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입학시험 (8)
‘역시 이 정도 꼼수는 안 통하나.’
덱스는 혀를 찼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했으나 간파당했다.
절반 정도만 거리를 좁힌 후 거리를 유지했다.
자신보다 고위 서클인 유리아가 어떤 마법을 사용할지 모른다. 섣불리 더 다가서는 것은 위험했다.
“윈드 커터!”
훅- 일어나는 미풍.
재빨리 실드를 펼쳤지만 뒤이어 강타한 충격에 곧바로 부서졌다.
덱스의 몸이 뒤로 튕겨 몇 바퀴 굴렀다.
전사의 대도를 몸으로 받아 낸 듯한 충격이었다.
‘젠장, 실드는 안 되겠군.’
바람 계열의 마법은 특히 까다롭다.
보이지 않으니 대응은커녕 피하기도 힘들기 때문.
조금 더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목걸이의 30%가 붉게 변한 것이 언뜻 보였다.
“윈드 커터!”
유효타에 성공한 유리아가 다시 한번 같은 마법을 영창했다.
동시에 덱스도 빠르게 술식을 마쳤다.
같은 수법도 또 당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게 하면 된다.
“아쿠아!”
두 사람 사이에 물 덩이가 나타난다.
방패처럼 최대한 넓게 펼쳐진 형태라는 것이 아까와 다르다.
촤악-!
동시에 바람의 칼날이 물을 가로로 베어 내며 형태를 드러냈다.
‘저긴가!’
덱스가 몸을 날려 옆으로 구른다.
아까는 보이지 않아 대응 못했을 뿐, 형태와 궤적만 확인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파이어볼.”
화르륵-!
이어지는 유리아의 연격.
머리통만 한 불덩이다.
덱스로서는 처음 보는 화염 마법이지만 파이어 애로우보다 윗줄이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보는 순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감지했다.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아쿠아!”
다시 한번 물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지금 투사 마법으로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은 파이어 애로우 하나뿐.
나머지는 1서클 위계의 원소 생성에 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써먹기 나름이겠지!’
파이어볼의 진행 방향을 물 덩어리가 연이어 생성되며 가로막는다.
단순한 물 덩어리 몇 개가 3서클 위계의 파이어볼의 위력을 감쇄시키기에 역부족이다.
파이어볼의 화력에 물 덩어리는 순식간에 수증기로 기화되어 사라졌다.
다량의 수증기가 폭발하듯 연무장을 메웠고, 유리아는 덱스를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퍼엉-!
목표를 잃은 파이어볼이 연무장 주변을 감싼 실드에 맞아 폭발했다.
폭발과 함께 발생한 열기가 수증기 가득한 연무장에 퍼져간다. 축축한 공기가 금방 뜨겁게 달아올랐다.
“크흡…!”
몸을 굴려 파이어볼을 피해 낸 덱스가 고통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가까이서 폭발한 파이어볼의 열기에 호흡이 괴롭다.
실드를 펼쳤음에도 아티팩트의 푸른빛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젠장, 직격당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부득 이를 갈았다.
지금 수준의 실드로는 3서클 마법을 막아 낼 수 없다.
이대로 수세를 이어 가면 필패.
그렇다면 승부를 걸어야지.
수증기 때문에 시야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유리아를 찾았다.
이리저리 분주한 유리아의 발이 보인다.
‘디그!’
“흣-!”
다시 한번 흔들리며 균형을 잃은 유리아.
발밑을 공격당한 것이 벌써 두 번째다.
‘같은 수법에 안 당해!’
발밑과 시야를 함께 노렸던 것이 떠올랐기에.
유리아는 즉시 눈을 감으며 반구 형태의 실드를 형성했다. 마력 소모는 많겠지만 어디에서 공격해 와도 대응할 수 있다.
“라이트는?”
하지만 예상했던 후속 마법이 없다.
질끈 감은 눈을 뜨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2초 내외.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덱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아앗!”
덱스의 우악스러운 손이 실드 안쪽을 파고든다.
실드는 물리력에 취약하다. 강한 물리 방벽 기능도 가진 배리어는 더 많은 마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이런 마법사 간의 싸움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실드를 뚫고 들어온 손이 그녀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황한 유리아의 동공이 흔들렸고.
이어서 그녀의 시야가 빙글 돌았다.
퍼엉-!
유리아의 몸이 허공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연무장 바닥에 떨어졌다.
“꺄악! 황녀님!”
“아아악! 저 미친놈이!”
황녀가 땅바닥에 메쳐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
옅어진 수증기 너머의 충격적인 광경에 응시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무표정하게 대련을 보고 있던 세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끝이다.”
덱스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모처럼 만든 찬스로 승부를 결정짓겠다는 생각뿐.
높게 쳐든 그의 주먹에 화르륵 불꽃이 일었다.
“먹어라! 불주…!”
금방이라도 내려칠 것 같던 주먹이 공중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덱스.
주먹을 감싸던 불꽃도 스스륵 사라진 후였다.
연무장 바닥에 쓰러진 황녀.
입을 벌린 감독관과 응시생들.
덱스의 손가락이 천천히 황녀를 가리켰다.
“얘, 기절한 것 같은데요?”
아주 짧은 정적.
“꺄아아악! 황녀님!”
금발의 소녀가 연무장 중앙으로 달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감독관도 양팔을 휘저으며 달려 나왔다.
“대련 중지!”
대련이 끝났다.
* * *
텁텁한 흙먼지 냄새.
귓가에서 아스라이 울리는 소음.
‘나 분명히 대련 중이었는데?’
유리아는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실드가 해제됐고 멱살이 잡혔다. 그리고 체술로 던져졌다.
‘졌구나.’
일련의 상황이 그려졌다.
바닥에 부딪혔는지 뒤통수가 얼얼하다. 아티팩트 덕에 부상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충격은 남는 모양이다.
“황녀님! 괜찮으세요?”
옆에서 들리는 급박하고도 익숙한 목소리.
세실이다.
“에? 황녀?”
다만 그 단어에 반응한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방금 전 황녀의 멱살을 잡아 넘긴 덱스였다.
그에게 세실이 빽 소리를 질렀다.
“무엄하다! 감히 황녀님 몸에 손을 대다니!”
“에? 큽, 카학! 그, 그러니까 황녀님이요? 누가요? 얘…가 아니고 이분이요?”
사레가 들러 쿨럭거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덱스.
여태껏 격하게 움직이느라 발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황녀라니? 황제의 딸이라는 말이잖아. 아아… 그래서 성이 아슐렌이었던 거야?’
식당에서 레오가 했던 이상한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느낀 위화감들이 모두 연결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황녀를 쥐어 패려고 했다는 거…?’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풀어졌다. 가지런히 편 양손이 공손하게 배꼽 아래로 모아졌다.
“황녀님! 정신 차리세요!”
연무장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세실이 조심스럽게 유리아의 머리를 받쳐 들었다.
덱스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 본다.
“저기, 나는 그냥 대련을….”
“닥쳐라! 즉시 참해도 모자라지 않을…!”
“세실, 난 괜찮아.”
유리아가 눈을 떴다.
눈으로 불길을 내뿜던 세실이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황녀님! 정신이 드셨나요? 흐어어어엉-!”
“난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반쯤 몸을 일으킨 유리아가 대성통곡하는 세실을 달랜다.
그 앞에서 어정쩡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덱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조지긴, 내 인생을 조져 버렸네.”
“파핫!”
그 한마디에 유리아의 웃음이 터졌다.
꼴이 말이 아니다. 젖은 머리칼은 미역처럼 얼굴에 달라붙었고 옷은 덕지덕지 진흙투성이다.
그런데도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굉장히 가슴이 후련해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세실, 나 좀 일으켜 줄래?”
세실의 손을 잡고 일어선 유리아.
“유리아! 괜찮은 게냐!”
그제야 부리나케 달려온 학부장 메퀸토와 교수들.
유리아의 상태부터 살폈다. 아티팩트가 있으니 괜찮을 것을 알면서도 방금 목도한 광경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터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스승님. 참, 여기에서는 학부장님으로 불러야 할까요?”
“아무려면 어떠냐.”
“황녀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다른 교수들도 유리아를 둘러싸고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유리아가 물었다.
“응시생도 아카데미 생도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나요?”
“마, 맞습니다.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저를 황녀가 아닌 생도로 대해 주시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아카데미 생도에게 신분은 무의미하니까요.”
“하지만 어찌 감히 황녀님께….”
“아카데미 역사상 황족이 입학시험을 치른 것은 제가 처음이지요. 저는 아카데미의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더럽힌 황족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군요.”
“…….”
유리아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배움에 귀천이 없다는 아카데미의 뜻은 이미 꺾여 버린 걸까요?”
그 말대로였다.
공식적으로는 신분과 무관한 평등한 배움을 표방했으나 실제로 완전한 평등은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서로의 가문으로 급을 나누었고, 일부 교수진들은 자신의 출세나 연구비 보조를 위해 특정 가문을 비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마법 학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네 말이 맞다, 유리아.”
“…학부장님.”
“황족도, 귀족도, 평민도. 이곳에서는 모두 같은 학생이다. 네 말이 맞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학부장 메퀸토의 말에 교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황녀님!”
“나는 지금까지 세실을 친구로 생각했어. 황궁에서야 예법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나를 평범한 친구로 대해 줬으면 해. 그래 줄 수 있지?”
“황녀님, 그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젖는 유리아.
“…유, 유리아 님.”
“아직 마음에 쏙 들진 않지만 훨씬 낫네.”
유리아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메퀸토를 비롯해 황녀의 안위를 확인한 감독관들도 한결 표정이 밝아졌다.
이것으로 공식적인 시험이 모두 끝난 셈.
“잠깐 내 방으로 오겠느냐? 벽을 허문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그럴게요.”
메퀸토의 뒤를 따르려던 유리아가 덱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덱스라고 했나요? 오늘 대련 재미있었어요.”
“아, 저기. 음….”
“그럼.”
고개만 까딱해도 저렇게 우아한 인사를 할 수 있구나.
어수선한 연무장에 홀로 남은 덱스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 산 건가?”
일단 목은 잘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