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숲의 조율자 (6)
유메른 강 건너에서 운 좋게 수도로 향하는 마차를 얻어 탔고, 그 덕에 생각보다 빨리 길드에 도착했다.
접수처의 샐리가 일주일 만에 돌아온 레오를 반갑게 맞았다.
“고생했어요. 역시 쉽지 않았죠?”
“그러게요, 숲이 정말 넓더라고요.”
“며칠이나 헤맸어요?”
“흐음, 닷새 정도?”
샐리는 레오 일행이 숲을 헤매다가 그냥 돌아왔으리라 짐작했다.
아무렴 전문 약초꾼도 찾기 힘든 포렌티아를 달랑 세 명이서 며칠 만에 찾아내리라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이전에도 몇 팀이 시도했지만 사상자만 발생했거든요.”
“하긴, 몬스터들이 좀 거칠긴 하더라고요.”
레오는 오우거의 존재를 굳이 밝히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정령수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는데 괜히 더 복잡해질 것만 같아서.
“어쨌든 잘 돌아왔어요. 충분히 쉬고 나서 다음 임무를 찾아보도록 해요.”
“예?”
“무리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거예요.”
“……?”
레오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제야 대화가 엇갈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리 빼놓은 포렌티아 다섯 뿌리를 턱 하니 올렸다.
“당연히 임무는 완료했습니다. 이걸로 500학점이죠?”
셋이 나눠도 인당 166학점.
4년 동안 채워야 할 길드 임무가 100학점인데 이 한 건으로 4년 치를 끝내 버렸다.
그러고 보니 클라인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쩔 수 없지.
“……?”
이번에는 샐리 쪽의 말문이 막혔다.
학점 쪽은 아무래도 좋다.
이 임무가 어디 보통 임무인가? 중급 용병 스무 명이 진입했다가 일주일간 다섯이 죽고 결국 실패해 돌아온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달랑 셋이서 포렌티아를 구해 왔다고? 정말로?
“아, 저, 음, 확인 좀 해 볼게요.”
“얼마든지요.”
길드 소속의 감정사가 금방 나타났다.
수염이 하얗게 세고 허리까지 굽은 노인이다.
포렌티아라는 말에 어느새 주변에 구경꾼이 몰렸고.
노인은 조심스레 가죽 주머니를 열고 이끼를 풀어 헤쳤다.
장갑으로 흙과 이끼를 조심스레 떼어내자 이윽고 포렌티아가 몸을 드러낸다.
“오오…!”
포렌티아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감정사가 감탄을 뱉었다.
은은하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순수한 마나.
그것이 응축되고 다시 응축된 집합체, 포렌티아임이 분명했다.
“영감! 맞아? 맞냐고?”
“거, 말 좀 해 봐, 답답해 죽겠네!”
살면서 포렌티아를 구경도 못 해 본 이들이 태반.
당사자인 레오 일행보다 구경하던 용병들이 더 흥분해 감정사를 재촉했다. 지켜보던 샐리도 덩달아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때요? 맞나요?”
“…내 평생 이 정도 상등품은 처음이오. 가장 어린놈도 족히 70년은 넘어 보이는구먼. 다섯 뿌리 모두 최고 등급의 포렌티아요.”
“세상에….”
덩달아 용병들도 소란스러워졌다.
살면서 포렌티아를 한 번이라도 직접 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비켜 봐! 구경 좀 하게!”
“영감, 나 냄새 한 번만 맡아 보게 해 줘! 그게 그렇게 정력이 좋다며?”
“에라이, 병신아, 대가리에 든 게 그것밖에 없지?”
“뭐 이 새꺄?”
도떼기시장같이 정신없이 고성이 오간다.
그런 와중에도 절대로 감정사 앞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켰다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자, 감정도 끝났고. 한 가지 요청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저희가 뵙고 싶어 한다고 의뢰주께 전해 줄 수 있나요?”
“일단 전달해 볼게요. 석 달 넘게 남아 있던 의뢰였기 때문에 의뢰주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럼, 부탁할게요.”
아직도 소란스러운 길드를 뒤로 하고 레오 일행은 거리로 나왔다.
간단히 끼니를 좀 때우고 기숙사로 돌아갈 작정이다.
“어때 무무카? 메르윈 백작이 우리를 만나줄까?”
일반적으로 고위 귀족인 의뢰주에게 만남을 청하는 건 비상식적이지만, 이번 임무의 특수성과 무무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음, 내 여동생을 거두어 준 것과 영주에 대한 영지민들의 평가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
“따로 백작을 만나려는 이유가 있나?”
“…백작 부인의 병에 대해서 따로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가능하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군. 백작이 아니라 백작 부인을 보는 것이 진짜 목적이라고 보면 되나?”
“그래, 그러니까 혹시 그런 상황이 되면 말을 잘 맞춰 줘.”
“알았다.”
어차피 포렌티아로는 백작 부인을 치료할 수 없다.
결국은 저주를 해주해야 하는데 일단 어떤 식으로는 직접 만나 확인해야 한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단순히 무무카와 관계된 인물이라서 도우려는 것뿐만은 아니다.
회귀 전, 부인이 죽고 크게 상심한 메르윈 백작은 몇 년이나 칩거하며 영지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백작마저 병으로 죽었고 후계는 자연히 하나뿐인 혈육 백작 영애에게 넘어갔다.
…그 백작 영애가 허수아비 영주에 불과했다는 것은 떠돌이 용병들도 알 정도였다.
영애의 뒤에서 실질적으로 백작령을 통치한 자는 그의 봉신 중 하나인 베눔 자작이었으니까.
그때를 기점으로 후작파의 힘이 비약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영 개운하지 않다.
“그런데 나머지는 어쩔 거야? 꽤 비싸게 팔 수 있는 거 같은데?”
“음, 한 뿌리에… 못해도 80실버 이상은 받겠지.”
메르윈 백작이 한 뿌리당 1골드 가격으로 의뢰를 넣었다. 그러니 아무리 낮게 잡아도 그 정도 가치는 충분하다.
“80실버? 지금 일곱 뿌리나 남았으니까… 와우….”
숲의 정기를 먹고 자란다는 포렌티아는 약재나 마법 재료로 가치가 높다.
메르윈 백작도 아마 부인을 위한 약을 제조하는 것이 목적이겠지.
“남은 건 우리가 쓸 거야.”
“우리가 쓴다고?”
하지만 정말 가치 있는 사용처는 따로 있다.
숲의 정기라는 건 결국 마나와 같은 말이다.
짧게는 수십 년에서 백 년 이상 숲의 마나를 축적한 약초? 마나의 정수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전사는 오러를, 마법사는 마력을 크게 늘릴 수 있다.
물론 그냥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포렌티아 속의 마나를 깨우는 특별한 작업이 필요하니까.
다행히 지금은 그 방법이 밝혀지기 전이고, 15년 뒤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레오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고작 몇 골드 따위, 생각도 안 나게 해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으응?”
덱스와 무무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레오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 없었으니까.
낑-!
줄곧 레오의 발밑에 있던 털뭉치가 지루한 듯 낑낑거렸다.
손을 내밀자 잽싸게 손바닥을 밟고 레오의 무릎 위에 올라타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바람 같다. 실제로 체중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도 했고.
“그런데 이 녀석 기숙사에 데려갈 수 있는 건가?”
“…글쎄, 그걸 생각 못 했네.”
레오는 미간을 찡그리며 털뭉치를 바라보았다.
정령 어쩌고 해 봐야 시끄럽기만 할 테니 이 녀석에 대한 건 비밀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 * *
며칠 만에 돌아온 기숙사 방은 여전히 정갈했다.
방을 비운 동안에도 담당 메이드 일레인의 손길이 구석구석에 닿은 덕분.
“하, 역시 집이 최고야.”
정 붙이면 그곳이 고향이고 집이지.
침대에 몸을 던진 레오를 따라 털뭉치도 함께 뒹굴며 편안함을 만끽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침대의 촉감이 꽤나 마음에 든 것 같다.
“동물을 키우면 안 된다는 규칙이 없어서 다행이야.”
생명의 은인이라 여기는 건지 아니면 서로의 마나가 섞여 친근하게 여기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이 잘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녀석의 본질은 이런 조그마한 소동물이 아니다.
아무래도 정령수라는 것에 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름을 붙여야겠지?”
마냥 이 녀석, 저 녀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
“새하얀 녀석이니 슈니는 어떠냐? 너무 귀여운 이름인가?”
캉캉-!
털뭉치 녀석이 기분 좋게 짖더니 침대 위를 빙글빙글 돈다.
“마음에 들었나? 그럼 넌 이제부터 슈니다.”
슈니, 한겨울의 눈을 뜻하는 말.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녀석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리 와 봐.”
캉-!
슈니가 폴짝 뛰어 레오의 배 위에 올라탔다.
전에도 느꼈지만 체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북슬북슬한 털은 손이 푹 파묻힐 정도였는데 비싼 옷감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스윽, 스윽-!
머리부터 등까지 쓰다듬는 감촉이 꽤 좋았기에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쓰다듬는 행위에 열중해 버렸다.
“헉!”
한참 동안 슈니를 만지며 시간을 보내던 레오가 정색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냥 잠깐 만진다는 것이 족히 한 시간은 지난 것 같다.
뀨잉?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슈니도 덩달아 눈을 반짝 뜬다.
‘이거 완전 마약이네….’
진심으로 놀랐다.
이 모습을 아무에게도 안 들켜 다행이었다.
슈니와 함께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를 발견했다.
지난번, 수도에 집을 마련했다는 편지에 대한 어머니의 답장.
-사랑하는 레오에게
네가 집을 떠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아카데미의 생활은 어떠니? 아픈 곳 없이 건강하지?
너희가 아카데미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내 일처럼 축하해 주었단다.
어떻게 아셨는지 영주님께서도 5년간 마을의 세금을 면제해 주셨어, 참 감사한 일이야.
자랑스러운 아들 레오,
수도에서 함께 살 수 있다니 너무 기쁘구나, 릴리도 너무 기뻐했단다.
그동안 오빠가 많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야.
한시라도 빨리 만나 그간의 일을 듣고 싶지만 조금 시간을 줄 수 있겠니?
그동안 신세 진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천천히 짐을 정리해 보려고 해. 덱스네와 일정을 맞춰서 함께 출발해 볼게.
편지를 전달해 주신 분이 답장을 받아 가려 기다리고 계시네. 이만 짧게 줄일게.
항상 몸조심하렴.
사랑하는 엄마가.
레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기본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이어 갈 테지만 언제든 볼 수 있는 거리에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 한결 마음이 따뜻해진다.
곧바로 부동산 중개인 프라인에게 서신을 남겼다.
지난번에 보았던 집을 둘 다 구매하겠다는 내용. 가족들이 올라와 곧바로 정착할 수 있도록 적당한 가구도 함께 부탁했다.
* * *
똑똑.
오랜만에 느긋하게 쉬고 있자니 노크가 울렸다.
열린 방문 뒤로 담당 메이드 일레인이 모습을 보인다.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이에요, 일레인.”
언제나 레오가 방을 비운 사이에 방 정리를 마치곤 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부러 찾아온 것은 따로 용건이 있다는 뜻.
여느 때처럼 사무적인 얼굴로 방 상태를 훑던 그녀의 눈동자가 한곳에 고정됐다.
레오의 발치에 붙은 슈니를 발견한 것이다.
“저, 저 아이는 뭐죠?”
“아, 어쩌다 보니 기르게 됐어요. 기숙사에서 기를 수 있다던데요? 음… 물론 일레인의 일거리를 늘린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일거리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레오 님이 언제나 쾌적한 환경에서 쉴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제 소임이니까요.”
“…예?”
일레인의 말수가 평소와 달리 많아졌다. 목소리도 한 톤 정도 떠 있는 듯하다.
레오에게 대답하면서도 그 두 눈은 귀여운 생물에 꽂혀 움직이지 않는다.
검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두 눈.
아직 늠름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귀엽게 솟은 코.
하얀 솜사탕 같은 몸은 분명히 보들보들하겠지.
아아, 하얗고 작고 소중해….
“저기, 일레인?”
“…….”
“이봐요, 괜찮아요?”
“예에? 그럼요, 괜찮아요. 아주 괜찮고 말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 아이를 한번 만져 봐도 될까요?”
“…뭐, 그러든가요.”
화색이 된 얼굴로 조심스레 슈니를 향해 손을 뻗는 일레인.
뀨우?
적의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손길에 슈니도 가만히 몸을 내맡긴다.
쭈그려 앉아 조심스레 슈니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던 일레인은 용기를 내 양손으로 슈니의 몸을 안아 들었다.
‘으아, 부드러워…!’
폭신하고 부드러운 털.
게다가 방금 목욕했는지 좋은 냄새까지.
언제나 딱딱하던 일레인의 얼굴이 한낮의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