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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의 신-114화 (114/210)

흑막의 신! 114화

“그러니까. 서울대 애들이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듣는 거예요. 나 아세요? 말 짧게 할 만큼 친하세요? 아니면 뭐죠? 수정이 선배니까 내 선배라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까? 사회로 나오면 제가 더 선배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남자를 몰아붙이자 수정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어장 관리를 하겠다는 표정 같았다.

남자는 날 빤히 봤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단지 후배 친구라 그렇게 했네요.”

남자는 바로 사과를 했다. 저러니 더 재수가 없다. 어쩌면 그가 나를 연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를 연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미안한 줄 아시면 됐습니다.”

난 수정을 봤다.

“수정아, 가자.”

난 수정의 손을 잡았다. 분명 남자는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난 그마저도 무시했다.

“아직 나 할 말이 있는데.”

“전 들을 말이 없는데요?”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남자가 날 째려봤다. 눈빛이 강렬하다. 저런 눈빛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꼭 말하는 성격일 거다. 분명 내가 생각한 대로 과대망상증이 확실해 보였다.

‘보디가드를 붙여야겠어.’

이 순간 남자를 보며 생각나는 것은 그것뿐이다. 소중한 내 수정을 위해.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험하지.’

원래 공부만 한 것들이 사고를 칠 때 대형 사고를 친다. 꼴에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연구라는 것을 해서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또 완전 범죄를 추구한다. 그러니 사고를 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형성을 좀 붙어야겠어.’

따지고 보면 내 제자(?)인 형성에게 수정은 사모님이 될 거다. 그러니 원거리 호위 정도는 해야 하는 거였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귀찮다는 눈빛으로 남자를 봤다.

“뭐죠?”

“오늘 여행 간다고?”

물론 이건 수정이 한 거짓말이다.

“남자가 멋있어 보일 때가 언제인 줄 아나?”

“또 반말이시네.”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 줄 때야. 꺾이기에는 아직 아름다운 꽃이잖아.”

난 남자의 말을 듣고 느글느글해서 구토를 할 뻔했다. 사실 이 남자의 말은 100퍼센트 옳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문뜩 나랑 수정이 지금까지 진도를 아주 많이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확 여행이라도 가 버릴까? 진도 좀 나가게.’

수정이 아마 여행을 간다고 말한 것 같다.

‘수정이랑? 흐흐흐!’

저 새침한 수정이 내 마수에 넘어와 줄지가 의문이었다.

‘여자는 분위기지.’

수정이 그냥 해 본 말인 여행을 간다는 말을 난 점점 더 현실화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남자를 봤다.

“그래서요?”

“언제까지 너의 여자 친구일지 모르지만 아주 가까운 미래에는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될 거니 소중히 여겨 줬으면 좋겠어.”

이 정도 수준이면 병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참 상도덕 없으시네.”

난 남자를 째려봤다. 그리고 힐끗 수정을 봤다. 수정도 살짝 남자의 니글거리는 대화에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무슨 소리야?”

“최소한 남자가 지켜야 할 몇 가지가 있죠. 살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첫 번째 군대 간 친구 애인 건들지 않기. 이거 어기면 3대가 재수 없다는 소리가 있죠.”

난 남자를 노려봤다.

“뭐라고?”

“그리고 자기 버리고 결혼하는 여자 식장 가서 울고불고 하지 않기. 그거 하면 쪽팔리잖아요.”

“그, 그래서.”

“죽어라 군대 간 남자 여자가 2년 기다려 줬는데 제대하자마자 군화 거꾸로 신기. 비슷한 걸로는 제대해서 복학하자마자 신입생이랑 놀아나기 등이 있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마지막으로 조금 약하기는 한데 당신처럼 애인 있는데서 남의 여자 친구 좋다고 선전포고 하는 게 있죠. 뭡니까? 쪽팔리게.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옆에 있을 때 이러면 안 되죠. 서로 사내끼리 뭐가 됩니까?”

“뒤에서 후려치는 것보다야 정정당당하지.”

남자도 알았다는 듯 날 째려봤다.

“하여튼 상도덕 있게 노세요. 그래도 서울대인데 나가면 여자들이 줄줄 설 겁니다.”

난 그렇게 말하고 수정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

“이봐! 내 이야기 안 끝났어.”

난 걷다가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지킬 것은 좀 지켜! 찌질하게 보이니까.”

난 그렇게 말하고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며 50미터를 걸었다. 그리고 수정을 봤다.

“쟤 뭐니? 쟤 왜 저러니?”

“내가 좋다네. 호호호!”

수정은 기분이 좋은지 웃고 있었다.

이럴 때면 완벽한 허영 덩어리 수정이다.

“좋아?”

“그럼! 나 좋아해 준다는데 좋지.”

“그럼 저 남자한테 가시죠.”

“너 하는 거 봐서 영 마음에 안 들면 갈까도 생각 중이야.”

이래서 여자 앞에서 남자 애인한테 선전포고를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냥 여자만 기고만장하게 해 주는 거다. 그럼 원래 애인이 피곤해진다. 하나를 주면 좋아라 할 여자를 이제는 셋 이상을 줘야 좋아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오 그러셔?”

난 인상을 찡그렸다.

“농담이야 농담!”

수정은 웃으며 툭 내 팔을 쳤다. 그때 난 고개를 돌려 조금 전 남자를 봤다. 여전히 불타는 질투심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나와 수정을 보고 있었다.

‘말로는 안 되겠네. 그리고 수정이도 좀 묶어 놓고.’

난 수정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바로 수정의 머리를 잡고 돌발 키스를 했다. 내가 수정의 머리를 잡고 키스를 하니 수정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반항은커녕 살짝 내가 자유롭게 키스를 할 수 있게 입을 열어 줬다. 이래서 성인이 좋은 거다.

‘이 정도면 좌절 모드겠지.’

난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많은 학생들이 놀라 나와 수정을 봤다.

“어머! 어머! 저 애 수정이 아니야?”

“맞아. 수정이네.”

“쟤네들 미쳤다. 요즘 애들 무섭네. 호호호!”

여학생들은 부러운 듯 말했다. 그리고 남학생들은 모두 다 나를 째려봤다. 이 순간 난 다시 모든 남학생들의 공적이 된 거다.

“캬! 오래도 한다.”

“좋아 죽네. 좋아 죽어. 호호호!”

“저기 봐! 진수 선배가 보고 있어.”

여자 하나가 턱으로 불타는 살기를 지금 뿜어내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네. 불쌍하네.”

남자 하나가 남 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진수 선배가 어디 쫒기나 했어? 참 꼴이 말이 아니시네.”

난 여전히 수정과 키스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게 첫 키스일 거다. 아니, 첫 키스다. 저번에 양로원에서 그냥 입술이 부딪힌 것은 사고였고 지금이 공식 첫 키스다.

“그만 해라! 할 만큼 했다.”

수정이 내게 살짝 속삭였다. 수정이 관객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거다.

“난 좋은데.”

나 역시 작게 속삭였다.

“누구 혼삿길 막으려고 그래?”

“우리 여행 갈까?”

“하는 거 봐서. 그만하자.”

수정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주변 눈치를 보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게서 떨어졌다.

난 수정을 보며 씩 웃었다.

‘여기서 마지막 한 방을 아주 끝장나게 넣어 줘야지.’

내가 웃자 수정은 뭔가 불안한지 내 손을 잡았다. 역시 여자는 육감의 동물이다.

“우리 동거합니다. 그리고 오늘 바로 여행갑니다.”

내 외침에 관객으로 변한 여자들도 내 적으로 돌변해 있는 남자들도 그리고 당사자 수정도 멍해졌다.

딱 몇 초간 이 캠퍼스 거리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난 바로 수정의 손을 잡았다.

“쪽팔리지?”

“어? 어.”

내 물음에 수정의 짧은 공황 상태에서 풀렸다.

“너. 너!”

그리고 날 노려봤다.

“쪽팔리니까. 뛰자!”

난 수정의 손을 잡고 힘껏 뛰었다.

“캬! 부럽다.”

수정의 여자 선배가 소리쳤다.

“오늘 이후로 집에 가서 우는 남자 많겠다. 호호호!”

“그런 거야?”

“이제 수정이 고맙게 아웃되셨네.”

“그게 무슨 소리야?”

“저 멍한 놈들이 앞으로 우리한테 잘할 거라는 소리지. 호호호!”

난 그렇게 영역 표시를 제대로 하고 서울대를 빠져나왔다. 만인의 적, 아니, 모든 남자들의 적이 됐지만 그래도 내 것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뭐 여기서 쪽팔려도 상관이 없다. 서울대를 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뭐든 할 거면 확실히 해야 한다.

“여행?”

“오늘 금요일이잖아. 불타는 금요일! 불금.”

“불금?”

지금 시대는 불금이라는 말이 없다. 불타는 금요일이란 말이 없다. 주 5일제가 아니니 말이다. 지금은 불타는 토요일이다. 그래서 토요일은 밤이 좋다는 노래도 있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있는 화려함과 화끈함은 금요일이다. 그래서 불금이다.

난 수정이 치근대는 남자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여행을 가자는 말에 수정은 길을 걸으며 날 봤다.

“왜 표시할 게 더 있어?”

역시 수정은 눈치가 빤하다.

“그런 게 아니고 같이 기억할 게 별로 없어서…….”

이게 남자의 변명일 거다.

“너도 ‘오빠 믿지’냐?”

수정의 말에 난 순간 당황을 했다. 만고의 거짓말 중 가장 못 믿을 말이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소리다.

장사꾼 중에 정말 밑지고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 다음이 노인이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말이다.

절대 노인이라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경우는 절대 없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새벽마다 약수터로 운동을 나가고, 좋은 것은 찾아서 먹고,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발악을 한다.

그리고 노처녀가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마 죽도록 하고 싶은데 능력이 없어서, 때로는 못생겨서 못하는 거다.

그리고 남자의 거짓말이다. 또는 여자의 거짓말일 거다.

너만 사랑해!

이보다 더 완벽한 거짓말은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DNA적으로 절대 평생 한 여자, 한 남자만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연인들은 너만 사랑하고 너 없이는 못 산다고 질질 짠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이 참 좋은 약이 된다. 그렇게 죽고 못 살고, 그 여자 그 남자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아파도 시간이 지나면 밥만 먹고 잘 산다.

그게 사람이고 사랑일 거다.

그리고 마지막이 동서고금 전근대를 통틀어 완벽한 거짓말이 바로 수정이 말한 오빠 믿지! 다.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을까?

아마 ‘오빠 믿지’에 넘어가는 여자들은 처음부터 오빠를 믿지 않았을 거다. 그냥 여자니 넘어가고 싶어서 오빠 믿지를 믿는 척하는 걸 거다.

‘모텔 앞에서 잠깐만 쉬고 가자’, ‘집에 가는데 좀 피곤하니까 쉬고 가자’, ‘추우니까 몸 좀 녹이고 가자’며 모텔에 들어가자는 남자가 항상 하는 말이 ‘오빠 믿지’다.

참! 믿을 것을 믿어야 하는 거다.

뭐 그렇다고 모텔 앞에서 너랑 그렇고 그렇게 하고 싶으니 들어가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여자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타협점이 아마 ‘오빠 믿지’일 거다.

난 수정의 ‘오빠 믿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어쩌냐? 난 오빠가 아닌데.”

난 피식 웃었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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