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의 신-12화 (12/210)

흑막의 신! 12화

“하여튼 제가 서울대 가면 따님 제 마음대로 합니다.”

오기가 발동하니 괜한 내기를 하게 됐다. 세상에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여자가 남자를 마음대로 하는 예는 있어도. 정말 득이 하나도 되지 않는 내기를 난 하고 만 거다.

“좋다. 그 대신 네가 대학 못 가면?”

“졸업하면 선생님 볼 일 없겠죠.”

딩동댕. 이게 정답이다. 난 그렇게 괜한 내기를 하고 말았다.

“허허! 이놈 봐라!”

“저만 보지 마시고 시험 감독을 좀 하세요. 저기 눈 돌아가네요.”

내 말에 선생님이 피식 웃었다.

“눈만 돌리면 뭐하나? 알아야 답을 따라 쓰지.”

맞는 말이다.

“그리고 너! 내가 서울대 가는지 못 가는지 볼 거다.”

선생님의 말씀에 난 잠시 물끄러미 선생님을 봤다.

‘서울대 한 번 더 가 주지.’

난 이미 서울대에 가 본 경험이 있다. 한 번 갔었는데 두 번 못 가겠나.

농담 같은 내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 내기의 여파는 내게 바로 돌아왔다.

전학생이면서 복학생인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지금까지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기가 시작된 후로 내게 말을 거는 사람도, 시비를 거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제야 내게 관심이 가는 거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이상하게 여자들이 내게 더 시비를 걸었다.

‘뭐지? 어이없네!’

내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이런 관심은 별로다. 저기서도 째려보네.’

“야!”

내 뒤통수에서 앙칼진 계집애의 목소리가 내 귀를 찢었다.

‘쯧쯧쯧. 성깔하고는. 누가 데리고 갈지, 참!’

앙칼진 것을 봐서 성질이 지랄 같은 것은 분명할 거다.

“사람이 부르는데 쌩까냐?”

난 그 소리에 돌아봤다. 그리고 네가 부른 게 나냐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

“그래 너.”

“나 알고서 부르는 거니?”

“너, 우리 아빠랑 나를 두고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내기를 했다며?”

그 선생님의 딸인가 보다. 역시 남자들의 내기에 동의할 딸은 없는 거다. 내 정말 이럴 줄 알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정말 이렇게 학교에 소문이 빠르게 날 줄은 정말 몰랐다.

“하도 애걸복걸하셔서.”

“뭐야? 우리 아빠가 너한테 왜 애걸복걸을 하셔?”

“서울대 가면 널 나한테 주신다더라. 너, 공부 열심히 해야겠더라? 아버지께서 거시는 기대가 무척이나 크더라. 좋은 딸 예쁜 딸 자랑하시고 사시는 것이 낙이신 것 같은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딸 돼라. 알았지?”

난 마치 타이르듯 말했다.

“뭐? 이게 어디서 1학년 주제에 어른 말투에 훈계야!”

난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난 이제 1학년인 17살이다. 하지만 말투가 어디 쉽게 변하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래도 최대한 고등학생처럼 보이게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어디서 또 선배한테 반말이야?”

“그렇군! 선배는 선배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반말은 여전했다. 어쩌면 여자는 내 이런 모습이 재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말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그래서? 우리 아빠가 내기를 걸었다고?”

“어쩔 수 없이 내기했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여자애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여자애도 자기 아빠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런 아빠를 알면서도 내게 와서 시비를 거는 것을 봐서 상당한 왈가닥이라는 것은 확실할 거다.

“그럼 네가 하지 말아야지. 누구 마음대로 나를 두고 내기를 해? 내가 물건이니?”

“그건 네 아버지한테 따지고. 난 너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할 말 다 했으면 난 이만.”

“뭐야? 아직 할 말 남았어.”

여자애는 날 노려봤다. 초승달 모양의 눈깔이 정말 사내 여럿 휘어잡을 눈깔이다. 난 저렇게 기가 세어 보이는 계집애는 한 트럭으로 실어다 줘도 싫다. 하지만 예쁘기는 무척이나 예뻤다.

‘그래도 실물로 보니 더 반반하네. 공부할 의지가 팍팍 생기네.’

난 여자애를 보며 씩 웃었다.

“왜 날 보면서 웃어? 그리고 어디를 보는 거야? 음흉하게.”

“서울대 한 번 가 봐야겠네. 잘만 먹이면 딱 보기 좋겠군.”

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이건 여자애가 약이 오르라고 한 소리다.

“야 거기서! 내가 거기 서라고 했다. 너 그거 성희롱인 거 알아?”

여자애는 자기 말이면 다 남들이 들어야 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저렇게 얼굴이 예쁘고 공부 역시 잘하니 저렇게 성깔이 지랄인 거다. 정말 선생님이라고 해도 가정 교육을 잘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난 돌아보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줬다. 어찌 보면 놀리는 것처럼 보일 거다. 그리고 여자애와 나의 대화를 들은 학생들은 더욱 빠르게 소문을 냈고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여자애는 다시 눈을 흘겼다.

“수정아, 참어. 인상 쓰면 피부 상해.”

공주에게는 시녀가 따라다니는 법이다. 딱 봐도 시녀 같은 애가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애의 이름이 수정인 모양이다.

“재수 없어! 정말.”

“복학생 주제에 어떻게 서울대 가겠어?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재수 없어.”

복도에서 짧은 시비가 있었고 수학 시험 시간이 됐다. 물론 난 수학 시험을 딱 10분 만에 보고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잤다.

드르릉! 드르릉!

식당 일을 도와서 피곤했는지 코까지 골았고, 시험을 보는 학생들은 힐끗 나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도 나처럼 이렇게 마음 편히 시험을 보는 학생도 없을 거다.

똑똑! 똑똑!

누가 내 책상을 두들겼다. 난 그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예. 선생님!”

“잘 거면 나가서 자.”

“저 나가도 됩니까?”

“당장 나가! 네가 다른 학생들 시험 방해하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시험을 방해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교편을 오래 잡지는 않았지만, 너처럼 시험 시간에 코까지 골면서 자는 애는 처음 본다.”

시크하게 생긴 여자 선생님이 나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밤일이 힘이 들어서 그럽니다.”

내 말에 여자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뭐 밤, 밤일?”

“예. 제가 요즘에 밤일 좀 합니다. 하하하. 하여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여자 선생님을 보며 웃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너, 너, 너! 교무실로 가 있어.”

“예? 왜 그러십니까?”

“이 새끼가 꼬박꼬박 존댓말 하면서 선생을 놀리네!”

난 처음으로 여선생님이 욕하는 것을 들었다.

“제가 어떻게 선생님을 놀릴 수 있습니까?”

한 번 감정이 상하면 뭐를 해도 감정이 상하는 법이다.

“그냥 가 있어.”

여자 선생님은 얼굴을 붉히며 날 째려봤다. 저러다가 눈 찢어질 판이다.

“예.”

난 영문을 몰라 교무실로 갔다.

스르륵!

조심스럽게 교무실 문을 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무실은 썩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난 뭔가 훔치러 온 놈처럼 교무실 안을 힐끗 봤다.

“뭐야?”

“예?”

“뭐냐고? 뭔데 시험 시간에 교무실에 와서 힐끗거리는 거야?”

남자 선생님이 물었다.

“교무실에 가 있으라고 해서…….”

“너 컨닝 했냐?”

“그런 거 안 합니다. 컨닝은 자기 실력이 아니잖습니까?”

“그럼 왜 왔어?”

“그게요…….”

“왜 왔겠어? 잘못했으니 왔지. 오! 너 나랑 내기한 그놈이구나.”

영어 시험 감독관이었던 선생님은 나를 보며 웃었다.

“예. 그놈입니다.”

“너, 빈정거리는 게 취미인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선생님은 피식 웃었다.

“너 할 일 해.”

탁!

선생님은 출석부로 내 머리를 내려치고 자기 자리로 갔다.

“예. 알겠습니다.”

난 바로 교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봐! 뭔가 잘못해서 온 거라니까. 하하하!”

“그런데 뭘 잘못했냐?”

다른 선생님이 심심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정말 참 궁금한 것도 많고 시간도 많나 보다. 저렇게 시간이 흘러넘치면 재테크나 하지. 참.

“그게 말입니다…….”

“그게 뭐?”

난 어쩔 수 없이 자초지종을 남자 선생님들에게 말했다.

“뭐? 하하하! 밤일을 자주 해? 이놈 봐라.”

“하하하! 너 정말 최 선생한테 그 소리 한 거야?”

“예. 제가 요즘 밤일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냥 그렇게만 말씀드렸는데 교무실로 가라고 소리를 지르셔서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하하하! 그래 좋다. 밤에 무슨 일 하냐?”

“식당 알바 합니다.”

“킥킥킥! 그렇지 식당 알바도 밤에 하면 밤일이지. 하하하!”

남자 선생님들은 재미있다는 듯 자기들끼리 웃으며 킥킥거렸다.

“그러고 보면 최 선생 남편도 밤일 잘 못 하나 봐. 그 소리에 최 선생이 꽥하고 성질을 부리는 것을 봐서.”

“그런가 보지. 요즘 혈색도 안 좋고 뭔가 아주 욕구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야.”

“욕구 불만? 하하하!”

난 그때 선생님도 학생 앞에서 음담패설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왜 여자 선생님이 나에게 그런 황당한 표정을 했는지 알았다.

“그런데 너 왜 밤에 알바 해?”

나와 내기를 한 선생님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