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햇살 내리는 날의 가이드 (53)화 (5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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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눈을 뜨니 모르는 장소였다.

김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검은 이불이 몸을 타고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대리석 바닥을 낯설게 여기며 김산은 멍하니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은 금방 되살아났다. 꼭 세상이 망할 것 같았던 격전이.

땅이 온통 움푹 파이며 뒤집어졌다. 몬스터가 쏘아대던 거대한 벼락은 근처에 있던 건물들을 부수며 지나갔다. 이윽고 지진이라도 난 듯 울리던 지면과 그곳을 적신 몬스터의 흥건한 피까지.

그런 곳의 한가운데, 기도해는 홀로 서 있었다.

무서웠다. 건물만 한 몬스터가 날뛰는 장면도 무서웠고, 말로만 듣던 에스퍼들의 싸움도 무서웠다. 특히 배운 것 이상으로 강력하고 거대한 몬스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선사했다. 오전에 본 꽃의 거북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럼에도 김산은 달려야 했다. 그곳에 기도해가 혼자 있었으니까.

멀리서 보기에도 기도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오전 내내 신경 쓰였던 그 영혼의 균열이 조금씩 몸집을 키우며 기도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수업에서는 이렇게 멀리서도 에스퍼의 상태가 보인다는 말은 없었는데, 김산은 이상하게 그걸 똑똑히 인지할 수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자상한 미소는 흔적도 없었다. 그저 영혼이 살라 먹히는 고통 속에서 고요한 비명만 지르는 그의 모습이 김산을 파고들었다.

그때, 기도해를 도울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점이 뇌리를 강타했다.

솔직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어떻게 그의 곁으로 뛰어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 차리니 어느새 그의 한걸음 앞이었다. 회의 내내 따라다니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건넨 덕일까 기도해는 영혼이 바스러지는 순간에도 차분하게 자신을 기다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입맞춤으로 가이딩을 했었지.

문득 떠오르는 감촉이 있어서 김산은 저도 모르게 귀를 붉혔다. 입술이 홧홧할 정도로 뜨거운 그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다.

분명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가이딩은 에스퍼를 위한 치료 행위였으니 긴급한 상황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만 볼에 열이 나는 것 같을까.

“깼어요?”

그때 한쪽에 있던 문이 열리며 기도해가 나왔다. 그는 맨몸에 검은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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