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량 18%
“여기 사람이 있다. 사다리를 가져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김산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구덩이에 떨어져 울컥울컥 솟아나는 서러움을 삼켜 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리면서 위쪽에 뿌연 흙먼지가 피었다.
순간 꼼짝없이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옆에 쌓인 무언가라도 이 구덩이로 떨어진다면 크게 다칠 테니까. 게다가 차가람 일행이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아서 더욱 걱정이었다.
다만 몸을 웅크린 채 잠시 기다리자 곧 먼지는 가라앉았다. 위쪽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허둥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구덩이 쪽으로 떨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흙더미 하나도 말이다.
“……감사합니다.”
위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타고 김산은 조심스럽게 지상으로 올라왔다. 아주 잠깐 들어가 있던 것뿐인데 햇살을 오래 못 본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가 거기 빠진 겁니까? 여긴 출입 통제 구역인데…….”
그를 구조한 연구원이 빠진 이유에 대해 묻는 바람에 다시 김산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등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이리도 따스한 날에, 서러운 일이었다.
“저게 왜 무너졌는지는, 아십니까?”
“네?”
김산이 차마 대답을 못 하자 그를 구조한 연구원이 뒤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그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분명 아무 이상 없던 공사 현장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피고 나서야 공사용 천막을 치기 위해 위쪽에 가설해 둔 구조물이 바닥으로 추락한 걸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몬스터 꽃 주변의 철책이 또 다수 파손되었다. 그럼에도 용케 김산이 있던 구덩이 근처의 철책은 또 멀쩡했다. 저 구조물이 조금만 이쪽으로 삐끗했다면 정말이지 크게 다쳤으리라.
“모르시나요?”
멍하니 주변의 난장판을 보는 김산에게 연구원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제야 볼에 꽂히는 시선이 묘하게 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여태 지상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 속에 있었는데, 그걸 왜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세상에, 이게 무슨! 김산 가이드, 괜찮아요?”
뭔가 미묘한 공기가 흐르기 직전, 이선혜 가이드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철책이 무너지며 공사용 천이 다 걷히는 바람에 이제는 이쪽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야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괜찮아요.”
자신을 구해 준 연구원이 다른 이들보다 한발 먼저 와 주었다는 걸 깨달은 김산이 감사 인사를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연구원은 이미 다른 곳으로 급히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이상하게 서두르는 듯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산은 이번엔 옆에서 들려오는 이선혜의 경악에 주의를 빼앗겼다.
“아니, 이곳에 빠져 있었나요? 대체 어쩌다가.”
“그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김산을 이선혜는 일단 공터로 데리고 나왔다. 철책이 일부 무너진 탓에 아까 몬스터의 꽃에 대한 설명을 하던 공터까지는 금방이었다. 밝은 곳에 나오고 나서야 김산이 크게 다친 곳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사이 김산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무턱대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려고 하니 아까 차가람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어쩐지 걸렸기 때문이다.
“휴, 완전히 엉망이군요.”
몬스터 꽃이 부화하려면 시간이 좀 남긴 했으나, 아무래도 주변의 철책이 이렇게 망가져서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연구소 내부는 비상이 걸렸다. 소란스럽게 모두가 철책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선혜가 혀를 찼다. 그게 꼭 제 잘못인 것만 같아서 김산은 목을 슬쩍 움츠렸다.
설명해 보라는 듯한 이선혜의 눈빛에 김산은 부담을 느꼈다. 결국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선배?”
차가람이 마치 다른 곳에 있었다는 듯 다급하게 뛰어왔다. 주변에는 연구원을 몇몇 이끌고.
“얘는 왜 이런 꼴이죠?”
시치미를 뚝 떼는 차가람의 얼굴이 꼭 괴물처럼 보였다. 작은 마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종류의 악의 앞에서 김산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억울함이 솟아올라 김산은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낼 뻔했다. 그 찰나의 순간 놀랐다는 표정과는 다르게 차가람의 눈빛에 스치는 번들거리는 악의를 엿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자신이 있던 일을 말하면 큰일 나는 건 차가람일 텐데,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절로 멈칫한 김산이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차가람의 근처에 있는 다른 신규 가이드들은 이상하게 김산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들에게, 차가람은 자신만만하게 아무도 못 본다고 말했다. 거기에 자신을 구해 준 연구원이 출입 통제 구역이라고 말하는 걸 봐서는, 역시 차가람이 저를 인도한 그 길도 함부로 들어서면 안 되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어쩐지 흡사 차가람의 부하처럼 뒤에 버티고 선 저 연구원들의 존재도 마음에 걸렸다. 마치 꼭 김산이 차가람이 그랬다고 지목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듯한 상황이.
“……길을 잘못 들었어요.”
힘 빠진 목소리로, 김산은 결국 차선책을 선택했다.
“뭐……?”
차가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김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선혜의 앞이라 해 오던 표정 관리 따위는 집어치우면서.
“…….”
그간 차가람은 김산에게 많은 돌을 던져 왔다. 그 어느 것도 일정 이상의 파문을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성공적이었다. 매서운 돌멩이가 잔잔하던 호수를 이리저리 유린하며 깊게 가라앉았다. 김산은 이제 타인을 의심하는 법을 무겁게 깨우치고 말았다.
역시나 이런 의심이 옳은 행동이었는지, 차가람의 뒤쪽에 있던 연구원들도 서로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김산의 입에서 듣고자 했던 말이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미안하군요, 김산 가이드. 제가 나중에 절 찾으러 와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때 선생님이 재빨리 이 상황에 끼어들었다. 자신이 아직 시설 전체 안내도 끝나지 않은 신규 가이드를 홀로 둔 탓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그를 보호하려는 이선혜의 모습에 김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간 많이도 쌓인 서러움이 자꾸만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이만 돌아가죠. 실습은 다음에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이선혜의 빠른 대처로 김산은 다시 가이드 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정작 배우려고 했던 건 얼마 못 배우고, 새롭게 도시에 적응하는 방법만 아프게 깨우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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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 짓이지.”
“뭐가요.”
철책에 불의의 사고가 생긴 다음 날. 허필식은 협회장 사무실로 들어서는 기도해에게 매섭게 일갈했다.
허필식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도해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가볍게 묻고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귀한 재료로 만든 소파에 어쩐지 가장 자주 앉는 사람이 놈이라는 사실이 허필식은 못마땅했다.
“어제 그 철근 떨어트린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