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포렌티아 (4)
레오는 테라스 앞에 기대어 앉아 슈니를 쓰다듬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목욕까지 마친 터라 몸이 노곤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만월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삼십 분쯤 지나자 연한 갈색을 띠던 포렌티아의 색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달의 정기를 흡수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날씨 좋고.”
여전히 하늘은 맑다.
숲의 정기를 상징하는 포렌티아에 만월의 달빛을 충분히 쐬면 그 자체로 순도 높은 마나 덩어리가 된다.
전사는 오러를 늘릴 수 있고 마법사는 마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그저 섭취하는 것만으로 성취를 크게 늘리는 영약.
생각 같아서는 저 일곱 뿌리를 혼자서 다 사용하고 싶지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최초 한 번뿐이다. 그것도 최소 스무 살 이전의 완성되지 않은 육체에만 제대로 작동한다.
‘덱스, 무무카, 클라인.’
일단 확실히 챙겨 줄 이는 셋이다.
레오 자신의 몫까지 포함하면 총 네 뿌리의 사용처는 정해진 셈.
‘나머지는 뒀다가 쓰지, 뭐.’
이렇게 달빛을 제대로 흡수시킨 포렌티아의 가치는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다.
가공법이 알려지지 않은 현시점에 더욱 가치가 높은 것이 말할 것도 없다. 팔고자 하면 족히 수십 골드는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는 동료의 전력을 올리는 것이 먼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슈니는 다리 사이에서 진작 잠들어 새액새액 숨 소리를 내고 있다.
테라스의 포렌티아도 충분히 달빛을 흡수하여 창백한 푸른빛으로 변했다.
가공이 끝난 것이다.
“좋아. 하나는 바로 사용해 볼까.”
회귀 전에 소문만 들었던 영약을 직접 먹게 되다니 왠지 감개무량하다.
제일 큰 놈을 골라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분명 단단했던 것인데 입에 넣자마자 녹아 버리듯 사라진다. 목구멍으로 넘길 것도 없이 그대로 녹아 몸속으로 흡수되는 느낌.
레오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오러 연공을 시작했다.
외부의 마나를 받아들일 필요 없이 포렌티아의 마나가 몸속에서 그대로 오러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난 기세다.’
몸속에서 화수분처럼 마나가 솟아났다.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마나의 양은 지금까지 축적한 오러의 양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캉?
레오가 포렌티아의 기운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하는 사이.
잠에서 깬 슈니가 짧은 다리를 세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은 눈을 감은 레오를 잠시 보더니 테라스에 놓인 포렌티아 한 뿌리를 날름 입속으로 가져갔다.
찹찹찹-!
포렌티아 하나가 그렇게 사라진 것도 모른 채, 레오는 여전히 오러 연공에 집중했다.
오러홀을 가득 채운 마나가 오러홀의 성장을 이끌고, 성장한 공간에 다시금 오러가 차오른다. 그리고 다시 오러홀의 성장이 반복된다.
주먹만큼 커진 오러홀이 성장에 한계를 맞자, 이번에는 오러의 압축이 일어났다.
절반으로 다시 절반으로…. 한번 오러의 압축이 일어나자 그다음은 쉬웠다. 압축된 오러가 오러홀을 채우고 공간이 부족하면 다시 압축이 일어났다.
압축을 거듭한 오러는 본래의 십분의 일까지 작아져 오러홀에 흘러 들어갔다.
포렌티아의 마나가 점차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느껴졌다.
레오는 한 톨의 마나도 버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했다.
그렇게 연공을 모두 마쳤을 때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후우….”
이윽고 길게 숨을 뱉으며 눈을 뜬 레오.
이 얼마나 단단한 오러홀인가.
굳이 오러안으로 살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문득 카르파의 오러홀이 떠올랐다. 오러홀만이라면,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힘이 넘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회귀 전을 통틀어 처음 오른 경지에 조금 고양되어 버렸다.
당장 연무장으로 뛰쳐나가 이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을 정도다.
‘이 녀석이 아니었으면 포렌티아를 찾지 못했을지도.’
문득 발치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슈니가 눈에 들어왔다.
슈니와 오우거의 전투를 놓쳤다면 아직도 포렌티아를 찾아 프로인 숲을 헤메고 있을지 모른다.
이 녀석을 만난 작은 우연이 없었다면 이런 힘도 가질 수 없었겠지.
“응?”
잠든 슈니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레오의 눈썹이 크게 움직였다.
포렌티아가 하나 부족하다.
하나를 직접 먹었으니 여섯이 남아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다섯 개뿐이다.
“어디 갔지?”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는 레오.
밤새 포렌티아 곁에서 연공을 했지만 당연하게도 인기척은 없었다. 바람에 날아가거나 새가 물어갈 리도 없다.
당황한 레오의 눈동자가 발치를 향했다.
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단잠을 자는 슈니.
‘설마.’
슈니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다.
초감각으로 살펴본 슈니의 작은 몸뚱이는 그 안에 대해(大海)의 기운을 담고 있는 듯하다.
언뜻 자는 것처럼 보였으나 녀석 또한 포렌티아의 마나를 갈무리하는 중이었다.
“하하하….”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애초에 저 포렌티아들은 슈니의 영역에서 자란 것들.
녀석이 전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다. 오히려 그 영역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이쪽이었으니.
슈니가 오우거에게 치명상을 입었을 당시가 떠올랐다.
핵의 균열은 어찌어찌 회복했지만 그때까지 마나를 얼마나 소모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렇게 작은 몸뚱이로 지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 추측대로라면 슈니는 아직도 몸을 회복하고 있는 중인지도.
“그래, 네가 하나 먹을 수도 있지. 나머지는 내가 좀 쓴다?”
생각해 보니 프로인 숲에는 아직도 포렌티아가 더 남아 있다.
모자라면 더 캐면 그만이다.
“다녀오마.”
찹찹-!
마나를 갈무리하는 것인지, 맛있는 꿈을 꾸는 것인지.
아침 햇살이 드는 테라스 앞에서 곤히 잠든 슈니를 두고 레오는 옷을 챙겨 입었다.
오랜만에 강의에 들어갈 참이었다.
* * *
자크는 아카데미 교수 중 아주 드물게 평민 출신이다.
전장의 용병으로 살아가던 그는 십수 년 전 카르파를 처음 만났다.
카르파의 눈에 들어 용병에서 정규군이 되었고 하나둘 공을 세워 나가며 점차 중용됐다. 이후 남작 위를 받으며 신분 상승까지 이루었다.
지금은 황립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니 평민으로 태어나 충분히 성공한 삶.
그런데도 정작 자크 본인은 지금 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애송이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며 보내는 시간은 너무도 무료했다.
은인으로 여기는 카르파만 아니었다면 이런 교수직 따위 진작 때려치웠을 것이다.
“애송이들 모두 모였나! 오늘 중간 평가가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겠지?”
연무장에 등장한 자크.
생도들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오늘은 미리 공지한 대로 ‘실전 무기술’ 강의 중간 평가가 있는 날이다.
‘벌써 그렇게 됐나.’
한동안 강의에 들어오지 못한 레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쩐지 다들 기합이 들어가다 못해 우중충한 얼굴이다 싶었다. 꼭 먹구름이 잔뜩 낀 지금 날씨 같다.
“준비된 조부터 나와라. 공지한 대로 오늘 평가에 오러 소드는 사용하지 않는다. 신체 강화에 사용하는 것까지 허가한다.”
자크는 날카로운 눈으로 생도들을 훑었다.
그의 강의는 한 학기 동안 총 세 번의 평가를 행한다.
오늘 평가는 그중 가장 점수 비중이 적은 대련 평가. 생도들 간 자유로운 대련을 통해 지난 8주간의 수업 내용을 점검하는 것이 목적이다.
대련 상대는 생도들끼리 미리 자유롭게 미리 정하도록 했다.
레오는 클라인과 조를 짤 생각이었는데, 그가 결석하면서 상대가 없어져 버렸다.
즉석에서 조를 짜려고 해도 다들 레오의 눈길을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레오는 눈에 띄는 녀석도 찾아볼 겸 느긋하게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입학시험 때 한 번씩 다 훑어보았기에 대충 예상은 되었지만 혹시 모른다. 그사이 일취월장한 녀석이 있을지도….
‘…그럼 그렇지.’
과한 기대였나.
대련이 이어지는 내내 눈에 차는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레오의 기대치가 높은 탓만은 아니었다. 자크의 표정도 그리 좋지 못했으니까.
“으음….”
또 한 조의 대련이 끝났다. 자크의 펜은 망설임 없이 채점지에 C를 그렸다.
첫 수업 때부터 몇 번이고 강조했다. 이 강의 목적은 첫째도, 둘째도 실전성을 익히는 것이라고.
실전성이란 결국 살아남기 위한 것.
그에 비해 생도들의 검술은 여전히 불필요한 동작투성이다.
“다음!”
어느덧 마지막 조.
레오는 대련용 창을 쥐고 자세를 잡는 이를 바라보았다.
자못 사나운 투기, 패트릭이다.
‘얼마나 늘었나 좀 볼까?’
길드 임무에 함께하지 않은 것이 녀석 나름의 각오라는 것은 잘 안다.
그렇다면 그만큼 성장을 기대할 뿐이다.
척.
연무장에 선 패트릭은 날을 죽인 연습용 창을 단단히 그러쥐었다.
상대의 무기도 마침 같은 창이다.
패트릭도 흘긋 레오 쪽을 바라봤다.
그에게 패했던 한 합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매일 그 기억을 곱씹으며 절치부심했다.
‘나는 당신처럼 될 수 없겠지.’
천재와 범재, 그리고 둔재.
굳이 자신이 어느 쪽인지 나눈다면 범재와 둔재 사이쯤에 들어가지 않을까.
처음에는 노력으로 재능을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재능을 탓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는 자의 핑계라 여겼다.
그러나 천재의 한 걸음과 둔재의 한 걸음의 차이는 상상보다 컸다.
손바닥 껍질이 까지고 다시 굳은살로 메워지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익힌 기술을, 형은 몇 번 따라 해 보는 것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가문의 모두가 형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래도 창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노력을 그만둘 이유가 되지는 않았기에.
창을 내질렀다.
우직하게 수만 번은 반복했을 단순한 찌르기를 상대의 창이 가로막는다.
예상했던 일이다. 막히고 부딪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익숙하니까.
백 번이 안 되면 천 번을, 천 번이 안 되면 만 번을 시도한다. 그렇게 천재가 한걸음에 뛰어넘은 벽을 넘어왔다.
반격하는 상대의 창신을 눌러 막으며 몸을 돌린다.
‘그러니 내 방식대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그저 묵묵하게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길.
환호나 응원도 없는 지독히도 외롭고 고독한 길.
거북이처럼 느려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어제보다 나아갈 수 있다는 단순한 명제만이 그의 앞길을 비추었다.
언제나처럼 이를 악물고, 근성과 정신력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그것은 제국의 재능이 모였다는 이 아카데미에서도 다르지 않으리라.
“거기까지.”
단단한 손아귀에 쥐어진 패트릭의 창끝이 상대의 목젖에서 멈추었다.
그의 대련이 끝났다.
대련 중지를 선언한 자크가 생도들을 휘익 둘러보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레오 한 명뿐.
“자네는 상대가 없나?”
“아, 그게… 클라인하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 친구도 요즘 바쁜가 보더라고요.”
“그렇다고 평가를 안 할 수는 없으니….”
자크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대련을 마친 생도들을 향했다.
의도를 읽은 생도들이 저마다 그 눈길을 피하기 바쁘다.
“좋다. 내가 상대가 되어 주마.”
“예? 교수님이 직접요?”
직접 상대를 해 주겠다는 자크.
조금 당황한 레오에게, 그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자신 없나?”
동서고금을 막론한 가장 확실한 도발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