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포렌티아 (2)
백작 부인이 병석에 누운 지 벌써 수년째.
그동안 병을 치료하겠다며 수많은 사람이 메르윈 백작을 찾았다.
개중에는 저주를 운운한 자도 있었으며 목적은 결국 금전이었다. 당연히 모두 사기꾼들.
“자네가 아카데미의 생도가 아니었다면, 포렌티아를 구해 준 은인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지하 감옥에 가두었을 걸세.”
“분명 그동안 여러 사기꾼을 보셨겠지요.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백작님, 생각해 보십시오, 제 안위만 걱정했다면 포렌티아만 넘기면 그만이지, 이렇게 위험한 길을 걸을 이유가 없습니다.”
백작의 사나운 눈길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포렌티아를 통해 모처럼 좋은 관계를 쌓았다. 이렇게 밤중에 몰래 방으로 찾아오면서까지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는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우수한 재원이다. 그런 자가 돈 때문에 저주를 입에 담으며 사기를 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행동이다.
“…더 말해 보게.”
“아까 부인을 뵈었을 때 저주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저주의 흔적?”
“자세히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제가 남들보다 마나를 느끼는 감각이 예민합니다. 부인의 심장에 어떤 인위적인 마나의 흔적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인과 함께 있던 치료사, 로트넬의 것과 같은 느낌이더군요. 저는 로트넬이라는 치료사가 의심스럽습니다.”
“로트넬이 저주의 원흉이라는 건가? 그럴 리가 없네. 그녀는 벌써 2년 넘게 부인의 곁을 지키고 있어.”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백작.
레오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로트넬이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그저 제가 보고 느낀 것만 말씀드렸을 뿐, 그자를 모함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쭙겠습니다, 로트넬을 어떻게 들이게 되셨습니까?”
“후우… 그녀는 베눔 자작이 추천하여 보내 준 치료사라네.”
베눔 자작.
메르윈령의 서쪽 일부를 다스리고 있는 백작의 봉신.
회귀 전, 메르윈 백작의 사후에 후계를 이어받은 레이라 영애의 뒤에서 실질적으로 백작령을 통치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레오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억측일세! 베눔 자작에게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후작파가 제국 제일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기 위해 베눔 자작을 회유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백작의 사후를 경험한 레오였기에 알 수 있는 일, 지금 당장 백작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백작님, 모든 것은 로트넬을 확인해 보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심증만 가지고 그녀를 잡아들일 수는 없네.”
“앞으로 닷새 더 머무르겠습니다. 부인의 상태를 보면서 약재를 만든다는 이유면 충분하겠지요. 그동안 용단을 내리신다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레오는 찾아왔을 때처럼 다시 한번 창을 통해 빠져나갔다.
다시 홀로 남은 백작은 침통한 표정으로 포도주를 들이켰다.
‘로트넬이라….’
그자가 보통 치료사였다면 당장이라도 잡아들이고 방을 수색할 수 있다.
아무 혐의가 없다면 사과와 금전으로 보상을 치르면 될 일. 그 과정에서 백작 부인이 입을 마음의 상처가 걱정되기는 하나 시행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로트넬은 백작의 봉신인 베눔 자작이 보낸 치료사다.
그녀에게 죄가 없다면 백작은 가신의 충심을 의심한 무능한 주군이 되고 만다. 이는 자칫 봉신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어 영지 전체에 불안감을 초래할 수 있다.
“어찌하는 것이 옳은가….”
포도주병이 완전히 빈 후에도 백작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백작 부인의 병세는 한결 좋아졌다. 포렌티아를 우려낸 진액을 조금씩 섭취하며 조금씩 기력을 찾았기 때문이다.
“부인,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떠신가요?”
레오는 몸 상태를 확인한다는 핑계로 매일 백작 부인과 만남을 청했다.
처음 그녀를 진단했을 때처럼 손등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고 마나의 흐름을 확인한다.
심장의 저주는 여전하지만 포렌티아에 깃든 생명력이 백작 부인의 원기를 돋우면서 잠시나마 호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너무 좋아요. 요근래 이렇게 기운이 난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정원을 산책했어요.”
백작 부인이 활짝 미소 지었다.
여전히 건강해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며칠 전보다 한결 혈색이 좋아진 모습.
“그것참 다행이군요. 정원에 반발한 꽃들도 부인의 발걸음에 기뻐했을 겁니다.”
“어머, 꽤 능글맞은 말을 할 줄도 아는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손을 내저으며 소리 내 웃는 백작 부인.
확실히 한결 기력을 찾은 목소리다.
“레오, 당신은 열다섯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부인.”
“내 딸과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당신의 나이를 잊고 만답니다. 오히려 내 또래와 이야기하는 기분이에요. 언짢게 듣지는 말아요, 칭찬이니까.”
“언짢다니요, 부인께서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레오는 능숙하게 백작 부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용병이라고 해서 바닥만 굴러먹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다수의 용병이 그렇긴 하다만, 적어도 제국에서 손꼽히는 용병 대장 정도면 사교계에 가끔 얼굴을 들이밀 기회가 생긴다.
특히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귀부인 중에는 거친 사내에게 흥미를 가진 이들이 있기 마련.
그런 관심을 용병대의 수입으로 연결시키는 것 또한 대장의 덕목이다. 삐끗 잘못하면 기둥서방으로 전락할 위험도 있지만 그 선만큼은 잘 지켰다.
그러니 이 정도 화술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일은 포렌티아의 양을 조금 더 늘린 약을 준비하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그래요, 고마워요.”
미소와 함께 응접실을 떠나는 백작 부인의 곁에는 로트넬이 꼭 붙어 있다.
며칠 지켜본 결과 그녀는 부인의 분신처럼 일과 시간 전부를 함께 했다.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것 같다. 하긴 영약 포렌티아라고는 하나 지금 수준에서는 저주에 대항하여 버티는 것이 전부니까.
‘움직이지 않고 배기나 보자.’
약에 사용되는 포렌티아의 진액을 두 배로 늘릴 생각이다.
이 정도 양이라면 포렌티아의 기운이 저주 그 자체를 갉아먹기 시작할 것.
과연 그때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 * *
다시 하루가 지났다.
백작 부인은 아침 일찍 시종이 가져온 약을 마셨다.
어제보다 더 진득한 느낌이었지만 먹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다.
조금 불편하면 어떠하랴. 이렇게 몸이 날아갈 것만 같은데.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이전이었다면 벌써 피로해서 침대에 누웠을 텐데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활력이 넘친다. 점심 식사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다.
“고기스프가 먹고 싶어졌어. 이렇게 식욕 생긴 게 얼마 만인지.”
“부인, 정말 다행이에요. 요리사에게 이야기해 놓을게요. 대신 소화가 잘되도록 연하게 푹 익힌 고기로요.”
“그래, 식사한 다음에는 정원을 좀 걷고 싶을까 싶어.”
“네, 오늘도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네요.”
백작 부인을 따라 환하게 웃는 로트넬.
그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딱 3개월이면 끝나는 거였는데…!’
과거 백작 부인을 괴롭힌 것은 폐병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베눔 자작은 로트넬을 메르윈으로 보냈다.
[백작 부인을 서서히 죽여라. 3년 정도면 적당하겠군. 시기를 잘 조절하도록.]
로트넬이 받은 명령.
백작 부인을 서서히 죽음으로 이끌면서도 죽을 시기까지 조절해야 하는 까다로운 임무였다.
건강 상태를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부인의 폐병 치료에 전념했고, 이후 조금씩 저주를 심어 놓는 작업을 진행했다.
폐병이 호전되며 로트넬에 대한 신뢰는 깊어졌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컨디션은 회복되지 않았고, 부인은 그것이 자신의 약한 체력이 원인이라 여겼다.
그에 메르윈 백작이 포렌티아를 수소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약 포렌티아.
그런 것을 다섯 뿌리나 구할 수 있으리라고 로트넬은 예상치 못했다.
한 뿌리 정도라면 저주의 강도를 조금 올려 버텨 낼 계획이었지만 다섯 뿌리나 되는 양이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당해 낼 수 없다.
일단 하루빨리 저주의 강도를 올려야 한다.
백작 부인이 잠자리에 들고서야 로트넬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문을 잠그고 침대를 밀어내더니 바닥의 비밀 공간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재료는 남아 있어.”
검은 고양이의 다리뼈, 도마뱀의 머리, 푸른 독개구리의 등껍질, 붉은 지네의 다리….
상자에는 저주에 사용되는 갖가지 재료가 담겨 있다.
로트넬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달의 위치를 확인했다.
마침 달이 거의 가득 차오른 참이다. 저주의 술을 행하기 아주 좋은 시기.
바닥을 덮은 뻣뻣한 모직 천을 치우고 저주의 주술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한 시간 가까이 걸린 작업.
마침내 주술진을 완성한 로트넬은 그 위에 저주의 대가가 되는 공물을 올렸다. 이번에는 검은 고양이의 뼛조각과 도마뱀의 머리가 재료.
마지막으로 저주를 받을 대상인 백작 부인의 회갈색 머리칼이 진의 가운데를 차지했다.
종일 함께 있기 때문에 머리칼 몇 개 얻는 것 정도는 매우 쉬운 일.
“좋아.”
달빛이 창을 통해 주술진을 비추었다.
로트넬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자신의 마나로 주술진을 활성화하는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저주를 강화하는 주술은 근 석 달 만이다.
포렌티아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어도 될 일.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였다.
그 때문에.
로트넬은 자신의 방 한구석에 전에 없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도.
그 구멍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얼마나 집중했을까.
쿵, 쿵, 쿵, 쿵
둔중한 걸음 소리가 울렸다.
‘…시끄럽게.’
위병들의 교대 시간일까.
로트넬은 흐트러지려는 집중력을 다잡으며 마지막까지 술식을 발동하는 데 전념했다.
쿵! 쿵! 쿵!
빠르게 가까워지는 소리.
쾅-!
로트넬이 반응할 새도 없이, 잠긴 문이 반쯤 부서지듯 열렸다.
그곳에는 기사와 병사들을 대동한 메르윈 백작이 서 있었다.
“로트넬! 내 너를 믿고 귀하게 대했건만!”
방안에 쩌렁쩌렁 울리는 메르윈 백작의 호통.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온화한 백작의 얼굴이 아니다. 그 붉고 일그러진 표정은 한 마리 맹수를 떠올리게 했다.
로트넬은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을 재빨리 다잡았다.
‘들킨 건가? 그럴 리 없어!’
백작 부인의 곁에서 신뢰를 쌓은 것이 벌써 2년이 넘었다.
어디에서 꼬리를 밟혔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는 없다. 이 주술진도, 의식도 부정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한 로트넬은 억울하다는 얼굴로 백작에게 되물었다.
“백작님, 무슨 말씀이시온지…?”
“사술로 내 부인에게 저주를 심은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면 지금 네년이 하고 있는 그 의식을 설명해 보아라!”
“오, 오해이십니다. 이것은 치료사의 의식입니다.”
로트넬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단지 치료사의 힘을 활성화하기 위한 의식이며, 모두 백작 부인의 치료를 위한 것이라고. 가문의 비전 의식이기 때문에 이렇게 눈을 피해 몰래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흐윽, 흑…! 억울합니다, 백작님…!”
눈물까지 흘리며 절절하게 외치는 로트넬.
평소의 메르윈 백작이라면 마음이 약해졌을 모습이었다.
‘역시 그의 말대로였나.’
가늘어진 백작의 눈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섞이지 않았다.
백작은 로트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로트넬을 포박하라. 또한 이 방을 샅샅이 뒤져 증거를 찾아내라!”
“예!”
분노가 담긴 주군의 명령에 기사와 병사들의 눈에도 불이 붙었다.
곧장 로트넬을 묶어 냈고, 그 자리에서 방 수색이 시작됐다.
침대 아래 비밀 장소에 있던 나무 상자가 금방 발견되었으나, 로트넬은 그 또한 치료사의 의식을 위한 재료라고 우겼다.
더 정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병사들은 침대와 책상 같은 가구를 부수다시피 분해하며 사방을 뒤졌다. 소지품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모두 확인했다.
그럼에도 증거라고 할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자 백작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로트넬도 살길이 열렸다고 여기며 더욱 절절하게 매달렸다.
“백작님, 정말 억울합니다! 제발 저를 믿어 주세요!”
한 병사가 책상 뒤흔들리는 벽돌 뒤의 비밀 공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여기 수상한 편지가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통의 서신.
베눔 자작과 나눈, 백작 부인이 죽어 가는 과정의 기록이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백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년을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백작의 노성이 영주성을 뒤흔들었다.
* * *
한밤중 일어난 성내의 소란.
‘현장을 잡는 데 성공한 모양이군.’
홀로 침실에 누워 있던 레오는 빙그레 웃었다.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