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신마성, 그 위대한 이름이여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는 사천을 적시던 비를 눈으로 바꾸었다.
눈은 바람과 함께 폭설로 이어졌고 세상은 온통 백색 일색으로 변해갔다. 숲을 노닐던 짐승들은 갑작스러운 기우변화에 보금자리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그것은 곧 보급이 완벽하게 끊겨버린 세외세력들의 식량보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는 결과로 이어졌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꽁꽁 숨어버린 짐승들을 사냥할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약탈을 계획하고 인근 부락들을 찾아다니던 자들은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정도맹의 고수들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죽어간 자들의 수만 수백을 넘어가자 홍교의 아밀랍타는 총공격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목표는 섬서의 정도맹 본관이었지만 주축세력이 전부 자신들의 배후인 사천당문에 집결한 것을 알고는 공격방향을 사천당문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은 혁련천후의 예상 안에 들어 있었다.
* * *
사천에서 태백산을 향하는 곳엔 귀령협이라는 좁고 높은 협곡이 있다.
세외세력들이 사천당문을 향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그곳은 고대 제국시절부터 죄를 지은 자들을 참수하고 묻는 곳으로 이용되었던 곳이라 예로부터 귀신이 자주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귀령협에도 폭설은 어김없이 쏟아졌다.
휘이잉!
부는 바람이 귀신의 울부짖음처럼 들려온다. 지형 때문에 발생한 회오리바람이 주변 숲을 몰아치자 쌓인 눈이 눈사태를 일으켜 굉음을 울려댔다.
콰르릉…….
“엄청나군.”
“깔리면 뼈도 추리지 못하겠군.”
협곡의 양쪽 절벽 위에 백색무복을 걸친 무사들이 협곡 안을 내려다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중원연합군의 무사들이었다.
이미 새벽부터 이곳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그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독한 화주를 마시며 자연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감상했다.
“과연 이곳으로 올까?”
“이곳이 아니면 열흘 가까운 시간을 돌아와야 한다. 보급이 끊겼으니 급한 마음에 당연히 이곳으로 올 게 틀림없다.”
“여기서 승부가 갈리겠군.”
“그렇겠지.”
무사들의 얼굴이 은은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점점 다가오자 그들은 긴장감을 몰아내고 각오를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삐익!
건너편 협곡에서 호각소리가 들렸다.
“뭐야? 벌써 놈들이 왔나?”
“젠장! 굶주린 놈들이 뭐가 이리도 빠르냐?”
모두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때 좌측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나타내며 무사들에게 말했다.
“협곡 뒤쪽으로 이동한다.”
화산의 진승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대화하던 무사들도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제자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좁고 험한 좋은 길목을 버리고 굳이 넓은 뒤쪽으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빛이다.
진승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분의 명령이시다! 이놈들아!”
“아! 옙!”
의아함은 진승의 그 말 한마디에 깨끗이 사라졌다. 곳곳에서 매복했던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하얀 백색무복을 걸친 터라 주변 환경과 동화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형적인 이점이 있는 까닭에 대부분이 젊은 무사들이었다. 이곳보다 위험한 곳엔 상대적으로 강한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다.
모두가 진승을 따라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누군가가 그곳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얀 털옷을 입고 연방 오들오들 떠는 청년과 소년이었는데, 놀랍게도 가인과 카츄였다.
“으… 여긴 너무 춥다. 괜히 왔나 봐.”
“흐… 춥다.”
둘의 뒤쪽에서 아리엘과 왕전이 나타났다.
왕전은 아리엘의 호위무사로 임명된 상태였다.
“누나! 우리 여기서 뭐 해?”
“나쁜 놈들을 물리쳐야지. 계곡이 좁고 높아서 이곳까지는 올라오지 못할 거니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위험해도 상관없어. 우리도 제법 강해졌으니까.”
가인이 어깨를 으쓱하자 아리엘이 웃으며 대답했다.
“여긴 그곳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자들이 많은 곳이야. 쉽게 생각하면 큰코다치니까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해.”
“그런가? 쩝!”
왕전이 주변을 살펴보고는 가인에게 말했다.
“날이 추우니까 화염계열보다는 아이스 붐인가 뭔가가 더 효과적이겠군? 그렇지 않냐?”
“아이스 붐도 괜찮고 파이어 볼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무엇이든 그들에겐 생소한 공격이 될 테니까 뭘 사용해도 쉽게 막아내진 못하겠죠. 더욱이 지형까지 이런 좁고 높은 협곡이니까요.”
“흐흐흐! 좋아! 얼리든 굽든 마음대로 해라. 뒤처리는 내가 깨끗하게 해주마.”
“그럼 여긴 요렇게만 있는 건가요?”
아리엘이 카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우리만 있어도 아무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할 거야. 이번 전쟁만 끝나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게 될 거니까 힘내. 카츄!”
왕전은 곧 몸을 은신할 만한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간이라야 장력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몸을 숨기는 게 전부였지만 내린 눈으로 둥그렇게 위장하자 완벽한 매복처로 변신했다.
한편 다른 곳에서도 작전은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혁련천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의 피해를 줄이고 승리를 거두고자 마음먹었다. 자신들만 있었다면 별다른 작전이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연합군의 무사들을 등한시s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가장 강력한 고수들인 팔왕을 가장 위험한 곳에 배치시키고 그 뒤쪽은 정도맹의 중진들이 배치하는 형국으로 진을 편성했다.
젊은 청년무사들은 혹시 모를 적의 기습을 대비하여 후미를 맡겼다.
하지만 팔왕의 눈을 뚫고 후미로 돌아갈 능력이 있는 고수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따라서 청년무사들은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는 것과 같았다.
눈발은 점점 거세졌다. 이대로 며칠만 더 내리면 크나큰 재앙이 될 정도로 쌓이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혁련천후는 무사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검후와 함께 서 있었다.
“마지막 싸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검후는 혁련천후의 팔을 꼭 안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되겠지. 놈들은 향후 100년은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될 테니까…….”
“연 교주도 찾아야죠. 진천님이 잘하고 계시겠죠?”
“당연히…….”
그때 십전무제와 십지신검이 다가왔다.
검후는 화들짝 놀라며 안았던 팔을 놓았다. 십전무제의 등 뒤에서 영호수란이 고개를 내밀며 혀를 내밀었다.
“다 봤거든요?”
코를 찡긋거린 그녀는 토끼처럼 뛰어와 검후의 팔을 안았다.
“여긴 남자들끼리 얘기하게 놔두고 우린 다른 곳으로 가요.”
“어딜?”
“기왕이면 젊은 남자들이 있는 곳이 좋겠죠? 얼른 가요!”
영호수란이 끌다시피 검후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십전무제와 십지신검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허허! 내가 성주에겐 할 말이 없네. 저렇듯 철이 없으니…….”
혁련천후는 미소로 화답했다.
십지신검이 물었다.
“벽력탄의 사용을 금했다고 들었네. 1천에 육박하는 적을 감안하면 벽력탄이 꽤 효과적일 텐데 말이야.”
“벽력탄을 사용하면 군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아이들이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셋째부인 말인가?”
묻는 십지신검의 표정이 조금은 묘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검후는 그의 친동생이다. 당연히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호수란의 증조부인 십전무제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색을 않을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있습니다. 곧 그 아이들의 능력을 보게 될 겁니다.”
“흠! 진천보다 강력한 환술을 펼치는 존재가 있었다니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네.”
십전무제가 아리엘을 거론하며 새삼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는 아리엘의 마법을 환술로 보고 있었다.
“검술도 초절정에 근접한 수준입니다.”
“크험! 지금 삼부인 자랑을 하는 것인가?”
십지신검이 다소 목청을 높였다. 그러자 십전무제가 껄껄 웃었다. 혁련천후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그때였다.
팍!
공간이 흔들리더니 아리엘이 나타났다. 텔레포트를 모르는 십전무제와 십지신검이 화들짝 놀랐다. 깜짝 놀라는 둘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 그녀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혁련천후에게 말했다.
“심심해서 왔어요. 아직 멀었나요? 언니들은 어디 있죠?”
“중요한 곳인데 자리를 비우면 곤란하지.”
“쳇! 금방 갈 거예요. 카츄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먹을 것 좀 가지러 왔어요.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
팍!
그녀가 다시 사라졌다.
“도대체 저런 경공술이 있었다니…….”
여전히 둘은 놀라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십지신검을 바라보는 혁련천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텔레포트라고 이형환위보다 몇 단계 위의 경공술입니다. 저도 못 하는 겁니다만…….”
“크험! 또 자랑인가?”
* * *
푸드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은밀하게 이동하던 홍교의 고수들은 이동을 멈추고 전방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1백에 달하는 그들은 가장 선봉에서 사천당문을 향하는 중이었다.
홍교의 장로인 혈마불을 수장으로 하여 이른 새벽에 태백산을 넘은 그들은 전방에 좁은 협곡이 나타나자 재빨리 몇을 그쪽으로 보내어 지형을 살피게 했다.
수색을 나섰던 고수들이 돌아와 혈마불에게 보고했다.
“적의 매복은 보이지 않습니다!”
“좋아! 빠르게 협곡을 벗어난다!”
홍교의 고수들이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대부분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답설무흔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라 허리까지 쌓인 눈은 그들의 이동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협곡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평지를 달리듯 빠르게 질주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속도를 줄여야 했다. 협곡의 중간지점이 눈으로 막혀 있었다.
쌓였던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듯 보이자 혈마불은 바닥을 차고 올라 그곳을 넘어서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쩌저저정!
요란한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적이다! 지체 말고 협곡을 돌파하라!”
화살 따위에 당할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고 여긴 혈마불은 곧장 협곡의 끝을 향해 질주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먼저 화살세례를 뚫고 질주했다.
퍽! 퍽!
호신강기에 부딪힌 화살들이 이상하게도 하얀 가루로 변해 날아갔다.
혈마불은 미처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무사들도 날아든 화살을 모조리 막아내며 막아선 눈을 넘어섰다.
“지형을 믿고 궁수들만 배치하다니, 어리석은 놈들!”
혈마불은 코웃음을 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또 앞쪽이 눈으로 막혀 있자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높이가 처음의 것보다 두 배에 달했다. 1백에 달하는 홍교의 고수들도 하나 빠짐없이 눈을 넘어서서는 혈마불의 뒤쪽에 섰다.
“마불이시여! 뭔가 이상합니다!”
“수작을 부렸구나. 걱정할 것 없다! 모두들 주변을 경계하며 저곳을 넘어간다!”
혈마불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그들이 장애물을 넘으려고 앞쪽으로 몰릴 때였다. 협곡 위에서 아리엘과 가인, 카츄가 나타났다.
“안녕!”
아리엘이 손까지 흔들며 웃었다.
혈마불의 눈동자에 순간 탐욕이 어린다. 아리엘의 눈부신 미모 때문이다. 혈마불은 색을 밝히기로 소문난 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색욕을 느낀다면 소문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흐흐! 먹음직스러운 계집이구나!”
색욕이 줄줄 흐르는 눈동자에 아리엘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가인이 성을 내며 소리쳤다.
“살려둘 가치가 없는 자식이잖아! 좋았어! 그냥 그곳에서 모조리 죽게 해주지.”
“흐흐! 꿈을 꾸고 있군.”
팍!
혈마불의 육신이 바닥을 차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협곡 위쪽에 내려섰다.
진정 가공할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높은 곳을 한 번 도약으로 오르다니…….
하지만 그게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임을 혈마불은 몰랐다. 그는 올라서기가 무섭게 자신을 자극하는 광포한 기운을 느꼈다.
“왔냐?”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혈마불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 거대한 도를 든 왕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 있었다. 그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는 재빨리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보다 아리엘과 가인의 화염공격이 더 빨랐다.
“나쁜 놈들이니 신께서도 용서하실 거야!”
“가랏!”
화아아아악!
허공을 수놓은 시뻘건 화염이 그대로 협곡에서 서성거리던 홍교의 고수들에게 떨어졌다. 화염의 넓이는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인 허공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카츄의 능력이 더해져 파괴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꽈아앙!
콰르르르…….
“크아악!”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질러대는 비명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동료의 검에 죽어가는 자들…….
혈마불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해갔다. 홍교의 최정예가 죽어가는 데 걸린 시각은 고작 일 각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왕전은 그를 내버려두었다.
“이, 이럴 수가…….”
“흐흐! 네 졸개들이 더 먹음직스럽게 익어버렸네? 돌중새끼야!”
왕전이 대도를 어깨에서 내리며 느릿하게 혈마불을 향해 걸었다. 혈마불의 눈동자가 악마의 그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놈들의 간을 생으로 씹겠다!”
“지랄을 하세요. 그따위 눈으로 무리를 이끄니 모조리 몰살을 당하는 거야. 돌대가리야!”
왕전은 여유가 넘쳤다.
혈마불은 세외에선 공포의 대명사다.
하지만 왕전에겐 그저 지나가는 삼류무사에 불과했다. 그가 전왕임을 혈마불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뒈지기 전에 하나만 말해 주지. 중원을 넘본 죄로 너희 세외는 곧 피의 보복을 당할 거야. 주공께서 그리 결정하셨거든.”
“개소리!”
“흐흐! 감히 나 전왕에게 개소리라고? 물론 모르고 한 것이나 곱게 죽여주마. 딱 세 조각으로 썰어주지.”
그제야 혈마불은 왕전의 귀고리를 보았다.
상아로 만든 하얀 귀고리는 전왕 단리극의 신물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 세외에도 없다. 혈마불의 시뻘건 눈동자에 공포가 어렸다.
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 * *
아밀랍타는 전방에 가득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바라보며 팔을 들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1천에 달하는 세외의 모든 고수들이 일제히 이동을 멈추었다. 아밀랍타를 호위하는 홍교의 고수가 연기를 가리키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혈마불이 이동한 방향입니다!”
“설마 벌써 발각되었단 말인가? 서둘러 아이들을 보내어 사정을 살펴보고 오너라!”
“예!”
경공이 뛰어난 무사가 재빨리 연기가 치솟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사가 돌아온 시간은 매우 짧았다. 무사의 표정만 보고도 아밀랍타는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직감은 적중했다.
“모조리 당한 것 같습니다! 마불의 목이 협곡의 입구에 걸려 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교주님! 우회해서 이동해야 합니다. 협곡은 아군에게 상당히 불리한 지형입니다!”
그때 다른 자가 나섰다.
“우회하면 며칠을 더 소요해야 하오! 경공이 빠른 고수들을 앞세워 정면으로 뚫고 갑시다!”
“그렇소! 놈들도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우리가 우회하기를 기다릴 것이오. 그러니 곧장 협곡을 뚫고 사천당문으로 향하는 것이 옳소이다!”
각파의 수장들은 정면 돌파를 고집했다.
아밀랍타는 이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면 돌파를 명했다.
은밀한 이동이 불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리자 1천의 세외고수들은 사나운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며 협곡으로 향했다.
“교주님! 지형적으로 너무 불리한 곳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하심이 피해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홍교의 장로 하나가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간곡하게 아뢰었다. 그러나 아밀랍타는 돌이킬 생각이 없었다.
“놈들이 일부로 마불의 수급을 걸어놓은 것은 매복을 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더냐. 당연히 우리가 우회해서 갈 것이라 예상한 시시한 계책이다. 저곳엔 분명 소수의 전력만을 남겨두고 우회로에 주력을 배치했을 것이다!”
“만약 적들이 그것을 역이용한 것이라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수적인 열세에 놓인 놈들이 그러한 여유까지는 부리지 못할 것이다. 딴말 말고 경공이 뛰어난 아이들을 먼저 협곡 위로 보내거라!”
아밀랍타의 단호한 태도에 장로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주변을 돌아보는 장로의 눈빛은 여전히 뜻을 알 수 없는 기괴함으로 가득했다.
* * *
“흐흐! 소문대로 대가리가 텅텅 빈 놈이었군.”
왕전은 새카맣게 밀려오는 세외세력들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신호를 보내야겠어요.”
아리엘의 손에서 하얀빛이 하늘로 쏘아졌다.
순간 하늘이 오색찬란한 빛의 결정들로 수놓아졌다.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발하는 그것은 건곤일척의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신호탄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의 옆에 혁련천후와 팔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이 그들과 함께 보였다.
마법사 요란이 활짝 웃으며 왕전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셨습니까?”
“흐흐! 텔레포트도 할 줄 알고 이젠 다 배웠군.”
“아리엘 님 덕분입지요.”
요란의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다른 고수들도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왕전이 혁련천후를 보며 물었다.
“진천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오고 있다고 들었으니 곧 도착하겠지.”
“후후! 그럼 저기 저놈들만 쓸어버리면 전쟁은 끝이군요.”
“쉽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해. 그리고 아리엘은 놈이 기운을 드러내면 내게 알려주는 것을 잊지 말고.”
“알겠어요.”
혁련천후는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적을 바라보며 한기를 품었다.
지난 날 그는 세외를 평정한 바 있었다. 그땐 최소한 살상을 금하고 주요 고수들만 처단했었다. 그게 실수였다.
그때 만약 무자비하게 쓸어버렸다면 오늘날의 이와 같은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점에 분노가 치밀었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그의 옆으로 혁련소와 연소민이 다가왔다. 혁련소는 여전히 홀베른의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천살강기를 잃어버린 탓에 현저하게 떨어져버린 방어력을 보강할 생각에서였다.
물론 혁련천후가 강제로 지시했기 때문이다.
검후의 따뜻한 시선이 둘을 향했다.
“너희들은 뒤쪽에서 지원만 하도록 해. 알았지?”
“하하! 어머니! 저도 꽤 강합니다.”
“소민을 지켜야지.”
“소민도 강한 걸요?”
검후는 가볍게 혁련소를 흘기며 갑주의 이곳저곳을 만져주었다.
“오늘은 어미가 너희 몫까지 싸울 거야. 너희들이 전장에 있으면 내가 불안해서 제대로 싸울 수 없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
혁련소가 뭔가 대답을 하려고 하자 연소민이 그의 팔을 잡아끌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니 말씀대로 지원만 하겠어요.”
“그래. 아무래도 소민, 네가 소를 지켜야겠다.”
포근한 미소로 화답한 검후는 이내 혁련천후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적과의 거리가 공격사정권 안으로 좁혀졌다.
갑자기 적진에서 새카만 물체들이 협곡 위로 쏘아졌다. 담대소천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벽력탄입니다! 주공!”
고개를 끄덕인 혁련천후가 아리엘을 돌아봤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인 아리엘은 가인과 카츄, 그리고 요란을 데리고 협곡의 끝부분으로 걸어갔다.
“핫!”
힘찬 기합성과 함께 넷에게서 발출된 화염이 날아오는 벽력탄을 향해 쏘아졌다. 순간 허공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났다. 강력한 열기를 지닌 화염을 이기지 못한 벽력탄들은 제 역할을 못하고서 모조리 허공에서 한 줌 불꽃으로 흩어졌다.
오히려 근접해서 벽력탄을 날렸던 세외의 고수들이 파편을 몽땅 뒤집어쓰고 참혹하게 죽어갔다.
가공할 광경에 세외의 고수들은 일순 넋을 놓았다.
세상에 저러한 무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번엔 수백 발의 강전이 쏘아졌다. 일반 궁수들이 아닌 무공의 고수들이 쏘아올린 강전들은 강력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법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허공에 무형의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기세 좋게 날아든 강전들은 모조리 방어막을 튕기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게 도대체 어떤 무공이란 말인가?”
“마공입니다! 세상에 저러한 마공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세외 세력의 고수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동요가 급속도로 확산되자 아밀랍타는 재빨리 내공을 실어 명령을 내렸다.
“사술일 뿐이다! 모두 정면으로 공격하라!”
“적은 소수에 불과하다! 힘으로 밀어붙여라!”
“우아아아!”
그들의 재빠른 대처에 동요를 일으키던 고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협곡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밀랍타의 지근거리에서 이동하던 장로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는 조금 전의 화염공격과 무형의 방어막을 목격하고는 다소 혼란스러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뭣 하느냐! 선두에서 무사들을 이끌지 않고서!”
아밀랍타의 불호령에 장로는 어금니를 깨물고는 선두로 치고 나갔다.
* * *
“이번엔 저희들이 하지요.”
아리엘과 셋이 물러나고 이번엔 담대소천 등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협곡의 끝부분에 섰다. 어차피 적은 협곡 위를 타고 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팔왕을 넘어서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달려드는 적들은 아직 그들이 팔왕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강한 자들이 먼저 협곡 위로 몸을 날렸다.
대부분이 암벽 중간을 차고 오르면 곧장 협곡 위까지 도달할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엔 죽음을 인도하는 사자들이 있었다.
퍽!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가 한번 그어지자 한꺼번에 서넛이 피를 뿌리며 추락했다.
무게중심을 실어줄 발판이 없는 허공이라 피하거나 막아 낼 방도가 없었으니 죽음은 당연했다.
사정거리가 긴 조윤의 창은 누구보다 많은 살상을 이끌어냈다.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가공할 살상력을 선보이며 주변을 피안개로 덮어가고 있었다.
“사정을 두지 마라!”
혁련천후의 차가운 일성에 팔왕은 더욱 사납게 공격을 퍼부었다.
짧은 시간에 상당수의 적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았다. 가공할 공격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저지선을 넘어서는 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더한 존재가 버티고 있었다.
혁련천후의 눈매가 차갑게 굳어지며 그의 검이 천살강기를 품었다. 소리 없이 날아든 검은 팔왕을 넘어선 자들의 육신을 깨끗하게 베어 넘겼다.
검후의 검도 20년 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는 고금 최강의 여전사란 소릴 들었던 그녀다.
한줄기 쏘아진 검강은 팔왕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리엘의 화염공격이 아직 올라서지 못한 자들의 머리 위에 작렬했다. 살상 반경을 넓히려고 일부러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킨 그것은 무공의 고사를 막론하고 참혹한 죽음을 선사했다.
콰광!
벽련탄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력한 화염이 연이어 작렬했다.
가인과 카츄, 요란의 마법이 더해지자 전장은 아비규환의 지옥을 방불케 했다. 혁련소가 검후의 말을 어기고 앞으로 나섰다.
마계가 선물한 궁극의 힘이 그에게서 뿜어졌다.
시커먼 연기가 세외세력의 머리 위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더니 그대로 지옥의 겁화를 작렬시키며 폭발을 일으켰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공격이 연이어 터지자 세외의 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피를 뿌렸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아밀랍타는 피가 끓었다.
“도대체 저 위에 누가 있단 말이냐? 설마 신마성주라도 왔다는 것이냐!”
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력의 삼 할이 사라졌다.
수만 근의 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저 엄청난 화염공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협곡 위로 올라선 자들의 썰어진 육신은 마치 우박처럼 도로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으니…….
“철수를 명해야 합니다! 저 위에 엄청난 존재가 있습니다!”
어느새 돌아온 장로가 그렇게 소리쳤다.
아밀랍타는 즉답을 못했다. 이대로 물러서기엔 피해가 너무 컸고 그것은 곧 자신의 자존심과 직결되는 것이다. 연합군의 맹주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이대로 패배를 않고 돌아서면 그동안 쌓아놓은 명성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그래서 그는 선뜻 철수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가 머뭇거리자 장로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변해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광경에 아밀랍타는 두 눈을 부릅떴다.
“어리석은 놈! 네놈 때문에 나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구나!”
백발을 늘어뜨린 벽안의 인물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요란 제국의 대마법사 율튼이었다. 카르스에 의해 심장을 관통당하고 죽은 그가 어떻게 이곳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율튼의 벽안이 새카맣게 빛을 발했다.
“누, 누구냐!”
아밀랍타는 기괴한 기운이 전신을 엄습하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곳곳에서 작렬하는 폭발로 인해 다른 자들은 미처 쉐인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밀랍타는 가슴에 화끈한 통증을 느끼고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심장을 뚫은 율튼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아밀랍타의 눈동자가 급격히 죽어갔다.
“배, 배신…….”
털썩!
“멍청한 놈!”
율튼은 협곡 위를 쳐다봤다.
그때였다.
협곡의 상공에 누군가가 솟아오르는 것이 율튼의 눈에 잡혔다. 그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존재였다.
“이런!”
율튼은 아차 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아밀랍타를 죽일 때 자신의 기운을 드러낸 것이 그만 발각된 것이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존재라면 충분히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재빨리 뒤쪽을 쳐다보았다. 먼 곳에 태백산이 보였다. 그곳을 넘어가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가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바닥을 박차고 오른 율튼은 혼신의 힘을 뽑아 뒤쪽으로 달렸다. 그는 앞을 가로막는 세외의 고수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기며 질주했다.
“비켜라! 하찮은 종족들아!”
퍽! 퍽!
“으악!”
세외의 고수들은 영문을 모른 채 피를 뿌렸다.
율튼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두 눈이 부릅떠진다. 상당한 거리까지 좁혀져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팍!
바닥을 차고 오른 그의 육신이 태백산의 초입까지 이르렀다.
‘저곳이다! 저곳까지만 가면 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거대한 나무들이 솟아 있는 눈의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차원을 오가는 자신만의 통로가 있는 곳이다.
율튼의 눈동자에 희열이 돌았다.
그때였다.
그가 질주하는 방향의 전방에 살짝 솟아오른 둔덕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나쁜 놈!”
어린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율튼과 아이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번쩍!
콰앙!
“우욱!”
묵직한 신음과 함께 율튼의 육신이 수직으로 튕겨 올라갔다. 격돌했던 아이는 그대로 뒤쪽 눈 숲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마지막이다!”
차가운 음성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서걱!
율튼을 쫓아온 혁련천후가 허공에서 그대로 율튼을 베고 지나갔다.
“끄아아악!”
율튼의 육신이 가슴부터 두 조각으로 썰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색이 아닌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자욱하게 피어났다.
털썩!
“끄아아악!”
율튼의 상체는 연방 괴성을 질러댔다. 그리고 서서히 변해갔다. 그 옆에 혁련천후가 내려섰다. 그는 변해가는 율튼을 내려다보며 검에 천살강기를 둘렀다.
“다시는 회생이 불가능할 것이다. 켈베로스…….”
켈베로스라니?
그는 분명 카루가의 자폭으로 소멸되지 않았던가. 놀랍게도 그의 말처럼 율튼은 다른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사악함이 스멀거리는 주름진 얼굴은 분명 혈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켈베로스, 그가 맞았다.
기운이 다한 켈베로스는 숨을 헐떡이며 혁련천후를 올려다보았다.
“크흐흐… 미개한 인간에게 당하다니!”
“욕심 때문에 죽지 못한 늙은 괴물보다야 인간이 훨씬 뛰어나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땐 네놈과 네놈의 일족을 모조리 핏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가죽만 남아가든 켈베로스는 저주를 퍼부었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착각하고 있군.”
“……!”
“말했잖아. 다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치르륵!
천살강기를 품은 혁련천후의 검이 시커먼 기운을 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꺼져가던 켈베로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마계의 암흑마기라고 하더군. 마계의 종족이 이것으로 죽으면 다시는 환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네놈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켈베로스.”
“네, 네놈이 암흑마기를 어떻게……!”
“후후후! 내 아들이 네놈 때문에 마계를 다녀왔지. 그땐 네놈이 무척 미웠는데, 덕분에 네놈을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얻었으니 그 대가로 고통 없이 곱게 죽여주마.”
“아, 안 돼!”
콰아앙!
* * *
“우와아아아아!”
세외세력들의 뒤쪽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중원연합군의 고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신마대의 무사들이 폭풍처럼 눈발을 뚫고 질주해 들어오면서 적의 후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으하하! 내가 신마대주 악승이다!”
신마대주 악승의 대도가 도강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뒤이어 화산의 제자들이 악승의 머리를 넘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매화무적 진유의 태청검이 매서운 화산의 힘을 뿌려대자 주변은 피안개로 채워졌다.
“후, 후퇴하라!”
“도주해라! 서장으로 돌아가라!”
그때야 누군가의 입에서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협곡 위에서 모두가 전장으로 내려섰다.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혁련천후의 명이 있었기 때문일까? 모두는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했다.
온화했던 검후마저도 적의 목숨을 사정없이 거두었다. 질세라 백선녀 영호수란과 아리엘의 공격이 도주하던 적의 뒤쪽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와 왕전, 북궁천소의 대도, 조윤의 창은 죽음을 부르는 악마의 손짓과도 같았다. 관산악은 700년을 묵혔던 살기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누구보다 많은 적들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흑야는 적과 함께 달리며 도주하는 적의 수뇌들의 숨통을 끊었다.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난 건가?’
혁련천후는 전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는 켈베로스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지자 전방의 하얀 눈의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다쳤느냐?”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때였다.
숲이 살짝 흔들리며 누군가가 눈 속에서 머리를 쑥 내밀었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헤헤! 괜찮아.”
혁련천후는 양팔을 벌렸다.
“어서 오너라. 카루가!”
* * *
항주의 북쪽, 서호는 수많은 시인묵객들과 선남선녀들의 발걸음이 일 년 내내 잦은 곳이다.
집을 짓고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게 중원인들의 소망일 정도로 항주는 중원제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오늘도 서호는 노를 젓는 연인들로 넘쳐났다.
찰랑! 찰랑!
봄바람에 찰랑이는 물결을 가르며 오가는 작은 배들은 저마다 사랑이 넘쳐났다. 오늘따라 유달리 많은 배들이 서호의 수면 위를 가득 떠 있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커다란 배가 서호의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르고 지나갔다. 백색 일색으로 치장된 유람선이었는데 그 화려하기가 마치 큼지막한 보석이 수면 위를 가르는 듯 보였다.
배가 지나가면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그것은 배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선상에서 서서 서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눈처럼 흰 은발을 바람에 날리며 선 여인은 마치 한 마리 학이 내려선 듯 고고하면서도 우아함을 뿌려댔다. 간혹 바람에 살짝 날린 머릿결을 치우려 손이라도 올리면 그 폭발적인 자태에 넋을 놓은 사내들은 여인들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수많은 배들이 그녀가 탄 배를 향해 뱃머리를 돌려놓고 있었다. 함께 온 여인들의 질투 섞인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노를 저었다.
다가가던 모든 사내들의 얼굴에 극도의 실망감이 드러났다.
여인의 옆에 무척 귀여운 꼬마아이가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모두는 그 아이가 여인의 아들이라고 여겼다.
사내들의 탄식이 바람에 날려 들려오자 꼬마아이의 얼굴이 살짝 구겨진다.
“저놈들 배를 전부 뒤집어버릴까?”
“원래 예쁜 사람을 보면 다 저러는 법이야.”
“쳇! 큰어머니들이 더 예쁘잖아.”
“흥! 그래도 내가 더 젊어.”
“일러준다?”
“일러라.”
카루가는 아리엘을 가볍게 노려보며 입을 삐죽였다.
그때 검후와 영호수란이 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서호는 다시 뜨거운 기운으로 몰아쳤다.
“찬바람이 몸에 해로울 거야. 어서 들어가.”
검후가 아리엘의 어깨에 겉옷을 걸쳐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마나로 주변을 차단하고 있어서 끄떡없어요.”
“그것도 태아에겐 좋지 않아.”
“안은 답답해요. 그냥 이곳에 있을래요.”
“그래요. 언니! 누구 핏줄인데 고작 이런 바람 따위에 영향을 받겠어요.”
영호수란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머금었다.
서호를 찬찬히 둘러보던 영호수란이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방에서 쏘아드는 사내들의 뜨거운 눈빛 때문이다.
“흥! 보는 눈들은 있어가지고.”
카루가가 짐짓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조금 전보다 반응이 더 뜨거운걸? 다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닌가 보다.”
퍽!
카루가의 뒤통수에 불꽃이 작렬했다.
“쪼그만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리엘의 주먹이 뜨거운 마나를 발산했다. 머리를 긁적이는 카루가의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맞아도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검후가 끌어안으며 맞은 부위를 어루만져주자 혀를 날름거린 카루가는 검후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때 배가 멈추었다.
선착장에 도착한 것이다. 선착장에서 누군가가 공손하게 말했다.
“마차를 대령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장대한 체격에 화산의 무복을 걸친 무사들이 좌우로 줄지어 늘어섰는데 그 끝에 화산의 매화무적 진유가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진유의 뒤에 오색찬란한 치장을 한 육두마차가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족이나 탈 법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마차였다.
“모두들 기다리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숙조와 가짜사부들께선……?”
진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검후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검후의 손을 잡고 섰던 카루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
“뭐?”
“잔다고.”
“주무신다고?”
“응! 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술만 마셨어. 지금 배안에 전부 쭉 뻗어 있어.”
진유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다.
“허… 혼인식이 당장 한 시진 앞인데…….”
“걱정 마요. 그 안에는 멀쩡하게 깨어날 테니까.”
“신교의 교주께서도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계십니다.”
이번에도 카루가가 대답했다.
“그 털북숭이 아저씨도 저 안에 있어.”
“그럼, 함께 오셨단 말이냐?”
“응! 제일 먼저 취해서 자던데? 제일 무섭게 생겨가지고 가장 약골인가 봐.”
「흑안의 마검사」 7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