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의 신! 176화
“예. 잠깐 와인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면 이 와인은 사또 무똥 로칠드로 레드 와인입니다.”
“그런가요?”
수정은 지금 속으로 기분이 찢어지게 좋을 거다. 내게 질투심을 유발하는 일이 생겼으니 그녀는 기분이 좋을 거다. 하지만 난 정말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엉망이다.
“프랑스 보르도 메독 지방의 특등급 와인 중 매년 출시될 때마다 작은 설레임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와인이 있다면 바로 이 무똥 로칠드일 겁니다.”
웨이터는 내 속도 모르고 잘난 체를 하고 싶었는지 설명을 했다. 아마 이 웨이터도 수정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특등급요?”
“그렇습니다. 최고의 와인입니다.”
나 역시 이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우선 이 잘난 체하는 웨이터부터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55년 제정 이후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바뀌지 않았던 프랑스 메독의 등급 분류가 변경된 유일한 사건을 만든 와인이지. 또한 매년 와인이 출시될 때마다 세계 각지의 유명 화가의 그림을 라벨로 활용하여 많은 와인 매니아들에게 1순위로 여겨지는 것 또한 이 와인의 큰 특징이기도 하지.”
내 말에 웨이터는 살짝 놀라 날 봤다. 이런 와인에 대한 정보를 알고 마시는 사람들은 되지 않는다.
“그, 그렇습니다.”
“저도 다 알고 있으니까. 가세요.”
“예. 알겠습니다. 하여튼 저쪽에 앉아 계신 분이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웨이터는 눈치 없이 다시 수정에게 누가 줬는지 말했다.
“아 그러세요.”
수정은 고개를 돌려 고맙다는 답례를 하기 위해 웃었다. 그리고 난 어떤 작자가 말도 안 붙여 본 여자에게 최소 130만 원을 썼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돌려 봤다. 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물 잔을 떨어트렸다.
‘저, 저 새끼는!’
내가 놀란 만큼 수정에게 와인을 보낸 놈도 날 보고 놀랐다. 그와 나는 절대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사이다.
‘최상혁 개새끼!’
난 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오픈해 드릴까요?”
웨이터가 또 눈치 없이 나섰다.
“됐어.”
난 차갑게 말했다.
“예?”
“됐다고.”
“그래도 저쪽 고객님께서…….”
“저쪽만 고객이고 우린 얻어먹으려고 왔나?”
순간 내가 차갑게 말하자 웨이터는 당황을 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왜 그래? 은성아!”
수정도 내 차가운 말투에 놀라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
그리고 난 다시 웨이터를 봤다.
“그 와인 이리 주세요.”
“예?”
“저기 있는 남자가 우리 마시라고 줬다며?”
“예. 그, 그렇습니다.”
“이리 달라고.”
난 다시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웨이터는 조심스럽게 와인을 내게 내밀었고, 난 그 와인을 받아 들고 일어섰다.
“은성아 왜 그래?”
사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난 그냥 ‘잘 먹겠습니다’라는 표정으로 와인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잘 먹었다. 그냥 주는 거 고맙게 먹는 거였다.
하지만 최상혁 저 새끼가 주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아마 내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최상혁은 수정만 보였을 거다.
“이 와인, 누가 줬는지 알아?”
“누가 줬는데?”
수정의 눈동자가 떨렸다.
“날 성폭행미수범으로 만든 놈!”
난 이를 바득 갈았다.
“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수정은 얼마나 내가 최상혁을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난 수정을 잠시 봤다.
“먼저 나가 있어.”
역시 이번에도 난 차갑게 말했다. 수정의 눈빛은 잔뜩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난 단 한 번도 수정에게 이렇게 차가운 눈동자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뭐, 뭐하려고?”
난 수정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오른손에는 최상혁이 보낸 와인이 들려 있었다. 내가 천천히 걸어가자 최상혁도 나를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최상혁은 나를 보며 웃었다.
“와인 잘 받았다.”
“수정 씨의 상대가 넌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은 것을 보낼 걸 그랬네.”
최상혁 역시 차갑게 말했다. 이놈은 여전히 날 돈 없는 국밥집 양아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멍청한 놈일 거다. 아니, 내가 그만큼 꽁꽁 숨길 걸 거다.
“그래! 그랬어야지.”
난 바로 손가락에 힘을 줬다.
바직!
순간 와인 병이 깨졌다.
쨍그랑!
순식간에 최상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난 바로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최상혁의 머리에 130만 원짜리 와인을 부었다. 순간 최상혁은 와인으로 범벅이 됐다. 그런데 최상혁은 뿌려지는 와인을 피하지 않았다.
콸콸콸! 콸콸콸!
참고 참았던 분노가 최상혁을 보자마자 터진 거다.
그때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그년이 재즈 바로 들어섰고, 나와 최상혁의 모습을 보고 살짝 놀라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늘 보기 싫은 것들 아주 많이 보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최상혁을 봤다.
“네가 나한테 한 짓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겠지.”
난 최상혁을 노려봤다.
“그렇지. 그런데 네가 한 짓이 널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걸 아나?”
최상혁은 날 보며 다시 웃었다. 아직 저놈은 나를 과거의 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다. 나는 조용히 내 모든 것을 꽁꽁 숨겼으니 말이다. 아마 나를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이다.
남의 삶을 지옥 그 자체로 만들어 놓고 그냥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잊고 살았을 거다.
“예전처럼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아.”
“예전이랑 많이 달라진 모양이네. 개구리는 뛰어 봐야 폴짝이지. 내가 던진 돌에 맞으면 바로 뒤지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내가 와인을 머리에 부을 때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한 것은 누구에겐가 맞을 수도 있다는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거다.
“내가 어디까지 뛰는지 한 번 두고 봐라.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아니, 난 완벽하게 변해 있다. 최상혁과 이놈의 할아비만 응징해야 한다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돈이 무기인 더러운 놈은 돈으로 조지면 된다. 하지만 최 회장의 뒤에는 동아백록회가 있다.
내 정보 조직의 은밀한 정보 수집을 통해 서서히 동아백록회의 계보가 밑바닥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점점 더 응징과 복수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거였다.
난 와인병을 다 붓고 나서 살짝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마음 같아서는 최상혁의 머리에 찍어 버리고 싶었다. 그럼 놈은 분명 나를 폭행으로 고발할 거다. 보는 눈도 많으니 여기서는 절대 안 된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때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음성이 들렸다. 오늘 과거의 인물들을 다 만나는 날인 줄 알았다.
내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은 실장이었다. 은 실장이 박은진 그년과 같이 걸어 들어왔다는 것은 최 회장에게 신임을 잃고 있다는 증거일 거다.
은 실장은 내게 급하게 달려왔다. 그리고 힘껏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난 예전의 내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은 실장은 아직 안 죽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거의 폐인이 다되어 있지만 죽지 않고 있었다.
‘비술에 실패라는 것은 없는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툭!
난 바로 손을 뻗어 은 실장의 손을 쳐냈고, 그 순간 은 실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날 봤다.
“넌…….”
“잊고 살지 않아서 미안하네.”
이번 역시 내가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은 실장이 날 못 본 것이다. 그리고 은 실장이 달려오는 것을 감지하고 바로 돌아서서 그의 손을 쳐냈다. 내가 강해진 이유도 있지만 은 실장이 확실히 약해지고 했다.
보기에 따라서는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런데 죽지 않고 있다. 그럼 뭔가가 있는 거다.
“오늘 여기서 과거라도 추억해야 하나? 나랑 관련이 있는 것들은 다 모였군.”
난 은 실장을 노려봤다.
“물러나라! 쿨럭! 더 이상 무례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쿨럭!”
은 실장은 거친 기침을 토해 내며 내게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폐인 다 됐군.”
“으음…….”
은 실장은 부인하지 않고 신음 소리를 냈다. 그건 스스로도 폐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 내가 무례한 짓 좀 했지. 그런데 너희들은 무도한 짓을 하고도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잖아. 은 실장, 당신은 좀 아닌 것 같고.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 당당했던 모습 어디에 갔지? 저년 보디가드나 하는 걸 봐서는 신용을 많이 잃었나 봐?”
난 은 실장을 조롱했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러고 저년도 이제 돈맛에 중독된 모양이군.”
“뭐라고요?”
조금 전까지 놀란 눈이던 박은진이 날 째려봤다.
“아직도 저 병신 새끼 옆에 붙어 있는 걸 보니 말이야!”
난 모든 것을 아는 눈으로 박은진을 봤다. 사람은 꼭 입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내 말에 최상혁과 박은진 그리고 은 실장이 동시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개새끼가 그날 이후로 안 할 놈도 아니고.’
난 그날, 기억하기도 싫은 날에 박은진 저년이 최상혁에게 반쯤 성폭행을 당했던 순간을 눈으로 봤다. 삽입해서 허리를 움직이던 놈을 머리채를 잡아 묵사발을 냈으니 말이다.
그때 나를 보고 입술을 깨물고 멍하니 있던 박은진이 내게 걸어와 내 뺨을 후려쳤다.
짝!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으나 피하지 않고 맞아 줬다. 그래야 한 대 후려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터진다. 지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저년이 내 뺨을 후려치는 것을 보니 역시 돈맛에 빠져 망할 년이 된 것이 분명했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무섭게 박은진을 노려보며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수정이 내게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참으라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 오아시스 수정은 타고난 쌈닭이라는 것을 잊었다.
“내 남자야!”
짝!
수정은 박은진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어디 감히! 쓰레기 같은 게 함부로 손을 올려!”
“넌 뭐야?”
뺨을 맞고 고개가 꺾일 정도로 돌아갔던 박은진이 급히 고개를 돌려 수정을 노려봤다.
짝!
“너 같은 년은 부끄러움 따위는 모르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년이 어디서 함부로 손모가지를 놀려!”
이 순간 틀림없이 수정은 내일 스포츠 신문 면에 톱으로 등장할 게 분명했다. 보는 눈이 참 많으니 말이다.
“뭐, 뭐라고?”
“왜 몰라? 내가 모를 줄 알아? 쓰레기 같은 년!”
수정의 욕에 주눅이 들어 있던 웨이터가 더욱 놀라 수정을 봤다. 하지만 이 순간 가장 놀란 것은 박은진 저년일 거다.
“너! 내가 그냥 둘 줄 알아?”
“안 두면? 왜, 방송국에도 제보라도 하게? 해! 내 남자가 너 같은 쓰레기한테 맞았는데 방송을 해서 뭐하게. 구해 준 남자를 궁지로 몰아? 이 망할 년아!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걸어 다녀? 기어 다니는 개도 자기 도와준 사람은 안 물어. 꼬리를 흔들지. 그래도 꼬리는 좀 잘 흔드는 모양이네. 옷 입은 꼴을 보니 저 새끼한테 흔든 모양이구나! 너!”
수정의 입에서 거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자퇴한 학교의 졸업생이라면 내 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리고 난 수정에게 내가 겪었던 그 일을 담담히 이야기해 줬고, 그날도 수정은 날 포근하게 안아 줬다.
어쩌면 이 순간 난 승리자일 것이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말이다. 저년처럼 돈 때문에 붙어 있는 년이 아니라.
그러니 난 최상혁을 이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