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17화 (17/127)

17. 입학시험 (6)

오전의 1차 시험이 끝나고.

레오와 무무카는 갈림길에서 다시 덱스와 합류했다.

“어이, 마법사. 시험 어땠냐?”

“말해 뭐 해. 간단했지. 그런데 그 검은 뭐야? 못 보던 건데?”

“하나 주웠다.”

“흐음… 누구 두들겨 패고 빼앗은 건 아니지? 하긴, 아무리 너라도 그건 아니겠지. 하핫.”

아니 두들겨 패고 빼앗은 거 맞는데.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은 귀찮았던 레오는 그냥 하하하 웃고 말았다.

“식당에서 점심을 공짜로 준다는 것 같던데.”

“음, 저쪽인 것 같군.”

역시 황립 아카데미.

시험 치러 온 응시생에게도 점심 식사 정도는 화끈하게 서비스하는구나.

과연 무무카가 가리킨 방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아카데미의 구내식당.

도착한 식당 내부 광경에 셋은 또다시 입을 벌렸다.

“와오….”

“내가 상상했던 귀족들의 파티장이 있었는데, 이 식당이 그것보다 호화로운 것 같다.”

덱스가 중얼거렸다.

그건 귀족 파티장을 실제로 구경한 적 있는 레오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높은 천장 아래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사방으로 빛을 반사했다.

넓은 간격으로 자리한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의자도 한두 푼 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비싸 보이는 예술품들이 벽을 따라 장식되어 있었고, 바닥도 반질반질하게 광이 나는 대리석이었다.

게다가 음식은 뷔페식.

육류, 해산물, 곡류, 채소를 메인으로 한 갖가지 요리에 과일과 디저트까지. 구역별로 갖가지 요리가 줄지었는데 얼추 백 종류는 넘는 것 같았다.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공짜로?”

덱스는 식판 가득 음식을 쌓아 올리고도 아쉬운 표정을 했다. 레오는 고급 요리를 골라 담았고, 무무카는 고기 위주로 식판을 채웠다.

“적당히 먹는 게 좋을걸. 너희도 오후에 대련 있다며.”

“걱정 마. 내가 싹 조져 버릴 수 있으니까. 아까 보니까 다들 별거 없어 보이더라고.”

입 안에 음식을 한가득 넣고 대답하는 덱스.

그 뒤에 여자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그 말, 진심인가요?”

낯선 음성.

식판만 바라보던 덱스가 포크를 멈췄다. 레오와 무무카의 시선도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은발의 소녀가 도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3황녀?’

레오는 회귀 전의 기억으로 소녀의 정체를 추측했다.

마법 학부에 3황녀가 응시한다는 소문은 전사 학부에도 파다했고, 애초에 저 밝은 은발 머리칼은 제국에서 매우 희귀한 색이다. 황제의 자식들 중 왕비와 꼭 같은 밝은 은발을 가진 이는 3황녀뿐이라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

하지만 그 3황녀가 왜 우리에게 말을 걸겠는가?

3황녀일 리가 없다. 그저 우연의 우연으로 머리 색이 비슷한….

“유리아 드메이르 폰 아슐렌입니다. 아무래도 방금 발언은 신경이 쓰이네요.”

맞네, 3황녀!

레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좆됐다는 신호가 머릿속을 데엥데엥 울린다.

회귀 전후 인생을 다 합쳐도 황족과 말을 섞어 본 적 없다. 황족을 먼발치에서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런 타이밍에 이런 식으로 황족과 엮이다니…!

아슐렌이라는 성을 들은 무무카도 움찔했다.

적어도 제국에 황족의 성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유리아를 쳐다보더니 몇 차례 눈을 꿈뻑거리는 덱스.

꿀꺽- 먹던 것을 삼키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너 1번으로 시험 본 애구나? 아! 혹시 같이 밥 먹을 친구 없어서 그래?”

“……?”

황녀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확대된 레오의 동공이 사방으로 떨었고, 무무카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는 직각으로 휘어 버렸다.

“여기 비었는데? 앉든가.”

“…네?”

있었다.

황족의 성을 모르는 놈이.

‘이 미친놈이…!’

황녀에게 쏟아 내는 거침 없는 언행.

레오는 정신이 멍해졌다.

일단 녀석에게 오늘 아침 말해 두긴 했다.

아카데미 생도들은 신분과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고. 오늘 시험 치러 온 녀석들도 최소한 부지 내에서는 같은 적용을 받을 거라고. 그러니 괜히 귀족한테 쫄 필요 없다고.

당장 자신도 오전에 남작가 아들내미를 두들겨 패지 않았는가. 하지만 거기에는 그가 저 멀리 북쪽 영지의 귀족이라는 이유도 깔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을 건드릴 자신은 없다.

“나는 덱스야. 너는 좀 하더라? 솔직히 다른 놈들 하는 거 보는 동안 눈이 썩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거기 계속 서 있을 거야? 다리 안 아프냐?”

덱스가 숨도 쉬지도 많고 말을 쏟아 내자 유리아의 도자기 같던 얼굴에도 당혹감이 퍼져 나갔다.

잠시 망설인 그녀는 결국 덱스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셋이 식사하던 테이블의 바로 옆자리였다.

‘저 애는 내가 황녀라는 걸 모르는 거구나.’

유리아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홍차를 조금 머금으니 당혹스러웠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됐다.

지금은 모두가 같은 응시생 신분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소년의 언행에 놀라기는 했지만 불쾌하진 않다.

그보다 이렇게까지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 준 사람이 처음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세실이 같이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한창 스승님과 이야기 중이겠지. 그러고 보니 세실에게도 편하게 대하라고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것 같다.

다시 한 모금 홍차를 마셨다.

“방금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 말을 했었죠?”

“아, 싹 다 조진다고 한 거?”

‘조진다?’

유리아는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다. 그런데 왠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이상하게 입에 착착 붙는 느낌이다.

“…그래요. 그, 조진다-라는 말.”

유리아의 대꾸에 레오는 고개를 떨군 채로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거 분명히 무슨 말인지 모르고 쓰는 것 같은데….

반면 덱스는 눈동자를 한 바퀴 크게 굴렸다. 그녀와 대련을 상상해 본 것이다.

“음, 솔직히 말하면 너 빼고는 죄다 조질 자신 있어. 그런데 너랑 붙으면….”

“붙으면?”

“글쎄,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덱스가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보였다.

이길 수 있다고도 안 했지만 질 것 같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 대답에 유리아는 왠지 모르게 즐거워졌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열셋에 세 개의 고리를 엮으며 그 찬사는 한층 강해졌다. 그럴수록 외로워졌다.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또래 친구도, 라이벌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세실에게도 미안하다. 그녀를 라이벌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만큼 실력 차이가 컸다.

어쩔 수 없다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이제 제국 역사상 최연소로 4서클에 올랐으니 외로움은 더욱 심해지리라. 그 또한 당연히 받아들이려 했다.

덱스의 마법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라면 할 수 있었을까.’

그는 파이어 애로우 다섯 개를 거의 동시에 발동해 냈다. 그리고 완벽하게 제어했다.

고위 서클이라고 해서 하위 서클 마법을 모두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마법을 완벽하게 제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노력이든, 재능이든 간에.

연습한다면 해낼 수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해 보라면?

…자신할 수 없다.

“잘 알았어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럼 오후를 기대할게요.”

“응?”

빙긋 웃은 유리아는 거의 입도 대지 않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와 무무카는 멀어지는 유리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덱스는 태연히 식사를 이어 갔다.

“후아-!”

레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식당은 여전히 평화롭다. 최소한 근위 기사가 들이닥칠 것 같지는 않다.

황족 모독죄로 즉결심판을 받는 일만큼은 피한 것 같다는 의미였다.

“흐흐흐, 어때?”

그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덱스가 바보처럼 웃었다.

“…뭐가?”

“겁나 예쁘지? 아까 시험장에서 보는데, 와…! 나 살면서 저렇게 예쁜 애는 처음 봤다.”

“하아아아….”

단전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

레오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방금 나 어땠냐? 남자의 박력! 마지막까지 무심하게!”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레오.

내 친구가 이렇게 멍청했던가? 아닌데, 멍청한 놈이 마법에 재능이 있을 리가 없잖아. 머리는 똑똑한데 눈치만 더럽게 없는, 뭐 그런 건가?

“야, 하나만 물어보자. 너 제국명이 뭔지는 알지?”

“제국? 아슐렌 제국?”

“제국이 그거 하나밖에 더 있냐? 그리고 방금 너랑 이야기한 그… 그분 이름은 기억나고?”

레오는 좌우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직 모르는 일이다. 황족 모독죄에 시효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까.

당장은 아니어도 수틀리면 잡혀갈 수 있다는 거다.

‘그러니 잡혀도 너만 잡히자 친구야, 나는 중요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이름? 유리아 음… 더 길었는데? 오! 마지막에 성이 아슐렌이었네?”

“그래서? 뭐 느끼는 건 없고?”

“성이 나라 이름하고 같네. 오… 졸라 멋지다.”

“…병신 새끼.”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러냐….”

혼난 강아지처럼 시무룩해진 덱스.

“닥치고 처먹기나 해.”

입을 삐죽거리더니 마저 음식을 쑤셔 넣기 시작한다.

그걸 바라보던 레오는 테이블이 꺼질 듯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아 3황녀는….’

유리아 3황녀에 대한 기억은 꽤 선명히 남아 있다.

그가 용병으로 전장을 전전하는 동안 3황녀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였더라.

워낙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전쟁 중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보르트 왕국과 전쟁이 발발하고 몇 년 후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암살당했다.

그 때문에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어지고 책임자들이 줄줄이 문책당했다는 소문은 제국 전체에 퍼졌으니까.

이후 암살자가 잡혀 처형됐지만 배후는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전쟁이 코 앞이다. 게다가 황녀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이라면 대략 4년 이내.’

제국 100주년 기념식의 다음 날.

보르트 왕국이 기습 침공하면서 10년 전쟁이 시작된다. 황녀 암살은 분명 그 뒤에 일어났다.

그리고 올해는 제국력 99년.

전쟁까지 몇 달 남지 않았다.

다만 지금은 전쟁도, 황녀 암살 건도 섣부르게 먼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정보가 부족하고 운신의 폭이 좁다.

‘어디부터 풀어야 하나….’

아직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 * *

오후 2차 시험 시간.

“끄응, 아직도 좀 부대끼네.”

마기쿠스관에 돌아온 덱스는 자리에 걸터앉아 부른 배를 두드렸다.

맛있는 음식, 처음 보는 음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잔뜩 먹었다. 이제야 배가 조금 꺼져서 몸을 움직일 만했다.

감독관이 곧 빈 자리를 채우며 2차 시험을 안내했다.

“1차 시험 성적의 역순으로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진행됩니다. 응시생의 안전을 위해 마법 충격을 흡수하는 아티팩트를 제공합니다. 아티팩트의 충격량이 먼저 가득 채워지는 쪽이 패배입니다.”

아티팩트로 응시생의 신체 보호와 대미지 게이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뜻.

본래 용도는 마법 충격을 대신 받아 주는 방어용 아티팩트였지만, 한계 충격량을 조정하여 생산 단가를 낮추면서 마법 대련용 아티팩트로 개발되었다고 했다.

‘별 신기한 게 다 있네.’

덱스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휙 둘러봤다.

누가 상대가 될까…. 그러다 방금 들은 설명에 생각이 닿았다.

‘시험 성적의 역순으로 짝이 된다는 건, 마지막 시합은 1차 시험의 수석과 차석의 대련이라는 뜻이구나.’

1차 시험의 수석과 차석.

그제야 오후를 기대하겠다던 소녀의 말이 이해됐다.

둘 중 누가 수석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1차 시험의 수석과 차석을 차지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덱스의 눈이 유리아가 앉은 곳을 향했다.

“기대해라.”

제대로 눌러 줄 생각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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