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숲의 조율자 (1)
한때 대피소였던 텅 빈 여관 건물.
그 한구석에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다.
모두 레오가 네메이르의 동굴에서 털어온 것.
구석에 던져 놓다시피 했지만 흑마법사의 물건이라고 하니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다.
마을 사람들은 접근할 생각도 안 했고, 말은 안 했지만 클라인과 줄리앙도 멀찍이 떨어지려는 모양새다.
덕분에 레오는 천천히 흑마법사의 물건을 살필 수 있었다.
“이 종이 쪼가리들은 마법 주문서 아니냐?”
“오, 그래? 어떻게 쓰는 거지?”
“너는 마법사라는 놈이 주문서 쓰는 법도 몰라?”
“안 써 봤는데 어떻게 아냐고, 하나 줘 보든가.”
옆에서 알짱거리던 덱스는 뭔지도 모르는 마법서에 관심을 보였다.
흑마법사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던 파블로도 힐끗거리다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든다.
“그거 그냥 찢으면 될 거야. 술식을 해방해서 본인 마력만 연결시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거든.”
“엄청 편리하겠는데? 실전에서 술식을 안 짜도 된다는 거잖아?”
“완전히 대체되는 건 아니야. 좌표 입력 같은 건 즉석에서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 외에도 몇 가지 제약이 있긴 한데 그래도 주문서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리하지.”
“오오, 주문서만 있으면 나도 고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니지. 그랬다가는 죄다 9서클 마법사가 되게?”
“뭐야, 그게.”
덱스가 실망감을 비춘다.
당연히 주문서는 만능이 아니다. 단순 발현이라면 발현 위치나 대상을, 투사 마법이라면 방향과 속도 등을 추가로 설정해야 한다.
술자가 주문서의 술식을 소화할 능력이 되지 않거나, 요구하는 마력을 감당할 수 없을 때도 제대로 기동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주문서는 주로 이미 익힌 마법 술식을 더 빠르고 편하게 기동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음음, 이제 좀 알겠네.”
덱스는 파블로의 설명에 이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블로는 의외로 말이 많은 친구였다. 그간 줄리앙의 옆에서 존재감이 옅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동안 레오는 남은 물건들을 마저 뒤적였다.
꼬질꼬질한 가죽 주머니에서 발견한 금화는 예상외 수확이다.
그 외에는 전부 수상하거나 쓸데없는 쓰레기였다.
“이 시약들은 어떻게 해?”
“일단 챙겨 놓자. 돌아가서 감정을 맡겨봐야겠어.”
“의외로 쓸 만한 게 나오면 좋겠네.”
“줄리앙은 어디 갔냐? 돌아갈 때도 마차 신세 좀 져야지.”
“안 그래도 용병들하고 이야기 중이더라고. 곧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레오는 흑마법사의 물품을 살뜰히 챙겨 밖으로 나왔다.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몬스터 토벌을 하룻밤 만에 끝냈다.
며칠 강의를 빠질 생각까지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게 됐다.
“다들 가자!”
용무를 마친 듯한 줄리앙의 목소리.
이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고풍스러운 가구가 가득한 화려한 집무실.
창백한 얼굴색의 중년 귀족이 창을 통해 자신의 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숲과 구릉과 이어져 푸르른 초목이 시원하게 펼쳐진 전경.
마침 노을빛까지 더해져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지만, 정작 남자의 눈매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지잉-!
집무실 책상의 손바닥만 한 거울이 작게 울며 빛을 발한다.
원거리 통신용 마도구다.
곧 거울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퉁퉁한 턱살과 쭉 찢어진 눈, 중앙 대륙에 영지를 둔 제레미아 켈시온 백작이다.
[후작님.]
“켈시온인가.”
마도구를 향해 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얼음장 같다.
크라젠 요크 후작.
황제의 숙부이자 남부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브뤼쉬의 까마귀가 실패한 것 같습니다.]
“실패라고?”
요크 후작의 싸늘한 목소리.
중앙 대륙 귀족의 거두인 켈시온도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더욱 몸을 조아렸다.
“상세히 말하라.”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던 것 같습니다. 몬스터는 모두 격퇴되었고 까마귀는 사로잡혀 브뤼쉬로 압송되었습니다.]
“보기보다 멍청한 놈이었군. 다른 까마귀에게 임무를 넘겨라. 영혼석은 회수했겠지?”
[물론입니다. 실패한 까마귀는 깔끔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침묵.
마도구 너머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켈시온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카데미 쪽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메퀸토는 사건 조사를 핑계로 마탑에 틀어박힌 모양입니다. 카르파가 뒷수습을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뜻을 보였다 합니다.]
“그것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 알고 있겠지?”
[송구스럽습니다.]
“…슬슬 까마귀들을 국경으로 옮겨야겠군.”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차질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예!]
스스스-!
마도구가 흐릿해지더니 요크 후작의 얼굴이 사라졌다.
통신이 끊어진 것.
“휴우….”
켈시온 백작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에 등이 축축하다.
브뤼쉬의 까마귀가 실패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으나 크게 질책받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다.
까마귀는 얼마든지 더 있으며, 무엇보다 영혼의 계약을 맺은 그들은 절대로 배후 존재를 누설할 수 없을 테니까.
까마귀, 요크 후작에게 충성의 계약을 맺은 흑마법사들.
그들이 배신하는 순간 이계의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길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냥 죽는 편이 낫겠지.’
켈시온은 오스스 몸을 떨었다.
비록 마도구 너머였지만 요크 후작에게 느껴지는 기운이 시간이 갈수록 달라졌다.
이제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대하는 것 같을 정도다.
악마 게르베, 요크 후작이 계약했다는 악마.
그는 악마에게 인간의 영혼을 공물로 바쳤고, 악마는 그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영혼석 또한 악마에게 바칠 영혼을 모으는 마도구.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일으킨 사건도 그 악마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요크 후작이 직접 계획했기에 켈시온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뿐.
후작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있는 남부 대륙의 그랜트 자작과 넬슨 자작은 기꺼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계획에 동참했다.
만약 예상보다 사상자가 많았다면 이를 정치 공세로 연결 지었을 테지.
책임을 물어 카르파와 메퀸토를 파면시키는 것은 물론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처형까지 기대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두 학부장의 힘을 눌러 놓는 데에 그쳤지만 말이다.
그래도 후작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기념식이 얼마 안 남았다.”
후작에게 바칠 영혼석을 더 모아야 한다.
전쟁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대량으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까마귀들을 전선으로 불러 모을 시간이었다.
* * *
“아- 이제 좀 피로가 풀리는 것 같네.”
해가 중천에 뜬 시간.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난 레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뜨끈한 물에 목욕까지 마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일단 길드부터 갔다가….”
오늘 할 일이 많다.
길드에 들러 몬스터 토벌을 보고해야 하고 흑마법사의 물품도 처분하고 감정도 맡길 생각이다. 덱스와 무무카의 방어구도 생각났을 때 챙겨야 한다.
굳이 우르르 움직이는 건 번거롭겠다 싶었던 레오는 혼자서 길드로 향했고, 이제 안면이 꽤 익은 접수처의 샐리가 그를 맞았다.
“시오프의 토벌에 참가한 아카데미의 레오인데요.”
“아, 아침에 다른 용병분들께 이야기 들었어요. 공교로운 일이 있으셨다고요.”
“뭐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죠. 별문제 없겠죠? 결과적으로 몬스터 토벌은 했으니까.”
“정상적인 흐름이라면 브뤼쉬의 의뢰로 진행되는 게 맞긴 한데, 도중에 의뢰주가 베니에르로 바뀌었더군요. 그래도 문제는 없습니다. 저희도 베니에르에서 대금을 받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거 다행이네요.”
일단 제대로 처리된다는 말에 레오는 안도했다.
기껏 시간을 내서 다녀왔는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학점을 인정 못 받으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어쩌다 보니 베니에르에서 의뢰하고 그 가문의 사람이 임무를 수행하는 모양새가 됐는데 상관없어요?”
“그 부분은 길드에서 엄정하게 관리하는 부분이니 걱정 마세요. 이번 건도 브뤼쉬의 의견과 용병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아무 문제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호.”
길드에서도 학점을 돈으로 사는 편법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놓고 편법을 허용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어차피 자신과 크게 관계없는 일.
레오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래서 저희 팀 몫은 얼마나 됩니까?”
“네 분이죠? 기본 토벌 참가 수당이 있고 의뢰주로부터 공훈 인정도 받으셔서… 합계 20실버네요. 아시겠지만 아카데미 프로그램으로 참가하셨기 때문에 금전으로 보상되지는 않아요. 아카데미로 이번 내용이 전달되면 학점으로 정산받으실 겁니다.”
“알고 있어요. 20실버면 20학점이네. 한 명당 5학점꼴인가.”
레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 하루를 쓴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효율이다.
“다음 임무를 좀 찾아보고 싶은데, 중급 리스트 좀 볼 수 있어요?”
“물론이죠.”
괜찮은 의뢰가 있는지 체크해 볼 생각이다.
이번에도 몬스터를 상대하는 임무가 우선순위다. 실력을 키우는 데는 실전만 한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이번 임무에서 느낀 것이 많아 보였다.
[포렌티아 채취, 5골드]
“오!”
포렌티아 다섯 뿌리를 구하는 내용
보수만으로도 눈길을 확 끄는 임무다. 물론 그만큼 쉽지 않겠지만.
“이거 아직 유효해요?”
“그럼요. 하지만 보수만 보고 혹해서는 안 될 내용이에요. 제국에서 포렌티아를 구할 수 있는 곳은 프로인 숲밖에 없으니까요.”
프로인 숲은 제국 내에서도 유명한 몬스터 군락지다.
웬만한 백작 영지만큼이나 넓은 프로인 숲에는 그만큼 다양한 몬스터가 서식했고,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숲의 정기를 받고 자란 귀한 약초들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약초 포렌티아.
섭취한 이의 활력을 증진시키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잔병 정도는 금세 떨치고 일어날 수 있으며, 피부가 맑아지고 기억력도 좋아지는 등 온갖 부수적인 효과도 가진다.
‘거의 만병통치약이지.’
찾는 사람은 많고 물건은 귀했으니, 포렌티아 한 뿌리만 캐도 평민 기준 몇 달은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중급 용병 기준으로 최소한 열 명 이상 팀을 이룰 것을 권장하는 임무예요.”
열 명으로 임무에 성공해도 각자 손에 떨어지는 돈은 50실버.
충분히 큰돈이지만 포렌티아 다섯 뿌리를 찾기 위해 숲을 얼마나 헤매야 할지 모른다. 그사이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를 만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위험을 생각하면 결코 후하기만 한 보수가 아니다.
역시 여태껏 남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거 우리 팀이 할게요. 굳이 열 명도 필요 없어요.”
“최소 인원수를 지킬 것을 강력하게 권장하지만 레오의 팀이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이미 지난 임무에서 충분히 능력을 보여 주셨고.”
레오의 팀이 트롤 넷을 격살했다는 내용은 이미 길드에 보고됐다. 그것도 레오 혼자서 셋을 잡았다는 것까지.
보통 트롤 하나를 안전하게 사냥하기 위한 최소 기준이 중급 용병 다섯이고, 일곱 이상을 권장하는 것을 고려하면 샐리의 판단 근거는 충분했다.
“그리고 이건 어디서 들어온 의뢰예요? 의뢰주가 안 쓰여 있는데, 비밀인가?”
“그렇진 않아요. 의뢰하신 분은 메르윈 백작이세요. 그저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좀 꺼리실 듯해서 비워 놓았어요.”
“아, 그렇다면 혹시 백작 부인의 병 때문에…?”
“제가 대답드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네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윈 백작 부인이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퍼져 있었다.
수도에 올라온 지 몇 개월 안 된 레오도 알 정도이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참, 주문서나 시약 같은 것들을 좀 팔고 싶은데 믿을 만한 곳 있을까요? 이왕이면 감정도 받을 수 있는 곳으로요.”
“으음… 그렇다면 카도르 님의 가게로 한번 가 보시겠어요? 용병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더라고요.”
“고마워요.”
가게의 위치를 받아 길드를 나선 레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메르윈 백작 부인의 병이라면… 분명 저주가 원인이었지.’
회귀 전의 기억이다.
백작 부인이 죽은 뒤, 사라진 치료사의 방에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됐다.
고위 귀족치고 드물게 유약한 성정을 지녔던 메르윈 백작은 그 충격에 몇 년이나 칩거하며 건강을 크게 해쳤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다 결국 따라간 백작이라니.
호사가들 사이에서 꽤나 로맨틱한 이야기로 미화되어 회자되었지만 실상은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메르윈 백작, 무무카의 여동생이 신세 지는 곳이라고 했지.’
괜한 오지랖을 부릴 이유는 없지만, 무무카를 생각하면 모른 척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당장 백작을 찾아가 저주를 언급해도 믿어 줄 리 없으니.
‘어차피 포렌티아는 구할 생각이었으니까.’
임무는 둘째치고 포렌티아는 꼭 필요했다.
제대로 가공만 한다면 좋은 영약이 될 테니까.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