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학년 교류전 (4)
황립 아카데미.
공식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아카데미는 황실 직속 조직이다.
따라서 최고 수장은 황실의 인물이어야 하며 아카데미의 두 학부장 위에 따로 교장 직책이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아카데미에서 황실의 인물이 반드시 참여하는 두 가지 행사가 있다.
졸업식과 학년 교류전인데, 특히 교류전 행사는 귀족들에게 있어 아카데미의 축제임과 동시에 황족과 고위 귀족을 접할 수 있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황족에게 얼굴을 비추기 위해, 아카데미의 유망주를 발굴하기 위해, 그저 축제를 즐기기 위해.
다양한 이유로 각지에서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오늘을 위해 중앙 광장에는 특설 연무장과 그것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객석 스탠드가 준비되었다.
연무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은 황태자의 좌석.
그 양옆에 두 학부장인 카르파와 메퀸토가 자리할 예정이다.
마법으로 음성을 증폭시킨 안내가 흘러나왔다.
[제국의 첫 번째 황자이시며 황위 계승 1순위인 슈나이더 드메이르 폰 아슐렌 황태자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내빈 여러분들은 모두 기립하시어 황실에 대한 경의를 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탠드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선다.
곧 황태자 슈나이더 드메이르 폰 아슐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
황태자가 손을 흔들자 군중들이 환호했다.
오늘 마련된 객석은 족히 일천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준이다.
생도들과 외부에서 방문한 귀족만으로는 절반도 채우지 못하지만 빠진 좌석 없이 빽빽하다. 평민에게도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마법 학부장 메퀸토의 연설을 끝났고.
퍼벙-! 펑!
마법 폭죽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 놓으며 화려하게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슈멜린 공, 잘 지내셨습니까? 꼭 1년 만이군요.”
“태자 전하, 자주 안부를 여쭙지 못해 송구합니다.”
“부디 예전처럼 대해 주세요. 폐하께서 요즘 부쩍 적적해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 또한 문득 스승님이 그리울 때가 있거든요.”
황태자 슈나이더는 카르파의 얼굴을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카르파는 자신에게 처음 검을 가르친 검술 스승이자 황제가 마음을 터놓는 몇 안 되는 친우다. 지금이라도 그가 황궁에 돌아온다면 얼마나 든든할지….
하지만 황제도 떠나는 그를 잡지 못했다. 이렇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이 황태자인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말씀대로 너무 격조했던 것 같습니다. 제 불찰이군요.”
“슈멜린 공, 그 말씀은?”
“조만간 폐하를 알현토록 하겠습니다. 늦어도 기념식 전에는 찾아뵙지요.”
“정말이십니까? 폐하께서도 너무 기뻐하실 겁니다.”
슈나이더가 반색하며 카르파의 양손을 잡았다.
지금껏 몇 번이나 청해도 완곡하게 거절하기만 했던 카르파가 처음으로 긍정적인 답을 들려주었으니까.
“무슨 말씀을 그리 즐겁게 나누십니까?”
마침 연설을 마친 메퀸토가 자리로 돌아왔다.
“하하하, 슈멜린 공께서 조만간 황궁에 들르겠다고 하십니다.”
“오호라- 드디어 고집을 꺾으신 게군요? 폐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겠습니다.”
메퀸토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카르파를 조용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 짓궂은 장난기가 섞였다.
‘다시는 황궁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더니?’
‘거참, 오지랖 좀 적당히 부리시오.’
메퀸토와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카르파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크흠흠! 전하, 올해 대련은 특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빈말이 없는 슈멜린 공의 말이니 정말 기대됩니다.”
“황녀 전하도 참가하시는 마법 학부의 대련도 기대하시지요.”
[지금부터 교류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전사 학부의 대련이 먼저 시작될 예정입니다. 호명하는 대련자는 연무장에 입장해 주십시오. 전사 학부 신입생 대표 패트릭 마이어! 2학년 대표 크루즈 예거!]
와아-!
본 행사의 시작과 함께 다시 한번 관중들의 함성이 터졌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환경에서 아카데미의 매년 열리는 이 교류전은 모두가 기다리는 이벤트였다.
“후우….”
첫 번째 대련에 나서게 될 패트릭은 눈을 감고 길게 호흡을 뱉었다.
뜨거운 함성이 거대한 특설 연무장 전체를 흔드는 듯하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손에 익은 창을 쥐고 일어섰다.
북부 대륙에 위치한 본가는 이곳에서 매우 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본가에서 온 이는 없을 것이다.
상관없다. 손바닥이 터지고 다시 아물고 굳은살이 박이는 것을 셀 수 없이 반복하며 창을 놓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첫판부터 지면 재미없다, 알지?”
“가서 조져 버려.”
동료들의 격려.
그래, 굳이 누군가를 꼽자면 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천재가 아니어도, 발이 느린 범재라도.
나는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패트릭이 연무장에 올랐다.
“후배님, 좋은 대련을 하자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야, 굳이 다칠 필요는 없잖아?”
관중을 의식한 듯 제자리에서 창을 크게 몇 바퀴 휘두른 크루즈가 한쪽 눈을 찡긋한다.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기색이다.
패트릭도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선배님.”
“…귀염성 없는 후배로구먼.”
쯧.
크루즈는 혀를 찼다.
적당히 기를 죽여 놓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영 반응이 싱겁다. 멘탈이 생각보다 좋은 편인가?
[첫 번째 대련을 시작합니다!]
오오오-!
시작과 함께 관중들 사이에 감탄이 터졌다.
크루즈의 창에 푸른 오러의 기운이 맺혔기 때문.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연이어 함성이 터졌다.
맞서는 신입생, 패트릭 또한 오러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첫 경기부터 둘 다 오러를 실어 내다니, 올해는 확실히 수준이 높군요. 저 신입생은 그 마이어 가문입니까?”
황태자 슈나이더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엑스퍼트의 대련은 후반쯤에나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둘 다 엑스퍼트 수준이라니.
“그렇습니다. 마이어 가문의 차남, 패트릭 마이어 생도입니다.”
“역시 북방의 창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군요. 눈이 즐겁습니다. 가문의 창술을 승계한 것은 장남이라 알고 있었는데, 차남의 재능도 결코 뒤지지 않아 보이는군요.”
“저도 놀랐습니다. 저 생도는 입학시험 때만 해도 무기에 오러를 담지 못했으니까요.”
“입학시험이라고 해도 한 달도 안 된 이야기 아닙니까? 최근에 벽을 넘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그 또한 놀랍군요.”
카르파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
신입생의 입학 성적은 모두 보고 받아 알고 있다.
패트릭 마이어도 분명 평균보다 뛰어난 인재임이 분명했지만, 세간에 천재라 불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다니?
콰앙-!
오러를 두른 창이 충돌하며 굉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돼! 나하고 비슷한 오러 수준이라고?’
바르르르!
손아귀에 전해지는 강한 충격.
크루즈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이어 가문의 둘째는 범재라는 소문, 그것이 다 거짓이었나?
단 일 합으로 깨달았다.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파밧- 팟-!
반면 창을 교환할수록 마이어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크루즈의 기세가 대단치 않았기에.
결코 그가 약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간 더 뛰어난 이들과 훈련하며 자연스럽게 눈이 높아진 것뿐이다.
‘충분히 해 볼 만해.’
불과 일주일 전이라면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생각.
무무카와 처음 오러를 부딪쳤을 때 내장이 곤죽이 되는 기분이었다.
클라인의 검을 받았을 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보였다.
레오가 작정하고 뿜은 살기에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들과 수없이 했던 대련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넌 오러도 충분한데 왜 제대로 쓰질 못하냐?]
레오의 도움으로 벽을 뚫어 냈다.
이미 소드 엑스퍼트가 되기에 충분한 오러를 가지고 있다고, 그저 몇 가지 팁을 주겠다고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다.
어떻게 오러를 운용하는 줄 알고 조언한다는 말인가. 같은 가문의 연공법을 익힌 형님조차도 일반적인 이야기밖에 해 주지 못했는데.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그의 말대로 비전 기술의 묘리를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거봐라, 쉽지?]
단 반나절 만에 창끝에 맺힌 푸른 오러를 보고, 레오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패트릭이 감격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잇!”
조급함이 묻어나는 크루즈의 창.
그것을 감아 돌리며 깊게 한 걸음 전진한 패트릭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이어식(式) 창술.
섬전(閃電).
“으읏-!”
뱀처럼 얼굴로 휘어들어 오는 창끝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크루즈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당기며 공격을 쳐 냈다. 아니, 쳐 내려 했다.
동시에 복부를 노리는 또 하나의 번쩍임이 있었다.
‘…어째서 두 개가?’
떠오르는 의문.
그리고 강한 충격.
퍼엉-!
오러의 폭발음이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크루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후우….”
연무장 중앙의 패트릭이 길게 숨을 골랐다.
행여나 가문에 누가 될까, 공식전에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가문의 기술.
부끄럽지 않은 기술을 보였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승자 패트릭 마이어!]
와아아아-!
멋지다-! 신입생!
“방금 봤어? 창이 두 개로 보였다고!”
“…역시 북방의 창이라는 게 허명이 아니네.”
아카데미의 축제인 만큼 생도들도 당연히 관객석을 채웠다.
2학년의 강자 중 한 명인 크루즈가 쉽게 당한 것은 충격이었지만, 신입생의 기술에 더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잘했어, 패트릭!”
“열심히 굴린 보람이 있다니까.”
“자, 이제 내 차례인가.”
무무카가 조용히 일어선다.
우드득-!
가만히 쥐는 주먹에서 무서운 소리가 울렸다.
* * *
황실을 위한 특등석을 제외하면 특설 연무장의 객석에 공식적인 등급은 없다.
다만 같은 일반석이어도 연무장이 잘 보일수록 좋은 자리인 것은 당연했으니, 가장 중앙 앞줄은 백작 가문 이상의 대귀족에게 우선 배정되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였다.
“아가씨, 제가 정말 이런 데 와도 되는 걸까요?”
미리야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다.
웨어울프의 생김새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이목을 끄는데 객석 맨 앞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게다가 둘러보니 앞자리에 앉은 이들은 모두 높으신 분들 임이 틀림없다.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가 대표로 나온다면서? 직접 응원해 줘야지!”
“그래도 저는 일개 시종인데 이런 좋은 자리에….”
“오늘은 내 친구 자격으로 참석한 거야. 뭐 어때? 아버님도 허락하셨고.”
“그렇죠? 괜찮겠죠? 엄청 떨리네요.”
메르윈 백작의 딸 레이라가 미리야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다.
자신의 손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커다란 손.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어릴 적과 변함없다.
“이따가 잊지 말고 손 흔들어 줘. 엄청 좋아할 거야.”
“…그럴게요.”
레이라의 따뜻한 말에 미리야도 빙긋 미소 지었다.
정말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이다.
메르윈 백작을 포함해 모두가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더 행복해져야 할 텐데….
어느새 침울한 표정을 한 미리야가 애써 다시 웃었다.
오늘만큼은 레이라도 모든 걱정을 잊고 축제를 즐겨 줬으면 했으니까.
“와아-! 아버님! 방금 시합은 정말 굉장했어요. 파바밧- 하고 끝났어요!”
“하하하, 그래 맞다. 저 뒤에 앉았으면 아무것도 안 보일 뻔했다. 나중에 레오 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자꾸나.”
“이제 무무카가 나올 차례인가요? 다들 이겼으면 좋겠는데 쉽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왠지 다들 이길 것 같은 느낌이야.”
“헤헤헷, 저도 그래요!”
뒤쪽에서 들려온 오라버니의 이름.
미리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양 갈래로 길게 머리를 땋은 소녀가 의자에 앉아 짧은 다리를 앞뒤로 휘젓는 모습이 보인다.
미리야와 눈이 마주치자 티 나게 동공이 떨린 소녀.
“앗, 아버님. 앞쪽에 앉은 수인 분이랑 눈을 마주쳐 버렸어요. 제가 실례를 한 걸까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소녀는 흠칫하더니 아버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들을 수 없는 크기였지만, 미리야는 웨어울프 중에서도 특히나 귀가 예민했다.
‘오라버니와 아는 사이일까?’
수인에 대해 편견 어린 시선은 여전히 만연하다. 그에 비하면 혹시나 이쪽이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꼬마 아가씨의 참 심성이 곱다.
꼬마 아가씨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미리야는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번에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미리야! 이제 시작하려나 봐!”
“앗, 네!”
미리야는 다시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국의 가장 뛰어난 재능이 모인다는 황립 아카데미, 그들을 보기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엄청난 자리에서 오라버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