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광산의 몬스터 (4)
레오의 제안은 간단했다.
일행이 멜핀의 눈을 피해 광산에 몰래 진입한 것이 아니라, 클라인의 고집에 못 이긴 멜핀이 처음부터 동행했다는 것.
클라인이 물었다.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뭐가 좀 달라지나?”
“공자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동행하기로 했다. 그게 관리 소홀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냐? 그리고 미믹 슬러그의 핵을 부순 것을 멜핀 경의 공으로 넘기면 정상 참작도 되겠지. 그러면 충분히 과를 상쇄시킬 수 있어.”
미믹 슬러그의 핵과 사냥 공적을 모두 멜핀에게 넘긴다는 뜻.
언뜻 레오가 손해 보는 제안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반다이트 백작뿐 아니라 가문의 기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차기 가주가 될 클라인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그 공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과를 공으로 상쇄시킨다…. 그렇구나!”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명분이 되지 않겠냐?”
“좋은 생각이긴 해. 하지만 그래서는 네가 활약한 내용이 사라지잖아?”
클라인은 내심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가문의 기사를 위해 나서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레오에게 똑같이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미믹 슬러그의 정체를 추론했잖아. 애초에 나 아니었으면 여기 올 생각이나 했겠냐? 거기다가 공략도 내 지시대로 한 것 아냐. 어? 생각해 보니까 내 지분이 한 99%는 되지 않나?”
“무슨 소리야. 마법사 없이 어떻게 공략해. 나를 빼놓으면 안 되지.”
“까놓고 말해서 넌 불 좀 피운 것 말고 없잖냐. 횃불로 지져도 똑같거든?”
“뭐 인마? 네 입도 불로 한 번 지져 줄까?”
투닥거리는 레오와 덱스를 보며 클라인은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맙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신경 써 줘서.”
“자식, 딱딱하기는,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
“…한 살 차이 가지고 되게 유세 떠네.”
“됐고, 보고서나 빨리 써. 졸려 죽겠다고.”
레오의 말대로 이미 깊은 새벽이다.
앞으로 두세 시간이면 해가 뜰 것 같다.
“그러게. 빨리 해치우자.”
“공자님, 보고서는 제게 맡기시고 쉬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멜핀 경에게 맡기면 분명히 있었던 그대로 작성할 테니까. 안 그래요?”
“…….”
“그러니 내가 쓸 겁니다. 내 서명까지 넣을 거예요. 그러면 멜핀 경도 더 이상 손댈 수 없겠지요.”
융통성이 없으니까.
웃음기를 머금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클라인.
멜핀은 마음을 굳혔다.
자신의 남은 평생을 반다이트 가문과 함께할 것을, 미래의 가주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 * *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올 때는 급하게 왔지만 가는 길은 중간중간 휴식도 취해 가며 느긋하게 갈 예정이다.
“공자님, 호위도 없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마차에 오르는 클라인에게 멜핀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공자를 이대로 보낸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기에.
“괜찮습니다. 설마 내 실력 모르는 거 아니죠? 거기다 황립 아카데미의 학부 수석 둘이 같이 있는데 그렇게 걱정만 할 겁니까?”
그렇게 말하니 멜핀도 할 말이 없다.
열넷에 이미 중급 기사 수준을 상회하는 클라인 공자, 거기에 그를 꺾고 수석을 차지했다는 레오. 그리고 마법 학부의 다른 두 명까지.
웬만한 도적떼로는 흠집도 내지 못할 전력인 것이 사실이다.
“이만 출발할게요. 멜핑 경도 아버님께 잘 보고드려 주세요.”
“맡겨 주십시오.”
배웅을 마친 멜핀은 곧바로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쉴새 없이 말을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으니까.
마침내 반다이트 성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멜핀 경? 광산에 있어야 할 경이 갑자기 무슨 일인가?”
집무실 책상에서 빼곡한 서류들과 싸우고 있던 반다이트 백작이 놀란 얼굴로 멜핀을 맞았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 달려왔습니다.”
멜핀의 보고라면 광산에 관계된 것일 터.
설마 더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일까.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반다이트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그의 입에 집중했다.
“말해 보게.”
“광산의 몬스터를 특정하고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놀란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멜핀은 젊지만 결코 언동이 가벼운 자가 아니다.
그의 보고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럼에도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어젯밤 클라인 공자께서 아카데미의 동료들과 함께 광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멜핀은 자신이 직접 본 것을 토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반다이트 백작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클라인 일행이 고집을 부리며 광산에 진입했다는 부분에서는 미간을 찌푸렸고, 화염 마법으로 몬스터의 정체를 드러내게 했을 때는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침내 핵을 부수고 사냥에 성공한 대목에서는 작은 감탄을 뱉기도 했다.
“허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여기 보고서입니다.”
멜핀은 구두 설명을 모두 끝낸 후에야 보고서를 내밀었다.
보고서 표지에는 클라인의 서명이 남아 있었다.
“미믹 슬러그. 나도 처음 듣는 몬스터네. 그것을 아카데미의 생도가 추측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미 사냥 방법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였습니다.”
“레오라….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올해 전사 학부 수석을 했다는 그 생도입니다.”
“아, 기억났어. 클라인 녀석과 싸움박질했다는 그 친구였군. 하하핫-!”
긴장이 풀린 백작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골칫거리였던 광산의 일이 스르르 해결된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다.
거기에 더해 검술밖에 모르고 무뚝뚝하던 아들은 아카데미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있는 것 같으니 흐뭇하기 그지없다.
“으음? 보고서의 내용이 아까 말한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
눈으로 보고서를 훑던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멜핀에게 들었던 내용과 다른 부분이 몇 군데 보였기에.
“예,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제가 방금 말씀드린 내용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 보고서는 클라인 공자가 직접 작성한 내용입니다.”
“…그렇군.”
멜핀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의 공적까지 가로채 가며 질책을 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공자의 절친한 친구라면 더욱더.
“주군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점. 어떠한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반다이트 백작은 굳은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멜핀에게 다가갔다.
멜핀 앞에서 잠시 침묵하던 백작이 툭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자네 말을 듣지 않은 내 아들놈 잘못 아닌가?”
“예?”
“그리고 어린 자식의 잘못은 보통 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이라네.”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명령을 지키지 못한….”
“하지만 내가 꽤 속이 좁은 사내라서 말일세. 치부를 드러내는 건 영 꺼려지는군.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 하나만 합세. 자네만 입을 꾹 다물어 주고, 이 보고서대로 공표하면 내 체면이 깎이지 않을 것 같네만.”
“주군….”
멜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세상에 이런 주군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그러면 이제 경에게는 상을 내릴 수밖에 없겠군. 하하핫!”
백작은 다시 유쾌하게 웃었다.
큰 근심거리가 사라지니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
게다가 기특한 짓을 하는 아들놈을 생각하니 더욱 기꺼웠다.
백작의 웃음소리가 잦아들 때쯤 멜핀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보고드릴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꺼낸 것은 천에 싸인 검은 파편.
서너 조각으로 부서졌지만 대략 어른 남자의 주먹 크기의 구형(球形)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게 뭔가?”
“미믹 슬러그의 핵입니다.”
백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레오 생도가 이 말을 꼭 함께 전해 달라 했습니다. ‘마탑에서 비싸게 사려고 할 것이니 반드시 뜯어내시라.’고.”
수십 년간 등장하지 않았던 몬스터의 핵.
연구 가치만으로도 꽤나 높게 평가받을 것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이쪽의 요청을 일부러 무시했던 괘씸한 마탑을 쥐고 흔들어 볼 만한 좋은 패이기도 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얼음물이라도 들이켠 듯 가슴이 시원했다.
“하하하핫-! 그 친구에게 제대로 값을 쳐 줘야겠어. 하하하하!”
레오의 이름이 다시 한번 백작의 머리에 깊숙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기사 멜핀은 마법사를 포함한 병력을 이끌고 카미르 광산 내부에 진입했다.
광산 채굴을 재개하기 전 최종 안전 점검.
수 시간에 걸친 수색 후 안전이 확보되었음이 공식화했고, 당일 오후부터 카미르 광산은 정상화 준비에 돌입했다.
늦어도 월요일부터 채굴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서신이 반다이트 백작에게 전해졌다.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불안감이 커지던 황제파는 안도했고, 꼬투리를 잡아 황제파를 흔들어 볼까 했던 후작파는 아쉬움을 삼켰다.
수십 년 만에 실체를 드러낸 미믹 슬러그에 대한 관심도 집중됐다.
맨입으로 미믹 슬러그의 핵을 삼켜 보려던 마탑은 부랴부랴 매수 의사를 타진해 왔지만 그간 수모를 감내했던 반다이트 백작이 호락호락하게 거래해 줄 리 없다.
거래를 할 듯 말 듯 마탑의 애를 태우던 중 황궁 마법사가 끼어들었고, 황궁 마법사와 마탑의 입찰 경쟁이 열렸다.
결국 미믹 슬러그의 핵은 황궁 마법사의 차지가 됐다.
이미 핵을 확보한 것처럼 보고했다가 말을 뒤집은 마탑 사무장 유미르는 나중에 징계받았다는 풍문이 돌았다.
상인회의 거래소도 난리가 났다.
채굴 정상화 소식과 함께 미스릴 시세는 급등할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로 하락했다.
실물의 시세가 그리했으니 매수권, 매도권은 등락 폭은 훨씬 심했다. 매도권의 가치는 폭등했고 매수권의 가치는 폭락하여 휴지 조각보다 못하게 됐다.
“또 떨어졌어! 으아아악-!”
“제발 팔아 줘! 당장 팔아 달라고!”
매수권을 가진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처분하고자 거래소 창구에 달려들었지만 팔려는 사람만 있고 사려는 사람이 없으니 제대로 거래가 이루어질 리 없다.
“내 돈! 내 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따서 갚으면 된다며!”
밀고 밀치고, 울고불고하며 외치고 화내는, 거래소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
지오르는 그 광경을 현장에서 겪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매도권을 든 손이 덜덜덜 떨린다.
엊그제 계약한 증서의 매도 권리 가격과 현재 시세를 확인했다.
자그마치 200배 차이.
그것도 실시간으로 차이가 계속 벌어지는 중이다.
‘지금 팔아야 하나?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나?’
머리가 어질하고 입이 바싹 마른다.
노련한 상인의 평정심 같은 건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지금 당장 레오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