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55화 (55/127)

55. 포렌티아 (1)

“헤헤헤….”

슈니를 가슴에 안아 든 일레인에게 한참이나 바보 같은 웃음을 실실 흘린다.

검은 보석 같은 녀석의 눈을 한 번 마주치고 다시 헤벌쭉 벌어지는 입.

그게 벌써 몇 차례 반복되자 레오도 슬슬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헛, 죄송합니다.”

조심스레 말을 걸자 일레인이 흠칫 몸을 떤다.

마치 둘만의 공간에 있다가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느낌.

“제가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고요.”

정신을 차린 일레인이 슈니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총총총.

짧은 다리를 움직여 레오의 발치로 향하는 슈니.

그 뒷모습을 보는 일레인의 눈동자에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뭔가 용건이 있어서 온 거죠?”

“크흠! …죄송합니다. 메르윈 백작가로부터 전언입니다. 백작께서 직접 내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며, 초대하는 분은 덱스, 무무카 님을 포함한 세 분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아카데미로 마차를 보내겠다고요.”

“알겠습니다. 기꺼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다행히 일레인은 평소 모습으로 금방 돌아왔다.

짧은 흑발을 찰랑이며 휙 돌아서 방을 떠나는 그녀.

아니, 조금 휘청거리는 것 같긴 한데… 상관없겠지.

* * *

다음 날.

오후 수업을 마친 레오, 덱스, 무무카는 곧바로 메르윈에서 보내온 마차에 올랐다.

백작의 영주성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진 후였다.

“어서 오세요, 귀빈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영주성 입구에 마중 나온 이들 중 눈에 띄는 수인이 한 명 있다.

성인 남성 정도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키, 회갈색 털의 웨어울프.

무무카의 여동생 미리야다.

“미리야!”

“오라버니,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그가 프로인 숲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듣고 걱정이 많았다는 미리야.

무무카는 그런 미리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그런 걱정 마라. 내가 어디서 당할 것 같더냐.”

레오 일행을 맞이하는 성 내 시종들 표정도 밝았다.

2미터를 훌쩍 넘는 무무카의 덩치에 흠칫 놀라는 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호의가 담긴 눈길. 그것만 봐도 미리야가 이곳에서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식사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집사를 따라 도착한 식당에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레오 일행을 초대한 돌로리아 메르윈 백작이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으시게. 내가 메르윈의 가주 돌로리아 일세.”

첫인사에서 느낄 수 있듯 백작은 꽤 호방한 성격이었다.

레오 일행이 평민인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시종일관 존중과 호의를 보였다. 오히려 배움의 기회가 적었을 텐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에 더 감탄했다.

“하하핫! 자네들이 올해 수석 입학생이었군.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백작의 시선이 무무카에게 이어진다.

“자네와는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무무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릴 날을 고대했습니다. 백작님께서 거두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여동생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교류전 때 이야기를 딸에게 전해 들었어. 나 또한 자네에게 감사하네. 이렇게 보니 인연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은가? 하하하,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식사부터 드세.”

메르윈 백작이 직접 큼직한 고기를 썰면서 식사가 시작됐다.

영주의 식탁이 영지의 부유함 척도라는 말이 있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대체로 맞는 말이다.

유메른 강에 맞닿은 메르윈령 남부는 넓은 밀 경작지로 유명했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밀은 제국 전체에서 손꼽는 고품질이다.

오죽하면 수도에도 메르윈의 밀을 사용하는 것을 내세우는 유명 빵집이 있을 정도.

“우와, 이런 빵 처음 먹어 봐….”

덱스는 입에서 살살 녹는 흰 빵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처음 아카데미 식당에서 흰 빵을 먹었을 때 이렇게 맛있는 빵은 세상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빵은 그것을 능가한다.

레오나 무무카라고 해서 반응이 다르지 않다. 아카데미 식당이 아니고서야 돌덩이 같은 호밀빵을 녹여 먹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메르윈의 밀은 제국 최고 품질이지. 모두 유메른 강의 축복 덕이라네.”

백작은 손님들의 솔직한 반응이 기쁜지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 말대로 유메른 강을 낀 메르윈령은 제국의 주요 곡창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밀이 영지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정도.

‘어쩌면 이 밀 경작지 때문에?’

레오는 베눔 자작에 대한 의혹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메르윈 백작의 봉신인 베눔이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며 후작파에 끈을 댈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터.

메르윈의 밀 경작지는 후작파가 충분히 욕심낼 만한 카드였다.

잠시 후, 식사를 이어 가며 백작의 기색을 살피던 레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포렌티아는 백작 부인을 위한 겁니까?”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 가라앉았다.

아무리 손님이라고 하나 굳이 먼저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다만 레오로서는 이것이 오늘 찾아온 목적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제 와 숨길 것도 없겠지. 그 말이 맞네.”

다행히 백작은 크게 화내지 않았다.

백작 부인이 병상에 누웠다는 사실은 이제 와 비밀이라 할만한 것도 아니었으니. 게다가 다른 손님도 아니고 그 포렌티아를 직접 구해 온 이들이 아닌가.

“제가 포렌티아를 좀 다룰 줄 압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약을 제조하는 일을 돕고 싶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레오의 말에 굳어졌던 백작의 표정이 풀어졌다.

귀한 약초를 구해온 이가 약의 제조까지 돕겠다고 하니 백작으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

“그렇습니다. 포렌티아가 귀한 약재이긴 하나 어떤 이에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입니다. 백작 부인께서 병상에 오래 계셨으니 기운이 많이 쇠하셨을 겁니다. 최대한 몸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병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약과 독은 한 끗 차이라고 했지. 아무리 좋은 영약이라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 독이 될 터. 부디 도와주시겠는가?”

레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짜고짜 백작 부인을 좀 만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해 봐야 허락할 리 없으니 궁리한 방법이었다.

“뭔 소리야? 네가 약을 만든다고?”

그 와중에 눈치 없이 묻는 덱스.

알아서 말을 좀 맞춰 달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것이 분명하다.

“악!”

다행히 덱스 녀석이 더 입을 열기 전에 무무카가 그 발을 꾹 밟아 줬다.

* * *

다음 날, 덱스와 무무카가 영주성을 떠나고 혼자 남은 레오.

응접실에서 만난 백작 부인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비쩍 마르고 퀭한 얼굴은 광대뼈밖에 안 보일 정도였고, 손가락은 가죽만 남아 마치 나뭇가지 같다.

아직 마흔도 안 되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오랜 병마에 심신이 지친 모습.

“반가워요, 나를 보고자 했다지요.”

“예, 포렌티아를 쓰기 전에 부인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모처럼의 귀한 약재를 헛되이 사용할까 걱정이네요. 벌써 몇 년 넘게 백작님께 심려만 끼치고 있으니….”

백작 부인은 힘없이 말을 줄였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년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라.

또한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짐만 되었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괴로워했음이 틀림없다.

‘부자연스러운 흐름이야….’

그사이 레오는 오러안으로 백작 부인의 몸을 관찰했다.

마나의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단순히 기력이 쇠한 느낌이 아니다. 작은 시냇물의 중앙에 거대한 바윗돌을 던져 놓은 듯 특정 부분에서 흐름이 일그러져 있다.

“부인, 잠시 앉으시는 편이 좋겠어요.”

“그게 좋겠네요. 좀 잡아 줄래요?”

백작 부인을 부축하여 자리에 앉힌 여인.

부인이 대하는 태도나 복색을 보면 시종이나 하녀는 아니었다.

“치료사 로트넬입니다.”

“레오입니다.”

레오는 로트넬이라 이름을 밝힌 치료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백작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편하게 앉아 계시면 됩니다. 잠시 손등에 실례하겠습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덜컥 치료에 발을 들인 것이 아니다.

레오가 믿는 것은 마나를 느끼는 초감각.

자연의 마나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

풀과 나무, 동물에도 존재하는 마나는 당연히 인간도 가지고 있다. 다만 일반인은 그 마나를 특별히 느끼거나 운용하지 못할 뿐이다.

백작 부인의 곁에 앉아 손등 위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는다. 이것은 초감각을 활성화와 관계없는 시늉이다.

눈을 감고 감각의 민감도를 조금씩 높여 간다.

백작 부인의 심장께에 자리한 이질적인 마나가 극명히 느껴졌다.

‘이게 저주인가.’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음습하며 탁한 마나 덩어리.

그것은 결코 자연적인 마나가 아니다. 그 탁한 덩어리가 백작 부인의 심장에 똬리를 틀고 정상적인 마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정체는 확인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초감각의 민감도를 높여 탁한 마나와 그 주변을 살폈다.

부인이 가진 본래의 마나는 탁한 마나 덩어리를 적으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다만 워낙 힘의 차이가 크니 그 형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다. 그러니 부인의 마나가 점차 소실되며 건강 악화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포렌티아를 사용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된다.

백작 부인의 힘을 북돋아 싸울 힘을 키워 줄 테니까.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

회귀 전, 백작 부인은 결국 죽었다. 포렌티아는 끝내 찾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포렌티아를 구했지만 어디까지나 증상 악화를 늦추는 것이 한계. 저주를 근본적으로 해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레오가 눈을 떴다.

“감사합니다, 부인. 내일부터 복용하실 수 있도록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백작 부인이 손짓하자 치료사 로트넬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두 사람이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레오의 눈이 끝까지 쫓았다.

‘어떻게 잡아야 할까.’

사냥감을 앞에 둔 것처럼 날카롭게 변하는 레오의 눈매.

초감각은 계속 활성화시킨 상태였기에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백작 부인의 심장을 막고 있던 탁한 마나.

그 흔적이 치료사 로트넬에게 남아 있었다.

* * *

어두운 밤.

반쯤 가려진 달빛이 성벽의 명암을 더욱 짙게 했다.

사방의 초병들도 꾸벅꾸벅 고개가 떨어지는 늦은 시간.

레오는 창을 통해 조용히 나섰다.

난간을 밟고 고양이처럼 벽을 타고 오른다. 군데군데 밟을 곳이 많아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조심해야 할 것은 병사들의 눈이었으나 레오의 모습은 어둠 속에 금방 스몄다.

성벽을 타고 오른 그는 반쯤 열린 어느 창문을 밀고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왔군.”

등불을 밝힌 방 안쪽에는 메르윈 백작이 앉아 기다리고 있다.

테이블에 반 정도 남은 포도주가 놓인 것을 보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모양이다.

“백작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도대체 어떤 말이기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군.”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손짓하는 백작의 표정은 그리 편치만은 않다.

레오는 백작 부인의 건으로 조용히 전할 말이 있다며 밤늦게 찾아가겠다고 통보하듯 알렸다.

관대한 메르윈 백작도 충분히 불쾌하게 받아들일 만한 일.

“허튼소리가 아니길 비네.”

메르윈 백작은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식사 시간에 보았던 사람 좋은 중년의 느낌과 사뭇 다르다.

은인으로 대하고 있는 만큼 마지막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눈빛이었다.

레오도 진중한 얼굴로 백작을 마주 보았다.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작 부인의 병은 저주 때문입니다.”

“…지금 저주라고 했는가?”

백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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