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학년 교류전 (1)
아카데미 신학기 2주 차에는 ‘학년 교류전’이라는 유명한 행사가 있다.
교류전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신입생과 2학년뿐이지만.
공식적으로 학년 교류전은 두 학년 대표가 대련을 통해 선후배 간 우애를 다지는 행사라 소개되어 있으나, 이면에는 신입생에게 2학년의 압도적인 실력 차를 실감시켜 겸손함을 배우고 아카데미 커리큘럼에 더욱 진지하게 임하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수십 년의 아카데미 역사 속에서 항상 선배가 승리를 가져간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든 천재는 등장했으니까.
그 때문에 올해 학년 교류전을 준비하는 2학년 대표들은 작년과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빈 강의실에 모인 전사 학부 2학년 4인.
“명예를 아는 기사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법이지.”
2학년 수석, 거대한 대검을 쓰는 베일이 읊조렸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명예’와 ‘기사’.
언제나 기사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기사도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가슴이 뜨거운 남자다.
“너 몇 주 전만 해도 클라인하고 붙어야 할 것 같다고 울상이지 않았냐?”
“…그랬을 리가 없는데?”
“내가 지금 남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왜 하필 그 녀석이 차석이냐고….”
눈알을 굴리며 시치미를 떼는 베일을 앞에 두고, 2학년 차석 아르망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울부짖었다.
클라인이 소드 엑스퍼트 중급 수준에 올랐다는 소문은 입학식 때 이미 전부 퍼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엑스퍼트 중급에 이르러도 우수하다고 평가받을 판에, 이미 그 경지로 입학한 후배를 상대해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하기만 하다.
“왜 하필이면 올해 저런 괴물들이 들어 온 거지? 작년에는 선배한테 두들겨 맞고 올해는 후배한테 두들겨 맞고. 우리 학년은 완전히 중간에 끼었어, 샌드백이야.”
“다들 약한 소리 하지 마라. 지더라도 화끈하게 멋진 선배의 모습을 보여야 할 거 아냐.”
브룩이 희고 고른 건치를 환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2학년 중 유일한 무투가라 선발되었다지만 그 또한 강자다.
사실 그냥 강자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전사 학부 2학년 동기 중 그에게 잡혀 바닥에 메다꽂히지 않은 이가 손에 꼽을 정도니까.
“그래 브룩, 너만 믿는다!”
“까짓 웨어울프가 별거야? 너도 만만찮은 괴물이야!”
브룩의 두툼한 목과 불쑥 솟은 승모근이 이때만큼 믿음직스러워 보인 적이 없다.
덩치로 어디서 밀려 본 적 없는 2학년 수석 베일조차도 브룩에게는 한 수 접어 줄 정도.
그의 꿈틀거리는 대흉근과 머리통만 한 이두근 사이에 끼이면 트롤 모가지도 단숨에 부러지리라.
“나도 할 만해 보이는데? 이번에 아르망이 고생 좀 하겠어.”
“크루즈, 너마저!”
창술사 크루즈도 여유를 보였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이어 가문의 둘째라고 했지.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창술로 유명한 마이어 가문이지만 그 재능이 온전히 장남에게 이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이번 상대는 비교적 평범하다는 차남이다. 그러니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너희만 믿는다!”
친구들의 자신감에 아르망도 기운이 난 듯 쾌활하게 답했다.
“까짓거 나 하나 정도는 질 수도 있지!”
물론 본인이 이길 생각은 없는 듯했지만.
* * *
교류전 걱정이 커지는 것은 마법 학부 2학년도 마찬가지.
“야, 황녀님이 입학시험 때 플레임 스피어를 썼다며? 그거 진짜야?”
마법 학부의 수석 제트라가 물었다.
2학년 수석인 본인도 아직 3서클 위계인 파이어볼 컨트롤에 애먹고 있다. 그런데 후배는 4서클 마법으로 입학시험을 치렀다니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아니, 애초에 4서클이면 당장 졸업해도 되는 수준 아닌가?
“그래, 4서클 인증하고 입학하셨다더라. 교수님한테 들었으니 확실한 정보야.”
차석 야피르가 의욕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작 그 4서클 후배를 상대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황녀님을 이기고 수석을 한 놈은 또 뭐냐?”
“나도 몰라. 소문으로는 업어치기 했다는데?”
“뭐야, 그게. 그냥 또라이 아냐?”
제트라는 답답함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법사의 대련에서 하나의 서클 차이는 매우 큰 벽이다. 그럼에도 4서클인 황녀가 패배했다면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녀석도 4서클이거나, 아니면 황녀가 실전 전투에 매우 취약하거나.’
황녀의 재능은 대마법사 메퀸토에 비견될 정도.
오히려 메퀸토보다 어린 나이에 4서클을 이루며 기대받고 있다.
그런 그녀 이외에 또 4서클의 신입생이 있을까?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황녀의 전투 경험 부족이 패인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신입생 수석의 전투 경험과 센스가 그만큼 좋다는 의미이지만….
‘실전 경험은 무조건 내가 위니까.’
길드 임무를 통해 실전 경험도 많이 겪었으니 충분히 해 볼 만 하다는 계산.
“하아,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당하고 나면 나중에 불러 주는 데도 없겠지?”
정작 차석인 황녀와 상대하게 될 야피르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4서클 마법사를 상대할 자신도 없고, 그게 황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황궁 마법사의 꿈은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최소한 백작가의 마법사라도 되고 싶었는데….
졸업 후 진로 걱정에 가슴이 답답한 야피르였다.
“페르시하고 유니트는 요새 뭐 하냐? 잘 안 보이던데.”
“몰라, 둘이 요즘 바빠 보이던데. 특훈이라도 하려나?”
“…그래, 그래도 둘이 이겨주면 아예 쪽팔리진 않겠다. 그치?”
“…….”
짧은 침묵.
“에휴….”
두 사람의 한숨을 끝으로 자연스레 대화가 끝났다.
* * *
“레오, 클라인, 무무카, 패트릭. 너희가 전사 학부 대표다. 출전은 호명의 역순이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넷을 호출한 이오페가 간단명료하게 용건을 전했다.
교류전 일정을 미리 알고 있던 선배 대표들과 달리 신입생 대표들은 이제 막 내용을 전해 들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덤덤히 답하는 클라인과 눈을 반짝거리며 의욕을 내보이는 패트릭.
학부를 대표한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내빈 앞에서 자신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명예이자 기회다.
“모두 알겠지만 올해도 황태자께서 참관하실 예정이다. 그 외에도 많은 귀빈이 참석하겠지. 그러니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이오페는 생도들의 얼굴을 한 명씩 바라보며 강조했다.
가문의 후계로 확정된 클라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셋은 진로를 고민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귀족에게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선보일 수 있는 이번 행사는 생도들에게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렇군요….”
생각에 잠긴 레오.
‘황태자는 어떤 인물이지?’
제국의 황태자, 슈나이더 드메이르 폰 아슐렌.
그는 회귀 전 역사에서도 그다지 깊은 인상을 주지 못한 인물이다. 보르트 왕국과 전쟁 초기에 전사해 버렸기 때문에.
황태자의 신분으로 직접 전선의 선봉에 설 정도로 책임감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 2황자가 황태자로 책봉되고 4대 황제에 즉위했다.
‘지금은 전쟁 대비부터야. 황태자는 나중에 생각하자.’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넉 달 앞으로 다가온 제국 100주년 기념식.
성대한 기념식을 위해 제국 각지는 진작부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이번 아카데미의 행사도 평년보다 크고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라고 했다.
회귀 전의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성대한 기념식 다음 날 새벽, 보르트 왕국의 병력이 국경을 넘어 반다이트 백작령을 침공한다. 반다이트 백작은 기념식 참석을 위해 황궁으로 자리를 비웠고 클라인 또한 아카데미에 있을 때다.
전날 기념식으로 긴장이 풀어진 데다 총지휘관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기습당한 반다이트군은 힘없이 패퇴했다.
이후 반다이트 백작이 전선에 복귀하고 클라인도 합류하며 연이은 패전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영지의 절반 이상을 내준 후다.
소드 마스터인 반다이트 백작이 나섰음에도 전황을 크게 뒤집지 못한 이유.
그것은 보르트 왕국에도 소드 마스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트 왕국의 소드 마스터, 광검(狂劍) 카바넬.’
공식적으로 대륙에 알려진 소드 마스터는 아슐렌 제국의 반다이트 백작 한 명뿐이었지만, 보르트 왕국은 단 한 번의 기습을 위해 수년간 소드 마스터의 존재를 숨겼다.
양국의 소드 마스터가 맞붙으며 전선이 교착되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10년간 이어진 전쟁의 초기 황태자가 전사했다. 이후 3황녀가 아카데미 내부에서 암살됐다. 내외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2황자가 황위 계승자가 되었고 이후 4대 황제로 즉위했다.
전쟁 끝물에는 반다이트 백작마저 전사했다.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고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더니 검은 마물이 등장하며 대륙이 멸망 위기를 맞았다.
하나같이 큰 사건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보르트 왕국의 침공은 단연 그 시작이었다.
‘일어날 전쟁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할 수 있는 대비를 해야 해.’
10년간 이어진 전쟁 때문에 제국 각지가 불안에 떨었다.
가족을 부르려 한 이유도 가장 안전했던 수도에 있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 외부인 초대도 가능합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무무카가 물었다.
“물론이다. 아카데미 내부에 외부인을 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니 잘 활용하도록.”
“그래, 무무카 너는 여동생을 부르면 되겠네!”
클라인의 맞장구에 무무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의욕을 낼 이유가 하나 늘었다.
“다들 좋은 모습을 기대하겠다.”
충분히 동기 부여가 된 것으로 판단한 이오페는 흡족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빈 강의실에 남은 네 사람.
오후 수업도 모두 끝났기 때문에 다들 특별한 일정은 없는 상태다.
“이왕 모였는데 우리끼리 훈련 좀 해 볼까?”
“그, 그래도 괜찮아?”
클라인의 제안에 패트릭이 반색했다.
“혼자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래도 굳이 억지로는….”
“아냐! 너무 좋지!”
강자와의 훈련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패트릭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 번씩 서로 대련하고 결과를 복기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언하는 방식으로 해 보자.”
“괜찮은 방법이네.”
“오러는 신체 강화에만 사용하고.”
“그렇게 하지.”
슬슬 걸어 연무장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정한 순서에 따라 무무카와 패트릭이 먼저 연무장 중앙에 섰다.
“자, 잘 부탁해.”
“잘 부탁한다.”
날을 죽인 연습용 창을 쥔 패트릭이 무무카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덩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압감에 절로 몸이 굳어질 것 같다. 서로 다치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흡-!
무무카가 먼저 움직였다.
창과 너클.
무기의 상성만 보면 창이 압도적이었지만 무무카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혔다.
“읏!”
순간의 잡념.
그것이 패트릭의 반응을 늦게 했다.
‘물러서면 안 된다.’
어설프게 몸을 빼려 하기보다는 맞서 달려들며 타이밍을 뺏고 기회를 만드는 편이 좋다.
“하앗-!”
남은 망설임을 떨쳐 내려는 듯 강하게 숨을 내지르며 발을 구르는 패트릭.
아직 부족한 기술이지만 이 타이밍이라면 충분히 먹히리라 확신했다.
마이어식(式) 비전 창술.
섬전(閃電).
트롤도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다는 가문의 비전 창술.
뻗어나간 초격이 무무카의 목을, 이격이 명치를 노렸다.
아니, 노리려 했다.
인간을 크게 상회하는 웨어울프의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창끝을 향해 무무카의 동공이 확대됐다.
찰나의 순간, 초격이 목을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몸을 틀며 창신을 잡아챘다.
키기기기긱-!
너클과 창신이 마찰하는 쇳소리가 손아귀에서 울렸다.
당황한 패트릭.
무무카는 회수되는 창을 역으로 당겼다.
상상 이상의 괴력에 패트릭이 두 발을 땅에 박아 넣으며 겨우 버텨 냈지만, 그사이 무무카는 창을 당기면서 그대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아앗!”
패트릭의 짧은 비명과 동시에.
파앙-!
그 얼굴 앞에서 공기가 터졌다.
눈앞에 무무카의 커다란 주먹이 멈춰 있었다.
주르륵-!
뒤늦게 패트릭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