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48화 (48/127)

48. 시오프 산맥 (7)

시오프 산맥 교역로 인근의 몬스터 토벌 명령.

브뤼쉬의 영지 관리인 율브렌은 영주의 이번 명령이 꽤 유난스럽다고 느꼈다.

최근 교역로의 이용객이 몬스터에게 습격을 받는 일이 부쩍 잦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나설 필요까지 있나 싶었기에.

애초에 산맥을 오가는 이라면 자기 몸은 알아서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트롤한테 쥐어 터진 그 멍청한 놈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군.’

얼마 전 브뤼쉬 영주는 수도의 고위직 귀족에게 선물을 보내려 한 바 있다.

시오프 산의 백 년 이상 묵은 약초를 정제하여 만든 영약이었는데, 이걸 들고 산맥을 넘던 기사가 트롤의 습격을 받아 영약을 빼앗기고 말았다.

당연히 영주는 노발대발했고 이에 몬스터 토벌령까지 확대된 것.

[병사를 움직이는 것보다 싸게 처리할 방법을 알아 와라!]

정예병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 든다.

영주는 그 와중에 더 값싼 인력을 원했고 길드에 의뢰하여 용병을 쓰기로 했다.

오늘 율브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용병의 몸값을 최대한 후려쳐 값싼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이었다.

“빨리빨리들 앞장서거라, 둔해 빠진 놈들 같으니.”

“예, 옛!”

가벼운 옷차림을 한 율브렌은 호위 병사들을 재촉했다.

무기를 들고 무거운 갑주를 입은 병사들의 사정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은 모습. 그저 산맥을 지나는 내내 몬스터에게 습격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할 뿐이다.

‘혹여 트롤이라도 나타나면 얼른 몸을 빼야 해.’

잔뜩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산을 거의 내려올 때까지 몬스터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윽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용병들이 도착해 있을 그 마을이 틀림없었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 율브렌.

하나 마을에 들어서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마치 전쟁이라도 치른 듯한 광경.

마을 곳곳은 부서지고 불탔으며, 흙바닥 여기저기에는 아직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곳곳에 보인다.

게다가 방금 지난 마을 입구에는 정체 모를 돌무더기와 함께 몬스터의 사체 수십 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한 차례 지독한 전투를 치른 모습.

생각이 거기에 닿자 율브렌은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가만있자, 이러면 굳이…?’

언뜻 봐도 쉰이 넘는 고블린에 트롤까지 죽어 자빠졌다.

이들이 어디서 왔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바.

목적한 결과는 이미 나왔다.

그렇다면 굳이 돈을 써 가며 토벌 의뢰를 진행할 이유가 있을까? 오히려 용병을 고용할 돈을 꿀꺽할 기회 아닌가?

‘흐흐흐….’

율브렌은 위로 치솟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무장한 병사 십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길을 피하며 그들을 누벤에게 안내했다.

“네가 마을의 대표인가?”

율브렌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치켜들었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기를 죽여 놓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불손한 모습을 보이면 꼬투리를 잡고 매질이라도 해서 권위를 세울 생각.

“그렇습니다. 재주 없는 몸이지만 마을의 대표를 맡고 있는 누벤이라고 합니다.”

“나는 브뤼쉬 자작님의 명을 받들어 영지 관리를 행하는 율브렌이다.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간밤에 숲의 몬스터 무리가 마을을 습격하여 아직 정리 중입니다. 준비되지 못한 모습으로 관리인님을 맞게 되어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흠….”

눈앞의 사내는 생각보다 처신을 잘했다.

꼬장꼬장한 눈으로 누벤을 내려다보던 율브렌은 이내 작전을 바꾸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습격당한 마을이다.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며 위로를 해 주는 그림도 나쁘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피해는 어떠한가?”

“마을 사람 열둘이 죽었습니다.”

“호오, 밖에 보이는 몬스터 사체를 봤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었구나.”

죽은 이가 고작 열둘이라니, 율브렌은 진심으로 놀랐다.

고블린의 숫자는 둘째치고 트롤은 어떻게 상대한 것일까.

“천운이 따랐는지 마침 마을을 방문한 이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용병들이 도운 것이구나. 오늘 용병을 소집하고자 했던 영주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마을은 벌써 괴멸했겠군.”

“모두 영주님의 은덕입니다.”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한 율브렌.

애초에 치안 관리가 제대로 됐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럼에도 영주님의 혜안 덕분에 마을을 구할 수 있었다는 궤변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레오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째 대가리가 제대로 박인 놈 찾기가 더 힘드네.’

당장이라도 입을 찢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는 레오.

오히려 누벤은 덤덤하게 그의 헛소리를 받아 주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영주님의 혜안에 미칠 바는 아니지만, 용병들의 선행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위기에 처한 이들을 지나치지 않다니 참으로 고맙고 의로운 일이다.”

율브렌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언뜻 칭찬인 듯하나 의도가 뻔히 보이는 말이다. 용병들의 행동을 자발적인 선행으로 포장하여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뜻을 완곡히 표현한 것.

“내 너희들의 선행도 영주님께 빼놓지 않고 말씀드리도록 하마. 또한 숲의 몬스터 토벌을 위해 너희들을 고용하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토벌할 몬스터가 없어졌다. 어쩔 수 없이 이번 의뢰는 없던 것으로 하겠다.”

드디어 본심을 뱉은 율브렌.

이에 누벤은 곤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관리인님….”

“누벤이라 했나? 뭔가 할 말이 있느냐?”

“예, 관리인님. 실은 용병들에게 지불해야 할 보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마을을 위해 싸운 것은 맞으나 그것과 보수는 별개의 문제이며….”

“허허, 답답하구나!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그게 아니면 감히 영주님의 뜻에 반하겠다는 것이냐? 나는 브뤼쉬의 적법한 통치 권리를 가지는 분을 대리하여 이곳에 왔다! 네놈이 정녕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율브렌은 눈에 핏발까지 세워가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내심 생각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겁을 잔뜩 준 다음에 당근 쪼가리를 적당히 던져 주면 용병들의 보수는 마을에서 알아서 떠안으리라.

그렇게 거의 다 되었다고 여길 때쯤, 끼어든 이가 있었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율브렌의 호통으로 가열된 분위기를 한순간에 가라앉힌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

줄리앙이다.

“뭐 하는 놈이냐?”

“브뤼쉬의 관리인이라고 했던가? 지금 이것이 베니에르 백작가의 장자이자 적통한 후계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인가?”

“……?”

율브렌은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꺾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린 금발의 미청년.

크게 고저 있는 목소리도 아니다. 과도하게 턱을 치켜들거나 무리하게 몸을 펼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귀족 특유의 오만하고 위엄 어린 기운이 자연스레 풍기는 남자였다.

‘베, 베니에르 가문의 후계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율브렌이 급히 허리를 굽혔다.

베니에르 백작이라면 제국의 내무 장관을 꿰어 차고 있는 고위직 인물이다. 황제파 귀족의 거두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모시는 브뤼쉬의 영주가 끈을 만들기 위해 가장 공들이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후계자가 왜 여기에?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브뤼쉬의 영지 관리인 율브렌이라 합니다.”

“흥, 옹이구멍보다 못한 눈이군. 그건 그렇고 브뤼쉬의 치안은 왜 이리 엉망인가? 영지의 치안 관리도 똑바로 못하면서 관리인이라 자칭하는 꼴이 우습구나.”

“제 개인의 결례는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공자님의 말씀은 자칫 영주님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십시오.”

공손하게 굽어진 허리 위로 율브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에 줄리앙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모욕? 마치 내가 없는 말이라도 지어낸 듯이 말하는군. 나와 내 동료들이 자칫 브뤼쉬의 영지에서 해를 입을 뻔했다. 그것도 마을 한가운데서 말이지. 이래도 내가 영지 치안 관리를 지적한 것이 모욕이 되는가? 아하! 내가 시체가 되어 말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겠군.”

“그, 그럴 리가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으득, 이를 가는 율브렌.

어린 귀족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롭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손아귀에 놀아나는 듯한 귀족 특유의 화술.

그의 말대로 영지 내에서 다른 귀족이 해를 입는 것은 영지의 주인에게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니 율브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책임질 텐가?”

“…책임 말씀입니까?”

“내가 목숨을 위협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니에르가의 후계자인 바로 내가! 마침 용병을 고용하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정식으로 브뤼쉬에 책임을 묻고자 한다.”

“그건 과도한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이번 일은 사고, 그렇습니다. 천재지변처럼 대비할 수 없는 사고가 아닙니까? 그러니 무리한 말씀은 거두어 주시지요.”

두 사람의 논리는 간단했다.

영지 내에서 몬스터에게 당할 뻔했으니 책임을 묻겠다는 줄리앙.

그것은 천재지변과 같은 사고라 주장하는 율브렌.

“무엇보다 공자님께서 무사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보다 다행인 일입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멀쩡하니 상관없지 않느냐는 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린 귀족의 대답이 없자, 율브렌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지금은 최대한 책임질 말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브뤼쉬의 대답인가? 좋다. 그 말을 그대로 신전에 전해 주도록 하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구나.”

“…신전이라고 하셨습니까?”

율브렌이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신전을 언급한다고? 왜?

“몬스터의 습격이 자연재해와 같은 사고라고? 그 배후에 흑마법사가 있었다. 어디 이단심문관의 앞에서도 똑같은 말을 뱉을 수 있는지 궁금하군.”

“흐, 흑마법사?”

뒤죽박죽된 사고가 뒤늦게 정리됐다.

흑마법사는 부정한 의식과 계약을 통해 힘을 얻는다. 당연히 신전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존재다.

영지에서 흑마법사가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신전이 이단심문관을 파견할 것은 당연한 수순.

문제는 그 이단심문관이 초법적 권한을 지닌다는 점이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율브렌.

줄리앙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놈을 데려오게.”

누벤은 곧 작은 손수레 같은 것에 무엇인가 태워 왔다.

“으으으….”

무릎 아래가 사라진 채 겨우 숨만 붙어 신음하는 남자.

흑마법사라는 말에 애써 동요를 숨기던 병사들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만큼 흑마법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존재였다.

“이자가 몬스터를 준동시킨 흑마법사다. 이래도 사고라고 말할 텐가? 흑마법사가 버젓이 활동하게 두다니 브뤼쉬는 꽤 관대한 곳이었군.”

“고, 공자님! 신전에 알리는 것만큼은 제발 그만둬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지금 신에 대한 내 믿음을 시험하는가? 설마 흑마법사의 편을 들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요! 그저 공자님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파들파들 몸을 떠는 율브렌.

어린 귀족과 대등하게 맞서던 노련한 관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좋다, 한번 믿어 보도록 하지. 그러니 네 주인에게 전하라. 이번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나와 내 아버지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겠노라고.”

“자비로우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자의 신변을 받아 가도 되겠습니까?”

율브렌은 흑마법사를 흘깃 가리켰다.

후환은 남기지 않으려면 저자를 꼭 챙겨 가야 했다.

“믿어 보겠다고 했으니 넘겨주지 않을 수 없군. 하나 명심해라, 허튼짓을 한다면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더 할 말이 있나?”

“아닙니다, 공자님. 그 말씀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뭐 하나? 어서 꺼지지 않고?”

나지막한 축객령에 율브렌과 병사들은 도망치듯 마을 밖으로 사라졌다.

줄리앙의 완벽한 승리였다.

가슴을 졸이던 마을 사람들의 분노 섞인 시선이 율브렌의 등을 좇았다.

설마하니 정말로 용병 보수를 마을에 떠넘기려 하다니!

“저, 공자님. 방금 그 말씀은….”

용병 하나가 줄리앙에게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보수가 거론되다 보니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신경 쓸 것 없다. 너희들의 보수는 처음 약속대로 베니에르에서 지불할 것이다.”

“와아!”

누가 주든 돈만 제대로 받으면 문제없는 용병들도 표정이 밝아졌다.

“줄리앙, 방금 정말 멋졌어!”

“어서 꺼지지 않고 뭐 해? 크…. ”

파블로와 니앙이 눈을 반짝였다.

“아….”

조금 철이 든 걸까. 줄리앙은 괜스레 창피했다.

예전에 밥 먹듯 했던 인성질에 비하면 꽤 순한 맛이었음에도 도중에 몰입이 깨질 뻔했다.

“오올, 너 꽤 친다? 역시 귀족은 귀족이라 이거지?”

덱스도 인상 깊었는지 줄리앙에게 목에 팔을 두르고 흔들어댔다.

“뭐야, 그거. 욕이냐, 칭찬이냐?”

“칭찬이야, 인마. 크크큭!”

“흥,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은.”

달라붙는 덱스를 밀어내며 무심하게 대답하는 줄리앙.

고개를 돌리는 그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솟아올랐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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