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데뷔 (3)
학기 첫날, 마법 학부의 강의실.
수업을 앞둔 신입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벌써 친분을 다졌는지 두세 명씩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곳곳에 보인다.
밝은 금발의 소년이 강의실에 들어섰다.
흰 피부와 푸른 눈동자, 오뚝한 콧날이 도드라지는 귀족적인 외모.
생도들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수려한 외모였지만 눈빛만큼은 오만하기 그지없다.
“줄리앙 님, 이쪽으로 오시죠.”
“좋은 자리를 맡아 놨습니다.”
동급생 두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같은 생도임에도 명백히 굽실거리는 태도다. 과한 언사에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생도도 있지만 정작 그들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금발 소년의 이름은 줄리앙 베니에르.
황궁의 재무와 사법을 총괄하는 내무 장관 베니에르 백작의 맏아들이자 가문의 후계자였다.
내무 장관 위의 관직은 오직 재상뿐이었으니 베니에르 백작은 중앙 귀족 중에서도 실세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꽤 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아들 줄리앙도 그것을 잘 알았다.
지금 그의 곁에서 수족을 자처하는 파블로와 니앙의 집 안도 베니에르 백작의 비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파블로, 니앙, 벌써 잊었어? 아카데미에서는 모두 같은 동급생이야. 그렇게 대하면 다들 불편해한다고 했잖아.”
“아하하, 그랬었죠.”
“편하게 하라니까, 편하게. 알지?”
줄리앙은 두 사람의 말투를 고쳐 주며 자연스레 자리에 앉았다.
진심으로 둘을 만류하기보다는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여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는 의도로 보였다.
“그, 그래, 줄리앙.”
“알았어, 그렇게 할게.”
여유가 넘치는 줄리앙과 달리 파블로와 니앙은 여전히 전전긍긍하는 모습.
‘베니에르 백작의 자제로군.’
‘우리 영지야 수도에서 꽤 떨어진 곳이니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밉보일 필요는 없겠지.’
다른 생도들도 줄리앙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백작가의 자제들이 몇 더 있다고 하나, 베니에르 가문의 위세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 이 강의실에서 그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이는 황녀 유리아가 유일할 것이다.
“자리 좋네. 잘했어.”
“감사합… 아니, 고마워.”
서둘러 대답을 고치는 니앙에게 줄리앙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보였다.
자리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족히 백 명 이상 수용할 만한 크기의 강의실은 교단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좌석이 펼쳐진 구조.
그중 줄리앙 일행의 자리는 중앙에서 조금 앞쪽으로, 교단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다.
뚜벅, 뚜벅.
가벼운 구두 소리에 생도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집중됐다.
이윽고 밝은 은발을 단정히 틀어 묶은 소녀가 기품 있는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3황녀 유리아.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생도들이 집중했던 이유였다.
“황녀님이야.”
“역시 아름다우셔.”
모두의 시선이 유리아에게 향했다.
황족을 대면하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다. 아카데미의 동급생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이가 태반일 것이다.
강의실을 휘둘러본 유리아는 중앙 좌석 쪽으로 향했다.
그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줄리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신분이 낮은 자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예법이 어긋났기에 줄리앙은 다가오는 유리아에게 눈을 맞추면서도 먼저 입을 열지 않고 기다렸다.
“이 자리는 비어 있나요?”
유리아가 가리키며 물은 곳은 줄리앙 일행의 바로 앞자리.
“베니에르가의 맏아들 줄리앙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고마워요, 줄리앙. 그리고 나는 여러분과 같은 생도입니다. 편하게 유리아라고 불러 주세요.”
“신하된 자로서 어찌 그런 불경을 행하겠습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유리아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조금 처연한 미소가 하얀 얼굴에 걸렸다.
지난 시험 때는 교수들마저도 자신을 생도가 아닌 황녀로 대하려 했다.
황족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사례가 처음이다 보니 발생한 일이다.
생도들과 거리를 좁히는 데에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세실. 잘 지냈느냐.”
“네, 오라버니.”
그리고 유리아의 곁을 따르던 금발의 소녀, 세실 베니에르.
베니에르 백작의 딸이자 줄리앙의 쌍둥이 여동생이다.
그녀는 한배에서 나고 자란 오라버니에게 짧고 쌀쌀맞은 대답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쯧.’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리는 줄리앙.
몇 달 만에 본 동생이건만 여전히 쌀쌀맞다. 원래부터 그리 살가운 여동생은 아니었지만 최근 몇 년간 줄곧 저런 상태다.
황녀가 가까이 있고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
줄리앙은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벌컥.
다시 한번 벌컥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밝은 갈색 곱슬머리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띤 소년, 덱스.
“그 녀석이야.”
“수석이다.”
덱스의 등장에 강의실 이곳저곳이 수군거렸다.
황녀가 들어설 때 모두 숨죽여 그녀의 걸음 하나 몸짓 하나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반대로 꽤 부산스럽다.
강의실 입구에서 자리를 한 바퀴 둘러본 덱스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향한 곳은 강의가 가장 잘 보일 것 같은 중앙 자리 쪽이다.
‘이쪽으로 온다고?’
줄리앙은 다가오는 덱스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황녀님이 계시는 곳을 더럽히려 하다니, 역시 주제도 예의도 모르는 평민이다.
덱스의 행동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여기 자리 있냐?”
자리를 묻는 행위 자체는 평범했다.
문제는 그 상대가 제국의 3황녀 유리아였다는 것.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줄리앙은 순간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빈자리랍니다.”
유리아도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다만 곁에 있던 세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제 오라비와 가까운 반응이다. 얼음장 같던 커다란 눈동자가 파도라도 일어난 듯 일렁였다.
“근데 너도 말 좀 편하게 하면 안 되냐? 동기끼리 존대하니까 영 어색한데.”
파지지지직-!
그 말에 세실의 손아귀에서 전격이 튀었다.
그걸 눈치챈 유리아가 재빨리 세실의 팔을 잡아 말리더니 다시 평범히 대꾸했다.
아카데미에서 평범한 또래 친구를 원하는 그녀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음, 생각해 보니 그렇네.”
다행히 세실의 전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세실도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듯 축 눈꼬리가 쳐졌다.
“그래, 훨씬 낫다.”
그렇게 덱스는 빈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리아의 옆에 자리 잡았다.
당사자인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주변 반응은 달랐다.
‘세상에 내가 뭘 본 거지?’
‘저래도 되는 건가? 불경죄가 아니야?’
황녀와 어떤 식으로 첫인사를 나누면 좋을까.
유력 가문의 자제들과 어떻게 친분을 쌓을까.
가문의 이득을 위해 서로 조심스레 탐색전을 벌이던 다른 생도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이다.
‘역시 레오야.’
반면에 덱스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레오의 말대로다. 유리아는 특별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악에 찬 주변 동기들의 반응이 더 재미있을 정도다.
‘이, 이게 무슨…!’
줄리앙은 아직도 평정심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황녀에게 동네 친구 대하듯 하는 평민.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 주는 황녀.
아무리 아카데미의 규칙이라지만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첫 수업에서 황녀와 대화를 트며 동기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려 했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가만히 둬서는 안 되겠어.’
천진난만하게 강의 들을 준비를 하는 덱스의 뒤통수를 보며, 줄리앙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 * *
마법 학부의 첫 수업은 ‘마력 순환의 기초’.
말 그대로 마법사가 가져야 할 기초 소양에 대한 내용이다.
대부분 생도들이 지루한 표정을 억지로 숨기며 강의를 들었다. 마나 감응을 끝나고 마력을 조절하기 시작할 때쯤 이미 충분히 배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덱스는 그렇지 않았다. 강의 내용 하나하나가 새롭고 재미있었다.
‘이게 저렇게 연결되는 거였네!’
배우는 즐거움이 이런 것일까.
루이스에게 얼추 개념을 배웠다지만 이렇게 체계적인 강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간 추측했던 개념이나 두루뭉술하게 느꼈던 것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꼈다.
덱스는 정신없이 강의에 빠져들었다.
“자, 첫 수업이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3시간가량 이어진 수업.
대다수 생도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쯤, 정수리가 훤한 중년 마법사 네피르가 수업의 끝을 알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덱스만이 유일하게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교재를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달려 나가다시피 하는 그의 모습에 유리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리아 님, 정말 괜찮으신가요?”
“뭐가?”
“아무리 같은 생도라고 하지만 그것도 평민이….”
-감히 황녀님에게!
세실의 눈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황녀의 멱살을 잡아 메친 그 미친 녀석.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고 다가와 친한 척 할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세실은 나하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 말에 세실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황족 입장에서 상대가 귀족이든 평민이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카데미니까 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나는 아카데미의 룰을 지키고 싶어. 그리고 말이야, 여기니까 나도 친구를 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
세실은 짧게 탄식했다.
친구라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황궁에서만 살아온 황녀.
위로 두 오라버니가 있지만 나이 차는 각각 열 살, 일곱 살로 꽤 터울이 컸다. 황궁에서 또래라고는 세실이 유일했다.
‘수년간 함께 지냈으면서 그런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세실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에게 유리아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세실, 고개를 들어.”
“유리아 님….”
“나는 말이야, 언젠가 이 강의실의 모든 이들과 격의 없이 지내고 싶어. 그리고 거기엔 당연히 세실도 포함이야.”
“저, 저요?”
“당연하지! 세실은 내 첫 번째이자 유일한 친구잖아.”
“송구해요….”
세실은 제복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그 대답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실은 내가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 잘 알 거야. 그렇지?”
“…….”
세실의 입술이 움찔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녀가 원하는 호칭이 무엇인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신하로서는 감히 부를 수 없는 호칭, 하지만 친구로서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짧은 순간 수많은 고민이 오갔지만 이내 마음을 굳혔다.
“유, 유리아….”
“응.”
유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습관처럼 반걸음 뒤에 서려는 세실의 팔을 당겨 어깨를 나란히 했다.
처음으로 친구와 나란히 걷는 기쁨.
식당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 * *
아카데미의 수업은 크게 오전과 오후 강의로 나뉜다.
1학년의 경우 학부 전공과 공통 강의 비율이 대략 5 : 5 정도이니, 홀로 마법 학부인 덱스는 일과 시간 절반 정도를 친구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는 점심시간은 덱스에게 꽤나 귀중한 시간이었다.
“야! 잠깐 거기 서 봐!”
“나?”
“조용히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덱스.
방금 강의실에서 뒷자리에 앉아 있던 둘이다.
“나 지금 바쁜데. 나중에 하면 안 되냐?”
새로운 친구를 사귈 기회일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그런 말랑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와. 잠깐이면 되니까.”
덱스의 거절에도 끈덕지게 권유하는 두 사람.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둘의 표정에 대충 무슨 상황인지 감이 왔다.
“그래, 웬만하면 빨리 끝내자?”
두 사람이 이끈 곳은 강의동에서 조금 떨어진 소각장 한구석.
그곳에 금발의 생도, 줄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야? 나한테 볼일 있다는 게. 여기까지 불러낸 걸 보면 수다나 떨자는 건 아닌 것 같고.”
덱스는 손목의 제복 단추를 풀며 씨익 웃었다.
돌아가는 상황이야 뻔했다.
귀족들이 주류인 아카데미에서 평민인 자신에게 텃세가 전혀 없으리라 기대도 안 했다. 게다가 입학 수석까지 했으니 배알이 꼬인 놈들도 있겠지.
그렇다고 수업 첫날부터 시비를 걸 줄은 몰랐다.
“방금 너라고 했냐? 너 정말 겁대가리가 없구나?”
줄리앙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생도라는 신분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뿐이다.
아무리 학부 수석이라고 해도 평민은 평민.
졸업 후 진로를 생각한다면 일개 평민이 베니에르 백작가의 후계자인 자신에게 이렇게 뻣뻣이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끄럽고 할 말 있으면 빨리 끝내자. 배고프다.”
다만 레오의 권유로 아카데미에 진학한 것이 전부인 덱스는 아직 마법사로서 구체적인 목표가 없다.
확실한 것은 벌써부터 출세를 위해 얽매여 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용병 마법사 생활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러니 상대가 귀족이라고 해서 먼저 빌빌거릴 이유는 전혀 없다.
혹시 자신의 행동이 레오의 발목을 잡을까 하는 걱정도 조금 있었지만, 어제 본인이 시원하게 말하지 않았나.
상대가 누구든 좆같이 굴면 가만히 있지 말라고.
‘그러니, 한번 볼까.’
얼마나 좆같이 구는지.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