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시오프 산맥 (6)
“그렇지! 네깟 놈들이 무슨 수로 골렘을 상대할 테냐, 하하핫!”
까마귀의 눈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네메이르는 박장대소했다.
그의 주문서는 일반적인 골렘 소환 술식에 자신의 비전 기술을 더한 것.
본래보다 더욱 강도를 높인 이번 골렘은 일반적인 스톤 골렘 중에서도 꽤 상급이었다.
“아무리 칼질해 봐라! 끄덕이나 할 것 같으냐!”
지금은 분전을 펼치고 있으나 곧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무생물을 상대로 몸과 마음을 짜내어 봐야 결국 먼저 꺾이는 것은 인간.
전면에서 싸우는 셋을 빼고는 이미 모두 망연자실한 얼굴 아닌가.
“더 발버둥 쳐 보거라. 하하하핫!”
네메이르는 동굴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웃어젖혔다.
이왕 비싼 주문서를 썼으니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이윽고 골렘과 접근전을 벌이던 이들이 뒤로 물러나자 네메이르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기다리던 학살의 시간이 기대됐으니까.
“…아직 포기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마법사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전투 마법사라고도 부르기 힘든 수준이다. 기껏해야 2, 3 서클 수준의 화염 마법이 전부.
“마지막 발악인가 보군.”
네메이르는 헛웃음을 뱉었다.
스톤 골렘에게 초급 화염 마법을 때려 부어봐야 헛짓이다.
바위도 녹일 정도의 초고온의 화염이라면 모를까. 당연히 저들에게 불가능한 마법이다.
학습 효과도 없는 건지 통하지도 않는 마법을 난사하며 마력을 낭비하는 모습은 마법사로서 실격이었다.
“불이 안 되니 이번에는 물인가? 어이가 없군.”
마력이 바닥난 모양인지 이번에는 물 덩어리가 나타나 골렘을 때리기 시작했다.
열기로 피어난 수증기가 까마귀의 시야를 가리더니 연결이 툭 끊어졌다.
“뭐야?”
네메이르는 버럭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가장 중요한 장면이 남아 있는데 시야가 끊어지다니!
“에잉….”
까마귀의 정체를 들킨 것인가.
똥을 싸다가 만 것 같은 찝찝함.
조금 고민하던 네메이르는 동굴을 나섰다.
메인 디시인 골렘이 날뛰는 장면을 포기할 수 없었다.
* * *
“파이어볼!”
“파이어 애로우!”
아카데미의 네 마법사가 골렘을 향해 화염 마법을 연달아 발사하자 서늘했던 밤공기는 금세 후끈해졌다.
“전혀 통하는 것 같지가 않은데…?”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나?”
용병들의 불안한 목소리.
그 말대로 화염 마법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골렘에게 별다른 충격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연속된 마법 발동에 마력도 빠르게 고갈되어 갔다.
유일한 이점이라면 앞서 싸우던 전사들이 숨을 고를 시간을 주고 있다는 것 정도.
허억- 허억-!
“덱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 맞아?”
줄리앙의 호흡도 거칠어졌다.
말 그대로 몸 안의 마력을 짜내고 있는 상태.
살면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마력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이를 악물고 버티는 중이었다.
‘젠장! 아무렇지도 않잖아!’
덱스는 이를 악물었다.
예전에 레오와 함께 개울가의 돌 판에서 고기를 굽다가 돌이 터진 적이 있다. 그게 기억나 일단 골렘에 화염을 때려 박아 본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나?’
노림수가 실패로 돌아가자 머리가 멍해졌다.
저도 모르게 사방으로 움직이던 덱스의 눈이 우연찮게 레오와 맞았다.
검지로 위를 가리키는 레오, 그 신호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줄리앙은 잠깐 쉬어! 이번에는 물이다!”
수 분간 이어진 화염 마법이 중단됐다.
더위와 피로에 덱스의 이마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표정만큼은 아까보다 밝았다.
“아쿠아!”
덱스는 화염 마법을 중단하더니 이번에는 물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공격도 뭣도 아닌 그저 물을 생성해 내는 1서클의 원소 마법.
골렘의 진행 방향에 형성된 물 덩어리가 복부에 닿았다.
치이익-!
잇따른 화염으로 발갛게 달구어진 골렘의 복부에 물이 닿자 곧바로 기화하며 수증기가 피어난다.
파블로와 니앙도 합세하자, 곧 시야를 가릴 정도의 대량의 수증기가 곧 주변에 가득 찼다.
‘저 까마귀,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데.’
주변을 살피던 레오는 아까부터 머리 위를 배회하던 까마귀가 근처 나뭇가지 위에 앉은 것을 발견했다.
꼭 흑마법사의 눈인 것만 같은 직감.
가까이 있던 누벤이 그런 레오의 기색을 눈치채고 자신의 활을 가리켰다. 쏴 죽이는 게 좋겠냐는 의미였다.
끄덕.
레오의 신호에 누벤은 지체 없이 활을 당겼다.
깍-!
유일한 마을 사냥꾼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았다.
까마귀는 외마디와 함께 땅에 처박혔다.
그사이 산 아래로 불어온 바람에 수증기가 옅어졌다.
골렘의 복부도 식어 버려 더 이상 수증기가 피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파블로가 불안한 얼굴로 덱스를 돌아봤다.
불을 때려 박았다가 그다음에는 물로 식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골렘의 복부를 이루는 단단한 돌덩이가 꿈쩍할 리 없다.
“어떡하기는.”
“이제 얼려야지.”
덱스와 레오가 차례로 답했다.
레오는 이미 검을 빼 들고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를 마친 상태.
“줄리앙, 아이스를!”
덱스의 신호에 잠깐 숨을 돌린 줄리앙이 마지막 마법을 준비했다.
“알았어!”
헐떡이며 영창을 이어 간 줄리앙.
남겨둔 마력을 모두 사용한다는 기분으로, 서클의 마력을 짜내고 또 짜냈다.
‘데웠다가 식혔다가 얼렸다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생각이 있겠지.’
몸 전체가 아니라 복부에만 집중시키는 마법.
그 때문에 골렘의 움직임에도 크게 제약을 주지도 못한다.
덱스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지금은 그저 믿고 따를 뿐.
쿵- 쿵-!
방해 없이 움직이는 골렘은 어느새 마을의 입구까지 들어섰다.
덱스와 줄리앙은 뒷걸음질을 치며 마법을 이어 갔다.
쩌저적-!
마력에 의해 강제로 열을 빼앗기며 급속히 낮아지는 온도.
어느덧 골렘의 복부에 살얼음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레오가 소리쳤다.
오러안에 비치는 골렘 복부의 바위 구조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작업이 효과가 있다는 의미였다.
“으아아아!”
그 목소리에 줄리앙이 다시 한번 마력을 쥐어 짜냈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탈력감에 다리가 휘청였다.
그리고.
쩡-!
폭발음과 함께 골렘의 복부를 이루던 암석이 폭발하듯 깨졌다.
“좋았어!”
덱스가 환호성을 질렀다.
마찬가지로 입꼬리를 올린 레오는 이미 골렘을 향해 달리고 있다.
골렘의 부서진 복부에 소용돌이치는 마력핵이 너무도 선명했다. 쇄도한 그의 검 끝은 정확하게 마력핵의 중심을 꿰뚫었다.
우르르- 쿵-!
동력을 잃은 골렘은 흙과 바위로 흩어져 무너져 내렸다.
졸지에 마을 한구석에 바위 더미가 생겨났다.
“줄리앙이 해냈어!”
“대단해! 골렘을 잡다니!”
파블로와 니앙도 방방 뛰며 환호했지만 줄리앙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3서클 파이어볼에도 멀쩡하던, 아니 괴물 같은 저 삼인방의 공격에도 아무렇지 않던 골렘이 어째서 1서클 아이스에 당한 거지?’
줄리앙의 시선이 덱스에게 향했다. 도저히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친 덱스가 엄지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먹혀서 다행이야.’
화염으로 아무 효과가 없었을 때는 망연자실했다.
그 와중에 레오와 눈이 맞았다.
작년 봄, 산 밑에 자리한 덱스의 집에 바위가 굴러떨어진 적이 있다. 겨우내 바위틈의 물이 얼어 균열이 생긴 바위가 다시 물이 녹으면서 깨져 나간 것이다.
레오는 그것을 생각해내고 신호해 줬다.
“레오는 어디 갔어?”
“…글쎄?”
덱스가 레오를 찾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기쁨에 취한 사이.
레오는 골렘의 흔적을 역으로 쫓으며 숲을 훑고 있었다.
‘놈은 어디에 있지?’
흑마법사를 찾는 중이다.
오러안으로 풀과 나무의 붉은 선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흑마법사의 것을 판별해야 했다.
저 까마귀를 통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시야가 끊어진 지금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드러낼 터.
‘찾았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인간의 형체가 잡혔다.
놈이 도망치기 전에 마중 갈 차례다.
* * *
‘뭔가 잘못됐어.’
네메이르는 산 아래로 내려오는 도중 환호성 소리를 들었다.
비명이 난무해야 할 판에 환호성이라니.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뒷덜미를 타고 오르는 불길한 기분에 발을 멈췄고 조금 주저하다 몸을 돌려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촉은 꽤 잘 맞았으니까.
‘일단 동굴에 돌아가자.’
마을을 살피는 것은 날짐승을 통해 확인해도 충분하다.
일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였다.
스스스슥-!
풀을 스치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한 순간.
네메이르는 다리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대로 풀숲에 쓰러졌다.
“아악!”
일어나려 했지만 일어설 수 없었다.
양다리 모두 무릎 아래가 사라진 채 피를 뿜어지고 있었으니까.
“잡았다, 쥐새끼 같은 놈.”
레오가 네메이르의 뒤를 잡자마자 양다리부터 베어 버린 것이다.
가까스로 몸을 돌린 네메이르는 양손으로 흙바닥을 짚으며 다가오는 검은 인영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버둥거렸다.
“누, 누구냐!”
“아니지, 내가 묻고 너는 대답을 하는 거야.”
푹-!
“아아악!”
레오의 검이 네메이르의 한쪽 허벅지를 관통하고 땅에 쑥 박혔다.
도리안은 물론 공방의 모든 장인들이 기함할 장면이었지만 레오는 상관 안 했다.
시정잡배의 싸구려 검이든 장인의 명검이든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잘 쓰면 그만일 뿐.
“이제 좀 이야기할 준비가 됐나?”
“으으…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흐음, 아직 준비가 안 된 모양이군.”
검을 뽑아 들더니 반대쪽 허벅지를 바라보는 레오.
“아니, 아닙니다! 뭐든 이야기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네메이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빌었다.
다짜고짜 다리부터 잘라 버리다니 이런 미친놈은 듣도 보도 못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팍 수그려야 한다.
“믿어 주지.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이다.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었지?”
“…예?”
네메이르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그야 그가 기거하던 동굴이지만 그곳으로 적을 안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오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읽어 냈다.
“이래서 인간적으로 대해 주면 안 된다니까.”
“아, 아닙…! 으아아악-!”
푹-!
네메이르의 반대편 허벅지에 다시 검이 파고들었다.
* * *
시신을 수습하고 부서진 잔해를 치우는 작업은 오전까지 이어졌다.
희생된 마을 사람들도 꽤 있었기에 전체적으로 침통한 분위기였지만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마을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촌장은 따로 없었지만 모두들 자연스레 누벤을 리더로 생각했다.
누벤은 마을을 대표해 아카데미 생도들과 용병들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일부러 용병까지 고용해서 저희를 구해 주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저 녀석일걸요. 줄리앙, 이리 와!”
레오는 줄리앙을 끌어당겨 누벤의 앞에 세웠다.
“내가 뭘 했다고….”
“아, 오라면 좀 빨리 와라.”
“크흠흠!”
누벤도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어쩐지 부서진 잔해를 치우고 죽은 몬스터의 뒤처리까지 마다하지 않는 용병들의 모습이 의아하던 차였다.
“그러셨군요. 저희를 위해서 용병을…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인 분들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줄리앙 베니에르.”
“이런, 귀족이셨군요. 지금까지 허리를 숙이지 않은 것을 사과드립니다.”
“괜찮다, 아니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저 아카데미 생도로 대우받고 싶으니까요.”
누벤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황립 아카데미에서 귀족의 신분보다 아카데미 생도의 신분이 더 우선한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 같은 외부인에게도 몸을 낮출 이유는 없다.
누벤은 이 줄리앙이라는 어린 귀족이 필시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이라고 생각했다.
“레오입니다. 저는 귀족이 아니니 편하게 대하세요.”
번개같이 검을 쓰던 레오와 마법사 덱스가 평민이라는 것, 그런데도 그들이 귀족 생도들과 너무도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이 등에 누벤은 다시 한번 놀랐다.
“누벤!”
그때 마을 북쪽에서 누벤을 부르며 달려오는 이.
몬스터 사체를 정리하던 루크가 마을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발견하고 알리러 온 것이다.
“누벤! 숲길에서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어요!”
“아… 그들인가 보군.”
어느덧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
본래 몬스터 토벌 임무를 의뢰한 브뤼쉬의 영주가 보낸 이들이 도착할 때였다.
“슬슬 도착하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누벤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레오의 제안이 있었지만 정말 그렇게 해도 될지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걱정 마시고 이야기한 대로 해 주세요. 뒷 일은 저희가 책임집니다.”
레오는 씨익 웃으며 곁에 있는 줄리앙의 툭 쳤다.
“알았지? 이제 전부 너한테 달려 있다.”
“어렵지 않지.”
줄리앙도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들과 함께하며 처음 보이는, 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