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데뷔 (1)
클라인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눈을 떴다.
“으으으….”
낯선 천장이다.
침대 옆에 준비된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니 울렁거리는 속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하나둘 슬그머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제 대련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온 클라인은 종일 레오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니 그의 분노가 조금 이해되었다. 다시 한번 만나 대화해 보고 싶었다.
오늘 아침 일찍부터 그를 기다렸다.
운 좋게 얼마 기다리지 않고 만날 수 있었고, 축하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맛있는 요리와 술을….
“음….”
식사와 함께 적당히 와인을 즐기는 건 익숙하다. 하지만 이들의 술자리는 뭔가 달랐다.
와인, 맥주, 과일주에 이름 모를 도수 높은 술. 그리고 다양한 조합….
이리저리 섞어 마셨다. 해가 중천이었지만 함께 취해 웃고 떠들었다.
웃통을 벗고 테이블에 올라가 춤도 췄다. 당시에는 즐겁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레오는 만취해 테이블에 엎어진 덱스를 강제로 일으키고는 바나나로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렸다. 먼저 쓰러지면 이렇게 된다면서.
그 광경에 과일 주스를 마시던 샤를롯도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며 자리를 떴다.
“…나도 맞았던가?”
오한이 일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유독 그 부분만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공자님, 일어나셨습니까?”
시종 브로닐의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일어났어. 곧 나갈게.”
붉은 석양이 넘어가고 있다. 대략 서너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난 모양이다.
복장을 가다듬고 시종의 안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도착한 곳은 아까 파티를 벌였던 장소.
깔끔하게 정리된 야외 테라스에서 레오와 무무카가 의자에 반쯤 늘어진 자세로 쉬고 있다.
클라인을 발견하고 한 손을 들어 보이는 레오.
“여! 술 좀 깼냐?”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군.”
“머리는 아직도 지끈거려.”
클라인도 자연스럽게 편한 말투로 응수했다.
이럴 때 보면 관계를 좁히는 데에 술만 한 게 없긴 하다.
머리가 좀 깨질 것 같긴 하지만.
“고맙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어.”
“얀마, 한 번만 더하면 백 번째다.”
“그랬나? 하하하.”
절레절레 손을 흔드는 레오.
클라인도 빈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아무 말 없이 석양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좋다. 뭔가 홀가분하다고 해야 할까.
검성의 아들.
백작가의 후계자.
제국의 미래.
지금까지 그를 수식한 단어들은 하나 같이 무겁기만 하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클라인이라는 이름 세 글자로 다가왔다.
그게 그렇게 마음 편한 일인지 처음 깨달았다.
“덱스는?”
“그놈은 아직 뻗어 있지. 약골이거든.”
약골?
클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술자리에서 본 레오의 상체는 엄청났다.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근육이 어느 하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덱스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보다 덜했지만 단련한 몸만 보면 전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레오는 늘어진 자세 그대로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담배 피우냐?”
“아, 아니, 아직 피워 본 적 없는데.”
“그래, 넌 이런 거 피우지 마라.”
꼰대력이 가득한 대답에 클라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레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미지근한 바람 속에 다시 뱉었다.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지.’
레오는 어제 술자리를 회상했다.
어린 클라인은 오직 검술만 머리에 가득한 지독히도 재미없는 놈이었다. 오만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예의를 중시하고 딱딱하여 술을 퍼먹여야 좀 사람 구실을 할 정도.
‘그런 놈이 어쩌다가 변하게 된 거지?’
모르겠다. 그래도 싹수없는 성질머리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머리는 여전히 깨질 것 같고 몸도 이곳저곳 쑤셨다. 결코 좋은 컨디션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후련한 기분이었다.
“아오, 씨발, 머리 아파 뒈지겠네.”
“크크큭.”
레오가 죽을상을 했다. 클라인도 결국 웃고 말았다.
아직 술기운이 남은 얼굴 위에 석양이 붉게 내려앉는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저녁 식사의 호스트는 지오르였다.
“저녁 메뉴는 속이 편한 것들로 준비했습니다.”
본래 그가 축하 파티를 연 장본인이니 오후의 연회부터 얼굴을 내미는 것이 옳았지만, 또래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 샤를롯을 대신 참석시켰다.
“하하, 점심에 저희가 너무 어지럽혔죠?”
“인사가 늦었습니다. 클라인 반다이트입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오르입니다. 저야말로 늦게 얼굴을 비춰 죄송합니다.”
레오는 뭉근하게 끓인 야채 스프를 한술 떴다. 부드러운 스프가 들어가자 부대끼던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귀한 분들을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단지 겸양뿐인 말은 아니다.
황립 아카데미의 수석 입학생 두 명, 거기에 미래의 검성으로 기대감이 높은 클라인 반다이트 공자까지.
지오르는 지금 이 시간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값진 자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지오르와 클라인이 자연스럽게 축하와 덕담을 주고받는 동안, 레오는 조용히 야채 스프 한 접시를 다 비워 냈다.
비교적 차분한 저녁 식사가 끝났다.
클라인은 정중한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시종과 함께 돌아갔고, 레오는 테라스에 홀로 나와 한결 서늘해진 바람을 맞았다.
“여기 계셨군요.”
“아저씨.”
“혼자 계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아뇨,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저녁식사 동안 레오는 말을 아꼈다.
클라인과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자 하는 의도도,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투자를 좀 하고 싶어서요. 돈 관리를 좀 부탁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상회 투자 말씀인가요? 제가 추천서를 써 드릴 수 있습니다. 내부 추천으로 소규모 투자금을 모아 운영하기도 하거든요.”
돈을 굴리는 상회는 언제나 투자자를 향해 열려 있다.
보통 일정 금액 이상의 투자 금액만 취급하려 했기에 여유 없는 대다수의 평민에게 해당 사항이 없었을 뿐.
하지만 레오가 말하는 투자는 다른 의미였다.
“그런 투자 말고요. 투자처는 제가 정하고 싶은데요.”
“투자 대행을 말씀하시는군요.”
“아, 그러네요. 물론 수수료는 충분히 드릴 생각이고요.”
“사실 저는 투자보다는 현물로 장사하는 쪽을 선호하긴 합니다만, 레오 님의 요청이라면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어떤 투자를 생각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일단은 매매권에 투자해 보고 싶은데요.”
“매매권이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는지….”
지오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매매권은 어떤 대상을 일정 가격에 매수하거나 매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현물 가격보다 수배 이상 가격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투자보다는 투기로 접근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 가진 돈이라고 해 봐야 60실버 남짓이잖아요.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몇 년간 그냥 놀릴 바에는 공격적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예, 그러시다면야….”
60실버면 평민 가족의 반년 치 생활비 정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레오의 앞날을 생각하면 그리 부담되는 액수도 아니었다.
“첫 투자처를 결정하는 대로 연락 드릴게요.”
매매권 투자는 분명 위험성이 크다.
하지만 미래의 굵직한 사건을 알고 있는 레오에게는 아주 좋은 돈벌이 수단이 된다.
단순히 돈을 좇고자 했다면 정보를 독식하고 직접 투자했겠지만, 중요한 건 이계의 존재로부터 이 세계의 멸망을 막아 내는 것이다. 돈은 그 과정에서 수단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돈을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었고, 지오르는 좋은 파트너였다.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신의를 지킬 줄 알았다. 그러니 믿고 맡겨 볼 생각이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지오르의 손을 맞잡은 레오도 씨익 미소 지었다.
* * *
레오와 덱스는 고향 론마르에 편지를 썼다.
직접 달려가 합격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 입학이 보름 앞이다. 아마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둘 다 기숙사 생활 중일 것이다.
“좋아하시겠지?”
“그럼! 촌놈들이 출세했는데.”
“크크큭.”
합격 축하 파티 후에 무무카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여동생에게 직접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훌쩍 시간이 지나 입학식 당일.
레오, 덱스, 무무카 셋은 짐을 챙겨 나왔다. 며칠간 신세를 졌던 지오르의 집을 떠날 시간이다.
레오는 양 갈래로 땋은 샤를롯의 정수리에 턱 하고 손을 얹었다.
“꼬맹아, 또 놀러 올 테니까 그때까지 많이 커라.”
“숙녀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거 아니야!”
별로 아프지도 않은 발차기가 정강이로 날아왔다.
눈물이라도 글썽일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귀염성 없는 꼬마였다.
“스승님, 내년에 꼭 입학할 테니까 기다려!”
“그래, 꼭 보자.”
덱스가 머리를 쓰다듬자 샤를롯이 헤헤 웃는다.
요 보름 동안 덱스는 스승 노릇을 꽤 괜찮게 해냈다. 샤를롯은 일취월장으로 실력이 늘었고 그만큼 두 사람 사이는 돈독해졌다.
이대로 꾸준히 발전하면 샤를롯의 내년 입학은 가시권이라고 할 정도다.
“얀마,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물론 그 광경을 보는 레오는 괜히 툴툴댔지만.
“무무카도 또 만나!”
“그래, 꼬마 아가씨도 쑥쑥 커라.”
샤를롯이 무무카와 인사하며 또 귀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레오는 지오르와 다시 굳게 악수했다.
“또 뵙지요.”
“예, 그간 감사했어요. 또 연락 드릴게요.”
지오르가 준비한 마차가 출발했다.
굳이 이렇게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끝내 지오르가 고집을 부려 준비한 마차였다.
“참, 우리 공금 있잖냐.”
“응? 그 돈?”
“내가 그걸로 투자를 좀 해 보려고 하는데, 어때?”
마차 안에서 레오는 어제 지오르에게 맡긴 60실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돈을 맡겨 놓고 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공금이었으니 미리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뭐, 너 알아서 해라.”
“그게 끝?”
“어차피 그거 현상금하고 네가 고블린 사냥으로 번 돈이잖아. 공금이라고 하기에도 좀 민망하지. 그냥 네 돈 아니냐?”
“아니지, 공금으로 쓰기로 했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나는 그 돈에 욕심낼 생각 없다.”
“그래? 그래, 그럼.”
무심한 대답.
사실 덱스는 레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자신도 몰랐던 마법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고 배울 기회를 주었다.
본래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황립 아카데미에 이끌어 줬다.
시골의 평범한 촌부로 살았을 자신이 마법사가 되다니, 그것만 해도 평생 갚아도 모자랄 만큼의 은혜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저 네 녀석 하는 짓에 끝까지 따라가 주마.’
언젠가부터 레오가 변했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꼈다.
아마도 이상한 꿈 이야기를 꺼냈던 그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레오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몸은 단련하고 검을 휘둘렀다.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아카데미 또한 녀석이 그리는 그림 중의 일부라는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뭘 준비하는 걸까, 뭘 두려워하는 걸까.
덱스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뭐가 됐든 친구 녀석의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을 뿐이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