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23화
-내 목은 언제 돌려놓을 거지?
은지수는 이제 메모지에 적는 것이 익숙한 모양이다. 내게 메모지에 적은 글자를 내밀었다.
“귀가 좀 열리나?”
-귀가 열리고 말고 할 게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해?”
난 은지수를 빤히 봤다.
-뭐? 내가 뭐?
“정말 느낀 게 없어?”
-내가 듣지 못했던 소리가 참 많다는 걸 알았어. 됐냐?
은지수는 괜한 것을 묻는다는 얼굴로 메모지에 적어서 내게 보였다.
“그래 잊었던 소리를 잘 기억해.”
이제 된 거다. 이제 은지수의 귀가 열렸다. 노래를 부르는 것에 있어서 성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귀가 열리는 거라고 난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 역시 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듣지 않고 또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을 거다.
이제 은지수의 귀가 열렸으니 은지수의 성대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주면 된다.
“이제 진짜 가수가 될 준비가 된 것 같네.”
난 은지수를 보며 웃었다. 그런데 은지수가 날 빤히 봤다.
-날 이렇게 만들고 또 고칠 수 있다는 거네.
“아마도.”
내 말에 은지수는 다시 뭔가 열심히 적어 내게 보였다.
-그럼 다른 병도 고칠 수 있나?
난 은지수가 왜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병?”
-예를 들면 시각 장애인의 눈을 고쳐 준다든가, 뇌종양 환자의 악성 종양을 치료한다든가.
은지수의 말에 난 웃음이 나왔다.
아마 은지수는 내게 기적을 요구하는 걸 거다. 물론 완벽하게 장담을 할 수 없지만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최 사부의 딸의 병인 루게릭병도 고친 나다. 그만큼 비술과 기공은 위대한 기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술과 기공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보장 역시 없었다.
“기적을 바라는 거야?”
내 말에 은지수가 날 노려봤다. 그리고 다시 뭔가 열심히 적었다.
-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지금 은지수는 내게 뭔가를 바라는 것이 있다. 이럴 때 그냥 원하는 것을 주면 안 되는 거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
그게 거래의 법칙이다.
“너 하기 나름이겠지.”
난 은지수를 뚫어지게 봤다.
-아니, 너 하기 나름에 따라 내가 움직이는 거지.
은지수는 거래를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이미 칼자루를 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답답한 것은 은지수일 거다.
“뭘 원하는 거야?”
-네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할 테니.
“뭐든 할 테니?”
-그래. 뭐든.
이 말은 내게 백지 수표를 내민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다. 매혹적인 은지수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한다고 말했다.
순간 난 음탕한 마음이 생겼다.
“정말 뭐든?”
이 순간 내 눈빛이 이글거렸다. 그리고 내 눈빛의 뜻을 은지수가 감지한 것 같았다.
-그 눈빛은 뭐야?
살짝 몸을 움츠리는 은지수였다.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나도 남자니까.”
난 은지수를 보며 씩 웃었다.
-뭐야?
은지수는 나를 째려보며 종이에 글을 휘갈겼다. 글이 날으는 것을 봐서 무척이나 당황하면서도 화가 난 듯했다.
“네가 ‘뭐든’ 이라고 해서 약간 상상을 했지.”
난 은지수를 보며 씩 웃었다.
-너 지금 음탕한 생각하는 거지?
“하면 안 되나? 난 원래 건강한 남자라고.”
-어린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네.
은지수, 역시 성격 있다. 난 그걸 지금 알았다.
“그렇게 나올 처지가 아닐 건데?”
-정말 날 원하는 거야?
은지수가 급하게 종이에 자신의 뜻을 적었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을 해?”
말장난이다. 하지만 은지수의 눈빛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순진한 구석이 있네.’
성깔도 있고 순진한 구석도 있는 은지수다. 수정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은지수인 거다.
침대도 좋고, 특실이고, 누가 들어올 것 같지도 않고,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 최고의 가수를 품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순간이었다.
-정말 날 원하는 거야?
“하하하! 난 빈약한 노계는 싫다.”
내 말에 순간 은지수의 눈빛이 성난 암고양이처럼 변했다.
-뭐라고?
그리고 바로 내게 종이를 던졌다.
“왜 그러는 거야?”
-넌 여자를 너무 몰라!
은지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게 했다. 그리고 난 바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은지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은지수가 날 원하는 거였다.
난 한마디로 차려 놓은 밥상도 못 먹는 놈이 되어 버린 거였다.
‘쟤가 날 좋아하나?’
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수정이다.
‘수정이는 뭐하려나?’
저번에 밤꽃 향기 사건으로 수정과 난 약간 서먹서먹해졌다. 그때 성공했어야…….
‘권태 놈이 다 망쳤다!’
지금 생각해도 짜증이 났다.
“꼭 여자를 알아야 하나? 여자가 날 알아주면 안 되나?”
난 은지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널 가지고 싶어.
은지수는 내가 다시 건넨 종이에 꾹꾹 눌러 글을 썼다. 이건 엄청난 용기가 분명했다. 역시 남자도 예쁜 여자에게 끌리는 것처럼 여자도 잘생기고 매력 있는 남자에게 끌리는 모양이다.
또한 난 영계다. 그러니 내가 만약 이 은지수의 유혹에 넘어가면 은지수는 계 타는 걸 거다.
‘지금은 안 되지. 뭔가를 해 주고 대가를 받는 건 안 좋은 일이지.’
난 그런 생각을 하고 은지수를 빤히 봤다.
“농담은 그만하고.”
-농담 아니야!
“당신을 소중하게 여겨! 난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니까. 너의 매니저로.”
내 말에 은지수가 날 빤히 봤다.
이 애매모호한 순간은 내 말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았다.
“은지수! 정말 네가 원하는 게 뭐지?”
-내가 아는 두 사람을 고쳐 줘.
은지수는 날 뚫어지게 봤다. 뭔가 정말 느끼고 얻은 것 같았다. 이곳은 병원이다. 그 병원에는 환자가 많다. 그리고 은지수는 그 환자들 중 두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그래. 뭐든 다 할 테니까.
난 은지수를 노려봤다.
“네가 평생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얼마나 은지수가 간절한지 알고 싶어 물어본 말이다. 내 말에 은지수는 다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천천히 메모지에 적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힘 있게 내밀었다.
-너, 그런 애였니?
내가 예상한 답이 아니었다.
“뭐? 내가 어떤 애인데?”
-그래도 난 최소한 너는 조금은 착하다고 생각했다.
“난 절대 착하지 않아.”
난 그렇게 말하고 은지수를 노려봤다.
내가 은지수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고쳐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 몸에도 상당한 충격을 입는 일이었다. 처음 최 사부의 딸을 치료해 주고 난 후 며칠 동안을 힘들어 해야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내가 쌓은 내공 비슷한 것을 상당수 소진해야 했다. 절대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비술과 기공으로 타인을 치료하는 거다.
“원하는 게 있다면 충분히 줘야 한다. 그게 거래의 법칙이다.”
어쩜 아주 매정한 말인지도 몰랐다. 내 그런 말에 은지수는 날 다시 죽일 듯이 노려봤다.
-너, 그런 애구나!
은지수가 그렇게 종이에 적고 휙 하니 내게 던지고 침대에 돌아누워 버렸다. 단단히 삐친 거였다.
‘아무에게나 기적을 내릴 수는 없지.’
내가 기적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아무에게나 기적을 내리지는 않는다. 내가 부정하는 신도 그렇게 아무에게나 기적을 내리지 않으니 말이다.
나 역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내리는 기적은 항상 경이롭고 위대한 순간에 내려져야 하는 거였다. 아무에게나 이벤트처럼 마구잡이로 쓰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거다.
* * *
암센터 연구실.
민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선배 의사를 보고 있었다. 민수가 바라보고 있는 선배 의사는 무척이나 침울한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각은 아주 많이 했지. 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야. 누구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평생 짐처럼 따라다닐 일이야.”
“저의 간절함입니다.”
“그렇지. 자네는 그냥 그렇게 가면 되니까. 하지만 남아 있어야 하는 일은, 그리고 의사라는 업을 가진 나는 어떻게 하지? 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지도 몰라.”
“그렇군요. 그런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렇다네. 내가 존경받는 훌륭한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의사로서 부끄러운 적은 없었네.”
이건 정중히 민수의 말을 거절하는 걸 거다.
“예. 그럼 어쩔 수 없이 다른 분을 찾아야겠군요.”
“그냥 치료를 하게. 자네도 알지만 돈만 충분하면 망막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러니 그분의 눈은 그렇게 고쳐 주는 것으로 하고 나랑 같이 치료를 하세.”
“죄송합니다. 저는 선배님도 알다시피 더 이상 어렵습니다. 제가 치료를 하고 입원을 한다면 그녀의 옆에 더 오래 있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이제 3개월입니다. 100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전 제 죽어 가는 몸을 치료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돈만 있으면 망막이 아니라 심장도 구할 수 있죠. 하지만 전 그녀에게 제 것을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같이 한 몸이 되어 살고 싶습니다.”
엄청난 사랑일 것이고 또한 엄청난 집착일 것이다.
“활동적인 종양 세포 때문에 이식 시술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아직 제 안구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네가 자네의 죽음에 동조를 하란 말인가?”
선배 의사는 소리를 질렀다.
“해 주십시오.”
“이봐! 민수!”
“다시 부탁드립니다. 선배님이 해 주십시오. 정말 부탁드립니다.”
민수의 말에 다시 선배 의사가 민수를 뚫어지게 봤다.
“꼭 그래야겠나?”
“선, 선배님은 제게 빚이 있으십니다. 잊으셨습니까?”
“으음.”
선배 의사는 잠시 민수를 봤다.
“그, 그렇지만…….”
“저는 선배님을 위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환자를 외면했습니다. 그것을 잊으셨습니까?”
“자, 자네 설, 설마?”
“그렇습니다. 지금 선배님의 몸속에 뛰고 있는 심장은 제가 암묵적으로 의사의 도리를 저버렸기에 이식된 심장입니다.”
민수의 말에 의사는 민수를 죽일 듯 노려봤다.
“왜, 왜 그랬나?”
“선배님이 저에게 간절히 애원하셨잖습니까? 선배님께서는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셨잖습니까?”
“그, 그것은…….”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약한 법이다.
“제가 그 때의 죗값을 받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이제 선배님의 죗값을 받으실 차례입니다.”
“자, 자네…….”
“절 원망하고 미워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민수는 다시 선배 의사를 뚫어지게 봤다.
“자네는 사랑에 미쳤네.”
“예. 사랑이라서 미치는 겁니다.”
민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