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9화
“우리 손자 놈이 박 사장님 따님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젊은 혈기에 좋아해서 그런 것 같소.”
“예?”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소?”
“예?”
“우리가 서로 사돈이 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오?”
박 사장은 더욱 기가 막혔다.
“하지만…….”
“소문은 들어서 아시겠지만 난 돈밖에 가진 게 없소. 돈이 힘이라고 생각을 하고, 돈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나 죽으면 이 많은 돈이 다 내 손자 놈 거요. 그러니 다 박 사장님 따님 거가 되는 거란 말이오. 내 손자 놈에게 듣기로는 이미 박 사장님 딸 우리 손자 놈한테 먹힌…….”
“제, 제 딸이…….”
“좋지 않은 기억은 금방 잊을 수 있게 내가 잘해 주겠소.”
박 사장은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지금 자금 압박을 받고 있었고, 자신의 딸이 저 큰손의 손자를 신고하면 당장 돈을 회수할 것 같았다. 그럼 공장은 바로 부도가 난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망할 뿐이다.
“잘 생각해 보시오. 난 돈밖에 없는 늙은이요. 그리고 그게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회유가 끝이 나니 협박을 하는 최 회장이었다.
“생각을 좀 해 보겠습니다.”
“회사 경영난이 심하다던데…….”
“그렇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요. 사돈 맺으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최 회장은 박 사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박 사장은 끝내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오. 나 오래 살아 봐야 10년이오. 내 손자 놈은 어리고, 내가 가진 돈을 누가 관리를 하겠소. 당연히 장인이 될 박 사장 아니겠소?”
“제, 제가요?”
“강남에서 큰 빌딩 10개 중 3개는 내 소유요. 아시겠소? 내 손자 놈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정도로 당신 딸이 좋다고 하지 않소.”
순간 최 회장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니 우리 관계를 잘 정리합시다. 결국, 내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은 돈이 이기게 되어 있소이다. 어떻게든 내 손자 놈은 당신 딸을 가지게 될 거요. 나중에 우리 손자의 정부가 되는 것보다 떳떳한 아내가 되는 편이 더 좋지 않소.”
최 회장의 말에 박 사장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최 회장을 봤다.
“어떻소?”
“좋, 좋습니다.”
“잘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최 회장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예?”
“내 손자 놈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었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내 손자를 그렇게 만든 놈이 잡혀 있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박 사장은 속으로 기겁을 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사돈께서 잘 아실 겁니다.”
박 사장은 이 순간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그게…….”
“내 금쪽같은 손자는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최 회장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순간 박 사장은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경찰이 조사하면 다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저야 합의를 해 드리면 그만이지만.”
“하하하! 사돈께서 잘 모르시고 계시지만 저, 제법 힘이 있습니다. 경찰 쪽은 제가 다 손을 써 놨습니다.”
“그러면?”
“따님이 진술만 해 주면 일은 금방 끝납니다. 전 제 가족을 건드리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제 사돈도 제 가족입니다. 제 그늘 안에서 편히 살게 만들어 드리죠.”
이건 회유와 함께 협박도 포함된 말이었다.
“알, 알겠습니다.”
* * *
상혁이 거실로 올라와서 침대에 벌러덩 눕고, 그 옆에 가은이 서서 한심한 듯 상혁을 봤다.
“나한테 할 말 있어?”
“상혁아, 앞으로 사고 좀 치지 마! 아버지 요즘 심장도 많이 약하시고…….”
가은의 말에 상혁은 피식 웃었다.
“내게 관심 꺼.”
“상혁아!”
“왜, 고모 대접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어?”
“뭐라고?”
가은이 최상혁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인자한 고모의 눈빛으로 변했다. 역시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길 수 있는 가은은 무서운 여자임에 틀림이 없다.
“가족끼리 걱정하는 거야!”
“가족? 어이가 없네.”
“상혁아!”
“내가 아직 애로 보여? 다시 말하는데, 나는 성골이면 너는…… 그래. 진골쯤으로 해 두자. 첩의 자식이니까.”
최상혁의 말에 가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금세 가은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알았어. 내가 주제넘었다.”
“나, 하도 무릎 꿇고 있어서 피곤해. 나가!”
최상혁은 눈을 감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까지 평온한 표정을 짓던 가은이 최상혁을 노려보며 차갑게 웃는다.
* * *
가은의 방.
가은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상혁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조사를 좀 해 봐요.”
-회장님 지시입니까?
“아니요. 제가 은밀히 부탁드리는 겁니다.”
-회장님이 아시면 제가 큰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저번에 자살한 대성실업 김 사장의 미수금이 있다고 보고한 것을 제가 눈감아 드렸잖아요.”
가은은 누군가에게 압력을 넣고 있었다.
-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 실장하고 전 이제 한배를 탔습니다. 그것만 아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아주 자세하게 알아봐요.”
-예.
“그럼 끊죠.”
가은은 전화를 끊고 나서 자신의 앞에 있는 테이블을 곱고 흰 손으로 피아노를 치듯 천천히 두들기며 웃었다.
“네가 사라져야 이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 되지. 그게 내 복수야!”
가은은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최상혁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너를 조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 * *
경찰서 조사과.
아침이다. 결국, 경찰서에서 밤을 새우고 말았다.
윤 경장은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지만, 난 내 앞에 놓인 설렁탕을 맛나게 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웃음이 이상하게 가식처럼 보였다.
“너처럼 이렇게 맘 편히 밥 먹는 놈은 처음 봤다.”
“안 했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야 밥알 튀어! 더러운 새끼.”
“언제까지 저 여기 있어야 합니까?”
“그 아가씨가 와서 네놈이 죄가 없다고 진술할 때까지 못 가.”
“임의 동행이잖습니까?”
“너, 임의 동행이 뭔지 알아?”
“밤에 구금된 아저씨들에게 물어봤습니다. 48시간 이상 못 잡아 둔다던데요. 이제 14시간 지났습니다.”
윤 경장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봤다.
“너 정말 안 했냐?”
윤 경장은 그렇게 묻다가 눈빛이 이상할 만큼 파르르 떨렸다.
‘왜지?’
난 그게 의문이었다.
“했어? 안 했어?”
이번에는 소리까지 지른다.
“정말 안 했다니까요. 그리고 그 아가씨 언제 옵니까?”
“왜? 임마!”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 해도 생명의 은인이 이렇게 갇혀 있으면 정신을 차리고 와서 꺼내 줘야죠. 저 서울 시장님에게 용감한 시민상 표창받아야지, 이렇게 설렁탕 먹는 신세가 아니란 말입니다.”
“너, 정말 아닌 거야?”
다시 윤 경장은 날 뚫어지게 봤다. 그런데 눈빛은 뭔가를 한없이 고민하는 그런 눈빛이다.
‘뭐야 저 눈빛?’
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입으로 말을 하지만 눈빛으로 말할 때가 있다. 윤 경장은 눈빛으로 내게 뭔가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
“기면 제가 이렇게 마음 편히 설렁탕하고 깍두기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겠습니까? 그 아가씨 언제 온답니까?”
“오후에 온다네. 휴우!”
윤 경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후면 나가겠네.”
“정말 안 했냐?”
“나 같은 놈 처음 봤다면서요. 했으면 이렇게 태평이겠어요? 몇 번 말을 해야 합니까?”
“설렁탕이나 마저 드셔! 그런데 정말 집에 연락 안 하냐?”
“오후면 나간다면서요?”
“그건 그 아가씨가 아니다 진술하고 나서고.”
“아니라니까, 정말.”
윤 경장은 잠시 나를 째려보다가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걸어가서 물끄러미 창밖을 봤다. 그리고 뒷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행범이야!”
윤 경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난 분명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