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숲의 조율자 (3)
시오프에서 돌아온 며칠 후.
줄리앙은 모처럼 조용한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파블로와 니앙과의 관계에도 변화의 기류가 흘렀다. 일단 두 사람이 예전처럼 부산스럽게 대하지 않아 훨씬 편해졌다고 할까.
오후 수업이 끝나고 모처럼 방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던 줄리앙의 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세실? 네가 웬일이냐?”
문밖에 서 있는 건 쌍둥이 동생 세실.
그녀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방문 앞에 선 채로 용건을 말했다.
“…아버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어요. 내일 본가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시네요.”
“갑자기 왜?”
“글쎄요. 내일 오후에 마차를 보낸다고 하시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무표정하게 말을 마친 세실은 그대로 몸을 돌렸고, 줄리앙은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방문을 닫았다.
여동생이 쌀쌀맞게 구는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쯧.”
짜증이 올라온 줄리앙은 침대 위로 거칠게 몸을 던져 누웠다.
여동생은 우수했다.
어릴 적부터 한 번 가르쳐 주면 잊는 법이 없었다. 명석하고 기품 있으며 인내심 강했다.
황녀의 놀이 친구로 발탁되어 황궁에 들어간 후에는 마법의 재능까지 보였다.
그렇기에 줄리앙은 언제나 여동생 세실과 비교당했다.
가문의 적장자인 그였지만 가신이나 하인들의 수군거림을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처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모두에게 인정받고자 두 배, 세 배로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마다 노력의 결실이 맺어지는 속도는 달랐고, 어느새 줄리앙은 고통스러운 노력보다 달콤한 안주에 물들기 시작했다.
가신의 자제들을 이끌고 대장 놀이를 하는데 재미를 붙였다.
자잘한 사고도 있었지만, 가문에서 모두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눈길은 차가워졌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어차피 노력해도 따뜻하게 바라봐 주지 않을 테니까.
여동생이 쌀쌀맞아진 것도 그때쯤이리라.
“가기 싫다….”
아버지는 왜 갑자기 저녁 식사를 하자는 걸까.
조금 전에 먹은 저녁 식사가 가슴에 턱 하니 막힌 느낌이다.
* * *
바일 베니에르 백작은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귀족이다.
영지도 없었던 미진한 가문의 젊은 귀족은 제국의 혼란기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황제의 눈에 들었다.
이후 젊은 나이에 중앙 정치에 데뷔하여 승승장구했고, 황실의 재정과 사법을 총괄하는 내무 장관직과 함께 백작위를 하사받으며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특히 딸 세실을 3황녀의 놀이 친구로 입궁시킨 것은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탁월한 선택으로 평가받곤 했다.
그런 베니에르 백작에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민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장자 줄리앙이었다.
어느 순간 엇나가기 시작한 아들.
이번 아카데미 입학도 반강제로 진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영문을 모르겠군.’
베니에르 백작은 집무실 책상에 펼쳐진 고급스러운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반다이트 백작으로부터 받은 감사 서신.
같은 황제파로 취급받지만 두 백작 사이에는 접점이 별로 없다.
베니에르 백작이 중앙 정치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면, 반다이트 백작은 국경을 지키며 황제파의 무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서로 성향도 달랐고 개인적인 친분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서신의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줄리앙이 반다이트 백작령의 카미르 광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과 그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내용.
‘브뤼쉬에서도….’
그것뿐만이 아니다.
브뤼쉬 자작에게도 감사 서신이 도착했다. 서신뿐 아니라 금화와 선물도 함께다.
줄리앙이 몬스터에게 공격받는 브뤼쉬의 영지민을 구했다고?
알고 보니 용병을 고용해 싸운 모양. 브뤼쉬에서 보낸 금화는 보수를 받으러 베니에르를 찾아온 용병들에게 모두 지급하고도 절반 넘게 남았다.
브뤼쉬 자작은 꽤나 속물적인 인간이다. 그가 보낸 금화와 선물에는 분명 다른 뜻이 섞였을 것이다.
반대로 반다이트 백작은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상대다. 중앙 정치에 일절 관심이 없으며 오직 제국의 방패인 것을 명예롭게 여기는 이였으니까.
그런 이에게 받은 감사 서신은 때로는 천금의 값을 한다는 것을, 베니에르 백작은 잘 알고 있다.
‘줄리앙,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이쯤 되자 베니에르 백작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됐다.
도대체 아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시점.
철없는 아들이 바뀌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본가에 도착한 줄리앙은 의식적으로 깊게 심호흡했다.
곧 저녁 식사 시간.
몇 주 만에 돌아온 집은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불편했다.
“공자님,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누가 긴장한다고 그래.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러시군요, 확실히 공자님 나이 때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법이지요. 못 뵌 사이 한결 어른스러워지셨습니다.”
“크흠….”
고작 한 달 동안 얼마나 변했겠는가.
민망해진 줄리앙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줄이자 필립은 주름진 눈으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예전하고 분위기가 바뀌셨습니다.”
“몰라, 그런 거.”
툴툴거리듯 대꾸하지만 애정이 담긴 목소리.
줄리앙에게 노집사 필립은 어릴 적 자주 집을 비웠던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보다 더 가족 같은 존재였다.
“요즘 건강은 괜찮아? 심장 안 좋다고 했었잖아.”
“한동안 안 좋았던 시기가 있었지요. 공자님이 몰래 외출해서 사라졌다던가, 어렵게 모신 마법 선생님의 수업에 만취해서 들어갔을 때였던가요. 최근에는 다행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거 나 욕하는 거지?”
“감히 공자님께 그럴 리가요.”
“으씨….”
“세실 아가씨가 먼저 도착해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줄리앙은 입을 삐죽거리며 열린 문을 통과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벽면을 채운 거대한 그림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베니에르 백작의 초상화.
그것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줄리앙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
테이블에는 먼저 도착한 세실이 앉아 있다.
줄리앙이 맞은편에 자리했음에도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마차에서처럼 다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베니에르 백작이 들어섰고 요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둘 다 오랜만이구나. 이제 아카데미 생활을 한 달 정도 해 보았을 텐데, 어떠냐. 특별히 어려움은 없느냐?”
베니에르 백작은 앞에 놓인 큼직한 통구이를 나이프로 썰며 포문을 열었다.
치즈를 곁들인 빵과 스프가 식탁에 함께 올랐지만 줄리앙과 세실은 음식에 손대지 않고 조용히 백작의 손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아카데미의 경험도, 황녀 전하를 모시는 일도 모두 기쁘게 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하께서 아카데미 생활을 아주 기꺼워하시니 저 또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그래, 전하께서 4서클에 오르셨다는 말은 익히 들었다. 전하를 보필하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너도 열심히 정진하거라.”
“노력하겠습니다.”
이윽고 고기를 썰던 백작의 손이 멈췄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잘게 썰린 고기를 덜어 줄리앙과 세실에게 나누었고, 그제야 두 사람도 식사를 시작했다.
“줄리앙, 너는 어떠하냐? 별일 없느냐?”
흰 빵을 스프에 찍어 크게 한 입 베어 문 백작이 줄리앙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심 먼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음에도 줄리앙이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백작은 조용히 식사를 이어 가는 줄리앙을 응시하며 포도주로 입을 적셨다.
조금 철이 든 것일까.
예전 같았으면 진작 제 무용담을 자랑스레 떠들었을 아이다.
그런 아들이 겸양이라는 것을 배운 듯하여 백작은 조금 흐뭇했다.
“반다이트 백작에게 서신을 받았다.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구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브뤼쉬 자작에게도 서신을 받았지. 금화와 선물까지 더해서 말이다.”
“그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많이 변한 것 같구나.”
“…….”
“항상 몸조심하거라.”
“…예.”
몸조심하라니.
짧은 한마디에 묻어나는 따뜻함에 줄곧 긴장했던 줄리앙은 조금 동요해 버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아버지와 눈이 맞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바라본 아버지는 꽤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프로인 숲의 북쪽과 동쪽에는 너른 습지가 인접해 있다.
숲과 맞닿아 동서로 흐르는 유메른 강의 영향이다.
건기에도 수심 1~2미터 이상을 족히 유지하는 습지와 습지에서만 활동하는 몬스터는 프로인 숲 내부의 몬스터가 밖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천연 방패가 되어 주기도 했다.
“젠장, 숲이 바로 저쪽인데 이렇게 돌아서 가야 한다니.”
덕분에 습지를 피해 멀리 돌아가야 하는 레오 강 하류로 이동하며 불평을 내뱉었다.
강 하류에서 도강하여 굳은 땅이 나타나는 지점까지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돌아가는 게 나아. 모처럼 갖춘 새 장비를 망치긴 싫으니까.”
셋의 복장은 이전과 한결 달라졌다.
불편한 갬비슨과 싸구려 가죽 갑주를 벗어 던지고 질기고 가벼운 그레이트 베어의 가죽을 사용한 장비를 새로 맞췄다.
방어를 더하고 민첩을 살리기 위해 중요 부위에는 부분적으로 판금을 더했다.
꼭 새로운 장비로 이번 임무에 참여하고 싶었던 레오는 공방에 사흘 만에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절대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하던 공방 주인이었지만 된다고 할 때까지 동전을 쌓았더니 이틀 반 만에 만들어 냈다.
역시 돈이 충분하면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레오는 다시 한번 느꼈다.
하류에서 강을 건너 꼬박 반나절을 이동하니 프로인 숲의 초입에 도달했다.
이미 해가 진 시간이라 셋은 자연히 야영을 준비했다.
“숲 하나를 두고 풍경이 완전히 반대로군.”
프로인 숲의 북쪽과 동쪽에 습지와 강이 붙어 있다면, 남쪽은 황무지가 인접해 있다.
레오는 모닥불 옆에 주저앉아 챙겨 온 육포를 씹었다.
“숲이 진짜 넓어 보인다. 우리 고향 숲의 몇 배가 되려나?”
“몇 배? 몇십 배, 아니 백 배가 넘을지도 몰라.”
지도에 표시된 론마른의 숲은 정말 코딱지만 했다.
그에 비해 프로인 숲은 웬만한 백작령에 비빌 크기다.
“몬스터도 많겠지?”
“일단 고블린, 트롤은 기본일 테고. 오우거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 있지.”
“오, 오우거라고?”
덱스가 놀라 되물었다.
고블린은 하급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흔하다.
어디에서든 무리를 짓고 세를 불리니 바퀴벌레에 비유되는 놈들이다. 또한 산과 숲이 깊은 곳이라면 트롤도 드물지 않게 자리를 잡는다.
오우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중급 몬스터인 트롤도 종잇장처럼 찢는 존재. 달리 지상 몬스터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소드 마스터를 바라볼 수준이 아니면 인간은 오우거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당연히 이들에게도 버거운 상대였다.
“어디까지나 소문이야. 까짓거 나타나면 튀면 되지.”
“그렇지? 도망치면 되겠지?”
“물론 안전하게 튀려면 하나 정도는 미끼로 던져야지. 그러고 보니 오우거는 마법사를 제일 좋아한다더라. 운동 부족이라 살이 야들야들하다나.”
“야!”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면서 식사를 마치고 이내 잘 준비했다.
“빨리빨리들 자라고, 내일은 해가 뜰 무렵 진입할 거니까.”
숲의 어둠은 빠르게 시작하기에, 무조건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한다.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서지.”
“그래, 부탁할게.”
첫 불침번을 자처한 무무카는 마른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더 밀어 넣었다.
낮에는 날씨가 꽤 따뜻해졌지만 밤공기는 아직 서늘하다. 아마 깊은 숲 주변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모닥불을 뒤적여 불을 키우던 무무카의 눈이 문득 남쪽 황무지를 향했다.
대략 석 달 전, 저 황무지 너머의 작은 도시 타렌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석 달은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던 지난 십여 년의 삶을 완전히 바꾼 시간이었다.
여동생을 찾았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살아 있어 줘서, 찾아 줘서 고맙다는 여동생의 말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처음으로 미래라는 것을 그려 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이 둘을 만나고 일어난 변화였다.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말에 레오는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되어 달라 했다.
그건 과연 무엇을 위한 동료일까.
굳이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며, 뭐가 됐든 그의 곁을 지킨다는 선택은 변함없으니 상관없다.
지금 생활도 꽤 마음에 든다.
그러니 지금처럼 묵묵히 함께 걸으면 될 일이다.
타닥, 타닥.
무무카가 내쉰 숨이 뿌연 입김이 나타났다가, 곧 사라졌다.
조용한 모닥불 소리와 함께 숲의 밤이 깊어져 갔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