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15화
“잊으셨어요? 노계 언니.”
그러고 보니 수정이 나보다 한 살이 많다.
“그러네. 오! 나 능력 있는데.”
수정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수정은 잘생긴 영계랑 사귀고 있는 거다. 또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힐끗힐끗 본다.
우리가 팔짱을 끼고 걸을 때면 다들 저렇게 본다.
부러운 걸 거다. 그게 아니면 질투를 하는 걸 거다.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따라가면?”
수정이 날 빤히 봤다.
“당연히…….”
뒤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수정이 내 모습에 피식 웃었다.
“당연히 뭐?”
“놀다 오는 거지.”
“오 그래? 어디 한 번 ‘오빠 믿지’에 넘어가 줘?”
수정은 지금 날 놀리고 있다. 여행을 갈지 안 갈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날 놀리는 거다. 하지만 내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어디 가고 싶어?”
“속초 가서 회 먹고 싶다.”
수정은 씩 웃었다.
“속초?”
“그래. 그런데 우리가 차가 있니? 이 시간에 어떻게 속초를 가니. 그냥 오징어 회나 먹으러 가자.”
수정은 지금 날 다시 놀리는 거다.
“차 있으면?”
난 이상하게 몸이 달았다. 정말 수정과 여행을 한 번도 안 가 봤다.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설레고 흥분이 됐다.
“차 있으면 좋지. 그냥 휙 다녀오고.”
“차 있으면 속초 가는 거다. 1박 2일로.”
내 말에 수정이 피식 웃었다.
“너 아주 오늘 죽고 싶어서 날 잡았구나.”
“가자! 가자아아!”
난 수정을 졸랐다. 남자가 조르면 여자들은 그냥 넘어가 주는 게 보통이다. 한번 졸라 봐라. 그럼 다 넘어온다. 물론 자신이 무척이나 잘생겨야 하고, 돈도 많아야 하고, 귀엽기까지 해야 하며, 믿음직스러워야 한다. 그게 안 되는 남자는 부작용만 낸다.
“차도 없는 게. 있으면 간다. 단, 택시는 안 된다.”
수정은 농담 같이 말했다.
난 뚜벅이다. 수정은 그렇게 알고 있다. 이제 겨우 20살이 됐다. 만으로는 18살이다. 차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나도 택시 싫어해.”
난 그렇게 말하고 씩 웃었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내 뒤를 따르던 에쿠스가 빠르게 앞으로 와 섰다.
그리고 양복을 쫙 빼입은 권태가 에쿠스에서 내렸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권태가 짧게 묵례를 하며 말했다. 수정은 잠시 놀라 날 봤다.
“무, 무슨 일이야?”
“차 있으면 간다며?”
“뭐?”
“차 있네. 가자 속초!”
난 수정의 손을 덥석 잡고 차에 납치를 하듯 밀어 넣었다.
“야! 잠, 잠깐만.”
“약속했다.”
“너 완전히 오늘 날 잡았구나.”
수정은 날 빤히 봤다. 아마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걸 거다.
이런 상황에서는 동서고금과 전근대를 통틀어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오빠 믿지!”
난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권태를 봤다.
“속초 가 주세요. 빨리요.”
“예. 속초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돌발 여행은 시작됐다. 난 속으로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정말 이제 수정과 찐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조건을 만들었다.
이래서 나를 비롯한 모든 남자는 늑대라는 거다. 항상 확인하려고 하고 차지하려고 하고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니 이 대한민국에 처녀가 없는 걸 거다.
‘킥킥킥! 꿈은 이루어지려나?’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정은 아직도 약간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무슨 차야?”
“회사 차지.”
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회사 차? 무슨 회사?”
“나 오늘 계약했다.”
난 순간 재치 있게 거짓말을 했다.
“무슨 계약을 해?”
“저번에 명함 준 사람 있지? 이준성이라고.”
“이준성? 이준성? 아! 그 연예 기획사 사람?”
수정은 드디어 이준성을 기억해 냈다.
“그런데?”
수정이 날 빤히 봤다.
“나 오늘 그 기획사랑 계약을 했다. 집까지 태워 준다는 길에 너 데리고 가려고 왔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
난 앞에 씩 웃고 있는 권태를 봤다.
“속초까지 태워 줄 수 있죠?”
“그럼요. 로드 매니저가 할 일이 그런 거 아닙니까?”
쿵 하니 짝이라고 권태는 내 거짓말에 동참을 했다. 그리고 이 순간 권태는 내 로드 매니저가 됐다.
“속초에서 즐겁게 노시고, 절대 스캔들은 나시면 안 됩니다.”
“괜찮아요. 아직 스타도 아닌데요.”
“곧 되실 겁니다. 하하하!”
역시 권태는 능글맞게 거짓말을 잘했다. 나와 권태의 대화를 듣고 있는 수정은 더욱 멍해졌다.
“은성아! 그럼 너 식당은 어쩌고?”
“식당이야 뭐, 할머니가 다 알아서 하시는 거지.”
“그래도 그게 체인점이 몇, 몇 개인데…….”
“지금 30개는 될걸.”
내 말에 수정은 깜짝 놀랐다.
수정이 알고 있는 체인점 숫자는 15개였다. 두어 달 만에 배나 더 늘어난 거다.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요식업 체인 업체 중에 우리만큼 공정하게, 또 자상하게 체인점을 챙기는 곳은 없다.
계약도 체인점이 유리하게 했다.
보통 다른 체인점은 음식 자재를 반드시 본사의 것을 쓰게 만든다. 그래서 체인점은 망해도 본사는 안 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기본적인 재료는 어디에서 사든지 상관이 없다. 중요 핵심 양념만 우리가 공급을 한다. 또 육수를 우리가 공급을 한다. 하루 만 리터의 육수가 체인점으로 배달이 된다. 물론 그 육수에 아주 미세하게 영약을 조금 넣는다. 그럼 크게 몸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난 다음날 아침에 몸 상태가 분명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 체인점은 모두 잘된다. 본사의 밀어내기 같은 것도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단지 따지는 것이 있다면 할머니 감정단이 암행 순찰을 나갔을 때 불합격을 받으면 일방적으로 체인점 계약을 파기하게 된다.
그럼 내가, 아니, 본사가 공급하는 육수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때부터 손님이 줄어들게 되는 거다. 벌써 시범 케이스로 다섯 개의 체인점을 계약 해지했다. 울며불며 사정을 해도 재계약은 없다. 물론 처음에는 계약을 해지한다는 소리에 콧방귀를 뀐다.
겨우 육수와 양념밖에 공급받지 않기에 자신이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손님의 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때가 늦은 거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재계약은 없다. 사업을 할 때는 냉정해야 한다는 마산댁 할머니의 말씀대로 난 그렇게 사업을 하고 있다.
“정말?”
“그래. 30개야! 아마 다음 달에는 일본 라멘 가게와도 파트너십 계약을 할 거야!”
“일본 라멘 가게?”
“신주쿠에서 꽤 잘 나간다고 하더라.”
“대단하네! 최은성!”
“이제 알았어? 로열티 아주 팍팍 받을 거다.”
일본 라멘 가게와의 파트너십 계약은 우연한 계기로 이뤄졌다. 한국 관광을 온 일본 라멘 가게 매니저가 뼈다귀 해장국을 먹고 그 맛에 반해 또 육수의 맛에 반해 관심을 가졌고, 그 매니저가 영약이 잘 받는 체질이라서 그런지 변강쇠 비슷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김용팔 사장처럼 역학 조사를 하다가 결국 얻어 낸 결론이 우리 본사 육수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그래서 20여명 정도를 데리고 와서 평균 조사를 했고, 그 사람마다 신체 리듬이 향상된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 계약을 해 달라고 졸랐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운이 좋은 사람일 거다.
그때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저희들이 로열티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매니저라는 남자는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본 모양이다. 대장금 이후 약선 음식이 일본과 중국 동남아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마 그런 이유도 있을 거다.
“로열티요?”
난 매니저라는 남자를 보며 되물었지만, 마산댁 할머니와 다른 할머니는 영 일본인을 싫어하는 눈빛이었다.
역시 나이 드신 분은 젊은 사람보다 반일 감정이 강했다. 젊은 사람이야 일본 애니메이션은 보며 킥킥거리다가 축구 한일전을 할 때만 애국심이 불탄다.
“애기 사장! 난 싫은데.”
그때 마산댁 할머니가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싫으세요?”
“응. 싫어.”
마산댁 할머니의 말에 통역을 하는 통역사와 일본 라멘 가게 매니저는 인상을 찡그렸다.
“할머니, 잠깐만요.”
난 마산댁 할머니를 밖으로 모시고 나왔다.
“왜 애기 사장?”
“그냥 무작정 싫다고 하면 안 됩니다.”
“싫은 거 싫다고 하지. 우리 고모가 말이야…….”
마산댁 할머니의 고모라면 아마도 일제강점기를 사셨던 분일 것이다. 대충 말을 안 해도 답이 나올 것 같다.
“예. 할머니!”
“정신대라고 아나? 애기 사장!”
“알긴 알죠.”
“거기 끌려가서 아직도 못 돌아왔어.”
아마 마산댁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이야기를 들었을 거다. 그래서 반일 감정이 하늘을 찌를 거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은 후진국이다. 반성을 모르는 섬나라 원숭이 새끼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세요.”
“그래. 난 그래서 일본에 일자도 싫고 쪽바리에 쪽자도 싫다.”
직설적이신 마산대 할머니다. 그 성격이 그대로 지금 나오는 거였다.
“저도 그래요.”
난 마산댁 할머니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런데 왜 일본에 체인점을 내려고 해?”
“돈 벌어야죠. 일본 애들 무조건 싫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죠. 그게 애국이잖아요.”
“이용해서 돈을 벌어?”
“예. 아주 크게 달라고 할 겁니다. 많이, 많이요.”
“많이?”
“예. 저의 육수가 필요하면 거금을 주고라도 사 가겠죠.”
“얼마나 받을 건데?”
“계약금으로 한 1억 엔 정도 받으려고요.”
1억 엔이면 13억이다.
“13억이나?”
할머니도 일본과 한국의 환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육수도 팔아먹고요. 그래야 이용하는 거죠.”
난 마산댁 할머니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가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예? 계약금으로 1억 엔이라고요?”
통역사도 놀라 내게 되물었다.
“그대로 통역하세요.”
그리고 통역사는 내 요구를 그대로 통역했다. 물론 난 일본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순간 일본어를 못하는 것이 이 계약 체결에 유리할 것 같아서 일본어를 못한다고 말했다.
일본 라멘 가게 매니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하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시겠답니다.”
“그럼 저희는 육수를 완제품으로 해서 공급하겠습니다.”
“예? 육수를 완제품으로 공급하시겠다고요?”
“예. 기술 이전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내 말이 아예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 하루에 1그램 정도가 들어가고 있다. 30개 체인점에 납품하는 육수에 영약이 그렇게 들어가고 있는 거다.
‘이제 4달치도 안 남았네.’
아직 영약 종균 배양 1차 실험만 성공한 상태라서 이렇게 사용하다가는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바닥이 날 판이었다. 물론 개고생을 해서 내가 깨어났던 산을 찾으면 일은 해결되지만 말이다.
“그럼 육수만 공급하는데 계약금이 1억 엔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는 계약을 체결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담판에는 배짱이 중요하다.
내 말을 통역 받은 일본 대형 라멘 가게 매너저가 날 빤히 봤다.
“그러시다면 독점으로 공급해 주신다면 계약금을 드리겠습니다.”
난 살짝 놀랐다.
그가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
“교포세요?”
“교포 3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