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데뷔 (2)
“지금부터 황립 아카데미 입학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황립 아카데미의 올해 신입생은 전사 학부 75명과 마법 학부 28명의 총 103명으로 결정됐다.
전사 학부 신입생의 비율이 훨씬 높지만, 이는 매년 비슷한 현상이다.
입학식은 야외 연무장이 아니라 실내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강당 천장부터 늘어트린 크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다.
조각조각 색유리로 이루어진 창은 예술 작품에 가깝다.
고개를 들면 웅장한 천장화가 펼쳐진다. 지금의 아슐렌 제국을 있게 한 주요 사건이 시계열로 그려져 있었다.
‘식당은 아무것도 아니었네.’
구내식당이 화려한 액세서리라면 이 강당은 예술품 그 자체다.
고개를 꺾어 천장화를 감상하다 보니 목이 아파 왔다. 목과 어깨를 좀 풀고 있자니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거, 되게들 쳐다보네.’
레오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내밀었다.
뒤통수가 따가운 건 둘째치고 단상에 앉아 있는 교수진의 시선이 데일 정도로 뜨겁다.
특히 학부장의 인사말 때는 카르파가 대놓고 뚫어지게 쳐다봐서 졸기도 힘들었다.
“이거 언제 끝나냐?”
“거의 다 했으니까 참아.”
옆자리의 클라인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저렇게 앉아 있으면 괜찮은가 싶어 잠깐 자세를 따라 해 보았지만 금방 포기하고 등받이에 허리를 붙였다.
“아카데미의 전통에 따라 학부 수석 입학생에게 부상을 수여하겠습니다.”
길고 긴 행사의 거의 끝순.
레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사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학부의 수석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전사 학부 레오. 마법 학부 덱스.”
호명받은 두 사람이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각 학부장이 작은 트레이를 들고 마주 나왔다.
먼저 레오에게 카르파가 내민 것은 작은 메달이었다.
“이걸로 도리안 공방의 무기를 하나 맞춤 제작할 수 있지. 유용하게 쓰게.”
“흐흐흐, 감사합니다.”
부상에 대한 정보는 미리 들었다.
드워프에게 기술을 배웠다는 장인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공방.
제국 최고 수준이라며 용병 시절에도 귀에 못이 박일 만큼 들었던 곳이다.
명성이 높은 만큼 돈만 있다고 해서 도리안 공방의 무구를 가질 수도 없었다.
‘땡잡았네.’
레오는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칼잡이라면 모름지기 좋은 무기에 대한 욕심을 지녀야 한다.
“마법 학부의 부상은 대대로 마석이지.”
메퀸토가 내민 것은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푸른 마석이었다.
한눈에 봐도 순도 높은 물건이다.
“가, 감사합니다!”
덱스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마석을 받아 들었다.
영롱한 푸른색이다. 샤를롯의 지팡이에 박힌 마석보다 훨씬 고등급의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마석을 평생 쓰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시게.”
주름이 자글자글한 메퀸토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4서클의 숙련된 전투 마법사에게도 부족하지 않은 마석이다. 그 이상의 성장을 기대한다는 의미의 덕담이었다.
“헤헤헤….”
덱스는 마석을 보물처럼 쥐고 자리에 돌아왔다.
이 마석을 어떻게 쓸지 벌써부터 고민이었다.
‘굳이 지팡이일 필요가 없지.’
처음에야 아무것도 몰랐으니 싸구려 마석이 박힌 지팡이를 썼다.
나중에는 샤를롯의 것을 빌려 쓰기도 했다.
하지만 레오와 대련이나 입학시험 때를 떠올려 보면 굳이 지팡이의 형태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크기가 아주 작으면 유리아처럼 반지에 박아 넣을 수 있을 텐데.
같은 등급의 마석은 크기가 작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비싸진다. 그러니 당장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아카데미 교장의 인사말이 꽤 오래 이어졌지만 덱스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 * *
아카데미 기숙사는 학부 관계없이 하나의 건물을 사용한다.
기숙사 1층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거대한 로비를 중심으로 사무실과 메이드 숙소 등으로 구성되었고, 가장 높은 4층부터 각 층별로 1, 2, 3학년 생도의 방이 배정되었다.
얼마 안 되는 짐을 들고 기숙사 방에 도착한 레오는 입을 벌렸다.
“아하하….”
방 하나가 고향 집보다 넓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신발 채로 밟기 민망할 정도로 고급스럽다.
창가에 마련된 침대는 누워서 세 바퀴는 구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고, 방 중앙에는 소파와 테이블까지 마련되어 있다.
귀족들은 어떤 반응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에게는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하여간 돈을 처발랐다니까.”
옷장에는 몇 종류의 제복과 실내복이 주르륵 준비되어 있다.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 순백색 제복은 행사 때나 입는 옷 같고, 상대적으로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아이보리색 제복이 평상복 같다.
합격자 발표날 치수를 재더니 미리 준비해둔 모양이다.
대형 욕조를 보자마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목욕부터 했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그간 혹사당한 전신의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손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양껏 목욕을 즐기고는 준비된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촉감도 은은한 향기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좋긴 좋구나.’
내일부터 첫 수업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자 묘한 기대감이 일었다.
싹수 있는 동료를 찾는 것도, 지난 생에 익히지 못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는 것도 모두 기대되는 일이다.
테라스로 나가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따뜻한 물에 씻고 담배까지 태우니 극락이 따로 없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니 부지런히 기숙사에 돌아오는 생도들과 그를 맞이하는 메이드들이 보인다.
“음?”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태우다가 이쪽을 올려다보는 메이드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흑발과 하얀 얼굴색이 대비되는 메이드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레오는 뒤늦게 입에 문 담배를 떠올렸다.
“쯧, 깐깐해 보이던데.”
확인해 본 결과 아카데미는 흡연이 허용되지 않았다.
훤히 보이는 곳에서 기세 좋게 담배를 태우고 있던 멍청함을 자책했다.
막 입학했는데 흡연으로 발목을 잡히고 싶진 않았으니까.
‘몰래 피워야겠어.’
한 바퀴 휘돌며 방 구경을 마치고 침대에 늘어져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린다.
“누구세요?”
벌떡 몸을 일으킨 레오가 문을 열었다.
그 뒤에는 방금 테라스에서 눈이 마주친 메이드가 서 있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흑발을 한,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다.
‘어, 설마 담배 때문에?’
괜히 손을 크게 휘둘러 보았지만, 방 안의 담배 냄새가 그리 쉽게 빠질 리 없었다.
“어, 음….”
“레오 님 맞으신가요? 담당 메이드 일레인이라고 합니다만.”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방에 먼저 도착해 계셨군요. 본래는 1층에서 담당 메이드인 저를 만나 방으로 안내받게 되어 있습니다. 담당 메이드와의 첫인사를 겸한 것이지요.”
“그, 그런가요?”
레오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생도들의 쾌적한 기숙사 생활을 위해 아카데미에서 담당 메이드를 배정한다는 설명을 들은 것도 같다.
아카데미 소속인 그들은 청소와 빨래 같은 기본 가사 능력부터 심리 상담까지 가능한 베테랑들이라고. 특히 그들은 생도와 수평적인 관계이니 충분한 예의를 갖추고 대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저기, 혹시 1층에서 계속 기다리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묘하게 불편한 기색이 섞인 일레인의 대답에 레오는 움찔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니 혼자 올라와 방을 구경하고 목욕도 하고 담배도 한 대 태우고, 족히 한 시간은 보냈지 않은가. 그 말은 일레인도 1층에서 그만큼 기다렸다는 말이 된다.
“죄송합니다. 기다리고 계신지 몰라서. 혹시 화나신 건….”
“화나지 않았습니다.”
즉답.
‘아, 이건 화난 거 맞네.’
레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담당 메이드에게 안 좋은 첫인상을 심어 준 것 같다.
“그리고 흡연하고 계시더군요. 아카데미에서 생도의 흡연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흡연 1회는 벌점 10점입니다. 아시겠지만 벌점 20점이 쌓이면 해당 학기 성적에 악영향을 끼치니 주의하시길.”
“아하하하… 혹시 못 본 척해 주시면…?”
“그 또한 담당 메이드의 책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아직 담배 냄새가 실내에 남아 있으니 충분한 환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그러면 인사를 나누었으니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럼 이만.”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 낸 일레인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레오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몇 마디 섞어 보지 못했지만 꽤나 딱딱할 것 같은 사람이다.
“쩝….”
습관적으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첫 수업 전에 성적부터 깎이고 싶진 않다.
탕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일레인의 노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다.
“문 좀 열어 봐!”
덱스다.
문을 열자 불쑥 들어온다.
“좀 쉬자.”
“여태 쉬었으면서 뭘 그래? 방 구경 좀 하러 왔지.”
“그래서 뭐가 좀 달라? 기숙사 방이 거기서 거기겠지.”
“어, 그러네. 내 방하고 별 차이 없네.”
그러더니 소파에 털썩 앉아 눈동자만 굴린다.
녀석이 고민거리가 있을 때 하는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뭔데? 내일 첫 수업이라 불안하기라도 한 거야?”
“불안하다기보다는 그냥 좀….”
“좀 부담되긴 하겠네. 그나마 우리 쪽은 좀 덜하긴 한데.”
불알친구답게 덱스의 불안함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마법 학부 신입생 중 유일한 평민.
아카데미 내에서 생도가 아무리 평등하다 떠들어도 현실적으로 신분의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의지할 친구들과 죄다 떨어지게 생겼으니 더 걱정되겠지.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어린 티가 난다.
“저 검, 저번에 어디서 났는지 말해 줬지?”
“아? 그랬지.”
무무카에게 시비 걸었다가 탈탈 털리고 도망친 녀석의 이야기.
지난 뒤풀이 때 질리도록 씹고 뜯은 이야기라 모두가 다 안다.
“상대가 누구든 좆같이 굴면 가만히 있지 말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흐흐흐, 그래. 그리고 그런 일 있으면 내가 가만있겠냐?”
덱스가 웃음을 흘린다.
조금 마음이 편해진 모양.
“그래도 성질 적당히 부리고. 행여나 누구 죽이고 그러면 안 된다.”
“어우, 뭐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
농담이 아니다.
착해 빠진 데다 바보 같을 정도로 손해 보는 성격인 주제에, 이놈은 꼭지가 한번 돌면 정말 무섭다.
작년인가 고향 론마르에 몇 년 만에 상인이 찾아온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상인을 반겼다. 자주 찾아 달라며 마을 차원에서 대접도 후하게 했다.
문제는 본인이 갑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챈 상인 놈이 술 취해 선을 넘은 것이다. 하필이면 덱스 놈이 짝사랑하던 누나에게 희롱하는 말을 뱉었다.
그날 덱스는 말 그대로 눈깔이 돌았다. 레오조차도 말리기 힘들 정도로.
상인 놈의 목숨을 부지시킨 것이 최선이었다.
“황녀한테 주먹질까지 한 놈이 쫄긴 왜 쫄아.”
“…그 이야기는 제발 좀 그만해라. 누가 주먹질했다고 그래.”
“그거나 그거나.”
때리려고 주먹 쥐었다며. 그게 주먹질 아니냐?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알려 줄까?”
“뭔데?”
“생각해 봐. 신분으로 따지자면 황족이 제일 위잖아. 귀족 놈들도 황족 앞에서는 똑같이 굽실거려야 한다고.”
“그렇겠지.”
“네가 황녀하고 친구 먹어 버리면 너한테 쉽게 깝죽거릴 놈이 있을까?”
덱스가 입을 벙긋거린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표정이다.
“솔직히 이미 친구 먹은 거나 다름없지 않냐? 저번에 식당에서 보니까 말도 잘 까더만. 생도 중에 지금 너만큼 황녀한테 막 대하는 놈이 있을 것 같아? 아마 없을걸. 다들 엄청 조심할 거라고. 그런데 황녀는 특별 대우받기 싫어한다며. 그럼 이야기 끝난 거 아냐?”
들으면 들을수록 맞는 말인 것 같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덱스.
하긴 황녀가 그런 걸 신경 썼다면 입학이고 뭐고 이미 목이 떨어졌을 몸이다.
저번에 보니까 세실인가 하는 그 애도 황녀한테 엄청 깍듯했지.
“뭐든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렇지….”
고민이 해결되었다는 듯 환하게 웃는 덱스.
그 티 없는 미소에 레오는 되레 불안해졌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