 위해 다툼을 벌일 정도였다. 부상당한 고수들은 재빨리 사천당문의 본관으로 옮겨졌다.

흑야와 조윤은 간단한 인사치레를 마치고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남궁기는 물어볼 것이 무척 많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신마성주가 직접 이곳으로 오느냐에 있었다.

흑야와 조윤이 그 부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는 그가 올 거라는 추측만을 할 뿐이었다. 팔왕과 신마성의 무사들이 움직였다면 당연히 그도 움직일 거란 판단에서였다.

어둠이 몰려온 사천당문은 묘한 적막감에 휩싸였다.

최소한의 경계 병력만이 혹시 모를 적의 기습을 경계할 뿐 다른 모두는 각자의 거처와 천막으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남궁기와 적용백은 사천당문이 특별히 내어준 가주의 거처에서 미리 도착한 각파의 수장들과 향후 작전수립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야와 조윤은 신마성의 무사들과 별도의 공간에서 머무를 뿐, 작전엔 일절 관여를 하지 않았다.

꽈르릉!

뇌전이 몰아치는 속도가 더더욱 빨라졌다.

하늘을 흘긋거린 조윤이 중얼거렸다.

“꼭 몬스터들이 준동할 때처럼 몰아치는군.”

“설마 놈들이 이곳까지 올 수는 없겠지. 와봤자 별다를 것도 없지만…….”

“그나저나 놈을 어떻게 찾지? 반드시 중원에 있으란 법도 없고 말이다.”

“없으면 그만이고 있으면 찾아내어 죽이면 되지 않느냐? 괜한 걱정은…….”

흑야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에 조윤은 그를 가볍게 노려보았다.

“속 편해서 좋겠다. 인간아!”

그때 백리관이 술과 음식을 가져왔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는 여전히 흑야를 아이처럼 좋아하며 따랐다. 매형이기 이전에 그는 백리관의 우상이었으니까.

“당문에서 전서를 빌려 방금 세가로 소식을 보냈습니다. 매형께서 오셨다고 말이죠.”

“다들 무고하시냐?”

“그럼요. 누나만 살이 쭉 빠졌습니다. 책임지셔야죠.”

옅은 미소를 머금은 흑야의 눈에 숲에서 빠져나오는 한 인물들이 보였다. 술로 목을 축인 조윤이 씩 웃었다.

“후후! 조용하게도 들어오셨군.”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적이었다면 다 죽었다. 어리석은…….”

나타난 인물들은 혁련강과 북궁천소, 그리고 혁련소와 청룡단원들이었다. 당연히 소란이 일어야 정상인데 사위는 매우 조용했다.

외곽을 경계하던 무사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흑야와 조윤은 혁련강을 자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모셨다. 마침 그곳으로 들어서던 백리추가 크게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백리관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고들 많았구나. 다른 아이들은 아직 소식이 없는 게냐?”

“곧 도착하신다고 했습니다.”

조윤이 술잔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잔을 채웠다.

혁련강이 술잔에 입을 가져가기도 전에 남궁기가 뛰쳐나왔다. 누군가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적용백도 겉옷을 걸치지도 않은 채 남궁기의 뒤를 따라왔다.

“노야께서 친히 찾아주시니 강호 동도들을 대신하여 심히 감사를 드립니다!”

“허허! 나 같은 늙은이가 짐이나 되지 않았으면 좋겠소만…….”

“노야께서 납신 것을 안다면 모두가 사기 백배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남궁기는 진정으로 그를 반겼다.

중원연합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혁련강은 신마에 버금가는 절대고수가 아닌가?

적용백이 공손하게 말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사람을 보냈을 것을 말입니다.”

“허허!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장에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소. 난 괜찮으니 개념치 마시오.”

사천당문의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자던 자들에게도 소식이 들어간 것이다. 모두가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청룡단의 청년들과 연고가 있던 사람들은 안위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렀다.

살아온 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접한 지인들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도 했다. 생존을 확인한 자들은 혁련강과 북궁천소에게 감사를 표하느라 연방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숲 속에서 누군가 빠르게 뛰어오며 소리쳤다.

“오셨습니다! 오셨습니다!”

모두가 무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무사는 천지개벽이라도 본 듯 반쯤 얼이 빠진 모습으로 빗속을 뚫고 뛰어왔다.

“누가 왔단 말이냐?”

“시, 신마께서 오셨습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오오! 신마께서 진정 오셨단 말이냐?”

혁련강이 미소를 머금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조윤과 흑야, 북궁천소가 일어섰다. 신마성의 무사들이 좌우로 늘어져 혁련천후를 맞을 준비를 했다.

살아 있는 강호의 전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조금이 지나자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흑발사내, 모두의 눈에 희열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신마성의 무사들이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 * *

하룻밤을 꼬박 퍼부은 폭우는 대지를 질펀하게 변화시켰다.

강호의 고수들이 아니면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변해버린 진창길을 이동하는 마차의 행렬이 있었다.

사천의 서쪽에서 동북방향으로 이동하는 마차들은 뭔가를 잔뜩 싣고 있었는데 마차 주변은 무기를 든 무사들 수십 명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푹푹 빠져드는 마차 때문에 이동속도는 어린아이의 걸음 정도로 느렸다. 선두에서 온갖 치장을 한 말에 몸을 실은 인물이 연방 짜증을 부렸다.

“속도를 내어라! 이대로 가면 제시간에 당도하지 못한단 말이다!”

짜증을 부린다고 길이 마르면 얼마나 좋을까? 무사들이 마차를 손으로 밀었지만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빌어먹을! 그냥 인근마을을 약탈하면 될 것을 보급은 무슨 얼어 죽을 보급이란 말이냐!”

“전주님! 말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이대로 가면 곧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게 분명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가심이…….”

전주라 불린 자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말이 쓰러지면 모든 게 틀어져버린다. 방법이라면 무사들이 짐을 들고 가면 되지만 천리길을 그렇게 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쉴 것을 허락했다.

“반 시진 동안 말들의 체력을 보충시키고 이동할 것이다!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고 보급품에 물이 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도록 해라!”

전주라는 자의 고함이 막 끝나갈 때였다.

퍽!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무엇인가가 그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피가 튀며 거대한 육신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챙! 챙!

무사들이 무기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란을 떨며 혼란스러움을 보였다.

다시 몇 발의 파공성이 울리며 꽤 강해 보이던 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좌우 숲 속에서 그림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거대한 칼을 든 왕전의 사나운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마치 선녀처럼 아름다운 이국의 미녀와 화산의 무복을 걸친 다섯, 그리고 정도맹의 무복을 걸친 청년무사들도 보였다.

“많이도 가져간다. 망할 새끼들!”

늘어진 마차들을 보며 인상을 그린 왕전이 가장 가까이 섰던 마차를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마차 주변을 섰던 자들이 기겁을 하고서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마차가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며 날아갔다.

쾅!

말까지 핏물로 화해버리는 가공할 광경에 호송하던 무사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에 달려들어도 시원찮을 그들은 왕전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전왕…….”

왕전을 알아본 모양이다.

“무기를 버리는 놈은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 단, 대항하면 어떻게 될지는 네놈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왕전이 사나운 범처럼 으르렁거렸다.

검을 뽑았지만 달려들 생각을 못 하고 있던 자들이 갈등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들은 세외세력의 본영으로 보급물자를 호송하던 자들이다.

당연히 적이 나타났다면 불문곡직, 싸워야 한다.

하지만 적도 적 나름이다. 세외에도 전설처럼 전해지는 팔왕의 한 명, 그것도 가장 사납기로 유명한 전왕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갈등은 당연했다.

갈등하는 것을 본 왕전이 옆의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빛을 주었다. 화려한 은발을 자랑하는 그녀는 다름 아닌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이 앞으로 나섰다.

“흐흐! 제대로 한번 보여 주시죠.”

“알았어요.”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양팔을 허공으로 세웠다.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허공에서 뇌전 같은 기운이 일렁거리더니 그대로 마차들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콰콰콰쾅!

마차 네 대가 연속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더니 산산조각으로 화해 날아갔다.

뇌전 한 발이 무사들의 측면에 떨어졌다. 대여섯이 피를 뿌리며 날아가더니 그대로 늘어졌다. 즉사를 한 것이다.

화르르르…….

불길에 휩싸인 마차의 파편들이 묘한 소리를 냈다.

순간 주변이 적막감으로 휩싸였다. 놀라기는 적뿐만이 아니라 아리엘과 함께 온 화산오웅과 정도맹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태어나 저런 무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쨍그랑!

적들이 무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더니 이내 모두가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흐흐흐! 역시 가시적인 효과는 최고라니까.”

“나 잘했죠?”

“흐흐흐! 정말 잘하셨습니다! 뭐 해! 놈들을 포박하지 않고?”

* * *

사천당문으로 들어서는 마차의 행렬을 보며 군웅들은 환호했다.

왕전 등이 적의 보급부대를 털러갔다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빠른 시간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바였다.

“오! 포로까지 잡으셨네. 역시 전왕이시다!”

“아군은 옷에 흙먼지 하나 묻지 않았잖아? 도대체 어떻게 잡으신 거지?”

젊은 무사들은 흠모의 빛을 쏘아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밝은 표정으로 들어서던 아리엘은 갑자기 훌쩍 뛰어올랐다. 그곳에 검후와 영호수란이 있었다.

“수고했어.”

“너무 쉬웠어요.”

“그건 아리엘이 강해서 그런 거야.”

검후는 포근하게 그녀를 맞았다. 영호수란은 여전히 샐쭉한 표정이지만 아리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어주었다.

“어머! 전부 우리를 쳐다봐요.”

“너희들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지. 그만 들어가자. 아리엘은 식사도 못 했지?”

“네! 배고파요.”

그녀들이 모습을 감추자 주변에 탄식이 흘렀다.

하지만 탄식은 곧 열망으로 바뀌었다. 신마 혁련천후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군웅들이 임시로 기거하는 연무장으로 들어서자 모든 이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세웠다. 젊은 무사들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사들의 꿈이자 우상인 그를 직접 본다는 건 누구에게나 크나큰 행운이다.

역사상 최초로 강호를 일통하고 강호의 역사를 적어놓은 강호사기에 유일하게 무적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존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엔 열망이 어렸다.

연무장을 가로질러 앞쪽 숲으로 걸어가는 그의 괘적을 쫓아 모두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곳엔 적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은 무사들의 임시분향이 차려진 곳이었다.

죽은 자들의 수는 무려 2백,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5백이 넘어간다. 그중 화산의 제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소식을 접한 혁련천후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분향소를 찾은 것이다.

매화무적 진유의 얼굴이 침통하게 굳어 있었고 화산오웅은 분을 삭이느라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진승은 눈물을 흘렸다.

죽은 무사들은 그와 같은 부대의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은 혁련천후는 경건한 자세로 술잔을 들고 부었다. 그리고 향을 던지고는 이배를 올렸다.

화산의 제자들뿐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이 숙연한 자세로 그러한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아내들도 옆에 다가와 있었다.

화산의 법에 여인들은 절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검후를 비롯한 셋은 혁련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섰다.

절을 마친 혁련천후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상당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죽은 제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위패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가 등을 돌렸다.

담대소천과 왕전이 그의 옆을 호위하며 걸었다. 다른 팔왕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왕전과 같은 임무를 지니고 어디론가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지나가는 동안 연무장의 모든 이들은 말문을 열지 않았다. 사천당문의 본관으로 그가 사라지고서야 모두는 하던 일상으로 돌아갔다.

* * *

신강의 겨울은 혹독했다.

눈은 보름을 쉬지 않고 쏟아졌다. 역사상 가장 엄청난 폭설이라고 모두는 말했다. 신교에도 폭설은 쏟아졌다. 험한 지형에 세워진 그곳이 백색 일색으로 변한 광경은 천하절경과도 같았다.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고 사라졌던 거대한 신교의 깃발이 첨탑의 꼭대기에서 바람에 휘날리며 위용을 자랑했다. 그 신교기 옆에 쏟아지는 폭설을 맞으며 둘이 서 있었다.

진천은 중원의 본토가 있는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우는 진천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던져놓은 채 간혹 그를 돌아보았다. 간간이 드러나는 그의 눈빛은 경탄, 경외가 드러났다.

철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후후! 이젠 식구니까, 은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교주께서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무진, 그 아이도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살아 있어야 좋은 거지. 아직은 확신을 하기 힘들어. 다만 추측일 뿐이야.”

철우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무조건 살아 계실 거라 믿습니다. 그분은 결코 그렇듯 허망하게 가실 분이 아닙니다.”

둘은 지금 신교주 연유극과 연무진에 대한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진천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 철우는 그를 무척 공손하게 대했다. 연소민이 신마성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말은 철우에겐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진배없었다.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신교를 이젠 그 누구도 무시하거나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 철우는 좋았다.

“놈들을 쫓아야 해. 당연히 사천 쪽으로 갔을 거다.”

“무사들을 대령시키겠습니다!”

“아니야. 너와 나, 둘만 가면 된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철우는 그대로 첨탑을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진천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후후! 이제 놈들의 대가리만 잘라나면 끝나는 건가? 꽤 심심하게 생겼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눈은 더욱 거센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멋지게 쏟아지는군!”

진천은 한동안 쏟아지는 눈을 즐기며 첨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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