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클라인 반다이트 (2)
“지금부터 수석 결정전을 시작한다. 호명하는 이는 연무장 중앙으로 나오도록.”
수석 결정전.
연무장에 모인 이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오른다.
합격은 결정되었으니 편안하게 즐기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응시 번호 1번 클라인 반다이트, 208번 레오. 두 사람은 중앙으로.”
레오는 자신의 검을 들고 일어났다.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미래에 함께 싸울 동료들을 얻으러 아카데미에 들어왔는데, 오히려 커다란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으니까.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
머리를 털었다.
일단 지금은 클라인과 대련이 먼저다.
미래의 검성이 지금 어느 수준인지 확실하게 가늠해 볼 생각이다.
호명받은 클라인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걸어 나가는 상대의 등이 보였다.
‘레오라고 했지.’
클라인은 어릴 적부터 혹독하게 검을 휘둘렀다.
일찍이 그 재능을 인정받았고 아버지가 가진 검성의 칭호도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대륙 최강의 검사를 목표하는 그에게 아카데미의 입학 수석 같은 것은 작고도 당연한 트로피였다.
오러 소드를 구사하는 한 레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1차 시험에서 나무 인형을 박살 내는 레오의 검술은 폭풍을 연상케 했다. 오직 파괴력에 방점을 찍은 듯한 그의 검은 클라인의 흥미를 끌었다.
오러의 구현 방식도 마찬가지다. 오러 소드를 섬세하게 제어하며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클라인과 달리 레오의 오러 소드는 거칠고 강맹했다.
‘저자와 검을 섞어 보고 싶다.’
검을 잡은 이래, 처음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 * *
‘이 자식은 눈이 또 왜 이래?’
클라인을 마주한 레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주 보는 녀석의 눈빛이 낯설다.
1차 시험도, 2차 시험도 무덤덤하게 치렀던 녀석이 지금은 눈에서 불꽃을 튀긴다.
적의가 섞였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열렬한 구애의 눈빛에 가깝다.
“진검을 사용하는 만큼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격은 금한다. 상대가 전투 불능이 되면 대련은 중지다. 알아들었나?”
“예.”
“예.”
“그러면 수석 결정전을 시작한다!”
이오페의 신호.
클라인의 검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두 개의 검이 강렬하게 교차하며 푸른 불꽃과 충격음이 연무장을 울렸다.
두 오러 소드의 충돌 여파가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 나갔다.
“휘유~ 시작부터 전력이야?”
“그래, 그러니 모든 것을 보여봐라.”
“사내자식한테 뭘 보여 주는 취미는 없는데?”
검을 밀어낸 레오는 제 자리에서 반 바퀴 회전하며 연속으로 검격을 쏘아 냈다.
1차 시험에서 보인 풍참(風斬)을 조금 변형한 기술.
카가강-!
재빠르게 막아 낸 클라인.
그의 눈동자에 다시 한번 푸른 불꽃이 튄다.
“어디에서 익힌 검술이지?”
“어디서 남의 밑천을 빼 먹으려고. 이빨 그만 털고 덤비기나 해.”
“그래, 궁금한 건 나중에 묻지.”
클라인의 눈빛이 매섭게 바뀐다.
날카로운 찌르기에 레오는 황급히 몸을 비틀었다.
횡으로 다시 종으로 클라인의 매서운 검세가 이어진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빠른 연격.
레오는 이를 악물고 클라인의 검을 받고 쳐 냈다.
캉! 카강!
오러 소드의 푸른 빛이 어지러이 허공에 흩어진다.
응시생의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으니 산발적으로 울리는 충격음만이 그 충돌을 짐작케 했다.
“보는 즐거움이 있군.”
“웬만한 기사 수준의 대련 아닙니까?”
카르파를 비롯한 교수진들은 두 사람의 대련을 흐뭇하게 관전했다.
시험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클라인의 실력도 놀랍지만 그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레오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회전력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기술이라, 대인전보다는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더 적합해 보이는군.”
“확실히 그렇습니다. 변칙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실전성을 갖추었군요.”
“그에 반해 클라인 군은 매우 정석적인 움직임입니다. 검로 또한 살아 있는 교본 같군요. 그간 쏟아 온 노력이 보입니다.”
화기애애한 단상 위 교수진.
하지만 생도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저런 놈들하고 내가 대련했던 건가….”
허공을 수놓는 검격과 오러 소드의 충돌.
동기가 될 이들 대부분 깊은 자괴감 속에 그것을 관전했다.
그들 또한 어린 나이에 오러 유저에 이른 이들이다.
십 대에 오러 유저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세울 만한 재능이지만, 멀찍이 앞서가는 두 천재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반대로 향상심을 불태우는 이도 있었으니.
마이어 가문의 패트릭이 그러했다.
‘나도 못 하리라는 법은 없어.’
집 안에서도 언제나 장남인 형의 그늘에 가려진 패트릭이다.
그럼에도 창을 놓지 않았다. 끈기와 노력도 재능이라면 그 또한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황립 아카데미를 훌륭히 졸업해 아버지에게 인정받겠다는 목표.
그것이 지금 새롭게 바뀌었다.
언젠가 저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졌다.
카가강-!
두 사람의 검이 다시 한번 거칠게 얽혔다가 떨어진다.
벌써 스무 합 넘는 공방이 오갔다.
“후우, 후우-!”
클라인은 거친 호흡을 갈무리하며 레오를 응시했다.
초반부터 전력을 내서 빠르게 승부를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작전을 바꿔 접근했다. 차근차근 패턴을 유도하고 허를 찌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변칙적인 대응으로 기회를 만든 쪽은 오히려 상대였다.
‘내 움직임을 읽는 건가? 어떻게?’
클라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레오의 방어와 대응이 점차 빨라지고 있다.
마치 이쪽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움직임이다. 검을 섞을수록 점점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빠르게 끝내야 해.’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클라인의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하아-!”
힘들기는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마음먹고 시도한 변칙 공격까지 오직 육체 능력만으로 무위로 돌리다니. 과연 열넷의 클라인에게 붙은 제국의 미래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다.
오러 소드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전투 센스와 반응 속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게 끌면 안 돼.’
오러안으로 보이는 클라인의 오러홀은 여전히 힘차게 요동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쪽은 곧 바닥이다.
상대적으로 오러를 쌓아 온 시간 자체가 달랐기 때문.
그러니 빠르게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흡-!”
레오가 먼저 돌진하며 거리를 좁혔다.
다시 한번 몸을 비틀어 회전력을 만들어 내는 모습.
그걸 본 클라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비슷한 공격을 이미 한 번 경험한 바 있다. 그러니 여기서 승부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카가가각-!
검격을 받아 내는 클라인
‘받아 내는 척하면서 흘리고 허를 찌른다!’
하지만 레오는 오러안을 통해 그의 의도를 읽고 있었다.
‘하체의 오러가 줄었다.’
절대적인 오러의 양은 적을지 몰라도 오러안의 활용만큼은 한층 능숙해졌다.
정면으로 받아 낼 생각이라면 하체를 더욱 단단히 하려고 할 터.
전심전력을 다할 것 같았던 초격에서 레오는 찰나의 순간 힘을 죽였다.
클라인이 미처 검을 흘리기 직전, 한발 앞서 변칙을 준다.
카강-!
클라인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대련 내내 큰 변화 없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페이크다, 자식아!”
레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치던 검이 뱀처럼 아래로 감기며 원을 그렸다. 역방향을 대비하고 있던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힘의 방향 변화에 검을 놓쳤다.
하나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툭.
“아…!”
클라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단 한 번의 수읽기에서 완패했다. 검까지 놓쳤다.
완벽한 패배.
투지에 불타던 눈동자가 허망하게 그 빛을 잃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오가 와락 인상을 썼다.
“야.”
터벅.
다가서는 발걸음.
“너 왜 다 끝났다는 얼굴을 하고 있냐?”
불쑥 짜증이 일었다.
그래, 검을 놓쳤지. 그런데 그게 뭐.
무기를 놓쳤다고 패배의 눈빛을 하는 그 얼굴이 성질을 긁었다.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던 검성 클라인의 모습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묻는 얼굴을 보자 뚜껑이 열렸다.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클라인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퍽-!
짧은 정적.
“클라인 공자를 쳤어!”
“무기가 없는 자를 공격하다니, 예의도 모르는 놈!”
응시생들이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보듬는 것이 승자의 미덕일 터.
그런데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다니, 예의도 상식도 모르는 놈이다!
“이게…!”
매운 주먹에 정신이 번쩍 난 클라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퍽! 소리와 함께 레오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드루와, 새꺄!”
“이 자식이!”
서로 멱살을 잡고 사이좋게 주먹이 오간다.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졌다. 오러 소드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수 싸움을 하던 수준 높은 대련이 끝나고 개싸움이 시작됐다.
“대련 중지이이이-!”
이오페의 외침이 울리고서야 두 사람의 주먹질이 멈췄다.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주먹다짐으로 끝난 수석 결정전이었다.
“으음….”
카르파가 뚜벅뚜벅 단상에서 내려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씩씩거리며 여전히 거친 호흡을 하는 두 사람.
둘 다 코피가 터져 얼굴이 엉망이다. 그새 모래바닥에 얼마나 굴렀는지 옷은 흙투성이에 머리도 산발이다.
“누가 설명할 텐가?”
카르파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누구든 좋으니 말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죄송합니다, 학부장님. 아카데미의 전통을 더럽힌 벌, 달게 받겠습니다.”
클라인이 고개를 숙였다.
한 대 얻어맞으니 저도 모르게 같이 주먹질을 해 버렸다.
머리가 식으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존경해 온 슈멜린 백작의 앞에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카르파의 시선이 레오에게 향했다.
“자네도 할 말이 있나?”
“예, 많네요.”
레오는 모래가 들어가 껄끄러운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옆으로 퉤 뱉었다.
붉은 피가 섞인 침이 흙바닥에 떨어졌다.
“저놈의 썩은 근성이 마음에 안 들어서 교육 좀 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카르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클라인도 발끈해서 레오를 노려본다.
“그게 합당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나?”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이 아카데미는 뭐 하는 곳입니까? 검을 쓰든, 창을 쓰든, 주먹을 쓰든, 강해지고자 하는 곳 아닙니까? 저는 친목을 빙자해서 대련 한 판 하고 하하하 웃으며 차 한잔 나눌 생각으로 검을 배우지 않았습니다만.”
말을 하면 할수록 검은 마물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던 전장. 그 안에는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지휘관도 섞여 있었다.
무능한 지휘관 한 명의 잘못된 판단으로 수백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정작 그네들은 병사의 목숨보다 고위 귀족과 사교에만 관심 있었다.
“나는 적을 베기 위해,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검을 쥐었습니다. 검이 없으면 주먹질을 할 것이고, 주먹이 없으면 이빨로 물어뜯을 겁니다.”
고개를 돌려 클라인의 눈을 마주 응시했다.
전장에는 규칙이 없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동료가 죽어 나간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검 한 번 놓쳤다고 세상 끝난 듯 포기해? 그 꼬라지가, 씨발 그 썩은 근성이 마음에 안 든다 이겁니다!”
푸후-! 너무 흥분했다. 길게 숨을 내뿜었다.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후우- 욕한 건 죄송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대련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상대가 전투 불능이 되면 중단이라고. 양손이 멀쩡한데 어떻게 전투 불능입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
레오는 이오페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카르파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면 너희가 빨리 중단시키든가. 팔다리 멀쩡하니까 난 계속 싸운 거야. 그나마 대련이니까 칼 버리고 맨손으로 한 건데?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었다.
“잘 알았다.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가도록.”
굳은 얼굴로 몸을 돌린 카르파.
단상으로 돌아가 이오페에게 몇 마디 말을 전하고는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내일 아침, 정문에 합격자 발표가 날 예정입니다. 이제 모두 돌아가시면 됩니다.”
이오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시험 종료를 알렸다.
공식적인 해산 통보에 다들 쭈뼛거리며 흩어졌고, 클라인도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레오를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무무카가 레오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짚었다.
“왜 그렇게 흥분했나. 평소답지 않군.”
“…그러게.”
머리에 쏠린 피가 좀 빠졌는지 레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원하게 주먹질이라도 하고 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괜히 어린 클라인에게 화풀이한 것 같아 영 찜찜하다.
“새끼, 주먹질은 꽤 하네.”
레오는 다시 한번 퉤 침을 뱉었다.
맞은 얼굴이 꽤 욱신거렸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