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33화 (33/127)

33. 송곳은 삐져나오기 마련 (2)

이오페가 레오를 지적하자 일부 생도들이 웅성댔다.

“평민에게 전략 전술을?”

“제대로 알 리가 없잖아.”

전쟁의 전략 전술은 지휘관에게 필수적인 능력.

그 때문에 귀족의 후계자 수업에 빠지지 않는 항목이었으며, 귀족만의 소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다 들린다, 새끼들아.’

당연히 레오도 귀족들처럼 선생을 두고 전략 전술을 배운 적은 없다.

직접 사선을 넘나들며 겪은 갖가지 실전 전투 경험이 그의 선생이자 교과서였으니까.

“흐음… 일단 성 밖의 물자부터 징발해야겠군요. 수성하든 뭘 하든 일단 식량부터 확보해야 할 테니까.”

레오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싸울 준비부터 해야 한다. 무기와 식량을 점검하고 확보해야 그 뒤의 작전을 세울 수 있으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일단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확보해야 한다. 물론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은 징발이고,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성 밖 주민들의 물자를 강제 징발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성 밖은 피해를 입는다. 적군이 약탈하도록 둘 바에야 이쪽에서 먼저 징발하는 게 나았다.

“…계속하게.”

“남은 시간이 이틀하고 반나절이라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요. 좀 더 여유가 있다면 성 밖에 함정 설치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수성전만 준비하기에도 부족하겠네요.”

“자네도 농성을 선택하는 건가?”

“아뇨, 처음부터 농성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병력이 열세라면 성벽의 도움을 받아 싸우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죠. 그런데 저 경우에는 식수가 좀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식수.

처음 언급되는 단어였다.

이오페의 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지도를 보면 성내로 이어지는 강의 지류가 성의 식수원인 것 같은데, 혹시 그 외의 식수원이 있습니까? 우물이나 지하수 같은 거요.”

“…없다. 말한 대로 저 지류가 유일한 식수원이다.”

“그러면 답 나왔네요. 제가 공격 측 지휘관이라면 성으로 향하는 물줄기부터 끊을 겁니다. 그러니 수비 측은 무조건 성 밖에서 적을 맞이할 수밖에요.”

“하지만 상대 병력은 아군의 두 배이다. 성 밖에서 상대하게 되면 피해가 엄청날 텐데.”

“그나마 한번 붙어 보기라도 하는 게 낫지, 아무것도 못 하고 성안에서 말라 죽는 건 최악이죠.”

레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최악의 선택지를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식의 가벼운 대답.

그렇지만 논리의 허점이 없으니 반박할 수 없다.

“좋다. 그러면 성 밖에서 뭘 할 수 있지?”

“병사의 훈련도는 비슷하다 하셨습니다. 게다가 양측 다 전투 마법사가 없으니 변수는 더 줄일 수 있겠군요. 아군은 숫자가 적지만 중보병을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지키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니 굳이 성이 아니더라도 더 유리한 지형을 점령해 지키기만 하면 그만이겠네요.”

“자네가 생각하는 유리한 곳은 어디지?”

“흐음, 저라면 여기에 진을 치겠습니다.”

레오가 가리킨 곳은 강에서 조금 떨어진 평야의 한가운데.

“저곳에 진을 치고 자리를 선점하면 적군은 강을 쉽게 건너지 못할 겁니다. 도강하여 진을 치기 전에 계속해서 견제받을 테니까요.”

“흐음.”

물 흐르는 듯한 설명.

이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도들도 귀를 기울이며 레오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는 급할 것이 없어요. 적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죠. 아무리 얕은 물이라도 진형을 제대로 갖추며 도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도강하는 동안 전투력은 약해지기 마련이죠.”

“적에게 진형 유지가 어려운 환경을 강요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상대는 싸우기 힘들고 우리에게는 유리한 장소를 전장으로 만드는 것이 핵심이겠군요.”

아군에게 쉽고 적에게 어려운 싸움을 하라.

전략 전술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기본적인 내용.

그럼에도 그 당연한 것을 실전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으니, 이오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적이 도강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지?”

“뭘 어째요. 그냥 죽치고 앉아 있는 거지.”

“…음?”

“이쪽은 급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열흘만 버티면 원군도 올 테고, 원군이 더 늦어진다 해도 어느 정도 식량을 자체 조달하면서 버틸 여력은 있을 것이고요. 서로 죽치고 견제만 하는 상황이라면 일부 병력을 떼어서 사냥조를 운영해도 되겠네요.”

수비 측이 강 건너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상황.

공격 측은 무조건 도강해야 한다. 하지만 맨몸으로 건널 만한 얕은 강이라 해도 움직임에 제약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진형을 흐트러질 것이고 상대 공격에 빠른 대응도 불가능하다.

무사히 도강해서 반대편 강가에 올라선다고 해도 그 이후가 문제다. 단단한 상대 중보병은 이쪽이 진형을 제대로 꾸릴 공간도 주지 않고 밀어낼 것이다.

“공격 측이 피해를 감수하고 도강을 선택한다면 어쩔 텐가? 병력의 이점을 살려서 수비 측이 전부 커버할 수 없도록 넓은 범위에서 동시에 도강한다면?”

이오페는 필사적으로 질문을 이어 갔다.

서로 수를 주고받는 논쟁.

그녀는 어느새 공격 측의 입장이 되어 레오의 다음 수를 기대하고 있었다.

“굳이 전부 상대할 필요는 있을까요? 진형의 중심에 중보병을 세우고 상대 기병의 도강에 대비할 겁니다. 나머지는 기병의 기동력으로 대응하고.”

“속도로 면적을 커버하겠다는 뜻이군.”

“그렇죠. 도강하느라 물을 잔뜩 먹어 무거울 테니, 마른 땅으로 올라오는 순간 기병에게 작살나는 거죠.”

이오페는 공격 측 지휘관이 되어 연상했다.

상대는 교묘한 위치에 진을 치고 도강을 견제하며 시간을 끈다.

결국 피해를 감수하고 도강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

병력 손실은 피할 수 없고 힘겹게 도강에 성공한 아군을 기다리는 것은 날쌘 기병과 체력을 비축한 중보병.

‘완패로군.’

어떻게 해도 이기는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훌륭한 대답이다. 가산점을 주지. 자네는 좋은 지휘관이 될 수 있을 것 같군.”

“칭찬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강의를 마치겠다.”

강의실을 떠나는 이오페의 입꼬리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 * *

교수실에 돌아간 이오페는 방금 전 레오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공개한 지도의 성채 요새는 십수 년 전 한때 반란군에게 넘어갔던 제국 동부의 로셀린 성이다. 또한 성을 다시 함락시킨 주역은 당시 제국 기사단을 이끈 이는 현 아카데미의 전사 학부장 카르파와 참모 이오페였다.

즉 제국이 공격 측이었던 셈.

당시 카르파는 반란군이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경기병과 경보병으로 빠르게 진군하는 것을 택했다.

두 배에 가까운 제국의 병력에 농성을 선택한 반란군이 성에 틀어박히자, 이에 제국군은 성을 포위한 뒤 성으로 이어진 물줄기를 끊으며 닷새 만에 항복을 받아 냈다.

무혈입성의 승리였다.

‘전술 지도만 보고 그때와 같은 전략을 제안하다니.’

당시 해당 전략을 제안한 장본인이 이오페 자신이었기에 레오의 대답이 더욱 놀라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겁쟁이인 데다 멍청한 놈들이었어. 나라면 저곳에 진을 치고 싸웠을 거다.]

요새에 무혈 입성한 카르파가 손가락이 가리킨 곳.

레오가 진을 치겠다고 한 바로 그 위치였다.

이유 또한 카르파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똑같았다.

‘그게 전장 경험도 없는 열다섯 살 꼬마의 대답이라고?’

이오페는 허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재? 아니면 몸속에 베테랑 군인이라도 들어 있나?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는 것이 우스워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 * *

이오페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 메이드가 기다렸다는 듯 강의실 내부에 들어왔다.

레오의 담당 메이드 일레인이다.

“레오 님, 면회 요청이 있습니다.”

“면회요? 저요?”

레오는 면회 요청이라는 말에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면회를 하면서까지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외부인이 있던가? 지오르 정도가 떠올랐지만 언질도 없이 찾아올 만한 인물은 아니다.

“누가 찾아왔는데요?”

“반다이트 백작님의 가신, 기사 멜핀 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거절하시겠습니까?”

“아! 아뇨, 지금 면회장으로 갈게요.”

“안내하겠습니다.”

레오는 일레인을 따라 강의동을 나섰다.

중앙 광장을 지나자 햇살에 반짝이는 넓은 호수가 보인다.

그 호수 너머에 있는 면회장은 아마 아카데미 부지에서 가장 경관 좋은 장소일 것이다.

면회장에서 바라보는 호수와 정원의 경관은 황제에게도 칭찬받은 바 있을 정도니까.

레오는 면회장의 야외 테라스에서 금방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여기까지면 됐어요. 고마워요.”

“그럼.”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일레인.

‘일전에 화난 건 진작 풀린 것 같은데.’

매일 청소되는 방과 언제나 깨끗이 관리되는 옷장을 생각하면 그녀는 일류 메이드임이 틀림없다.

그런 것에 비하면 무뚝뚝한 성격은 그다지 흠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잠시 일레인의 뒷모습을 보던 레오는 이내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레오를 발견한 멜핀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웃는다.

“기사님! 오랜만이에요.”

“레오 도련님,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냥 편하게 부르시라니까요.”

레오는 볼을 긁적이며 앉을 것을 권했다.

용병 일을 하며 만난 기사들은 대부분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했다. 개중에는 실력도 없으면서 미천한 용병하고 말도 섞지 않겠다는 부류도 있었다.

그런 기사에게 이렇게 깍듯한 대접을 받자니 영 익숙지 않다.

그것도 단순히 클라인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에휴, 마음대로 하세요.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슨 일로?”

“반다이트 백작님의 뜻을 받아 뵈러 왔습니다. 주군께서는 지난 광산 건에 대해 도련님께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계십니다. 직접 도련님을 만나 감사를 전하고 싶어 하셨지만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인지라 제가 대신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쑥스럽네요. 그렇게 거창하게 감사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예의상 겸양을 떨었지만 반다이트 백작이 이렇게 고마워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광산의 문제가 지속되었다면 필시 백작을 향한 정치적 공격이 시작되었을 테니.

“나중에 꼭 한번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학기 중에는 곤란하실 것 같으니 휴식기에 여유 있게 방문해 주시는 건 어떨는지요.”

반다이트령은 중앙 대륙의 서쪽 국경에 인접해 있다.

멜핀의 말대로 편도로 열흘은 잡아야 하는 일정인 만큼 학기 중에 방문하기는 곤란하지만 휴식기라면 문제없다.

게다가 귀족의 성에 초대를 받는 것은 회귀 전 경험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니 제법 기대가 된다.

“기꺼이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친구분들도 꼭 함께해 주십시오. 그리고 가주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약소한 사례금이지만 받아 주십시오.”

“친구의 일이잖아요. 사례금을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고로 어른이 주시는 걸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친구 아버님께서 주시는 거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주세요.”

표정 관리, 표정 관리.

가죽 주머니가 제법 묵직하다. 이따 혼자 있을 때 열어 봐야지.

사례금이 전부가 아닌지 멜핀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목함을 꺼냈다.

“이게 뭐죠? 열어 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목함 속에 든 것은 동전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타원형 금속.

세 개의 방패 문양이 고급스럽게 음각되어 있었다.

“반다이트 가문의 징표입니다.”

레오의 미간이 움찔 움직였다.

귀족 가문의 징표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주군께서는 도련님을 가문의 은인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적어도 반다이트령의 이들은 이 징표를 가진 도련님을 주군의 귀한 손님으로 여기고 헌신을 다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유, 과분한 대우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꽤 마음에 든 얼굴이신데요?”

“하하핫, 들켰나요? 솔직히 말하면 너무 든든합니다.”

가문의 징표를 건넨다는 것은 백작 개인이 아니라 가문의 입장에서 상대를 은인으로 여긴다는 의미.

이는 장차 반다이트 가문을 우군으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건 상상 이상이야.’

기숙사에 돌아온 레오는 방에 설치된 금고에 반다이트의 징표를 보관했다.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귀족을 우군으로 둘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이렇게 든든할 줄 몰랐다.

‘게다가 초대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내 줬으니….’

제국 100주년 기념식 그리고 보르트 왕국의 침공.

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반다이트령이니만큼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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