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18화
찌이익 턱!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리고 바로 이동식 침대에서 은지수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그리고 옆에 있는 간호사의 옷에 들어 있는 펜을 꺼내 자신의 손에 뭔가를 적었다.
-아까 그 의사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주세요.
“예?”
간호사는 영문을 몰라 은지수에게 되물었다.
-사인 받고 싶으면 알아서 오라고 하면 알아요.
은지수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4층이다. 15층이 병원 특실이다.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아니기에 바로 은지수가 입원해 있는 특실 병동까지 갈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은지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해!’
은지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까 은지수가 쓰러진 사진을 찍은 여자는 정말 강제 퇴원 조치를 받았다. 물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것이 분명할 거다.
하지만 이 병원 부원장인 김민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이 세상이 허락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다.
* * *
속초 대포항 주차장.
나와 수정을 태운 에쿠스는 속초 대포항에 도착을 했다.
“자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벌써 9시가 다 되었다. 금요일이다 보니 서울에서 속초까지 오는 시간이 4시간 정도 걸렸다. 처음 수정은 장난처럼 생각하고 있었지만 점점 자신이 서울에서 멀어지자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어떻게 돌아가니?”
“이제 막 왔거든.”
나와 수정이 에쿠스에서 내리자, 차 창문이 쓰윽 내려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권태는 그 말만 하고 빠르게 시동을 걸어 사라졌다. 순간 수정은 멍해졌다.
“저, 저 차, 정말 가는 거야?”
“그럼. 태워 줬으니 가야지.”
“우, 우리 집에 어떻게 가?”
“회 먹고 가면 되지.”
물론 이것도 내 거짓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것도 여자랑 둘이서 와서 딸랑 회만 먹고 갈 남자는 이 대한민국에 아무도 없을 거다.
아니, 회만 먹고 가면 어쩜 여자가 싫어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역시 남자의 생각이다.
“어떻게 회 먹고 가니? 그럼 10시도 넘을 건데?”
“이 대한민국에서 차가 없니 돈이 없니. 가면 가는 거지.”
난 지금은 수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그, 그렇지.”
이래서 여자는 단순한 거다. 남자를 너무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 회 먹자. 오정어회 좋네. 하하하!”
난 신이 나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수정과 속초까지 여행을 나왔다는 것이 일차적으로 좋았고, 단 둘이 있다는 것이 다음으로 좋았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보너스를 기대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 회만 먹고 가자.”
수정은 내게 다짐을 받듯 말했다.
“우선 먹자.”
난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럼 대포항 구경을 좀 해 볼까?”
내 말에 수정은 약간 바닷바람이 추운지 내 팔짱을 꼈다.
“춥다.”
“회는 찬 바닷바람 맞으며 먹는 게 최고다.”
“아이고 그러세요?”
“그럼. 그래야 소주 맛이 나지.”
“어린 게 못 하시는 소리가 없네.”
수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수정은 날 미성년자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어쩌냐? 나 이제 완벽한 성인인데. 흐흐흐!”
난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뭐?”
“만 20세! 건장한 성인 남자! 뭔 말인지 알지?”
내 말에 수정이 찰나의 순간 긴장한 눈빛을 보였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어쩌냐? 넌 항상 이 누님의 동생인데. 호호호!”
“원래 오빠, 아니지, 이런 상황에서는 동생! 동생! 하다가 아빠! 되는 거야.”
“뭐라고?”
수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봤다.
“저기 횟감이 펄쩍펄쩍 뛴다. 가자!”
상황이 애매할 때는 딴 짓이 좋다.
‘지금은 여기까지.’
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횟감이 펄쩍펄쩍 뛰는 곳으로 수정의 손목을 잡고 걸었다.
팔팔 뛰는 횟감들을 보니 나 역시 활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이 광어 얼마에요?”
수정이 회 좌판 앞에 서서 아줌마에게 물었다.
“자연산은 7만 원이고요. 양식은 3만 원이네요.”
값이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수정은 그 값의 차이를 보고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요?”
수정이 날 봤다.
“우리 여기서 먹자. 자연산으로.”
수정은 속초까지 왔으니 자연산 회를 먹자고 내게 말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자연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만 거의 자연산은 없었다.
“자연산?”
“응. 자연산이 원래 맛있잖아.”
그것 역시 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착각이다. 회는 원래 배에서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 그리고 어떤 종류는 자연산보다 양식이 더 맛나는 것도 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 말에 수정은 신이 났는지 아줌마를 봤다.
“아줌마, 자연산 광어로 썰어 주세요.”
“호호호! 알았어요. 아가씨. 그런데 참 곱네. 남자친구도 잘생겼고. 내 기분이다. 진짜 자연산으로 맛나게 썰어 주지.”
아줌마의 말에 난 아줌마가 잡는 고기를 봤다. 보기 좋고 싱싱해 보이고 무늬까지 선명한 것을 뜰채에 뜬다면, 그건 아줌마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양식을 준다는 거였다. 난 아줌마가 어떻게 할지 지켜봤다.
‘지켜보자!’
그런데 아줌마는 연한 색이 도는 광어를 뜰채에 떴다.
‘진짜 자연산을 주시네.’
사실 광어는 색이 연한 것이 자연산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색이 진한 것을 선호한다. 그런 경우도 있을 거다. 횟집 주인이 양심적으로 자연산을 팔아도 사람들은 그게 양식인 줄 알고 옆에 있는 양식을 달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줌만 그거 양식 아니에요?”
딱 수정이 그 짝인 거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저렇게 설치는 거다.
“어? 무슨 소리야, 아가씨?”
아줌마는 날 봤다.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난 눈으로 그냥 수정이 달라는 대로 주라고 눈치를 했다. 양식을 자연산으로 알고 먹으면 자연산이 되는 거다.
아줌마 역시 내 눈치를 알겠다는 듯 살짝 나만 알 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잘못 봤네. 요즘 눈이 침침해서. 미안해 아가씨!”
“호호호! 아니에요.”
“아가씨 회 좀 먹어 봤네. 단번에 자연산하고 양식을 구분하네.”
아줌마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수정의 비위를 맞췄다.
“그럼요. 저 회 무척 좋아해요.”
난 순간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오늘 자연산 값으로 양식 먹게 생겼네.’
하지만 수정이 좋다면 그만인 거다. 양식이든 자연산이든 난 상관이 없다. 그리고 내가 진정 먹고 싶은 것은 회가 아니다.
‘마음대로 드세요.’
그렇게 오늘 아줌마는 횡재를 한 걸 거다. 하지만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기분이 좋으면 그만인 거다.
나는 지금 손질을 하고 있는 것이 양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아줌마 역시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무언의 합의.
그럼 된 거다.
“야채하고 초장은 식당 가면 3천 원씩만 내면 먹을 수 있어.”
이게 대포항의 참맛이다.
고기를 싸게 뜨고 야채랑 초장을 사서 식당에서 먹는다. 물론 매운탕을 먹기 위해서는 5천 원을 더 내야 한다.
결국 그냥 서울에 있는 횟집에서 먹는 것이랑 가격 차이는 별로 없어진다.
하지만 바다가 있다.
그리고 바람이 있다. 또 진한 바다 냄새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있으니 그럼 된 거다.
* * *
술과 분위기는 여자의 마음을 여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면서 무기다. 물론 몸을 여는 것에서도 최고의 무기가 될 것이다.
처음 난 그냥 장난처럼 여행을 가자고 했지만 속초까지 오니 남자의 마음이 들끓었다. 그러고 보니 수정을 가만히 둔다는 것은 내가 남자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오늘이 결정의 순간이다.’
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상의 모든 일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이루어질 거다.
난 최대한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려 노력했다.
“캬! 바닷바람 좋다.”
난 소주를 들이켰다. 수정은 내 행동을 보고 피식 웃었다. 마치 너도 어쩔 수 없는 남자구나 이런 눈빛이다.
“그래, 마시자.”
수정도 소주를 들이켰다. 난 술이면 자신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술 발동을 이용해서 체내에 흡수된 알코올을 정수리로 증발시키면 된다.
수정과 같은 양을 마셔도, 아니, 더 많은 양을 마셔도 절대 난 취하지 않는 거다.
술이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여자를 쓰러뜨린다. 난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 모양이다. 수정은 내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셨다.
정말 바닷바람이 좋았다.
5월의 겨울 바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녀가 옆에 앉아 소주를 마신다는 것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일이다.
그렇게 수정과 나는 소주를 3병 넘게 마셨다. 물론 두 병은 내가 마셨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 원래 음흉한 계획이 있으니 난 기공술을 이용해서 알코올을 증발시켰다.
“역시 자연산이라 맛나다.”
수정은 광어회를 초장에 찍어 맛나게 먹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었다.
* * *
대포항 등대 앞.
하나둘씩 연인들이 분위기를 잡았다가 사라졌다.
‘오늘 속초 모텔 미어터지겠다.’
난 야릇한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이 등대 앞에는 수정과 나뿐이었다.
“으슥하다.”
수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딱 뭐가 나올 것 같다. 하지만 등대 앞 바다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정이 살짝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역시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
난 내 의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럴 때면 잡다한 놈들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아 주면 더욱 금상첨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오늘 기분 좋다.”
수정이 살포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마 잠이 온다는 증거일 거다. 이제 고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지. 속초 바다 풍경 좋네.”
지금 이 순간 내가 뭐가 안 좋겠나.
“너 무슨 꿍꿍이 있지?”
수정이 내게 살짝 야릇하게 입김까지 불어넣으며 물었다.
“뭐?”
난 이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게 뛰었다.
“무슨 꿍꿍이?”
“없어?”
“없, 없어.”
“있는 줄 알았는데 좋다가 말았네. 호호호!”
수정은 내게 농담을 했다. 이만큼 수정은 당돌하다. 그때 이 좋은 분위기를 깨는 바퀴벌레들이 등장을 했다.
역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그림 딱 좋아지려고 한다.”
양아치들이다.
역시 이래서 함부로 생각하거나 말하면 안 된다는 거다.
난 고개를 돌려 알짱거리는 양아치 셋을 봤다.
“뭘 보냐? 옆에 깔치 끼고 있다고 용기가 막막 생기냐?”
역시 하는 말도 딱 양아치다. 어디서 저런 말투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모양이다.
“가라!”
난 무겁게 경고를 했다.
“오! 네가 가라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갈 것 같나? 킥킥킥!”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수정이 날 잡았다.
“그냥 피해!”
이 순간 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수정이다. 난 바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이제 춥네.”
“어디를 가시나?”
양아치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