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22화 (22/127)

22. 클라인 반다이트 (3)

“크크큭… 크하하하핫!”

빠른 걸음으로 학부장실에 도착한 카르파.

방문을 닫자마자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연무장에서부터 웃음을 참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검 한 번 놓쳤다고 세상 끝난 듯 포기해? 그 꼬라지가, 씨발, 그 썩은 근성이 마음에 안 든다 이겁니다!]

그 녀석의 말이 계속에서 귓가를 맴돈다.

“신입생이 그런 말을 뱉을 줄이야! 하하하핫!”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 겨우 30여 년 전. 그럼에도 지금 제국은 평화에 찌들어 있다.

제국을 위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설립된 황립 아카데미의 목적도 서서히 변질됐다. 특히 최근에는 귀족 자제들이 사교의 목적으로 입학하려는 경향이 눈에 띄게 커졌다.

그런 와중 레오의 그 한마디는 카르파를 가슴을 꽤나 시원하게 해 주었다.

“학부장님, 들어가겠습니다.”

이오페였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 보이나?”

“웃음소리가 복도까지 쩌렁쩌렁하던데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친구가 한 말에 대해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때 중단시키지 못한 제 책임도 있고요.”

“그것 말고 말일세.”

카르파는 선 채로 아무도 없는 연무장을 지긋이 내려다봤다.

이오페도 조용히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동안 잘못 생각했는지도….”

카르파는 조용히 읊조렸다.

젊은 시절 대륙 곳곳의 전장을 휘저었다.

제국이 안정을 찾고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국 근위기사단의 일원이 됐다. 명예로운 자리였다.

모두가 평화에 환호했으며 이대로 아슐렌 제국의 영광을 염원했다.

하지만 시간은 천천히 모든 것을 풍화시켰다.

열정이 가득했던 황제는 점차 늙고 쇠약해졌으며, 제국의 번영을 위해 열띤 토의를 벌이던 이들은 파벌을 만들고 제 이익을 탐했다.

황궁에서는 더러운 모략과 술수가 판을 쳤다.

그것이 혐오스러워 조금씩 뒷걸음질 친 것이 여기까지 왔다.

“적어도 나는 명예롭게 남아 있고자 했네. 하지만 더러운 것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고 해서 깨끗한 것은 아니지. 그저 눈을 돌리고 모르는 척하는 방관자였으니까.”

“학부장님.”

아카데미에서 후학을 기른다는 핑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하지만 정작 이 아카데미에서도 점점 그런 꼴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볼 생각이네.”

전사는 전사다워야 한다. 적어도 이 명제만큼은 확실하게 관철시켜야 함이 옳다.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언제나 학부장님과 뜻을 같이합니다.”

“자네는 아부를 참 못 하는구먼? 하핫!”

“확실히 그런 특기는 없는 것 같네요.”

카르파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이오페도 입가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 * *

“시험은 잘 봤어? 우아아…!”

레오 일행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간 샤를롯은 무무카를 올려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웨어울프를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무무카 정도의 덩치는 웨어울프 중에서도 흔치 않다.

“내 친구야. 둘이 인사 좀 해 봐라.”

“무무카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샤를롯! 귀, 귀 좀 만져 봐도 돼?”

무서워 울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샤를롯은 되려 눈을 반짝이며 되묻는다.

그것보다 귀를 만지고 싶다니, 이거 종족 차별적 발언 아닌가?

레오가 애매한 표정을 하는 사이 무무카는 흔쾌히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자세를 낮췄다.

샤를롯이 짧은 팔을 위로 쭉 뻗자 겨우 무무카의 귀에 손이 닿았다.

“으아아… 부드러워…!”

“큼, 간지럽다.”

“무무카도 나랑 친구 해 줄 거야?”

“아름다운 레이디의 친구라니. 이거 영광이다.”

“와아!”

양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하는 샤를롯.

“무무카 너 의외로 이빨 좀 턴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찍으니 무무카도 이를 보이며 씩 웃는다.

한없이 무뚝뚝해 보이지만 이럴 때 보면 천성은 정말 착한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 맞다! 그래서 시험은 어땠어? 레오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제 자리에서 방방 뛰며 기뻐하던 샤를롯이 다시 생각난 듯 표정을 바꿔 물었다.

“아, 전사 학부 대련은 빡세다고.”

레오는 슬쩍 부은 쪽 얼굴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입 안이 죄 터져서 욱신거린다. 무인이라 그런지 어린놈이 주먹도 맵다.

“수석 결정전을 치르며 얻은 영광의 상처라 할 수 있지.”

“어? 레오가 수석 결정전을? 혹시 상대는 클라인 공자였어?”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무무카의 설명에 다시금 눈이 커지는 샤를롯.

수석 결정전을 치렀다는 건 합격은 물론이고 두 손가락 안에 들었다는 뜻이다. 아버지도 레오의 실력이 굉장하다고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두들겨 맞고 졌어?”

“음, 내가 보기에는 레오가 이겼다. 둘 다 쌍코피가 터지긴 했지만 레오가 몇 대 더 때렸지.”

“에? 전사 학부 대련은 주먹질도 하는 거야? 의외이긴 하지만 레오가 수석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네?”

샤를롯이 입을 헤 벌린다.

스승님 옆에 붙어 있던 엑스트라가 알고 보니 실력자? 딱 그런 표정이다.

“이 꼬맹이 말본새 봐라, 가능성이 아니라 내가 수석이야. 내가 이 정도 남자라고.”

레오는 짐짓 가슴을 폈다.

이 꼬맹이는 좀 더 나의 대단함을 알 필요가 있다.

“그건 됐고, 덱스 스승님은?”

레오를 향한 샤를롯의 관심은 딱 거기까지다.

사실 얼굴의 상처가 없었다면 덱스의 결과부터 물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그 이야기를 못 들었네. 덱스, 이야기 좀 해 봐.”

무무카 뒤에 있던 덱스가 비척비척 걸어 나온다. 왠지 아침에 비해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내 대련 상대는 그, 음, 황녀님이었는데 말이야.”

“아? 3황녀하고 붙은 거야? 마법 학부는 그 3황녀가 유력한 수석 후보 아닌가?”

“설마! 스승님이 황녀님과 마지막 차례에 대련했어?”

“마, 맞아. 마지막에 붙긴 했지….”

“아아아! 역시 스승님이야! 그 대련이 마법 학부의 수석 결정전이나 마찬가지라구!”

샤를롯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 유명한 유리아 황녀님과 수석을 다투다니! 역시 스승님은 최고야!

“빨리 좀 말해 봐,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레오의 재촉에 덱스는 좌우 눈치를 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단어가 나열될수록 달아오른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 갔다.

양손을 모으고 기대에 찬 눈으로 경청하던 샤를롯의 얼굴색이 창백해졌고, 조용히 듣고 있던 무무카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이 레오의 입을 통해 나왔다.

“미친놈이네. 황녀님을 때려눕혀?”

“아, 아니야! 안 때렸다고! 눕히기만 하고 때리진 않았다고! 아니 눕혔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니고…!”

“닥쳐, 인마! 그 말이 더 위험하니까. 황족 모독죄로 즉결 처형당하고 싶냐?”

“아니야, 그게 아니야….”

레오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식당에서 황녀한테 동네 친구 대하듯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설마하니 대련에서 그런 일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장 자신도 백작가 아들내미와 주먹다짐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멍한 표정의 샤를롯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세 분, 용무는 다 끝나셨나요?”

“응?”

“…너 지금 선 긋는 거지? 이야, 서운하네. 누가 상인 집안 아니랄까 봐!”

덱스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레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샤를롯을 째려봤다.

스승님, 스승님 하면서 달라붙더니 황족 좀 때렸다고 바로 손절을 치려고 해? 아니 뭐 생각해 보면 충분히 손절을 칠 이유가 되긴 하는데…. 그래도 괘씸하잖아?

“흐에엥-! 아버님-!”

역정을 내는 레오.

결국 울음을 터트린 샤를롯.

“안 팼다고, 안 팼다고, 진짜로 안 팼다고!”

얼빠진 표정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덱스.

“난장판이군.”

조용히 보고 있던 무무카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레오 일행은 공식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아카데미로 향했다. 이번에도 샤를롯이 동행했다.

“가슴 좀 펴! 괜찮다고, 인마.”

“그렇지? 괜찮겠지?”

“이런 새가슴 새끼, 문제가 될 거였음 어제 벌써 났지.”

“그렇지?”

문제로 삼으려 했다면 어제 난리가 났어야 한다. 반대로 어제 아무 일 없었다는 건 앞으로도 아무 일 없다는 뜻이다.

“걱정 마, 스승님은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돼!”

“너, 어제하고 너무 다르다?”

“나랑 스승님의 연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

“얼씨구.”

샤를롯도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덱스의 편을 들었다.

어제 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지오르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끝내고 조언해 준 모양이다.

마차를 타고 간 덕에 아카데미 정문까지는 금방이었다.

정문 옆에 사람들이 몰린 것으로 보아 최종 합격자 명단이 붙은 모양. 조기 탈락한 이들이 우르르 빠졌을 텐데도 구경꾼들 때문인지 꽤 붐볐다.

마차에서 내려 정문 쪽으로 다가갔다.

정작 당사자가 아닌 샤를롯이 가장 긴장한 표정이다.

“넌 뭐 하러 따라오냐? 가 봐도 넌 보이지도 않겠구먼.”

“볼 수 있어! 보인다구!”

열심히 까치발을 해 보지만 샤를롯의 눈에 보이는 건 사람들의 뒤통수뿐.

그걸 본 무무카가 슬쩍 허리를 굽혔다.

“무등 태워 줄까?”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구. 으으음… 하지만 어쩔 수 없네.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실례가 될 테니.”

그러면서 신나는 얼굴로 냉큼 무무카의 어깨에 올라탄다.

다루기 쉬운 꼬맹이였다.

“우와아-!”

2m를 훌쩍 넘는 무무카의 어깨에 타자 샤를롯의 시야가 훌쩍 치솟았다.

높은 시야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잽싸게 명단을 확인했다.

“레오가 전사 학부 수석이야! 맙소사, 덱스 스승님도 마법 학부 수석! 무무카도 합격이야!”

“으음, 그래도 쩨쩨한 양반들은 아닌 모양이네.”

“그럼 나 진짜 괜찮은 거야?”

“모두 대단해!”

샤를롯의 호들갑에 사람들이 일행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학부에서 시험 친 이들은 모두 레오와 덱스의 얼굴을 알고 있다. 둘 다 그 난리를 쳤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마법 학부 수석이 황녀님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지? 살아 있는 게 용하네.”

“전사 학부 수석은 그 클라인 공자한테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고 하네요.”

“용케 둘 다 합격했군.”

당연히 수석에 대한 부러움과 축하 같은 일반적인 반응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봤으면 좀 비킵시다.”

레오 일행이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길이 열렸다.

아카데미의 밖이지만 합격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출셋길이 보장된 수석이다. 굳이 그들과 악연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전사 학부]

수석 : 레오

차석 : 클라인 반다이트

[마법 학부]

수석 : 덱스

차석 : 유리아 드메이르 폰 아슐렌

“캬-!”

“믿기지가 않네.”

가장 위에 자신의 이름이 있다니!

레오는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성공적으로 첫 단추를 꿰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덱스도 진심으로 감동한 얼굴이다. 그야 몇 주 전만 해도 시골 마을의 촌부였으니까. 마법을 배우거나 황립 아카데미 입학 같은 건 꿈꿔 본 적도 없었다.

“레오.”

주변의 시선을 즐기며 성취감을 만끽하는 와중, 등 뒤에서 어색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붉은 머리의 소년이 서 있다. 클라인이다.

“헉, 클라인 공자다.”

“얼굴이 엉망인 걸 보면 둘이 주먹으로 치고받았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봐.”

“설마 앙갚음하러 온 건가?”

주변의 수군거림.

클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에게 다가갔다.

“아, 음… 축하한다.”

“어… 고마워.”

영 어색한 분위기.

클라인 입장에서는 어제 치고받은 상대에게 말을 거는 상황이라 그렇다지만, 레오는 다른 의미로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그 클라인이 축하를 건넨다고? 그 오만한 검성이?’

회귀 전 경험한 클라인 반다이트와 굉장히 괴리가 큰 모습이다.

과묵하고 딱딱한 표정은 어린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약한 이를 멸시하는 오만한 눈빛만큼은 똑똑히 뇌리에 남아 있다. 레오가 아는 검성 클라인은 그런 자였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을까?”

그 기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어린 클라인이 정중히 대화를 청하고 있다.

그것도 가득 호의를 담고서.

“어… 그래, 안 될 것 없지.”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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