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38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지은은 정중히 정보람을 팔짱을 끼고 부축을 해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왔다.
난 정보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만만한 여자는 아니군.”
내 혼잣말에 최 사부가 날 빤히 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각을 통해 우리 위치를 파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최소한 엘리베이터의 비밀은 감지한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최 사부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선 진실을 밝혀 줘야겠죠.”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 그녀의 판단에 맡길 생각입니다.”
똑똑!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박지은의 목소리였다. 박지은은 충실히 임무를 수행한 거였다. 물론 약간의 허점 몇 가지는 보였다.
“왜 귀마개를 하지 않았지?”
난 바로 박지은을 보고 물었다. 물론 내 눈은 정보람도 보고 있었다. 정보람은 내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역시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어. 어디까지 알았을까?’
난 문뜩 그게 궁금했다.
“죄송합니다. 캡틴!”
난 공식적으로 두 가지 직함이 있다. 자운대의 총 지휘권을 가진 캡틴이라는 직책과 해동비문의 장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운대의 총지휘권을 가진 캡틴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기에 박지은은 날 캡틴이라고 불렀다.
“작은 일에 틈이 생기는 법이다.”
“예. 알겠습니다.”
호중과 박지은은 짧게 동시에 대답을 했고 난 정보람을 봤다.
“정보람 씨. 어디까지 파악하셨죠?”
난 정보람을 보며 씩 웃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대략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전, 그런 적 없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들 누구죠? 누군데 날 이런 지하까지 데리고 온 건가요?”
“역시 파악하고 계셨네요.”
난 다시 한 번 정보람을 보며 웃었다.
‘역시 보통 여자는 아니야!’
“정보람 씨! 무슨 이유에서 원수인 김민수에게 접근을 했죠?”
난 정보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파악한 정보람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그것은 삶에 대해서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말이 될 거다.
그리고 삶에 대한 조금의 미련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순순히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 마지막 순간에도 정보람은 자신이 어디로 끌려오는지 파악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것은 좀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닐 것이다.
“무, 무슨 말이죠?”
정보람의 목소리가 떨렸다. 보통 난 상대방의 눈빛의 떨림으로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파악해 왔다. 하지만 정보람은 시각 장애인이다. 그렇다면 목소리의 떨림으로 파악을 해야 한다.
난 고개를 돌려 최 사부를 봤다.
“확인시켜 줘야 이야기가 편할 것 같네요.”
내 말에 최 사부는 서말자가 감금되어 있는 곳의 스피커를 켰다.
-왜 날 이곳에 가둔 거야! 내가 뭘 잘못을 했다고.
서말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정보람의 귀를 자극했다.
“아시죠. 서말자 씨를.”
내말에 정보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른다고 하실 건가요?”
“왜 나한테 이러는 거죠? 병원 측에서 안 건가요?”
“병원이라고 하셨나요?”
서말자도 처음 이곳에 끌려 왔을 때 병원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물었다. 이를 통해서 난 병원이 큰 조직처럼 변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요. 병원이 우리를 파악한 건가요?”
“믿으실지 모르지만 전 병원 측에서 보낸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 왜 우리한테 이러죠?”
정보람은 분명 마음속으로 당황했을 건데 말투는 제법 담담했다. 저런 것은 딱 두 가지 이유다. 모든 것을 포기했던가? 그게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다던가. 둘 중 하나일 거다.
“왜 제가 이러는지 진짜 모르십니까?”
“몰라요.”
“그럼 천천히 하나씩 알아가도록 하죠.”
“뭘 알고 싶은 건데요?”
“좋습니다. 하나씩 질문을 하고 하나씩 진실을 말씀해 드리죠.”
“예? 무슨 소리에요?”
처음으로 정보람이 당황을 했다.
“왜 사랑하지도 않는 김민수에게 접근을 했죠?”
내 말에 정보람은 피식 웃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죠.”
처음으로 진실이 정보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왜 접근을 했습니까?”
“제가 접근을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김민수가 내게 다가왔죠. 그리고 마침 그때 전 숙모에게 모든 진실을 알았고요.”
이건 새로운 사실이다.
“김민수가 접근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당신이 병원 측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로 하죠. 뭐 달라질 방법은 없으니까요. 복수! 힘없는 것들에게는 참 어렵네요.”
정보람은 피식 웃었다.
다시 말해 정보람은 복수를 꿈꾸지만 능력이 없어 하지 못하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어쩜 당연할 거다. 아무리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이 있어도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럼 서말자 씨가 어떤 진실을 말해 줬죠?”
“제가 모르고 있던 모든 것들을 말해 주셨어요.”
정보람은 내 질문에 생각 이상으로 고분고분했다.
“그녀가 말해 준 것이 뭡니까?”
“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요.”
“그게 진실이라고 믿으십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때로는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보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 이해가 안 되네요.”
“당신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은 분명 병원 측과 김민수가 확실할 겁니다.”
“그런데 왜요? 왜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당신들, 누구죠?”
“그건 밝힐 수가 없습니다.”
“자신도 밝힐 수 없는데 어떻게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으라는 거죠?”
“전 당신과 병원 측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니까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당신 아버지의 죽음에 병원 측과 김민수만 관계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드리는 겁니다.”
“그럼 누가 또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처음으로 정보람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이것은 마음의 동요가 있다는 거다.
“알고 싶으십니까?”
“알려 주려고 부른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잔인한 진실을 알려 드리려고 모신 겁니다.”
“이유가 뭐죠?”
정보람은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최대한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당신이 악인지 아닌지 그리고 김민수가 절대 악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내 말에 정보람은 다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악이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당신도 김민수도 악이라면 응징할 생각입니다.”
“우습군요. 당신이 뭔데 악이라고 정의를 하고 응징을 한다는 거죠?”
이건 내가 내 스스로 항상 질문을 던지던 말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하지 않기에 제가 하는 겁니다.”
“당신 건망지군요. 마치 당신은 신처럼 모든 법 앞에 군림하려는 것 같아요.”
정보람은 내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전 절대 신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신처럼 굴려는 거죠?”
역시 정보람은 보통이 아니었다.
“아주 가끔은 신의 능력을 보이니까요.”
“역시 당신은 건방지군요.”
정보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정보람처럼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여자도 없었다.
“어쩌면 제가 건방질 수 있을 겁니다.”
“예. 당신은 건방져요.”
“좋습니다. 그건 그렇게 넘어가죠.”
“그럼 제가 알아야 할 진실이 뭐죠?”
“당신 아버지의 죽음과 당신에게 진실을 말한 서말자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알고 있어요.”
내 말에 난 정보람이 약간의 충격을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정보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내가 당황스러울 차례였다.
“알, 알고 계셨습니까?”
“예. 처음에는 몰랐지만 조금 생각을 해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그럼 서말자 씨와 당신의 삼촌이 병원 측과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알고 있었어요. 숙모와 삼촌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를 압박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정말 대단한 추리력이었다.
역시 내가 생각한 대로 정보람은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내가 정보람에게 알려 주려고 했던 진실을 이미 정보람은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진정 생각하고 있던 본론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다.
“당신은 김민수를 사랑하지 않지만 김민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죄책감이겠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닌가요? 나 같은 시각 장애인 여자에게 엘리트 의사가, 그것도 가문 좋은 남자가 접근을 하는 이유는 딱 3가지일 거예요.”
“3가지요?”
“그래요.”
“그 3가지가 뭐죠?”
난 점점 더 정보람이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알고 싶으세요?”
“궁금해지네요.”
“그런가요? 우선 동정심이겠죠. 그리고 그건 죄책감과 같은 거죠. 제가 불쌍했을 거예요. 그래서 저를 돌봐 주고 싶은 거겠죠.”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뭡니까?”
“저 같은 장애인에 대한 호기심이겠죠. 남자는 신기한 것을 찾기도 하잖아요.”
“확신합니까?”
“확신해요.”
“김민수가 정보람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짜 사랑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죠. 전 저 악마 같은 여자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진짜 사랑이든 동정심이든 김민수의 옆에 있어야겠죠.”
“당신은 김민수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내 마지막 질문에 정보람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은 저, 저한테는 사치가 아닐까요? 어떻게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를 사랑할 수 있죠? 또 사랑한다면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처음으로 정보람의 목소리가 서글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왜 원수인 김민수 옆에 있는 거죠?”
“으음.”
처음으로 정보람이 신음 소리를 냈다.
“당신은 스스로 당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있군요.”
“그렇지 않아요. 전, 김민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네요. 머지않아서 당신은 앞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죠?”
“당신이 병원에 있는 이유를 정말 모른다는 건 아니죠?”
“저는 각막 이식 수술을 기다리고 있어요.”
“맞습니다. 그러니 곧 앞을 볼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죠?”
역시 정보람은 촉이 좋았다.
“뭐 당신은 김민수를 사랑하지 않으니 알아도 큰 동요는 없겠군요.”
“무슨 말이죠?”
“김민수는 지금 당신에게 각막을 주기 위해서 자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정보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마치 정신을 잃는 듯 휘청하더니 의자에서 넘어졌다.
쿵!
난 고개를 돌려 박지은을 봤다.
“다시 조심히 자리에 모셔.”
“너무 잔인하시네요. 캡틴!”
“임무에 감정을 넣지 마라!”
난 차갑게 박지은에게 말했다.
“전 처음으로 캡틴이 무섭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어쩌지? 난 항상 내가 무섭다. 어서 정보람 양을 의자에 모셔라.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난 박지은을 노려봤다.
“알겠습니다.”
박지은은 짧게 말하며 정보람에게 다가가 조심히 정보람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