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11화 (11/127)

11. 산딸기와 웨어울프 (4)

“끄으으으….”

다리부터 올라오는 끔찍한 고통.

베론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알고 있다면 진작 대답했으리라. 하지만 모른다고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 또한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대충 알겠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무무카와 친분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 각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용병 대장으로 이름을 날렸기에 서로 은근히 의식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연찮게 두 용병대가 함께 고용되었을 때, 레오는 무무카와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당시 전장의 무무카는 그저 용맹하다는 표현으로 부족했다. 악귀나 야차라는 수식어가 적합했으리라.

그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싸웠다.

하루빨리 죽음이라는 안식에 들고 싶은 것처럼.

[그때는 죽겠다는 생각으로 싸웠다. 하지만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지.]

수년 후, 검은 마물 토벌을 위해 다시 만난 무무카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가족을 찾았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그 전장을 끝으로 가족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 * *

“그놈, 아무래도 모르는 눈치인데.”

레오가 말했다.

“소년, 끼어들지 말아라.”

“지금 모락스는 예전과 같은 조직이 아닐 거다. 말 그대로 과거의 잔재일 뿐이지. 저놈이 직접 노예를 조달하는 모락스의 사냥개였다면 어디에 처분하는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야.”

“…사실인가?”

무무카와 레오를 번갈아 바라보던 베론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무무카의 손아귀를 떠난 베론의 몸이 소파 위로 뚝 떨어졌다.

무무카도 휘청이며 소파를 짚고 섰다. 복수할 대상을 찾았지만 여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절망감이 훨씬 컸다.

“무무카, 도움이 될지 모르나 한 가지 들은 이야기가 있다.”

“뭐지?”

“그 산딸기 파이, 고향이 생각나는 맛이라고 했지?”

“그래, 그게 지금 어쨌다는 거냐.”

무무카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 서 있었다.

원수를 발견했지만 가장 중요한 동생의 행방을 찾는 데 실패했다. 그 좌절감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

“확실히 맛있었지. 계속 생각날 정도로. 그러니까 이 정도 유행하는 거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메르윈령에서 처음 유행했다고 들었다. 소문으로는 메르윈 백작가의 시종이 만들어 다과회에 제공한 것이 시작이라는 말이 있지. 그것이 수도에서 다시 한번 크게 유행하면서 여기저기 번지기 시작했다고.”

한껏 일그러졌던 무무카의 표정이 점점 펴졌다.

어머니의 손맛을 꼭 닮은 파이.

그저 그립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것을 만든 이가… 설마…?

무무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직 레오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그 시종이 웨어울프라는 소문이 있어.”

“사실인가!”

“나도 들은 소문이야. 하지만 모락스의 사냥개에게 더 이상 정보가 없다면 이쪽을 확인해 볼 가치가 있지 않아?”

무무카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산딸기 파이를 만들었다는 웨어울프가 여동생이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해 준 맛을 꼭 닮은 그것이라면….

“고맙다, 소년. 이름을 묻고 싶다.”

“레오.”

“레오, 고맙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감사함을 표한다. 그리고 정말 여동생을 찾게 된다면… 반드시 보답을, 아니 은혜를 갚도록 하겠다.”

“별로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야. 여동생을 꼭 찾았으면 좋겠군.”

반드시 찾을 수 있겠지. 레오는 확신했다.

[그 산딸기 파이가 여동생의 작품이었다니. 어쩐지 어머니의 맛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었지.]

검은 마물 토벌 때 다시 만난 무무카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그냥 내버려 둬도 그는 결국 여동생을 찾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10년은 더 지난 시점일 테니 그 시간을 당겨 줘도 좋겠지.

“대신, 이자의 처분을 내게 맡겨 줄 수 있겠나?”

레오의 말에 무무카는 쓰러져 신음하는 베론을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껏 복수를 위해 살아왔지만 그것이 여동생을 찾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레오, 내게 행선지를 알려 줄 수 있나?”

“일단은 메프람으로 향하는 중이야. 황립 아카데미에 지원할 예정이라서.”

“황립 아카데미라…. 잘 알았다. 나중에 꼭 찾아가도록 하지. 함께 있던 소년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게.”

무무카는 그대로 사라졌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산딸기 파이를 만든 웨어울프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자 그러면, 우리는 남은 이야기를 마저 해 볼까?”

레오는 바닥에서 뒹구는 베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다.

* * *

십수 년간 타렌의 치안을 지켜 온 경비대장 파울로는 요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두 달 전 나타나 상회를 차지한 수상한 녀석들 때문이었다.

놈들이 나타난 이후 도시의 치안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성 내외에 도적이 늘고 시장의 상인들은 불안함에 떨었다.

놈들은 점차 대범해졌다. 경비대의 앞에서 보란 듯이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요구했다. 즉시 잡아들였지만 곧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행정관의 명령이었다.

이후 도시의 질서는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경비대는 허수아비가 됐고 놈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타렌에서 활개 쳤다.

파울로는 그들을 감싸는 행정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행정관은 야심가와 거리가 멀었고 탐욕스러운 이도 아니었다. 성정은 조금 유약할지 몰라도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고 아랫사람에게 따뜻한 이였다.

평소 존경하던 행정관의 변한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십수 년간 자랑스레 이끈 경비대를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장님! 상회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그래서 누군가 상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통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행정관을 생각하면 뒷수습이 머리 아프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으음….”

직접 달려가 확인한 상회의 광경은 끔찍했다.

건물 내부는 피범벅이다. 1층 복도에는 거대한 둔기에 당한 듯 머리가 곤죽이 된 시체가 즐비했고, 상회장 베론은 가장 안쪽 방에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다.

“사, 살려 주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파울로는 살려 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베론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횡설수설했는데, 한쪽 다리는 무엇에 당한 것인지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

“여기 살아남은 이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앳돼 보이는 청년이 방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청년은 거의 유일하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는데, 묻기도 전에 베론의 악행을 술술 불었다. 그 내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외지 상인의 물건을 갈취한 것은 물론, 피해자를 죽여 없애거나 노예로 팔아넘겼다. 게다가 행정관의 딸을 중독시켜 행정관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다.

하나같이 대담하고 끔찍한 범죄 행위였기에 듣는 것만으로 아찔할 정도였다.

“이놈들…!”

생각했던 것을 훨씬 넘어서는 악행들.

파울로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해독제는? 분명히 가지고 있을 테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남자가 해독제를 가져왔고, 어떤 방식이든 죽음을 면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베론은 고개를 떨궜다.

“이놈들을 묶어라. 당장 행정관님을 뵈러 가야겠다.”

포박되는 베론을 보며 파울로는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 * *

거리의 아이에게 동전을 쥐여 주며 타렌 상회에 경비대를 부른 이는 레오였다.

그들과 복잡하게 얽혀 봐야 일정만 늦어질 것이고, 뒤처리는 이 도시의 사람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물론 빈손으로 여관에 돌아오진 않았다. 레오의 손에는 베론이 그간 상인들에게 갈취한 돈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또다시 목숨을 구했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돈만 찾아왔는데요.”

“상인의 돈은 피와 같습니다. 흘린 피를 찾아 주셨으니 목숨을 구해 주신 것과 다름없지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지오르는 자신이 산딸기를 매입했던 원금만 돌려받겠다고 했다. 이미 손에서 한 번 떠난 돈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면서.

“몸 상태는 좀 어때요?”

“이삼 일 정도 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곧바로 메프람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일주일 정도면 도착하겠지요.”

“뭐, 우리야 좋지만.”

당초 같은 방향까지만 동행하다가 헤어질 생각이었다. 지오르가 아예 메프람으로 직행하겠다고 하니 오히려 좋다.

넉넉잡아 사흘을 휴식하고 세 사람은 타렌을 떠났다.

“다시 생각해도 그날 내가 죽을 뻔했구나.”

덱스는 무무카와 첫 만남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수인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웨어울프라면 여러 수인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다.

아무리 실수였다지만 그런 무무카에게 종족 차별적인 반응을 했다니!

“이제 알겠냐? 삼도천 건너는 걸 내가 멱살 잡고 살려 준 거다 이 말이야.”

“으으으….”

“알았으면 앞으로 은인으로 모셔라.”

“근데 레오 너도 무무카 덕에 살아 온 거 아냐? 자기도 운 좋게 풀린 주제에?”

“원래 인생은 운발이야, 인마.”

“쳇, 대현자 납셨네.”

덱스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애초에 이런 반응인 이유는 레오가 사실을 각색해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지오르의 돈을 받아 내러 갔는데 운 좋게 무무카가 등장해서 상회를 박살 내 주었다는 내용으로.`

베론의 손가락을 자른 것을 포함해서 직접 칼질한 부분은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알맹이가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인 자신과 달리 덱스는 이제 막 고향에서 나온 열다섯 소년에 불과했다. 앞으로 싫어도 세상의 더러운 꼴을 보게 된다. 친구로서 굳이 그런 경험을 일찍부터 시키고 싶진 않았다.

이후의 여정은 순조로웠고.

일주일 후, 세 사람은 무사히 제국의 수도 메프람에 도달했다.

“드디어 왔구나, 수도에.”

“우와아아…!”

멀리서부터 보이는 성의 전경부터 덱스는 계속 감탄사를 뱉었다.

소도시 타렌도 그에게 충분히 놀라웠지만, 메프람의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성 밖에 펼쳐진 너른 밀밭은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수많은 가옥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성벽은 고개가 위로 꺾일 정도로 높았으며, 도르래를 걸어야 여닫을 수 있는 성문도 타렌보다 몇 배는 크고 무거워 보였다.

외성을 통과하자 또 하나의 성문이 등장했다. 안쪽 성문을 잇는 도개교 아래 해자에는 수심이 가늠되지 않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 좀 다물어. 촌놈 티 내지 말고.”

“이걸 보고 안 놀란다고? 네가 이상한 거 아냐? 아저씨, 안 그래요?”

“하하하, 자그마치 제국의 수도이니까요. 제가 괜히 뿌듯하군요.”

“어휴, 촌놈 냄새. 이따가 알은체하지 마라. 쪽팔리니까.”

“여태 같이 자랐으면서 뭐라는 거야.”

여느 때의 만담 같은 다툼에 지오르는 빙긋 미소 지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제 나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다.

“메프람에 도착했으니 두 분과의 여정도 이제 끝이군요. 정말 아쉽습니다.”

“또 만날 날이 있겠죠. 저희도 한동안 메프람에 머물 테니까요?”

“물론 아카데미에 합격했을 경우지만요.”

“두 분의 실력이라면 합격하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샌드 웜을 상대한 광경뿐만이 아니었다. 여정 동안 지오르는 두 사람의 대련을 간간이 참관할 수 있었다.

숙련된 전투 마법사 같은 덱스의 실력도 놀라웠지만, 그 마법을 검으로 베면서 상대하는 레오의 기술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마법을 부수는 참격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레오가 보여 준 모습이 그것과 다르다는 것은 직감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실례라는 것도 잊고 직접 묻기도 했다.

[그거요? 저놈 마법이 형편없어서 되는 건데요?]

[지금 뭐라고 그랬냐? 한 판 더 붙어!]

지오르는 자신의 기술에 대해 밝히고 싶지 않다는 레오의 뜻을 이해하고 더 캐묻지 않았다.

비록 상인의 눈이지만 두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재능과 실력이 훤히 보였다. 그런 둘을 아카데미에서 놓칠 리 없다.

“시험까지 이 주일 정도 남으셨다고요? 그동안 저희 집에서 머무르시는 건 어떠십니까?”

“오! 그래도 돼요?”

“물론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 분과 더 연을 쌓고 싶은 욕심이랄까요.”

“하하하, 아저씨답네요. 좋아요, 그 거래 받겠습니다.”

레오는 흔쾌히 수락했다.

상인이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속내를 감추고 은혜를 베푸는 척하기보다 차라리 저렇게 말해 주는 것이 호의를 받는 입장에서도 마음 편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