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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의 신-59화 (59/210)

흑막의 신! 59화

“재하청은 없었으면 합니다. 하청에 또 하청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으음…….”

이세도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다.

“어려우십니까?”

“아, 아니네. 그렇게 하지. 내가 전기선 하나까지 직접 감독하지.”

고질적인 병폐를 난 사전에 막으려고 했다. 하청을 받은 건설 공사가 재하청을 주는 것은 건설사 관행이다. 이런 것들이 많아지면 생명공학 연구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 및 생산 시설은 부실 공사가 될 우려가 있다.

“고맙습니다. 이제 계약서에 서명만 남으셨습니다.”

난 미리 준비해 온 계약서를 이세도에게 내밀었다.

물론 내가 지금 말한 것들이 모두 포함된 계약서다. 이세도는 천천히 계약서를 읽었고 그때마다 살짝살짝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서명을 했다.

이렇게 생명공학 연구소 건물 건설은 시작됐다.

이런 것을 두고 일사천리라고 말하곤 한다.

사인을 마친 이세도가 힐끗 창밖을 보고 있는 김재창을 봤다. 나 역시 힐끗 김재창을 봤다. 아마 김재창은 심심해 죽을 거다.

저렇게 멍하니 창밖만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거다.

그리고 다시 이세도는 날 빤히 봤다.

“내 하나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김 엔 동방과는 무슨 관계인가? 재창건설이 관심을 끄는 것은 모두 다 김 엔 동방 때문이잖은가.”

역시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저희 건설사 최대 지주이십니다.”

그 말에 이세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대답을 예상하였다는 눈치다. 하지만 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한 거다.

재창건설은 100% 내가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다.

그렇게 계약은 끝이 났다.

나와 재창은 태권이 모는 체어맨에 몸을 실었다. 이제 재창은 건설사 대표가 됐고 태권은 새로운 비서가 됐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은 재창과 태권이다.

“후배들을 건설사에 취직을 시키세요.”

내 말에 김재창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폭보다는 건설사 직원 직함이 더 좋죠.”

“이게 말씀하신 자력갱생이라는 겁니까?”

“조폭의 수를 줄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면 그들도 스스로 자력갱생을 할 겁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노하우를 입수하세요. 언제까지 하청을 주면서 건설사를 꾸려 갈 순 없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보스! 최대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건설사를 좀 알아보세요.”

김재창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합병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노하우를 전수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합병과 인수를 통해서 기술적인 부분을 보충해서 당당한 건설사로 거듭날 생각입니다.”

내 말에 김재창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후배들을 각 부서에 배치해서 배우게 하세요. 그럼 주먹으로 먹고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바로 조치를 하겠습니다.”

이제 건설사로 새롭게 나갈 거다. 이제 시작이다.

난 잠시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업적인 측면은 착착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내 최종 목적은 최 회장과 최상혁이다. 그리고 그 여자.

최가은!

그들을 내가 살았던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내 최대의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했다. 난 그들의 활동을 모니터하고 추적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안 팀을 만들어 봐야겠네요.”

“예?”

역시 김재창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꾸려 보죠.”

이미 보안 팀의 역할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문적이지 못했다. 그러니 전문적인 보안 팀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권태가 말했다.

“서울대.”

사실 요즘 수정을 통 못 봤다. 수정은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물론 아직은 정식 입학은 아니다. 하지만 수정은 서울대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다.

공부하겠다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건 약간의 허영심 같아 보였다. 내가 서울대를 다닐 거라는 여자의 허영심.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정 씨 만나러 가십니까?”

권태가 백미러로 힐끗 나를 보며 물었다.

“요즘 잘못 챙겼잖아. 삐진 것 같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잘난 분은 항상 꼬박꼬박 확인 감시를 하셔야 합니다. 아니면 누가 채 갑니다.”

권태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공부 잘하는 애 중에 잘난 애는 몇 없다. 그리고 서울대까지 간 여자는 김태희 정도일 거다. 공부도 잘하지, 얼굴도 잘났지, 서울대 근처에 있는 사내들은 수정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릴 거다.

“서울대로 모시겠습니다.”

난 이렇게 일과 연애를 병행할 참이다. 정말 수정은 놓치기에는 아까운 여자다.

* * *

역시 수정은 대부분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었다.

내가 타고 온 체어맨이 정문을 통과할 때 별 제지가 없었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좋은 차를 타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들어갈 때도 별문제 없이 통과했다. 학생증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학생증이 없다는 내 말에 도서관 사서가 날 힐끗 보고는 알았다는 듯 통과를 시켜 줬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옷을 잘 입어야 한다. 물론 이곳 학생이 될 수정을 찾으러 왔다는 말을 했기에 통과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다시 서울대 도서관에 들어오니 감회가 새롭다.

예전에는 나도 이곳에서 죽어라 공부를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난 공부밖에 할 것이 없었기에 정말 무덤을 파듯 죽어라 도서관에서 책을 팠다.

반 고아 고학생이기에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바로 휴학을 해야 했다. 생활비야 과외로 벌었지만, 등록금은 어떻게든 장학금으로 충당하려고 노력했다.

어쩜 간절함이 나를 이 도서관으로 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많은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마음을 먹으니 이렇게 답답한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와 보는군.”

난 옛 기억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넓은 도서관에 수정 혼자 돋보였다. 많은 남학생이 공부할 생각도 않고 수정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게 내 눈에 보였다.

난 수정을 봤다. 테이블에 쌓여 있는 음료수만 봐도 흑심 가득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이 왔다가 갔는지 알 수가 있었다. 수정은 그 많은 음료수를 치우지 않고 마치 사냥감을 진열해 놓은 사냥꾼처럼 아무 말도 없이 공부만 했다.

‘역시 튀네!’

난 입맛을 다셨다.

정말 잘 감시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빼앗길 것 같았다. 사실 수정처럼 공부만 하고 봉사만 다니는 맹추들은 훅 업혀 갈 소지가 많다. 그래서 나와 묘한 감정이 피어났는지도 모른다.

서울대 입학 예정자와 고등학교 중퇴자?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일 거다.

‘최소한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겠지.’

수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감시를 잘해야겠어. 잘난 여자는 잘난 값을 하지.’

그러니 두고두고 잘 감시를 해야 한다. 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수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부는 하지 않고 수정만 보고 있는 남자들에게 마치 보란 듯 영역 표시라도 하는 것처럼 수정을 뒤에서 꼭 껴안았다.

“어머?”

수정은 놀라 뒤를 돌아봤다.

“뭘 그렇게 놀라?”

난 수정을 보며 웃었다. 수정도 내가 이 도서관까지 왔다는 것에 두 번 놀란 것 같았다.

“너, 안 하던 짓 한다? 여기는 공공 도서실이야!”

“조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너 바보니? 사람들이 다 보잖아.”

수정의 말에 난 수정과 나를 보는 사람들을 봤다.

반응이 성별에 따라 각각 달랐다.

남자들은 한없이 적개심을 담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여자들은 나를 보며 반은 부러운 듯, 반은 꼴사납다는 눈빛을 보냈다. 결국은 자기 남자친구가 절대 해 주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도서실의 백 허그를 부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어?”

수정은 다른 사람들 학습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이미 수정이라는 여자가 이 도서관에 있는 것 자체로 다른 남자들의 학습은 물 건너간 거라는 것을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역시 좋은 옷이 날개네! 어디든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네.”

나 역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힐끗 주변을 봤다. 수많은 눈에서 뿜어지는 살기가 내게 집중됐다.

총 맞은 것처럼 난 지금 적개심에서 뿜어지는 레이저를 맞고 있었다.

“옷이 날개?”

수정은 날 잠시 봤다.

“응. 옷이 날개네.”

내 말에 수정이 날 이상하게 봤다.

“어린 게 무슨 양복이니?”

“어려도 대박 식당 사장이다.”

수정에게 내가 하는 일을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것을 안다는 자체가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나가자. 여기서 계속 수군거리면 다른 사람 공부 방해돼.”

수정이 책을 덮고 일어서자 난 수정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번 강한 살기들이 내게 밀려왔다.

난 이렇게 수정은 임자 있는 사람이라는 영역 표시를 했다. 정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일 거다.

남자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난 그렇게 수정을 도서관에서 데리고 나왔다.

“왜 왔어?”

수정은 신기한 듯 날 봤다.

“당연히 너 보려고 왔지?”

“그런데 왜 오버는 해?”

수정도 이미 내 행동의 이유를 아는 것 같다.

“늑대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어린 양을 지키기 위한 목동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표현이지.”

“뭐? 말은 잘한다.”

수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봤다가 피식 웃었다.

“원래 말은 잘해.”

난 씩 웃었다.

“너 때문에 아주 낭만적인 대학 생활은 물 건너갔네. 휴우~.”

“낭만적인 대학 생활?”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해.”

“그렇게 뒤에서 덥석 안아 놓고 미팅도 하고 소개팅하라고?”

수정은 내게 눈을 흘겼다.

“허락받고 다녀와서 경과보고하고.”

내 말에 수정이 힐끗 날 봤다.

“너 의처증 있냐?”

“모르지. 확인한 적이 없으니까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 결혼을 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지도.”

“넌 딱 바도 있어.”

수정은 그렇게 말하며 내 팔짱을 꼈다. 요즘은 이 자세가 편하다. 나도 수정도.

“명동이나 갈까?”

내 말에 수정이 날 봤다.

“명동?”

“그래. 거기 가서 사람들 구경이나 하자. 난 사람 구경이 제일 재미있더라.”

“그건 너고.”

“그럼 넌?”

“난 너 구경이 제일 재미있던데.”

수정이 날 보며 환하게 웃었다.

“봐라! 봐라! 많이 봐라!”

“보고 있잖아. 호호호!”

난 지금 수정과 걸어가고 있다. 물론 멀리 뒤에서 체어맨 자동차가 날 뒤따랐다. 수정에게 체어맨 자동차를 타고 왔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까지 보여 주면 꼬치꼬치 캐묻는 성격이라 귀찮아진다. 수정은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니까.

그리고 그냥 젊을 때는 뚜벅이 연애도 괜찮다.

‘연애? 내 주제에 연애를 다 하네.’

난 내 팔짱을 끼고 있는 수정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천국이지.’

이런 천국의 계단을 걷는 것 같은 날이 시작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오랜 세월 동안 난 지옥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내 손을 내밀어 준 것이 바로 수정이다.

어쩌면 진정 괴물이 될 수도 있었던 나를 잡아 준 것이 수정일 거다.

‘행복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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