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시오프 산맥 (2)
새 검을 허공에 베고 찌르기를 수차례.
레오는 소름이 돋았다.
검이 아니라 원래 몸에 붙은 손발처럼 편안하다.
그만큼 불필요한 힘의 소모가 없으니 검로는 자연히 더욱 정확하고 안정됐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아뇨, 반대예요. 여태껏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검은 처음인데요?”
빈말이 아니었다.
잠시 휘둘러 본 게 전부인데 족히 몇 년은 끼고 잔 것처럼 익숙하다.
그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도리안도 껄껄껄 웃었다.
“자네는 어떤가? 마법사가 쓸 메이스라 더 신경을 썼네만.”
덱스의 메이스는 봉 상단 부분에 마석이 박혔다는 것만 빼면 일견 평범해 보였다.
철퇴 부분에는 세로로 여덟 개의 두툼한 날이 삐죽 세워졌는데, 그 곡선미는 확실히 예술성이 느껴질 정도.
“고블린 대가리 정도는 한 방에 깰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건 뭔가요?”
“옆으로 한번 돌려 봐.”
덱스는 철퇴 부분의 반대쪽, 봉 끝의 고리를 시키는 대로 돌렸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끝이 쑥 빠지는 듯하더니 봉의 길이가 주욱 늘어났다.
“어어?”
“그러면 딱 지팡이 크기가 되지. 지난번에 둔기를 말하면서도 지팡이에 미련이 남은 눈치였거든.”
“으아아… 너무 멋져요!”
“머리를 쓴 보람이 있구먼. 그래도 근접전을 벌일 일이 있다면 메이스 형태를 추천한다고.”
“네! 감사합니다, 정말 잘 쓸게요.”
지팡이 끝을 다시 밀어 넣고 고리를 돌리니 다시 딱 휘두르기 좋은 길이의 메이스로 돌아온다.
덱스는 메이스를 소중히 끌어안고 도리안에게 연신 허리를 굽혔다.
“나중에 수리도 해 주죠?”
“언제든 가져 와. 이제부터 쓰러 가는 모양인데 나중에 소감을 꼭 들려 달라고.”
그렇게 말한 이유는 레오와 덱스의 옷차림 때문이다.
두 사람은 평소의 아카데미 평상복이 아니라 모험가의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레오는 도리안과 다시 한번 악수하며 씩 웃었다.
“그럴게요.”
이제 외성 북문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 * *
한낮 동안 달아오른 지면의 열기가 모두 식어 버린 한 밤.
브뤼쉬로 향하는 마차 행렬이 수도 외성 북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마차는 총 여섯 대.
그중 유독 행렬 맨 뒤의 마차가 눈에 띈다.
용병들이 빽빽이 들어앉은 낡은 짐마차와 달리, 백합 문양이 세공된 고급 마차.
어쩌다 보니 레오 일행도 함께 얻어 타게 된 베니에르 가문의 마차다.
꽤 큰 마차였지만 일곱이나 타니 실내가 가득 찼다.
‘우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네.’
‘그때 그 수인이구나!’
웨어울프를 처음 접하는 파블로와 니앙은 머리가 마차 천장에 닿을 듯한 무무카를 연신 힐끗거렸다.
주먹질 한 방으로 마물 머리를 수없이 부수는 장면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특히 니앙은 가족이 있던 동문 쪽을 막아 주었던 무무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 저기…!”
“음? 할 말이라도 있나?”
니앙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입을 뗐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날 동쪽 객석에 어머니가 와 계셨거든.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셨어. 가장 처음 달려온 웨어울프가 없었다면 분명히 피해자가 나왔을 거라고.”
“…내 여동생도 그쪽에 있었으니까.”
“그랬구나, 그래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야. 정말 고마워.”
“흠흠, 그래.”
무무카는 어색하게 답했다.
이런 호의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헤헤헤, 여럿이 가니까 꼭 소풍 같네.”
같은 마법 학부 동기들과 함께하게 된 덱스는 마냥 즐거워했다.
혼자만 다른 학부라서 은근히 소외감을 느꼈다나?
“뭐, 우연이지만.”
그 옆에서 줄리앙이 조용히 입을 삐죽거린다.
새침하게 말하지만 그 또한 지난 카미르 광산 이후 덱스가 한결 편해진 것이 사실이다.
“소외감? 네가 우리랑 있으면서 소외감을 느꼈다고? 좀 믿을 만한 거짓말을 해라, 손에 그런 걸 쥐고서.”
덱스를 향해, 클라인은 어이없이 웃었다.
그도 그럴 게 반짝이는 메이스를 사랑스럽게 만지작거리는 덱스는 누가 봐도 전사의 모습에 가까웠다.
“저놈 하는 말에 일일이 의미 부여하지 마. 피곤해지니까.”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휘젓는 레오.
덱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메이스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 날의 곡선 좀 봐, 역시 도리안 공방이 유명한 이유가 있다니까. 그립감은 또 어떻고? 손에 아주 착착 감긴다고. 이거 들고 있으면 마법 생각이 아예 안 날 것 같아.”
“확실히 판금 투구도 단박에 깨부술 수 있을 것 같다.”
“어때, 한 번 쥐어 볼래? 생각보다 무겁지도 않아.”
“그러면 잠깐만… 오! 진짜 느낌 좋은데?”
“그렇지?”
파블로와 니앙이 한두 마디씩 거드니 덱스는 더욱 신이 났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입꼬리가 광대까지 뻗어 올라갈 지경이다.
“그나저나 둘 다 방어구는 그 정도로 되겠어?”
클라인이 레오와 무무카를 향해 물었다.
클라인은 판금과 사슬이 혼합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딱 봐도 비싸 보이는 데다 방어력도 상당해 보였다.
그에 반해 레오와 무무카는 갬비슨과 가죽이 혼합된 방어구를 걸친 게 전부다. 일반 용병들보다는 나은 축에 속했지만 클라인의 눈에 아쉬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준비하기에 시간이 부족했어.”
“나는 이 정도가 편하고 딱 좋다. 더 이상은 거추장스러워.”
무무카는 움직임이 더 불편해지는 건 싫다고 했다.
게다가 투기를 쓰면 신체가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에 가벼운 날붙이 정도로는 쉽게 상처도 입지 않는다고.
“그래도 판금을 좀 덧붙이는 게 낫지.”
레오는 장비에 돈을 아낄 생각이 없다.
특히 방어구는 곧 여벌의 목숨이나 마찬가지. 약간의 활동성 제약 정도는 목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무엇보다 돈도 충분하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덱스와 무무카의 것까지 방어구를 맞출 생각이다.
“맨몸으로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정말 괜찮다.”
“너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간다. 중요한 데 몇 군데만 해도 훨씬 낫다고. 흉부나 고간 같은 데 말이야.”
“고간?”
“그래, 남자에게는 심장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지.”
“…납득했다.”
고집을 부리나 싶더니 무무카도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이상한 데서 납득을 하네?
“내 것도 챙겨 줄 거지? 이왕이면 이 메이스하고 잘 어울리는 놈으로. ”
“시끄러워.”
“…왜 나한테만 뭐라 그러냐.”
시무룩한 덱스를 보니 레오는 괜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간간이 잡담이 오가는 가운데 맞은편의 줄리앙이 눈에 걸린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영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흐음….’
카미르 광산 때 잠깐 같이 움직이긴 했지만 동료라 하기에는 아직 친분이 부족한 느낌.
그가 미래에 이름을 떨칠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면 적극적으로 영입해 볼 생각도 있다. 하지만 회귀 전 기억을 더듬어봐도 특별한 기억이 없다.
‘덱스한테 까불다가 크게 혼쭐이 난 것 같긴 한데.’
어쩌다 보니 지난번 둘의 대화를 들어 버렸다.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기에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
“그나저나 너희는 왜 이거 지원했냐?”
줄리앙을 지긋이 바라보던 레오가 대뜸 물었다.
이번 몬스터 토벌 임무는 1학년 생도가 선뜻 선택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토벌 경험이 없으면 실전에서 발목만 잡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몬스터 토벌 경험이 있어 자신감이 있든가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골랐든가.
레오는 당연히 전자이기를 바랐고.
“방학 되기 전에 부지런히 학점 벌어 놓아야지.”
“그건 당연한 소린데, 왜 이 임무를 골랐냐는 거지. 몬스터 토벌 경험은 있고?”
“어차피 싸움은 용병들이 나서서 하는 거 아냐? 우리는 뒤에서 마법 보조만 해 줘도 될 것 같은데.”
“…….”
망할, 그러면 그렇지.
안이한 대답에 레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전에서 완벽하게 안전을 보장받으며 마법을 쓰는 상황?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레오도 생각한 대로 전투가 흘러갔던 경험은 거의 없었다.
운 좋으면 열에 한 번, 스물에 한 번 정도? 언제나 그때그때 발생하는 변수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며 위기를 극복했다.
덱스에게 마법을 가르친 루이스조차 실수 몇 번에 멘탈이 무너지지 않았나. 뭐 애초에 같이 다니던 놈들이 악당이었지만.
‘짐이나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용병이었다면 엉덩이라도 걷어차 줬을 텐데.
상대는 아카데미 신입생이다. 이 또한 좋은 경험이 될 테지.
마음 편히 기대치를 낮추기로 했다.
“항상 조심해라. 실전은 언제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니까.”
그렇기에 레오가 해 줄 수 있는 말도 이 정도가 전부였다.
* * *
얼마나 이동했을까.
어느새 구름이 걷히며 밤하늘은 별빛을 쏟아 냈다. 마침 달까지 둥글어 따로 횃불이 필요 없을 정도다.
조금씩 오르막이 이어지는 것을 보아 산맥 근처에 다다른 것 같다.
오늘 일정은 시오프 산맥의 아래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는 것이 전부.
하루 푹 쉬고, 내일 오전에 브뤼쉬의 관리인에게 구체적인 임무 내용을 전달받을 예정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창을 열고 선선한 바람을 쐬던 레오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매캐한 탄내와 몬스터 특유의 역한 체취가 바람 속에 옅게 섞여 있다. 둘 다 용병 시절 지겹게 맡았던 냄새다.
좋지 않은 예감.
레오는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살폈다.
오래 둘러볼 것도 없이 행렬 앞쪽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이런 썅.”
휙-!
마차 창문으로 몸을 빼낸 레오가 순식간에 지붕 위로 올라섰다.
불길이 치솟는 곳은 전방의 마을.
단순한 화재가 아니다. 마을이 몬스터 무리에게 공격당하고 있다.
저 멀리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몬스터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 마을이 우리 목적지 아닌가?”
“맞는 것 같은데. 씨벌, 일찍 도착했으면 개고생할 뻔했네.”
“고블린인가? 개떼같이 몰려왔구먼.”
“섣불리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 일단 좀 지켜보자고.”
눈앞에서 마을이 습격받는 중인데 선두 마차를 포함해 용병들도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아직 의뢰주에게 정식 임무를 전달받지 못했으니 저곳에 뛰어든다 한들 보상이 불투명하다. 요컨대 돈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쯧.”
용병대장 시절의 레오라면 같은 판단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용병이 아니었다.
“몬스터다!”
생도들이 탄 마차가 앞선 행렬을 따라 제자리에 멈췄다.
지붕에서 뛰어내린 레오는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외쳤고, 몬스터라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말이야? 이 앞에 몬스터가 있다고?”
“벌써 토벌이 시작되는 거야?”
당황한 줄리앙과 불안한 듯 눈을 굴리는 파블로와 니앙.
지금은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다.
“마을이 습격당하고 있어. 아마도 우리가 묵으려던 그 마을일 거다.”
“그런…!”
“줄리앙, 너희 팀은 네가 알아서 챙겨. 우리 팀은 바로 진입한다. 내가 가운데, 클라인과 무무카가 좌우를 받쳐 줘. 덱스는 후방에서 지원이야.”
레오는 빠르게 방침을 정했다.
클라인은 이미 수차례 몬스터를 상대한 경험이 있고, 검투 노예로 살아남은 무무카에게 실전 경험을 물을 필요도 없다.
덱스가 경험이 부족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영리한 녀석이니 본인의 몸 정도는 잘 챙길 것이다.
“가자!”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