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26화 (26/127)

26. 데뷔 (4)

“잡아.”

줄리앙의 명령.

파블로와 니앙이 덱스의 양팔을 몸 뒤로 꺾으며 단단히 붙든다.

“하하, 재밌네.”

덱스가 줄리앙을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웃음이 났다.

혈기 왕성한 십 대가 모여 생활하는 아카데미에서 생도 간 다툼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하지만 날붙이를 쓰거나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은 즉시 퇴학 조치를 할 정도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것은 입학식 때도 강조한 내용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 이외는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한 놈이, 감히 황녀님께 그따위 불손한 언동을 해? 나 줄리앙 베니에르가 황녀님을 대신해 벌을 내리겠다.”

양팔을 결박당한 덱스의 앞에.

줄리앙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기껏 생각한 이유가 겨우 그거야?”

“뭐라고?”

“그러니까 네가 뭔데 황녀님 대신 벌을 주니, 마니 하냐는 거지. 그냥 네가 배알이 꼴려서 이러는 거 아냐. 꽤나 추잡스러운 핑계 같은데?”

제압당한 상황에서도 실실 웃으며 비아냥대는 덱스.

줄리앙은 속이 뒤집어졌다.

“이 새끼가!”

짝-!

흰 장갑을 벗더니 장갑으로 덱스의 빰을 갈겼다.

덱스의 뺨이 발갛게 변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흐흐흐.”

입안에 고인 피를 퉤- 뱉어 낸 덱스가 낮게 웃었다.

붉게 물들어 번들거리는 이빨이 드러나자 그 미소가 더욱 섬뜩하다.

순간 움츠러들 뻔한 줄리앙이었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법.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웃어? 이게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네가 먼저 쳤다?”

“뭐라고?”

퍽-!

팔을 뒤로 잡힌 상태에서 몸을 띄운 덱스가 양발로 줄리앙의 가슴을 밀어 찼다.

반격당하리라 생각도 못 한 줄리앙은 그대로 뒤로 나뒹굴었고, 파블로와 니앙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분명 양팔을 구속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둘은 덱스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딸려 다니기만 했다.

꾸욱.

“아야야!”

힘으로 팔을 풀어 낸 덱스가 엄지로 둘의 손목 안쪽을 깊게 누른다.

파블로와 니앙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다.

그제야 둘은 깨달았다.

처음부터 덱스를 제압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가만히 있어 준 것일 뿐이다. 애초에 마법 수련만 하던 도련님이 힘으로 덱스를 구속하려 한 것 자체가 실수였다.

덱스가 눈을 부라리자 파블로와 니앙이 “히익”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둘을 지나쳐 쓰러진 줄리앙에게 다가갔다.

“야, 너 어디서 제대로 맞아 본 적 없지?”

줄리앙의 앞에 쭈그려 앉은 덱스.

걷어붙인 팔뚝에는 잔근육과 힘줄이 두드러졌다.

레오와 함께 죽어라 단련하기 이전부터 숲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하고 나무를 팼다.

햇빛도 피해 가며 실내에서 얌전히 책만 보던 귀족 샌님과는 몸 자체가 달랐다.

“이 미천한 것이! 감히 누구의….”

짝!

화끈한 감각에 줄리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이어 얼굴에 불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내가 따귀를 맞았어?’

육체의 아픔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위세 높은 백작가의 장남이자 장차 베니에르가를 이어 갈 후계자는 부모에게도 손찌검당한 적이 없었으니까.

“천한 놈이…!”

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줄리앙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휙 돌았다.

새하얗던 양 볼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따귀를 맞는 줄리앙을 보며 파블로와 니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정신 차려야지. 할 말 있어서 불렀다며.”

덱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줄리앙은 덱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비틀린 입매는 평소 자신의 표정과 비슷해 보이지만, 고요하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 안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미, 미친놈인가!’

분노도 흥분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눈동자.

줄리앙은 그 안에서 광기를 읽었다.

대련이라고 하나 황녀에게 거리낌 없이 주먹을 내지르려 한 놈이다.

뒤늦게 공포가 스멀스멀 뒷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아직 할 말이 생각 안 나? 한 대 더 맞으면 생각나려나. 남을 쳤으면 너도 맞을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그게 당연한 거 아냐?”

“기, 기다려…!”

짝!

기어이 따귀 한 대를 더 때리자 줄리앙은 입이 트인 아이처럼 말을 쏟아 냈다.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제 그만 때려….”

덱스가 손을 뻗자 흠칫 팔을 올리는 줄리앙.

“아, 지금 사과하는 거야?”

“그, 그래. 사과할게. 내가 잘못했다. 제발 그만 때려.”

“응, 그래. 사과를 하면 받아 줘야지.”

씨익.

덱스가 붉게 물든 치아를 드러내며 다시 한번 밝게 웃는다.

“그러면 우리 이제 친구인가?”

히익!

덱스가 손을 뻗자 줄리앙이 경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줄리앙의 팔을 잡아 일으켰을 뿐이다. 여기저기 더러워진 옷을 손바닥으로 털어 주기까지 했다.

“치, 친구?”

“아, 친구 아니야?”

“친구 맞아! 맞지? 그렇지?”

“그래. 아직 통성명을 안 했네? 나는 덱스다. 너네는 이름이 뭐냐?”

“나는 베니에르가의 장남….”

“이름만 말해. 그런 건 안 궁금하니까.”

덱스가 슬쩍 눈에 힘을 주자 줄리앙은 흠칫 떨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따귀가 날아올 것 같았다.

“주, 줄리앙이다.”

“그렇지. 너희는?”

“…파블로.”

“…니앙.”

“그래, 이제 잘 지내 보자?”

웃으며 손을 내미는 덱스.

줄리앙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친구들, 다음에 보자. 먼저 간다.”

서둘러 소각장을 떠나는 덱스의 뒷모습.

남은 셋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줄리앙, 괜찮아?”

“많이 다쳤어?”

“아무래도 미친놈을 잘 못 건드린 것 같아….”

줄리앙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반면.

서둘러 식당으로 향하는 덱스는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다.

“애들한테 말해 줘야지~!”

새 친구를 사귀었다고 자랑할 셈이었다.

* * *

“흐음….”

전사와 마법 학부의 공통 필수 강의, ‘제국의 역사’ 시간.

레오는 불퉁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아 강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자동으로 잉크가 공급되는 비싼 필기구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노트가 깨끗한 것도 당연지사. 필수 과목이라 어쩔 수 없이 앉아 있기는 하나 애초에 아카데미 성적 따위에는 관심 없다.

‘클라인 녀석은 꽤 호의적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고….’

될성부른 녀석들을 찾아 키우는 것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클라인은 걱정하지 않아도 빠르게 성장할 녀석이고, 다른 싹수 있는 놈도 찾아 놓아야 한다. 어쨌거나 쪽수는 많으면 좋을 테니까.

강의실 맨 뒤에 앉은 레오는 동기들의 뒤통수를 주욱 훑었다.

입학시험에서 기억에 남은 녀석이 있긴 하다. 문제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다짜고짜 ‘너, 내 동료가 돼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곁에서 들려온 클라인의 목소리에 레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오후 강의가 끝나 다들 자리를 뜨고 있었다.

“도리안 공방은 가 봤어?”

“…그걸 깜빡했네.”

레오는 손바닥을 쳤다.

당장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하느라 무기에 대한 건 까맣게 잊었다.

“그런 것 같더라고.”

“생각난 김에 바로 가 볼까. 덱스 놈도 불러야겠네.”

마침 오늘 강의도 다 끝났고 내일은 주말이니 딱 좋았다.

클라인이 같이 가고 싶다며 합류했고 무무카는 동생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렇게 셋은 아카데미를 나와 도리안 공방이 있는 외구역으로 향했다.

공방은 외구역의 가장 북쪽, 성벽 대신 산맥이 이어진 지역 끝자락에 있다.

이 부근에 좋은 철이 다량 매장되어 공방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옛말이다. 이제는 철을 포함한 재료 대부분을 제국 곳곳에서 공수하고 있었으니까.

공방 입구에서 메달과 마석을 내밀자 금방 안쪽으로 안내받았다. 생각해 보니 이들 입장에서 아카데미 신입생의 무기 의뢰는 연례행사였다.

“흐음, 자네가 올해 수석이라고?”

장인 도리안은 거구의 사내였다.

머리칼과 수염이 허옇게 센 것을 보면 적어도 오십 대 이상으로 보이는데 근육질의 단단한 몸은 삼십 대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 검이 자네 건가? 어디 잠깐 좀 볼까? 뭐냐…? 이 쓰레기는?”

음, 몬젤의 검에 당장 짜증부터 내는 걸 보니 실력은 틀림없겠어.

“그거 그냥 주워서 막 쓰고 있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래도 최소한 검이라 부를 만한 놈을 들고 다녀라. 이건 그냥 쓰레기잖아.”

도리안은 공방 한구석 잡철이 모인 곳으로 검을 휙 던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의 물건을…!”

발끈한 레오가 한 소리 하려는데, 도리안이 검 하나를 내밀었다.

작업대에 널부러진 것들 사이에서 방금 집어 든 놈이다.

“빌려주마. 깨 먹어도 뭐라고 안 할 테니 검이 완성될 때까지 이걸 써. 아까 그 쓰레기보다는 나을 거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든 레오는 화내려던 것을 잊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예기와 절묘한 무게 중심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도리안 공방의 무구란 말이지?

과연 칼잡이들이 노래를 부를 만하다.

“아무리 그래도 뭐라고?”

“아뇨, 잘 쓰겠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잠깐 몸 좀 만져 보자.”

순식간에 분노가 치유된 레오.

도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으며 그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더니 팔과 등, 허리 근육 등을 면밀히 살폈다.

그냥 검 하나 골라 주려나 싶던 레오도 진지한 그의 행동에 잠자코 몸을 맡겼다.

“자네, 꽤나 강검을 즐기는 모양이군.”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쓰는 무기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본래 중량감 있는 강검에 기반을 둔 검술을 즐겼다. 그걸 몸의 근육으로 파악해 내다니 꽤 놀라웠다.

“그 검보다 길이는 이 정도 늘리는 건 어떤가? 조금 더 무거운 검이 좋겠지?”

“예, 이 녀석도 조금 가벼운 감이 있어요.”

“그래, 좋군. 달리 특별히 원하는 건 없나?”

“따로 없습니다. 어련히 잘 만들어 주시겠죠.”

“후후후.”

도리안은 꽤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되도 않는 요구를 고집하는 의뢰인이 태반인 판에 이 소년은 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새로 만들 검에 대해 대략적인 이미지를 끝낸 도리안이 다음으로 덱스에게 향했다.

“그리고 자네가 올해 수석 마법사인가.”

“자, 잘 부탁드립니다!”

“마법사치고 몸을 꽤 단련했구먼.”

도리안은 마석을 받아 들며 자연스레 덱스의 몸도 눈으로 살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과 잘 갈라진 전완근은 마법사보다는 전사에 가까운 몸이다.

“마법을 배우기 전에 이것저것 많이 했거든요. 사냥도 하고 나무도 하고.”

“허여멀건 녀석들보다 훨씬 보기 좋아.”

“그래서 말인데 이 마석을 지팡이 말고 무기에 박아 넣을 수 있을까요?”

“뭐라고?”

“근접전에도 대비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싶어서요.”

미묘한 표정을 하는 도리안을 항해.

덱스는 눈을 반짝이며 해맑게 말했다.

마법사라고 해서 언제나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으며 싸울 수는 없다.

이건 특히 레오와 대련하면서 절실히 깨달은 점이다. 마법사도 언제든 근접 전투가 필요한 상황이 올 수 있고 그럴 때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

“솔직히 검술은 그다지 자신 없어요. 둔기 같은 건 어떨까요?”

“하하하하!”

가만히 듣고 있던 도리안은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검을 만들어 달라고 했으면 당장 엉덩이를 차서 쫓아냈을 거다. 가끔 있거든, 마검사가 되겠다며 검을 만들어 달라는 애송이가.”

아마 아카데미 생도보다는 어느 귀족 도련님의 의뢰가 아닐까 싶다.

마검사라는 것이 이도 저도 안 되기 십상이라는 것 정도는 아카데미 생도라면 알고 있을 테니.

“얼마나 걸릴까요?”

“으음, 보통 일주일 정도면 되겠다만. 솔직히 지금은 장담을 못 하는 상황이다. 미스릴 수급에 문제가 생겼거든. 카미르의 광산이 몬스터에게 점거당했다는군.”

“카미르 광산이 말입니까?”

여태껏 가만히 듣고 있던 클라인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미르 광산은 반다이트 가문이 관리하는 곳이다. 가문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했다.

‘아!’

곁에서 듣던 레오의 뇌리에 한가지 기억이 스쳤다.

카미르 광산의 작업 중단. 그리고 몬스터.

회귀 전에도 분명 같은 일이 있었다. 분명 레오의 기억에 선명히 남을 정도로 떠들썩한 사건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레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돌았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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