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50화 (50/127)

50. 숲의 조율자 (2)

몇 시간 전, 레오가 한참 기숙사에서 곯아떨어져 있었을 시간.

파앗-! 파앗-!

이른 새벽부터 벨라토르관의 연무장에 파공음이 울렸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두운 시간.

혼자 검을 휘두르는 이는 클라인 반다이트였다.

“하아- 하아-!”

새벽이 밝아 오기 시작할 때쯤에야 검을 놓고 휴식을 취하는 클라인.

조용히 호흡을 갈무리하며 오러 연공을 이어 갔다.

시오프에서 돌아온 것이 바로 어제저녁이다.

휴식을 취할 만도 했지만, 그는 밤늦게 연무장을 찾았다. 트롤을 양단하던 레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녀석은 그사이 더 강해졌다.’

입학시험에서 검을 주고받은 것이 불과 몇 주 전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레오는 더욱 일취월장했다.

오러를 방출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 그의 오러가 거친 야생마였다면 지금은 그 야생마를 완전히 길들인 느낌이다.

게다가 그 성장세는 아직 한계에 부딪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천재라는 단어는 그런 녀석에게 더 어울릴지도 몰라.’

클라인은 진짜 범재가 들었다면 큰일 날 생각을 태연히 떠올렸다.

누군가를 보며 조급한 마음이 든 것도, 또래에게 벽을 느낀 것도 생전 처음이다. 그 때문에 편히 잠들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걸 한다. 그건 변하지 않아.’

호흡을 고른 클라인은 조용히 오러 연공을 이어 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사실 노력하는 천재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검에 관한 호승심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으니까.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아카데미에서 레오를 만났다. 그리고 벽을 경험했다.

단순히 검의 강함뿐만이 아니다. 시오프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은 분명 새로운 일면이었다.

클라인의 안에서, 레오라는 벽은 더 높고 단단해졌다.

그만큼 벽을 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다.

‘고맙다. 내 앞에 나타나 줘서.’

후우-!

연공을 마친 클라인은 길게 숨을 내뿜으며 눈을 떴다.

지쳐 천근만근 무거운 몸이지만 감각만큼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평소보다 마나의 기운이 청량하게 느껴진다. 체내를 흐르는 오러의 흐름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잡힐 듯 잡힐 듯한 간질간질한 감각.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 한 번 도약의 기회가 왔음을.

* * *

길드를 나선 레오는 샐리에게 소개받은 가게를 찾아 외구역으로 향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미스티 잡화.

외구역에서도 꽤 구석진 곳에 위치한 가게다.

겉은 꽤 낡았지만 깔끔하다. 무엇보다 용병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다는 건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양심적인 장사를 한다는 의미다.

잡화점의 주인 카도르의 모습이 대략 그려지는 듯했다.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 수완보다는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으로 장사를 하는, 장인에 가까운 인물이 아닐까?

“계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가게로 들어서자 안경을 쓴 오십 대 정도의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레오를 맞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몸통, 한눈에 봐도 평범한 잡화점 주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내.

무엇보다 레오가 상상했던 인물상과 꽤 거리가 멀어 보였다.

“카도르 씨 되십니까? 길드의 샐리 양에게 소개받고 왔습니다.”

“오, 그래요? 내가 카도르 맞소.”

샐리의 이름을 꺼내자 금세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권하는 카도르.

손아귀 곳곳에 박힌 딱딱한 굳은살이 느껴진다. 오랜 기간 검을 잡은 손이 틀림없다.

‘전직 용병인 모양이군. 어쩌면 현직일 수도 있고.’

“샐리가 손님을 꽤 잘 본 모양이오. 우리 가게를 아무에게나 추천하진 않거든.”

“하하, 그거 영광이네요. 일단 전반적으로 감정을 좀 받고 싶습니다. 일부는 판매하고요.”

레오는 흑마법사에게 털어온 물품들을 늘어놓았다.

주문서야 마력을 쓸 수 있고 어느 정도 지식만 있으면 금방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 시약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 같은 것들은 정확한 감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감정까지 하는 건가?’

감정은 마법에 속하는 영역이다.

카도르는 아무리 봐도 머리보다 몸 쓰는 쪽 인물인 것 같은데….

“어디서 난 것들이오? 애먼 짓을 하는 양반은 아닐 테고.”

“흑마법사의 물건입니다. 일종의 전리품이겠네요.”

“호오… 어쩌면 재미있는 녀석이 섞여 있을지 모르겠구먼. 미스티! 좀 나와 보거라.”

‘미스티?’

그러고 보니 가게 이름이 미스티 잡화였지.

누군가의 이름을 딴 거였군.

곧 가게 안쪽에서 졸린 눈을 한 소녀가 나타났다.

붉은 기가 섞인 갈색 머리칼을 뒤로 한데 질끈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모습이 꽤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

“감정이야?”

“그래, 흑마법사의 물건이라는구나.”

“오?”

흑마법사의 물건이라는 말에 소녀의 눈빛이 반짝 빛난다.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더니 레오를 보는 둥 마는 둥 물건들부터 살피기 시작한다.

“감정하는 데 시간 좀 걸릴 텐데 괜찮겠소?”

“물론이죠.”

“차 한잔 내드리지.”

카도르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레오는 감정에 열중인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인상을 쓰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하나하나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나갔는데, 그 속도가 레오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감정하는 것보다 내용을 적는 데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정도.

결과를 확인해야 알겠지만, 저 정도 속도로 평균적인 감정만 해내도 꽤나 수준 높은 감정사라 할 수 있다.

“여기.”

연갈색 액체가 담긴 투박한 찻잔.

익숙한 향기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베아모르 잎차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오, 베아모르를 아는 거요?”

“예전에 마셔본 적이 있어서요.”

“부잣집 도련님 같아 보이는데 신기하구먼. 하긴 그냥 도련님이 흑마법사를 상대할 리도 없나, 하하하.”

베아모르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그 잎을 말려서 우려낸 차는 약간의 각성 효과를 가지는데, 용병들이 즐겨 마셔 ‘용병의 차’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물론 각성 효과라고 해 봐야 잠이 좀 안 오는 정도의 미약한 수준이기에 기호 음료에 가깝지만.

레오도 용병 시절 지겹도록 마신 차였으나 회귀 후 처음 접했기에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감정하는 분은 따님입니까?”

“그렇소. 저런 재주가 있어 참 다행이지. 최소한 아비처럼 험한 일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 자랑 좀 하자면 내년에 아카데미 시험을 치르게 할 생각이오.”

“그렇군요, 명석한 따님이네요.”

카도르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고 레오도 적당히 맞장구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차 한잔을 거의 다 마셨을 때쯤.

미스티가 안경을 벗어 탁 테이블에 놓았다.

“아빠는 손님한테 쓸데없는 이야기 좀 하지 마.”

“오, 미스티 벌써 끝난 거냐? 역시 우리 딸!”

카도르는 딸의 타박에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하나씩 설명드릴게요.”

미스티도 아빠의 호들갑을 무시하며 레오를 자기 앞으로 불러 앉힌다.

어려 보이는데도 꽤 똑 부러지는 면이 엿보인다.

“먼저 여기 주문서들은요….”

주문서는 대한 것은 당연하지만 덱스에게 미리 들은 것과 일치했다.

덱스가 쓸 만한 것들은 미리 빼놓고 팔 것만 챙겨 온 것이기에 제시한 가격에 모두 넘기기로 했다.

제대로 된 감정사의 능력이 필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이건 회복 시약이에요, 약간의 각성 효과가 함께 배합되어 있네요. 시중에서 파는 하급 시약보다 조금 더 효과가 좋아 보여요.”

시중의 하급 시약이라 해도 가볍게 구매할 만한 가격은 아니다.

그보다도 효과가 좋다니 잘 챙겨 놓기로 하고.

“이건 마나 민감도를 높이는 용도 같네요. 빠르게 마력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예요.”

음, 이건 덱스나 줘야겠다.

“이건 마법으로 조합한 마비 독이네요. 중급 몬스터 정도까지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중급 몬스터라면 트롤, 오크 정도를 가리킨다.

녀석들을 상대로 마비 독을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일단 챙겨 놓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특정 부위에 혈액을 집중시키는 용도인데….”

설명을 이어 가던 미스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자신 있게 설명을 이어 가던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이다. 감정이 잘 안 된 건가?

“특정 부위요?”

“저, 저도 왜 이런 마법 식이 적용되었는데 모르겠는데. 그, 고간 부위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혈액을 집중시키는….”

아.

“그건 팔게요. 가격은 알아서 쳐 주세요.”

레오는 괜히 카도르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대답했다.

미친놈이 별걸 다 만들었네. 하긴 비싼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는 잡동사니에 가까웠다.

대상자의 머리카락을 감아 약한 저주를 거는 도구라든가, 단시간 동안 혈색을 밝게 해 주는 바르는 약이라든가.

꽤 혹하는 효과에도 잡동사니라 칭한 것은 그 이상의 부작용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부는 판매하고 일부는 그냥 처분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이 메달인데요. 원거리 통신 마법이 부여되어 있어요. 안타깝게도 상대는 알 수 없지만요.”

“통신 마법?”

까마귀같이 생긴 새가 양면으로 음각된 메달.

레오는 메달을 들어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앞뒤로 동일한 문양 새겨졌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을 찾아볼 수 없다.

“대상자의 마력이 아니면 작동하지 않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가지고 계셔봐야 소용없을 거예요. 저희도 매입은 좀 힘들 것 같네요.”

“그렇군요. 이건 일단 가져갈게요.”

“그러면 여기, 지금까지 판매 의사를 밝히신 물건과 매입 희망 금액입니다.”

리스트와 합계 금액을 보고 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횡재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짭짤한 금액이다. 게다가 이 까마귀 메달도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통신 마법이라…. 그 흑마법사 녀석을 사주한 녀석이 있는 걸까.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들르죠.”

“또 봅시다.”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고 레오는 잡화점을 나섰고, 잠시 후 약속 장소에서 덱스와 무무카가 합류했다.

레오는 길드에서 본 새로운 임무에 대해 의견을 나누면서, 무무카에게 메르윈 백작의 건을 물었다.

“그렇다. 내 여동생을 거두어 준 분이지. 백작 부인이 와병 중이라는 건 동생에게 들어 알고 있다. 가능하다면 그 의뢰를 꼭 하고 싶군.”

“나도 상관없어.”

장소는 미개척 지역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인 숲.

게다가 포렌티아를 발견할 수 있을지 확신도 없는 상황.

그런데도 메르윈 백작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던 무무카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덱스도 별말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런데 클라인은? 안 왔냐?”

레오가 클라인에 대해 물었다.

가능하면 데리고 나오라고 했는데….

“아, 그 녀석 갑자기 본가에 돌아갔다던데.”

“본가에? 왜?”

“나도 그쪽 담당 메이드에게 전해 들었어. 본가에서 수련해야겠다면서 갑자기 출발했대. 우리한테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더라고.”

“흐음….”

평소에도 검술 수련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다.

그런 녀석이 수련을 위해 본가에 돌아가겠다고 할 정도면 정말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고 수련에만 몰두하고 싶다는 뜻.

그만큼 중요한 기로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건가.’

레오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쩌면 녀석은 회귀 전보다 더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번 의뢰는 우리 셋이서 하자. 괜찮지?”

“좋아. 당장 출발할 거야?”

“아냐, 그전에 오늘은 돈 좀 쓰자고.”

레오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냈다.

일단 장비부터 제대로 맞출 생각이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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