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36화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이 사장, 수제자로 삼으라는 애가 쟤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사무실 문 쪽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듣고 이준성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체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지, 지은 씨…….”
“그래! 나 지은이다. 이 정신머리 없는 것아!”
지은이 그녀는 1990년대 최고의 트로트 가수였다. 2000년대는 댄스 열풍이 불어 트로트의 침체기였지만 그래도 행사장에 가면 아직도 지은이가 대세였다.
행사를 한 번 뛰어도 천만 원 이상 들어오는 가수였고, 또 연말 디너쇼를 하면 전석이 매진되는 가수이기도 했다.
그런 트로트 대가수를 이준성은 체리의 보컬 선생님으로 섭외를 한 것이다.
물론 그녀를 섭외할 수 있었던 것은 이준성의 인맥과 은성의 자금력이었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내가 아무리 한물갔다고 해도 아직 저런 애 가르칠 정도는 아니야!”
“죄송합니다. 원래 선생님도 처음 트로트 하실 때 싫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준성의 말에 지은이는 피식 웃었다.
“별걸 다 아네.”
“죄송합니다. 트로트로 대성할 가수입니다. 한 번 지도해 주십시오. 아무리 댄스가 대세지만 트로트도 다시 한 번 바람을 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걸로?”
지은이는 마치 체리를 물건 취급했다.
“전 가능하다고 봅니다.”
“난 이준성 사장이 그 개 양아치 밑에서 나왔다고 좋아했는데 촉이 사라진 거야?”
“예?”
“저 물건이 마음에 들다니. 쯔쯔쯔!”
“제 촉 여전합니다. 선생님!”
“그래. 돈은 이미 입금됐으니 돈 받은 값은 해야지.”
“감사합니다.”
이준성은 짧게 묵례를 했다.
“너, 이름이 뭐니?”
“윤정요.”
“성은?”
“윤 씨인데요. 저 파평 윤 씨에요.”
“파평 윤 씨가 자랑이니?”
지은이와 자신의 본명을 밝힌 체리의 신경전인 것 같았다.
“예. 왕비 많이 나온 집안이에요.”
“이제 큰 딴따라 나올 집안이네.”
“예?”
체리의 반문에 지은이는 이준성을 봤다.
“역시 촉 안 죽었네. 이 사장.”
“그렇습니다. 하하하!”
“쟤 톡톡 튀네.”
“그렇죠? 그래서 이름이 체리입니다.”
“트로트에 무슨 체리야! 윤정은 좀 촌스럽고.”
“제 이름이 어때서요?”
“그럼 넌 왜 체리라고 가명 쓰니? 너 웃기는 애구나!”
“그, 그게…….”
지은이 역시 뭔가 톡톡 튀는 성격이었다.
“성 하나만 넣으면 좋겠네.”
“예?”
“너 앞으로 정씨다. 정윤정!”
“정윤정이라고요?”
“그래! 트로트는 정이잖아. 정이 앞뒤에 있으니 딱 대박 나겠네. 그렇지 이 사장!”
“예. 선생님!”
“그런데 곡은?”
지은이의 말에 이준성은 공손히 곡을 내밀었다.
“리듬은 좋은데 노랫말이 왜 이래?”
지은이의 말에 이준성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노랫말 이 사장이 붙인 거야?”
“마음에 안 드십니까?”
“눈물이! 눈물이! 앞을 가려요. 절 자꾸 왜 이리 울리시나요?”
지은이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며 이준성을 째려봤다.
“70년대 3류 뽕짝 불러?”
지은이의 다그침에 이제 정윤정이 된 체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저 정말 트로트도 싫은데 뽕짝은…….”
“트로트가 뽕짝이지, 이년아!”
“그, 그래도 선생님!”
“잠깐.”
지은이는 잠시 체리를 봤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톡톡 튀지, 이 사장!”
“예?”
이준성은 지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멍했다.
“촉 다 죽었네. 다 죽었어. 이 명곡을 불러 줘도 모르니 참!”
“예?”
“하여튼 됐네요.”
지은이는 정윤정을 봤다.
“너 유명해지면 나 모른 척하지 말고 인사 잘하고 다녀라.”
“예?”
“꼭 내 제자라고 매스컴에 까발리고 다니고.”
지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드디어 은성의 기억 속에 있는 노래들이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노래들은 다 은성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대박을 친 노래였다. 미래의 기억이 있는 은성에게 이렇게 연예계는 쉬웠다.
* * *
어두운 방.
난 혼자 앉았다. 어둡다. 그리고 그 어둠에 나는 적응해 있다. 서서히 보이는 사물 속에서 제일 잘 보이는 것은 나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사실 난 원론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만 명의 죄인을 벌하기보다 한 명의 선량한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마라.”
이건 내가 테러리스트가 된 후 항상 생각해 왔던 일이다. 내가 결심한 악을 벌하고 나서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지금 난 고민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완벽한 악인은 정해져 있다.
김민수!
그다.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악이다.
하지만 그 악인이 선을 찾고 있다. 그럼 그것이 악인가? 선인가? 고민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고민에 빠졌다. 난 항상 자력갱생을 말했다. 지금 악이 선을 찾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선택을 해야 한다.
악은 악으로 응징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난 정보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철저히 이용되고 있다. 서말자! 그 여자도 악이다. 악인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정보람 역시 악이 되려고 했다.
“풀 것은 풀어야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스피커에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캡틴이다. 정보람 데리고 와!”
내 목소리가 차갑다. 그리고 난 내 소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만 명의 죄인을 벌하기보다 한 명의 선량한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마라.”
* * *
호중과 박지은은 모처럼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나왔다. 그때 기술 지원팀에게서 전화가 왔다.
-캡틴의 지시입니다.
전화를 받은 것은 호중이다.
“뭐죠?”
-정보람 양을 모시고 오라는 캡틴의 지시입니다.
“모시고 온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라는 말은 납치를 해서라도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악인에게 모질고 독한 은성이지만 일반인에게 한없이 약한 은성이기도 했다.
호중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호중의 생각에는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지금 데리고 오라고 지시를 한 정보람이 악인이거나 그게 아니면 악인과 관련이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떠한 경우라도? 납치라도 하라는 지시인가?”
-어떠한 경우라고 하셨습니다. 기술 지원팀은 캡틴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견을 넣지 못합니다.
“알았습니다. 정보람 양을 모시고 오죠.”
-박지은 요원이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뭐? 박지은 요원이?”
-그렇습니다. 기본 데이터는 전송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호중은 박지은을 봤다. 그리고 그때 박지은의 핸드폰에 마구잡이로 문자가 울렸다. 기본 정보가 전달된 것이다.
“뭐지?”
박지은은 핸드폰을 봤다.
“네가 직접 움직이라는 지시다.”
“내가?”
“그래. 첫 임무다.”
호중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자운대는 법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첫 임무라고?”
박지은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보람 양을 모시고 가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요? 납치라도 하라는 건가?”
“가능하다면.”
호중은 짧게 말했다.
“우린 자운대 요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캡틴의 말에 복종한다. 너와 나에게는 사부님의 말씀이지. 가자!”
“알았어.”
박지은의 반말에 호중이 박지은을 뚫어지게 봤다.
“임무 중에는 존대를 해라. 그것이 자운대 요원의 철칙이다.”
호중의 말에 박지은의 얼굴도 담담해졌다.
“알겠습니다.”
“가자!”
박지은과 호중은 정보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정보람은 병원에 있었다. 사실 정보람은 그렇게 많이 아픈 곳이 없었다.
안구 이식 수술 대기 상태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김민수가 이 병원 부원장이 아니었다면 이럴 수는 없었을 거다.
또각! 또각!
발자국 소리가 정보람의 귀를 자극했다. 시각이 없어지면 다른 감각이 발달하는 법이다. 정보람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누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지? 처음 듣는 발자국 소리야!”
지금은 깊은 밤이다. 간호사도 다니지 않을 만큼 깊은 밤이었다.
또각! 또각!
그렇게 발자국 소리가 났다가 자신의 병실 앞에 멈췄다.
쩌어억!
조심스럽게 병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보다 더 조심스럽게 여자 발자국 소리가 났다.
정보람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침대에 앉았다.
“누구죠? 간호사는 아닌 것 같은데?”
정보람의 물음에 박지은은 조금 놀랐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박지은은 정중히 말했다.
“신분도 밝히지 않으면서 왜 오셨나요?”
“모시려고 왔습니다.”
“나를요? 왜죠?”
박지은은 최대한 담담히 말했고 이상할 만큼 정보람도 담담했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도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 살지 않았지만 많은 일을 경험했다는 증거일 거다.
“이유를 말씀드려야 가시겠다는 건가요?”
“납치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어쩔 수 없다면 그래야 해요.”
“납치라니……, 왜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았다는 건가요?”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아, 아닌가요?”
“아니에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서말자 씨와 정인촌 씨에 대한 일입니다.”
박지은의 말에 정보람이 파르르 떨었다.
“결국 들켰네요.”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모실까요?”
“어떠한 경우라고 하셨죠?”
“그래요. 어떠한 경우라도요.”
박지은은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지금쯤이면 놀랄 만도 하지만 정보람은 여전히 담담했다.
“끌려가는 것보다 제 발로 가는 것이 좋겠네요. 도와주시겠어요?”
정보람은 시각 장애인용 지팡이를 찾았다.
“제가 모실게요.”
박지은은 조심스럽게 정보람을 부축했다. 그러면서 너무나 담담한 정보람이 신기할 만큼 이상했다.
‘뭐지? 뭐가 이렇게 여자가 간이 크지?’
박지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딩동!
그때 박지의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더 들어왔다. 박지은은 급히 핸드폰 문자를 봤다.
‘뭐지 이건?’
은성이 보낸 문자였다.
-사랑을 믿느냐고 물어보고, 믿지 않는다면 데리고 오고 믿는다면 데리고 오지 마라.
박지은은 은성이 보낸 문자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엉뚱한 명령이라도 은성의 명령이다. 박지은도 자운대 대원이기에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