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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의 신-11화 (11/210)

흑막의 신! 11화

사실 은성이라는 이름은 내 주민등록증을 다시 만들 때 새롭게 지은 이름이었다. 아줌마는 꼭 은성이라는 이름으로 하자고 내게 말했고, 어떤 이름을 쓰든 아무 상관 없기에 난 알았다고 했다.

“이름도 똑같네. 정말 아들 삼는 거야?”

난 남자의 말에 아줌마를 봤다.

“실없는 소리 할 거면 어서 가.”

아줌마는 소리를 지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서 지른 소리는 아닌 듯했다.

그리고 남자는 정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냥 국밥에 머리를 처박고 먹은 뒤 내게 돈을 건넸다.

“잘해 드려! 많이 고생했다.”

“예?”

“그냥 그렇다고.”

정말 남자는 아줌마를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식당은 10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나는 바로 식당 청소를 했다. 사실 내가 먹고 자고 하는 곳은 바로 이 식당의 홀이다.

식탁을 나란히 하면 침대가 되고, 교과서를 올리면 책상이 된다.

“아무리 예전에 다 배운 거지만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시험을 봐야지.”

난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를 봤다.

시험 문제는 다 교과서에 나온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모두 뻥이다. 시험 문제는 모두 선생님이 사라고 찍어 준 문제집에서 나오는 법이다.

‘젠장! 문제지를 사면 공부가 더 쉬운데.’

난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한다. 뭐 시험에 똑같은 문제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초가 튼튼하니 어려울 것은 없다.

“대충 반에서 10등만 하자.”

난 그렇게 마음먹었다. 첫 시험부터 성적이 잘 나오면 아줌마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 * *

“눈 돌리는 소리 난다.”

시험을 감독하는 선생님들은 모두 저런 소리만 한다. 어떻게 안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날까. 어이가 없고 식상하다.

첫 시험은 영어다.

난 영어나 독일어에는 무척이나 자신이 있었다. 의대 원서가 거의 영어나 독일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등학교 1학년 영어는 내게 유치원생들의 ABCD랑 다를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난 5개 국어 정도 하는 것 같다.

한국어는 원어민 정도로 구사할 수 있고, 물론 영어나 독일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일어는 여자를 꾈 수 있을 만큼은 한다. 그다음이 중국어다. 중국어는 저게 욕인지 아닌지 정도를 구분하고, 생활 중국어 정도는 한다. 뭐 사실 세상 어느 나라의 욕이라도 욕은 웃으면서 해도 저게 ‘아, 욕이구나!’ 하고 단번에 알게 되지만 말이다.

“왜 이렇게 유치해!”

난 영어 본문을 읽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본문과 문제가 쉽게 읽히니 답을 적기에 무척이나 쉬었다. 지금 내가 문제를 푸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곧 답을 적는 시간일 정도였다.

시험 시간은 총 50분이지만 난 5분 만에 문제를 다 풀었다. 나 같이 시험 시간이 많이 남는 학생은 두 부류로 나뉜다.

ABCD도 몰라서 찍는 놈, 그게 아니면 유창하게 영어가 되는 놈, 둘 중 하나다.

난 시험 문제를 다 풀고 나서 바로 자리에 엎드렸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난 제일 싫다. 사실 멍하니도 참 많이 있어 봤다. 그래서 난 시간이 남으면 뭐든 한다. 그게 잠을 자는 거라고 해도 한다.

탁!

“아야!”

선생님의 지시봉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너는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왜요?”

“이제 5분 지났다. 난 아직도 45분 동안 이렇게 서서 감독을 해야 한다.”

“그래서요?”

“틀린 게 있나 없나 더 보라고. 물론 찍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찍은 거 검사는 해야지.”

“다 봤는데요. 그리고 안 찍었어요.”

내가 짜증스럽게 이야기를 하자 선생님은 피식 웃었다.

“짜식! 자존심은 있어서. 그래! 네 인생 네가 조지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나서냐. 자라! 자.”

기분이 확 나빠졌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선생님이랑 싸울 수는 없다. 난 바로 다시 엎드렸다.

“니들도 잘 들어라. 저렇게 영어 시험 시간에 5분 만에 끝내는 놈 중에 내가 대학 가는 놈 못 봤다. 찍는 것도 정성을 들여야 하느님이 도와주는 거야.”

듣자 듣자 하니 기분이 팍 상했다. 사람이 있는 데서 저런 악담 하면 못 쓰는 법이다.

난 서울대가 목표인데 대학도 못 갈 놈이라고 하니 화가 났다.

“제가 대학 가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난 선생님을 노려봤다.

“요거 선생님 앞에서 인상 찡그리네. 그래 뭐?”

“제가 대학 가면요?”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선생님을 노려봤다.

“와! 눈깔 봐라. 눈깔에서 레이저 발사되겠다. 그러다 그 눈깔로 선생 찌르겠다.”

“제가 가면요?”

오기 발동이다.

“그야 네가 좋은 거지. 그리고 네가 대학을 가면 내가 너 업고 운동장 열 바퀴 뛴다.”

“제가 만약 서울대 가면요?”

내 말에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날 멍하니 보다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 서울대? 하하하! 네가 서울대? 5분 만에 찍고 자는 네가 서울대? 서울대가 무슨 군대냐? 아무나 가게.”

“가면요? 제가 서울대를 가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난 나도 모르게 오기가 발동했다. 서울대가 목표인 나한테 저러면 안 되는 거였다. 물론 내가 서울대를 가겠다고 공표한 적도 없지만 말이다.

“가면? 네가 정말 거짓말처럼 서울대를 가면?”

“예. 제가 못 가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좋다. 그렇지. 그런 법은 없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원래 꿈은 크게 가지는 법이니까.”

선생님은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내게 사진을 보여 줬다.

“예쁘지?”

“예. 예쁘기는 하네요.”

아니, 모태 미녀라고 할 정도로, 연예인을 해도 모자랄 것이 없는 미모였다.

“우리 딸이다.”

“좋으시겠네요. 박봉이실 건데, 딸 수술비는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이 빈정거림 역시 오기의 발동에서 나온 빈정거림이었다.

내 비아냥거림에 선생님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틀린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씩 웃었다. 난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안 하는 편이다.

그냥 말투가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그럼 좋지. 얼굴도 예쁘고 운동도 잘하고 거기다가 공부도 잘하니까. 이 학교 전교 1등이다. 이제 2학년이니 내년에는 서울대 가겠지. 너희도 다 알지? 우리 딸!”

“예.”

우렁찬 대답이 나왔다. 참 시험 시간에 잘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선생님의 딸이 학교 퀸이라는 것을.

“그럼 성격이 모났나 보죠. 하나님은 공평하다는데.”

“뭐야?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선생님은 인상을 찡그리며 날 노려봤다.

“말이 그렇다고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완벽할 수 있냐는 뜻이죠. 좋으시겠어요. 헤헤헤!”

난 선생님을 보며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질 못하는 법이다.

“참자! 휴우, 하여튼 네가 서울대 가면 내 딸 너 준다. 너도 서울대 갈 거면 좋잖아. CC도 하고.”

이런 게 바로 딸 바보 아빠의 착각이다. 본인이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준다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라고 모두 다 좋아 죽는 줄 안다. 그리고 저기 사진 속 여자애도 자신 아빠의 말에 동의하는지 난 의문이다.

“제 스타일 아닌데요?”

“뭐야? 네 스타일은 뭔데?”

“쭉쭉빵빵이요.”

내 말에 시험을 보는 다른 학생들이 킥킥거렸다.

“따님이 예쁘지만 쭉쭉빵빵은 아니잖아요. 아이고, 딱 봐도 절벽이네요. 전 절벽 싫어해요. 그것도 아주.”

“고2가 발육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 원래 그런 건 금방 쑥쑥 자라.”

선생님은 학생들이 듣든 말든 자기 딸 자랑에 정신이 없다. 정말 타고나지 않고서는 저러지 못할 거다. 타고난 팔불출! 딱 이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또 저보다 한 살 많네요.”

난 인상을 찡그렸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은 여자는 노계에 속한다. 노계는 질기고 성깔 더럽고 맛도 없다. 여자든 닭이든 영계가 맛이 난다. 그래서 영계백숙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왜, 싫어?”

“늙었잖아요. 전 저보다 늙은 여자 싫어합니다.”

“요즘은 연상연하가 대세야!”

이렇게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 보니 지금 나랑 이야기를 하는 선생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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